법정스님만이 가지고 계신 독특한 행동이나 버릇 같은 것이 있으십니까?
불일암에 손님들이 오면 "앞에 보이는 산이 나니까 산 많이 보고 가시오." 이렇게 말씀도 하시고 여러 사람이 오면 노래도 한곡씩 시키고, 갑자기 조각과 출신있냐고 물어봐서 누가 손을 들면 사과 좀 깎아 보라고 하셨어요.
처음 뵙는 분들은 당황스럽기도 하겠네요..
그렇지요. 그러면서 인연이 맺어지지요. 유머 감각이나 순발력이 뛰어나서 좌중을 웃음으로 편안하게 만드시는 능력이 있으셨어요. 병상에서 계실 때 의사가 회진을 하면서 “스님 불편하신 데는 없으십니까?” 하면 “내가 불편하니까 여기 와 있지” 하면서 그 순간에도 병상의 무거운 분위기를 유머 감각으로 심각하지 않게 만드셨으니까.
병상이면 몸이 힘드니까 마음도 약해지셨을 텐데요. 죽음 앞에서 어떤 모습이셨는지요?
제가 모친을 모시고 임종 이틀 전에 다녀왔어요. 그 당시에 몸무게가 45킬로까지 빠져서 수척하고 마르신 모습을 어머니께서 보시고 많이 안타까워 하셨지요. 말하자면 기골만 남아서 의식이 총총하니 정신으로 존재하셨지요. 어머니가 어릴 때 살았던 친구들 말씀을 하시니까 같이 유년시절 이야기도 하시고 어머니도 편찮으셔서 나도 빨리 데려가라고 하시니까 스님께서 “내가 안 죽으니까 불일암에 오라”고 하시니까 어머니께서 “발 아프니까 불일암을 못간다”고 하니 길상사로 오라고 하셨어요. 제 생각으로는 내생에 본다던가 그런 말씀을 하실 걸로 생각했는데 불일암이나 길상사에 가면 볼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은 길상사나 불일암에서 스님의 흔적과 정신을 느낄 수 있는 장소이지요.
어느 날은 시자에게 “지금 내 소원이 뭔지 알아? 남들에게 폐 끼치지 않고 하루 빨리 다비장으로 들어가는 거야.” 이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스님은 남에게 폐 끼치는 것과 복잡해지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셨어요. 사는 것이 번거로워지고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버리고 떠나기를 통해서 새로워지고 본질적인 삶을 추구하셨지요. 그리고 누군가에게 선물이나 보시를 받으면 그것을 '폐'라고 생각하셔서 거기에 상당하는 답례를 해서 그것에 대한 부담감을 답례를 통해서 보답을 하셨지요.
버리고 떠난다는 게 저희로서는 이해가 잘 안되거든요. 그게 어떤 건가요?
제가 출가해서 불일암을 짓기 시작했어요. 불일암 자리에 그 전에 자정암이라는 암자가 있던 곳이었어요. 스님께서 봉은사 생활을 마치고 살만한 곳을 찾다가 마지막으로 빈 암자에 물을 마셔보니 약수물이 맛있고, 청매가 예쁘게 피어나는 것을 보고 마음을 내셨어요. 그때의 자정암을 허물어서 쓸 만한 목재나 기와를 살려서 작은 부엌채를 만들고 불일암 본채는 나무와 기와를 큰절까지 싣고 와서 일꾼들이 불일암까지 옮겼어요. 스님이 암자를 증축하면서 불일암으로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살면서도 성품 그대로 '먹이는 간단 명료하게' 라고 반찬은 세 가지 이상 못하게 하셨어요. 아침은 보리나 미숫가루로 간단히 드시고 식빵을 사와서 후라이팬에 토스트를 해서 커피와 마시고 이렇게 간소하게 생활하셨어요. 누구라도 와서 보면 마음이 정갈해지고 청정해지는것을 느낄 만큼 부엌에 여러 가지 도구와 행주도 어느 여성의 손길 못지않게 아주 정갈하셨어요. 호미나 그런 농기구들도 일을 끝내고 나면 깨끗이 씻어서 열을 맞추어서 가지런히 정리를 하셨어요. 누가 과일이나 음식을 냉장고가 가득 차게 해 놓으면 답답해 하셔서 하루 이틀분만 남겨놓고 큰절에 다 보냈어요. 스님이 털실로 짠 모자를 쓰고 사셨는데 올이 풀려 떨어진 것을 보고 사람들이 짜서 보내주면 겨울에 스무개가 넘게 와서 다 보내요. 지인들이 책을 보내주셔서 서가에 많이 쌓이면 송광사 도서관이라든가 박스에 몇 개씩 쌓아가지고 보내버렸어요. 쌓아두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셨죠. 차하는 사람들이 와서 보아도 스님의 다식(다식)진정한 다인의 모습으로 차를 정갈하게 내는 분위기도 그렇고 차맛을 감식하는 혀썰미(미각)이 뛰어 나셨어요. 다기들도 구해서 놓아 두어도 서너개가 넘지 않도록 주변 지인들에게 다 나누어주셨어요. 스님 주변에 차인들은 차와 다기를 스님께 많이 선물을 받았어요. 스님의 성품 중에 아름다움(미학)을 추구하는 취향이 강하셨어요. 내가 다른 것은 다 놓아버릴 수 있었는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마음만은 가장 버리기 어려웠다고 하셨거든요. 그 아름다움을 가장 단순하고 절제된 삶속에서 찾으셨는데 사시는 공간을 당신의 철학대로 정돈하며 사셨고, 넘쳐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참지 못하고, 바로 없애버리고 그런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때는 그 자리를 떠나버리셨지요.
그런 정신이 스님이 말씀하신 무소유 인가요?
그렇지요. 무소유란 스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것 이거든요. 싸다고 해서 무조건 사지 말고 필요한가 불필요한가를 생각하라고 하셨고, 쓰레기를 많이 만들지 말고 최소한의 물질로 최대한의 정신적인 영역을 추구하면서 사는 것을 강조하셨지요.
무소유정신을 말씀하신 데는 은사스님이신 효봉스님 효봉스님의 영향을 있는 것인가요?
아무래도 효봉 스님의 영향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효봉스님은 젊어서 화려한 생활을 하시고 가족도 거느리셨지만, 어느 순간 아니다 싶었을 때 완전히 버리고 떠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철저하게 수행자의 삶을 사셨잖아요. 토굴에서 1년 6개월 동안 하루 한끼만 드시고 도에 만족하는 삶을 사셨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으셨다고 할 수 있지요. 사람들이 효봉스님을 "절구통 수좌"라고 했어요. 한번 앉으면 움직이지 않으셔서 붙은 별명이시죠. 스님께서는 많이 돌아다녀서 신발 떨어지는 것 자랑하지 말고 많이 앉아서 방석 떨어지는 것을 자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당시에 육바라밀 스님들을 표현하신 말이 말이 있는데 지계제일 전강스님, 인욕제일 청담스님, 정진제일 효봉스님, 천진제일 무아스님, 설법제일 동산스님이라는 말이 있었어요. 세속에서도 그렇지만 출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스승과의 만남입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출가 자체가 다른 방황의 시작일 수가 있지요. 법정스님은 훌륭한 스승을 만나서 올바른 지향점을 찾으실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법정스님은 성격이 완벽주의자셨나요?
스님께서는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셔서 주지를 살지 않고, 상좌를 두지 않고, 기지옷을 입지 않고 살았어요. 스스로 빨아서 풀을 먹여서 다림질해서 의복에서도 칼칼한 수행자의 모습을 보이셨지요. 부처님의 모범을 따르려고 했던 측면이 있고, 부처님도 55살에 아란존자의 시봉을 받으신 점을 말씀하셨어요. 노보살님들에게도 나이를 물어서 부처님보다 더 살면 미안하다는 이런 말씀들을 하셨어요. 스님께서 열반하신 시점이 79세 때라 이런것도 아마 당신 삶의 원칙들이 있었기 때문에 원대로 가신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처음보는 사람들에게는 따뜻하고 친절한 마음을 보여주시는것 같지 않으셨지요. 그렇지만 인연이 되어서 철학과 가치관이 부합되고 정서가 교감하게 되면 도반 이상으로 교류하고 정을 나누었어요. 그래서 장익주교님 같은 경우 종교는 다르지만 도반처럼, 형제처럼 정을 나누었던 분들이라고 할 수 있지요.
완벽하고 멋지게 수행자로서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은데 자신의 고뇌를 풀 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 스님께서 글을 쓰신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들이 드는데요.
당신이 알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한 것을 글을 쓰지 않았어요. 말과 글과 행동이 일치하는 부분이 긴 생명력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가보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했지만 스님의 글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그런 세계를 체험해 볼 수 있었던 점도 한몫 했겠지요.
대중들에게 직접적으로 불교를 말씀하시지 않으셨지만 글로써 가까워진 계기가 되셨잖아요? 그런 작업들이 회향이라는 것과 연결이 될 수 있나요?
불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어 두개가 귀의와 회향인데요, 불자가 자기의 모든 것을 영원히 삼보에 바치는 것을 귀의(歸意)라고 합니다. 회향은 회소향대(回小向大)의 줄임말인데요, 작은 것을 돌이켜서 큰 것을 향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좋은 일 하면 복을 받잖아요, 그런데 회향이라는 것은 복이 나에게 오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는 것이에요. 내가 지은 선업이 나에게 오지 않고 이웃들에게 돌아가서 이웃들이 괴로움과 번뇌를 벗어나서 깨달음을 이룰 수 있게 해 달라는 마음이 회향의 마음입니다. 한 방울의 물은 작지만 바다에 떨어지면 바다가 사라지기 전에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작은 공덕을 중생의 선업으로 돌리고 공덕의 회향을 하게 되면 우리들의 삶을 지켜주고 보리심을 잃지 않게 해주는 구실을 합니다.
스님의 글쓰기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어렸을 때 책 읽는 것을 좋아하시고 대학 때 문학동아리에서 활동하시고 이광수의 글을 좋아하셨다고 해요. 출가하면서도 책에 대한 애착 때문에 고민을 하셨는데 처음으로 문재에 대한 인정을 받아서 처음으로 통도사에서 불교서적을 편찬하셨어요. 이 때 불교 용어 단어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 잡혔고, 두 번째로 불교성전이라는 역경(경전 번역)일을 하셨어요. 이 불교성전이라는 책을 편찬하셨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아요. 이 작업이 70년대 이루어 졌는데 팔만대장경의 핵심을 뽑아서 아름다운 우리말로 옮긴 것인데 굉장히 의미가 있는 작업이었어요. 전체적인 구성과 윤문을 스님께서 다 하셨는데 왜 스님이 이름을 올리지 않으셨는지 물으니까 이것은 경전을 옮긴 것이기 때문에 불교서적편찬위원회의 이름으로 편찬을 하셨어요.그 외에 불교교본 이런 것을 정서와 윤문을 많이 하셨고요. 백련암의 성철스님의 <본지풍광> 이라든가, <선문정로>라든가, 성철스님의 중요한 저술들 있잖아요, 이런 것도 스님이 백련암 직접 가셔가지고 손길을 통해서 마지막 윤문이 됐습니다. 그리고 광덕 스님의 <법보단경> 이런 것들도 광덕스님이 일부러 법정스님에게 부탁을 했었습니다.
불교학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신 것인데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겠군요.
사람들은 문필가로서의 법정스님만 알고 있는데, 선승과 명사로서의 법정스님, 미학가로서의 법정스님, 자연생태주의자로서의 법정스님 등 각각의 테마별로 깊이 있게 스님의 삶을 조명해 볼 필요가 있어요. 세계적으로 생태주의자들에게 성지처럼 알려져 있는 월든도 소로우가 2년 밖에 살지 않은 곳이거든요. 그런데 불일암이든가, 수류화개실 이런 곳은 스님께서 자연주의자적인, 생태철학자적인 삶을 추구하면서 17년, 18년을 살았던 곳이거든요. 그래서 앞으로 생태철학 자연주의적 삶을 본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불일암과 수류화개실은 하나의 성지처럼 순례하면서 삶의 철학과 가치관을 공유하고 학습할 수 있는 순례처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스님이 수행자시면서 글을 쓴 것에 대해서 불교계에서 비판적인 시선이 있지는 않으셨나요?
스님 생전에 대중적으로는 인기가 있으셨지만 승가 한편에서는 세속적인 잡사를 글로 써서 본분에서 이탈한 게 아니냐는 염려의 이야기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님이 돌아가시면서 아름다운 마무리, 열반의 모습을 보고 부정적이던 인식과 평가가 완전히 바뀌었어요. 말로만 그런것이 아닌 전 존재로 그렇게 살고 실천하신 분이라는 공감이 확대된 것이지요. 어려운 경전들을 아름다운 우리말로 옮기고, 타종교인들까지도 누구나 공감하면서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절이나 경전에 갇혀있던 절을 구석구석에 심어준 스승이었구나 하는 생각이었지요.
바뀌기 전에 불교계의 입장은 어떤 것이었나요?
불가에서는 혼자서 고집스럽게 사는 사람을 괴각이라고 해요. 괴각다운 면모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고, 수행자라기 보다도 글쓰는 스님으로 인식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마지막 모습과 유언 - 모든분에게 깊이 감사를 드린다. 내가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두고 참회할 것이다. 내 것이라는 것이 남아 있다면 맑고 아름다운 사회를 만드는데 써주기 바란다. 나를 위해서 돈을 걷어서 수의와 관을 짜지 말고, 사리를 찾지 말라 - 의 말씀과 제자들이 유언을 그대로 따르는 모습들을 보고 무소유의 철학과 삶이 죽음의 모습까지일치하는 것을 보고 재평가가 되었지요.
괴각이라는 말은 괴짜라는 말인가요?
괴각의 본래적인 의미는 대중과 어울리면서 잡담을 나누고 하는것을 즐기는게 아니고 대중적인 것을 기피하면서 혼자서 고집스럽게 도를 즐기는 사람을 말합니다. 속으로는 존경하면서도 자기질서에 충실하게 사는것을 은근슬쩍 비꼬는 말이 괴각입니다.
법정스님이 추구하셨던 세계는 어떤 세계이셨을까요?
그것은 법정스님만이 아시겠지만, 스님의 글들을 살펴보면 부처의 길을 따르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나답게 사는 것이고 나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는 것 이예요. 내 것이라는 것이 없는 무소유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고, 자연주의자가 아니고 자연과 하나되고 본성과 하나되는 것, 진리와 일치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었지요.
불가에서 말하는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화두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나라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이 생각하는 나가 있습니다. 이 나를 우리는 모를 때가 많습니다. 우리에게 수행이라는 것은 나라는 좁고 작은 존재로부터 벗어나서 본래적인 나, 마음의 본성으로 돌아가는것을 말합니다. 다섯가지 번뇌(탐욕, 질투, 성냄, 무지, 자만)가 마음의 본성을 싸고 있어서 이 번뇌의 작용을 가지고 감정이니 욕망이니 하면서 자아를 표현해요. 이 번뇌를 벗어나면 마음의 본성, 청정과 자비가 드러납니다. 이런 의지를 가지고 시민운동으로 하신 게 맑고 향기롭게 잖아요. 내가 나답게 살자는 것이지요. 번뇌에 물들지 않는 청정하고 자비로운 삶을 살면서 메아리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향기로움을 나누어 주는 것이라고 표현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민혁당 사건때는 정치적인 충격과 고뇌가 있으셨을 것 같거든요.
불일암에 처음 오셨을 때만 해도 형사들 서너명이 항상 감시를 했어요. 맞은편 산에서 망원경을 가지고 방문객을 살피고 불일암에 온 편지를 내용을 보고 다시 풀칠해서 보냈어요. 스님께서 굉장히 불쾌하셔 가지고 한번은 광주에 나가셔서 보내는 사람 김성일(법정스님 속명)로 쓰고 '검열관들 보아라, 남의 편지를 보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이냐, 독재정권에서 시킨 일이겠지만 이런 것도 업보와 인과가 따른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보냈다고 하더라고요.
어느 날, 스님방을 청소하면서 보니까 당신 기사를 스크랩 해 놓으신게 있더라고요. 불교신문 편집국장이셨는데 청운, 소소산방등 다른 필명으로 쓰셨어요. 정권의 박해를 받으면서 감옥에 갇혀서 분한 마음들을 그대로 표현한 시나 불교동화 같은 것이 원고지에 있었어요. 중요한 자료라 복사를 해 놓으려고 제가 가지고 나갔다가 그때는 긴급조치 이런 것들로 단속이 심할 때라 나중에 문제의 소지가 될까봐서 그냥 가지고 왔어요. 다음에 스님이 오셔가지고 부엌에서 그것을 태우고 계셨어요. 그때는 그 글들이 아궁이에 한 줌 재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 보기만 했어요.
제가 시자 할 때인데 함석헌 선생님께서 제자들과 불일암을 찾아 오셨어요. 갑자기 열명 가까이 손님이 찾아오니까 마땅히 식사를 준비 할 수 없어서 감자를 쪘어요. 함석헌 선생님께서 저녁 한끼를 드시는데 감자만 드린 것으로 법정스님께서 두고 두고 죄송스럽게 생각하셨어요. 하룻밤을 묵어 가시면서 오래 이야기를 나누시고 함선생님께서 다실에서 주무시고 제가 스님과 한방에서 처음 잠을 잤습니다. 함석헌 선생님께서 나도 중이나 됐으면 좋겠다시면서 세속생활의 번거로움을 이야기 하시곤 했습니다.
법정스님과 사촌 조카시라고 알고 있는데요, 법정스님과 외사촌 관계신가요?
법정스님은 54년도에 출가를 하셨고 제가 56년도에 태어났으니까 직접적인 인연은 없어요. 법정스님의 고모의 딸이 어머니이십니다. 구체적인 촌수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출가하는데는 법정스님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고요, 이야기만 들었고 제가 고등학교때 불교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절에 다녔어요. 정혜원이라는 적산사찰인데 법정스님께서도 대학생때 알바로 그 절에서 사무원으로 있으면서 스님들 법문도 듣고 효봉스님도 그 곳에서 만나셨다고 해요. 정혜원에서 출가 인연이 생겨났고 저도 그곳에서 불교 학생회를 활동하면서 출가에 대한 생각을 가졌거든요.
법정스님께서 스님의 출가를 반대를 하시지는 않으시던가요?
제가 출가를 한다고 하니 어머니께서 걱정하시고 다래헌으로 찾아갔어요. 어머니께 제 이야기를 전해듣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스님께서 편지를 보내왔어요.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데 저의 출가소식을 전해 듣고 당신의 출가시 심정이 생각났다고 하시면서 <세속적인 학문을 먼저 익히고 자신과 사회에 대한 눈뜸이 있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출가를 하겠다면 돕고자 하는 책임을 느끼지만 현실적인 도피라면 종단과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종교가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치고 어떤 기능을 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데 자신의 존재와 사회에 대한 개안(눈뜸)을 하지 못하면 역기능을 하게 되고 종교 자체가 부정되고 말 것이다>고 편지를 주셨어요. 제가 늘 되풀이해서 읽으면서 지향점을 삼아 왔다고 할 수 있지요.
스님께서 출가하신 뒤로는 세속의 인연을 반기지를 않았어요. 거부는 아니지만 반기지를 않아서 두 번 갈 것도 한 번만 찾아가셨어요. 오히려 신도들은 반기지만 세속의 인연은 반기지는 않았어요. 스님도 저도 세속의 인연을 특별하게 생각해 본적이 없고 그것을 드러내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출가를 생각했을 때도 스님께서 상좌를 받지 않으실 때라 저를 구산 스님께 보내서 구산스님의 상좌가 되고 송광사 문중으로 인연이 되었지요.
세속의 인연이라는 것은 모질게 대하셨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스님들 중에는 성품 따라서 노후에 어머니를 모시고 사시는 분도 계십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이나 해외 유학가는 스님들한테는 학비나 장학금을 성큼성큼 주셨지만, 법정스님은 세속의 인연들에게는 오히려 훨씬 더 냉정하게 하고 그런 부분은 굉장히 철저하셨습니다. 들은 바로는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할머니 손에서 많이 성장하셨고 작은 아버지가 학교를 보냈는데 굉장히 실망이 크셨다고 해요. 잘 되어서 보답을 해야 하는데 출가를 해 버리니까 서운한 감정들이 있었다고 이야기를 들었어요.
사람들이 법정스님의 책만 보고 스님을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요, 법정스님의 대중성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법정스님을 대중들이 좋아하는 것은 글을 보고 공감을 하시기 때문에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직접적으로 인연을 맺는 것은 한계가 있잖아요? 고민이라든가 마음이 아픔이 치유가 되면서 지향점을 찾게 되는 것 같아요. 특히 마음에 상처가 있거나, 우울하거나, 부도가 났다거나 하는 사람들이 단순한 글이 아니라 심리를 치유해주고 새로운 삶의 희망을 제시해 주는 역할을 하셨지요. 특히 스님의 마지막 모습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화두를 던져 주었어요. 나는 어떻게 마지막을 정리할 것인가. 내 삶을 어떻게 정리하고 회향할 것인가. 일반인뿐만 아니라 불가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제까지는 큰 스님들 입적하시면 국화를 수천송이를 꽂고 일이 많았거든요. 법정스님께서 그렇게 가시고 난 이후에 아무도 예전 화려한 장례식을 할 엄두를 내지 않는 거예요. 대흥사 천운스님 다비식 때만 해도 스님의 방식대로 부조금을 받지 말고 화환도 받지 말라고 하는 것이 관행이 되었어요. 스님이 모범을 보여 버리시니까 불가에도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지요.
자기 입던 옷에 관도 없이, 수의도 없이, 가사 한 장, 천 하나 덮은 거잖아요. 이런 방식은 가난한 인도사람들의 장례 방식입니다. 제가 표현 하기를 <법정스님은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 티벳 사람처럼 살다가 인도 사람처럼 가셨다>고 했어요. 티벳 사람처럼 살다 가신 부분은 티벳 사람들의 의식속에는 복이란 것이 물질적인 유혹 앞에 넘어가지 않고 청빈한 수행을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어요. 우리가 독신 비구의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청정한 수행자로서 공덕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선근이라 하는데 선근이 부족하면 출가를 해도 계속 여여하게 수행자의 생활을 하기가 힘들어요. 이런 점에서 스님은 이중적인 삶을 살지 않고 온전하게 수행자로서, 종교계의 어른으로서 귀감이 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스님이 가신 빈자리가 큰 것 같아요.
스님이 가신 다음에 종교적인 갈등이 생기고 있거든요. 법정 스님 당시에는 김수환 추기경님과 강원룡 목사 이렇게 세분이 각 종교의 어른으로서 완전히 형제처럼 지냈습니다. 성당에 가서 강론도 하시고 축,경께서 예고도 없이 오셔서 초파일날 음악회도 감상하시고 거기서 나온 수익금을 카톨릭에서 운영하는 봉사 단체에 보내주고 강원룡 목사께서는 크리스챤 아카데미를 같이 운영하셨어요. 어른들이 이렇게 하시니까 귀감이 되어가지고 종교의 경계를 넘어서 선의지를 가지고 사회에 좋은 일을 그런 게 많았었지요. 어른들이 돌아가시고 화합이 사라져 가지고 서로의 주장이 강해지고 갈등과 대립이 깊어지는데 그런 어른들의 뜻을 사회적으로 살릴 수 있는 일들이 다시 진행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길상사만 해도 법정스님께서 돈을 내지 마라 그래요. 주지하는 것 봐서 돈 내고 이 절 저 절 다니면서 돈 뜯기지 마라고 하시거든요. 돈은 정말 필요한 곳에 쓰도록 하셨고 남에게 보시를 받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시고 의식주는 당신의 노동으로 해결하셨고, 스님의 손을 보면 여러분이 깜짝 놀라실 건데, 글 쓰는 선비의 손이 아니라 농부나 노동자의 거친 손이예요. 스님은 글만 쓰신 것이 아니라 독립된 토굴생활을 하시면서 의자나 필요한 생활용품은 장에서 사온 것이 아니라 인근에서 나무를 구해서 직접 만드는 목수 일을 굉장히 즐겨 하셨어요. 강원도에 가면 스님이 심어놓으신 자작나무가 몇 그루 있는데 새하얗게 잘 자라서 나무의 귀족 같은 기품이 있어요. 불일암도 모란을 심고 후박나무, 달맞이꽃도 심으시면서 뜰을 가꾸는 것을 좋아하셨어요.
스님의 의자가 의미하는 게 큰 거 같은데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그 의자를 만든 재료가 장작개비거든요. 불에 넣는 장작개비를 다듬어서 만드셨어요. 거기 앉아서 앞산을 자주 바라보셨어요. 산과 내가 둘이 아니고 자연과 내가 둘이 아닌 경계를 묵상하셨지요. 절해고도에서 빠삐용이 탈출을 시도 하듯이 나라고 하는 절해고도에서 빠져 나와서 자연과 우주가 하나되는 묵상 체험을 많이 하셨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산이 나니까 저산을 보고 가라고 하신 것은 농담이 아니라 체득하신 세계를 직접적으로 말씀하셨지만 귀찮으니 산이나 보다 내려가라고 하신 것처럼 들렸을 수도 있었지요.
1주기가 지난 이 시점에 많이 그리우실 것 같은데요.
스님의 뜻을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곳이 맑고 향기롭게라는 시민단체입니다. 스님의 뜻을 받들어서 테마별로 스님의 사상을 연구하고 사회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문화 콘텐츠를 만드려고 합니다. 법정스님이 이 땅에 태어나서 80년이라는 세월을 사셨는데, 우리 역사에서 역동적인 시대를 온 몸으로 헤쳐 나오면서 터득한 지혜와 삶의 자취가 미래 세대에게 삶의 대안과 해답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중요한 해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