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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 감사하라(시107:1-9)-2023.6.25
금년도 벌써 6개월이 훌쩍 지나갑니다. 오늘이 6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지난 6개월 동안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과분한 사랑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도저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지금 우리가 여기 이곳에서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로 우리는 지난 6개월을 순적하게 살아왔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감사와 찬양은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최상의 가치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여호와께 감사하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상고해 보려고 합니다. 사실상 오늘은 지난 6개월을 결산하는 감사주일입니다. 교회 절기로 말하면 지난 6개월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주일과 맞아 떨어지는 절기가 있습니다. 맥추절입니다. 그래서 다음주일은 대부분의 교회가 맥추절을 지킵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절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습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의식적인 절기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완성되었기에 절기를 지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충분히 동의합니다.
그러나 저는 절기를 의식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키는 것이라면 굳이 절기를 가지고 옥신각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맞다 틀리다는 소모적인 논쟁보다는 감사하는 절기에 초점을 맞추어 드리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믿는 자에게 1년 52주는 감사주일입니다. 1년 365일은 감사절입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주일이 감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다가 굳이 맥추절이라는 단어를 차용하여 감사절을 지키는 것이 싫지 않은 것은 2모작에 익숙한 우리나라 정서상 크게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농업은 봄과 여름에는 벼를 재배하여 가을에 수확하고, 벼를 수확한 다음에는 보리를 심어 이듬해 봄에 수확을 합니다. 1년을 크게 보면, 상반기에는 보리를 수확하고, 하반기에는 벼를 수확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상반기와 하반기를 구분하는 것이 상당히 익숙합니다. 대부분의 결산도 상반기와 하반기를 나누어서 합니다. 대부분의 학교 학사일정도 그렇게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하는데도 이것이 부담없이 적용되는 것이 절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상반기에는 맥추감사절, 하반기에는 추수감사절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절기가 있다는 것이 좋습니다. 상반기를 지켜주신 하나님께 맥추절로 감사하고, 하반기를 지켜주신 하나님께 추수절로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좋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도 대부분 기억하지 못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가르치지만 그렇게 못합니다. 그나마 감사절기가 있음에 우리가 다시 한번 감사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생각건대 일 년 52주가 감사 절기였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일 년 52주를 감사절기로 지키면 타성에 젖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매주 감사에 대한 다른 주제를 가지고 감사절기로 지키면 어떨까요? 식상하지 않고 신선해서 좋을 것 같습니다. 알다시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셔서 특별한 은혜와 은총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위해 절기를 마련해주셨지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절기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 돈독한 교제를 나누자는 것이지요. 1년 365일 동안 하나님을 잊지 말고 교제하자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일곱 절기를 주셨습니다. 물론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입니다. 그런데 일곱 절기를 압축하면 3대 절기가 나옵니다. 유월절과 오순절과 초막절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맥추절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3대 절기는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절기입니다. 3대 절기는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가 반드시 하나님이 택하신 곳으로 가서 지켜야 했습니다(출23:14-19, 신16:16, 레23:9-14).
그중에서 맥추절을 지키는데 맥추절은 무교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에 지키기 때문에 오순절이라고 부르고, 혹은 칠칠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곡식의 첫 열매를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초실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던 중 성령이 강림하셨기 때문에 성령강림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강림절을 기점으로 하여 교회가 처음 시작되었기에 생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추수에 대해 잘 모릅니다. 비록 우리가 보리 추수에 대해 잘 모를지라도 맥추감사절은 밀보리를 추수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감사절기입니다.
우리가 절기를 지키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당연히 맥추절을 지키는 이유도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께 감사입니다. 절기의 생명은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절기를 복음 시대의 우리가 의식화해서 지키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굳이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맥추절을 지키라고 강조하지 않더라도, 맥추절을 지키라고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받들어서 감사절을 지킴이 좋은 것입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떤 성도가 가장 위대한 성도인가? 성경을 많이 아는 성도가 아닙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성도도 아닙니다. 혹은 예배를 많이 드리는 성도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전도를 많이 하는 성도도 아닙니다. 가장 위대한 성도는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성도입니다. 저는 그 말에 공감합니다. 솔직히 감사 없는 기도, 감사 없는 예배, 감사 없는 전도 얼마든지 할 수 있거든요. 그러나 감사 없는 기도는 염불이요, 감사 없는 예배는 종교행위이며, 감사 없는 전도 역시 종교인들의 포교술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번 본문을 가지고 지난 6개월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우리가 얼마나 감사했는지를 생각해 보도록 하십시다. 혹시라도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 무엇으로 감사할까 고민이 되시는 분이 있다면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한참동안 감사할 꺼리를 찾는다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저 우리는 감사할 것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감사하는 것보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의 최우선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당신만으로 감사합니다.
(1) 여호와께 감사하십시다
우리에게 감사가 부족한 것은 자꾸만 내 손에 가진 것이나 잡힌 것만 보려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에게 주어진 것으로 감사하려는 습성을 갖고 있습니다.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것으로 불평하기 빠르지요. 문제는 성도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자기에게 주어진 어떤 것으로만 감사하려합니다. 그래서 감사하라고 하면 감사할 것이 무언가를 찾기에 골몰하지요. 한마디로 감사할 꺼리를 찾기에 급급하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어떤 것을 감사의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이지요.
진정한 감사는 하나님께 하나님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하는 것이지요. 하나님 당신을 감사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지요. 창조주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나의 전부이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한분만으로 감사하는 것이지요.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처럼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18). 여호와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감사요, 범사의 감사입니다.
내가 잡은 것이나 얻은 것으로 감사하는 자는 성숙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믿음과 상관없습니다. 성숙하지 못한 성도는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을 가지고 감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성도는 감사의 목적을 하나님께 두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한분만으로 감사할 줄 압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되심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으로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일하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으로 감사하는 자는 언젠가 감사가 시험들 때가 옵니다. 이른바 감사가 고갈 될 때가 온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감사의 목적을 소유에 두지 않고 하나님께 두는 자는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감사의 목적으로 삼는 자는 감사가 시들지 않습니다. 감사가 요동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변함없이 감사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믿는 자는 감사의 목적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먼저 여호와께 감사하라고 주문하는 것입니다. 감사의 최상의 목적을 하나님께 두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이름을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행하신 크고 놀라우신 일들을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본 시편의 기자는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감사하라고 말합니다.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다루시는 고유한 성품이거든요. 그래서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감사를 열어가는 키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다양한 성품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선하심과 인자하심 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다 들어 있거든요. 그래서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다고 찬양합니다. 그중에 대표적으로 시편136편을 보면, 구구절절이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노래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감사할 것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면서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추임새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만 가지고도 충분히 감사할 수 있습니다. 아니 감사함이 마땅합니다. 그러면 먼저 하나님의 선하심을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무엇입니까? 선하심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도덕적으로 착하고 흠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우리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행위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되어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에 합당한 것이 선하심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의 자리에서 이탈하지 않고 있는 것이 선하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나서는 절대 선하심을 설명할 길이 없고 증명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 없는 선하심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선하심입니다. ‘선함’이라는 히브리어는 ‘토브’입니다. 그 의미는 좋다, 아름답다, 혹은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상태가 ‘토브’입니다. 그것이 선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선하신 하나님이 선하신 목적대로 당신의 백성들을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시고 선한 목적대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선하심으로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그분은 지금까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방식으로 우리를 이끌어 오신 것입니다. 금년도 6개월을 돌아보건대 하나님은 선하심으로 우리를 인도하신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 자체만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금년 6개월을 사시면서 당신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심이 믿겨지지 않았다면 그만큼 당신의 신앙은 병이 들었던 것입니다. 혹은 감사가 없는 죽은 신앙이었는지 모릅니다. 말세에는 감사가 없다는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함께 반드시 감사해야 할 하나님의 성품은 인자하심입니다. 인자하심은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헤세드는 아주 폭이 넓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주로 사용하는 자비, 양선, 인자 외에도 사랑이라는 단어까지 확장됩니다. 솔직히 사랑이라는 단어를 포함한다면 수용하지 못할 것이 없는 것이지요. 사랑보다 폭이 넓고 깊이가 깊고, 높이가 높은 단어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라는 단어에 사랑이 포함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 속에 들어가지 못할 범주는 없는 셈이지요. 사랑이라는 단어를 포함한다면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감사하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것입니다. 솔직히 여러분 하나님의 성품을 찬양하고 감사해본 적 있으십니까? 보이는 어떤 것을 바라보고 감사할는지는 몰라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을 감사해 본적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하여 감사할 수 있는 성도라면 분명히 당신은 성숙한 성도요, 건강한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가 맞습니다. 무엇보다 금년 6개월 동안 우리를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까지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그것이 바로 맥추절을 지키는 성도의 바람직한 자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함께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행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귀하고 복된 성품을 가졌을지라도 나에게 영향력이 미쳐야 합니다. 나와 관계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와 관계가 없는 것이라면 결코 감사할 수 없겠지요. 선하신 하나님이, 인자하신 하나님이 나에게 당신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베풀어주셨다는 말입니다. 이른바 내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분이 베푸시는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공급받았다는 말입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내가 구속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른바 구원함을 받은 것이지요.
(2) 구속하심을 감사하십시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주신 구속의 은혜를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나를 구속하셨습니다. 죄에서 구원하시고, 질병에서 건져주시고 사망에서 구속하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영육을 구속하신 것입니다. 본 시편 107편은 앞에 있는 시편 105편과 106편과 상호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105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들을 어떻게 구원해주셨는가를 알려주는 시편입니다. 감사시편이지요. 한마디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받고 살다가 출애굽했는지의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106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로 다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죄악 된 길을 고집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셨습니다. 이른바 광야를 거쳐 약속의 땅 가나안과 바벨론 포로시대까지의 역사를 거론하며 하나님이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인도하셨음에 방점을 찍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시105편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노래한 것이라면, 시106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지켜주심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붙들고 계신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이 감사할 것밖에 없는 것이지요.
본 시편107편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랜 후의 역사를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른바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회복된 때를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을 바벨론에서 해방시켜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삼아도 어찌 다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감사할 것 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중에서 가장 으뜸 된 감사는 무엇일까요? 누가 뭐라 할지라도 구속함을 받은 것입니다. 내 영혼이 구원받은 것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시편 기자는 2절에서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는 이같이 말할지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구속함을 받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오늘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구원함을 받은 모든 이를 통칭하는 것이지요. 그들은 당연히 하나님이 대적의 손에서 구속하심에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과거 여러 차례 대적들의 손에서 구원받은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먼저 애굽이라는 대적자들로부터 구출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광야와 가나안 땅에서도 수없이 많은 대적들로부터 구출을 받았었지요.
본 시편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는 바벨론에서도 구출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본 시편은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구출을 받은 사건을 네 가지 사례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4절로부터9절까지는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주리고 목마름으로 인해 아사직전에 있을 때 구원함을 받은 여행자들의 비유를 통한 구속입니다. 물론 이스라엘민족이 대표적으로 받은 경험이었지만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일이라는 것이지요. 금년에 우리가 받은 은혜입니다.
그리고 10절로부터 16절까지는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인 바 된 죄인들이 구원받는 것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린 연고로 엎드러져 돕는 자가 없을 때 구원함을 받은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이스라엘백성들이 직접적으로 경험한 일이지만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누구에게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 신음하고 고통당하는 때가 있거든요. 그러므로 모든 인간에게 구속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이지요. 다만 그 구속의 은혜를 경험하려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17절부터22절까지는 죄로 인해 질병에 걸려 있는 자들에게 대한 묘사입니다. 그들은 병이 심하여 음식도 먹지 못하고 거의 사망의 문에 가까이 있었던 상태에서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3절부터32절까지는 뱃사람들로서 선척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영업하는 자들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명하신 폭풍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배가 위로 솟구쳤다가 다시 파도 속으로 들어간 것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두려움에 놀란 선원들은 마치 술에 취한 자들같이 비틀거리며 지각이 혼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역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구원함을 받은 것입니다.
물론 본 시편에서 거론한 네 부류의 사람들은 자기들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비천한 상태에 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결과는 동일했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이 고통에서 건지셨다는 말이지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은 한결같이 저희의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던 것입니다(6,13,19,28절). 그들의 구원은 고난의 성격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를 취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을 찾고 구했다는 것이요,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아 구원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방법은 말씀으로 하신 것입니다.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
여기서 하나님이 구속하셨다는 말씀의 본질은 먼저 영혼구원입니다. 물론 영혼 구원에 제한을 두는 것은 아닙니다. 삶의 모든 위경으로부터 구원해주신다는 말이지요. 이는 영육을 구원해주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구속하신 것으로 모든 것을 중단하지 아니하십니다. 비록 구원받은 백성일지라도 육체를 입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혼자 살아가도록 방치하지 아니하신다는 말입니다. 영혼구원은 물론이거니와 삶속에서의 구원도 병행하신다는 말이지요. 우리는 영육구원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영혼구원은 당연하지만 육신의 구원도 받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도 외면치 아니하십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다양한 위경들이 있습니다. 환난도 있고 고난도 있습니다. 예기치 못한 사건도 있고 사고도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그런 위경들을 이겨낼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 앞에 어떤 일이 일어날는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합니다.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간구합니다. 솔직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지금까지 내가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멀리 볼 것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 이 순간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요즘 들어 가장 핫한 복음송이 있지요. 은혜라는 곡입니다. 그 가사에 보면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우리는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지요. 하다못해 지금 당장 여기 앉아서 예배하는 것도 은혜입니다. 숨 쉬고 호흡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보는 것이 은혜요, 듣는 것이 은혜며, 말하는 것도 은혜입니다. 움직이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무엇으로 감사할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까? 무엇으로 감사할 것인지 곰곰 생각해 보아야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냥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임은 모든 것이 감사할 것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으로 감사해야 할까요?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나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시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삶속에서 나를 건져주심을 감사하십시다. 본 시편의 기자는 여호와께서 고통에서 건져주심을 감사했습니다(6절). 그는 이스라엘이 당하는 삼중고를 고백합니다. 그들이 겪은 삼중고는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할 성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주리고 목마름으로 피곤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든 인생이 모두 다 경험하는 인생의 삼중고이지요.
사람마다 광야 길에서 방황합니다. 어디가야 좋을지 어찌해야 좋을지 갈팡질팡하지요. 그리고 어디에 정착해야 할지 모르고 헤맵니다. 심지어 지치고 피곤하여 생명의 끈을 놓아버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인생의 삼중고를 자기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면 너무 힘듭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문제는 인생의 삼중고를 자기 수준에서 스스로 해결했다고 큰 소리를 쳐도 실상은 만족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큰 산이 자기를 불안하게 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삼중고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해결해주시면 안전하고 만족합니다.
비록 자기가 기대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우리 안에 만족함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어떤 것이 내 앞에 있을지라도 아무 걱정도 없고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내 영혼을 만족시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9절에서 고백합니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내 영혼을 만족케 하시고 주린 영혼을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3) 채워주심을 감사하십시다
하나님은 자기를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십니다. 그리고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을 채워주십니다. 영혼을 만족케 하심은 부족함이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시편23편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는 내 영혼의 상태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사실 사람들이 만족이 없는 것은 자기 안에 하나님이 안 계셔서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혹은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다면 부족함이 없습니다. 만물의 주인이시오, 만유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이 내안에 나를 성전 삼고 계심을 믿는다면 결코 부족함이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내 영혼의 만족도는 내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는지의 여부에 달린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하심의 여부에 달린 것이지요. 내안에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결코 영혼이 만족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되시는 데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보배이신 예수님이 내안에 나를 성전삼고 계시는데 무엇이 불만족하시겠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인생은 공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령이 칼칼하고 만족이 없습니다. 예수님 한분이면 됩니다. 예수님만 계시면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믿음이 없으니까 목마르고 갈급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없는 영혼은 무엇인가를 채우려고 합니다. 돈이 됐든지 명예가 됐든지 혹은 세상의 어떤 것이라도 채우려고 한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아무리 세상 것을 채워보십시오. 내 영혼이 만족하시는지 말입니다. 세상 것은 채우면 채울수록 갈급합니다. 오히려 탐욕이 됩니다. 탐심은 결국 우상숭배의 죄악이 되고 말지요. 내 영혼이 만족함을 얻으려면 반드시 하나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은 하나님만 생각하고 하나님만 바라본다는 말입니다. 모든 삶을 하나님께 집중한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나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보통 하나님 앞에서 불만을 가질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우리의 욕구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입니다. 우리는 기도도 우리의 욕구를 채워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충돌은 바로 이것입니다. 욕구와 필요입니다. 우리는 욕구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그래서 우리 기도의 대부분이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욕구와 필요는 전혀 다릅니다. 욕구는 지금 당장 내게 없어도 전혀 불편함이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필요는 반드시 내게 있어야 할 것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믿는 자들도 자기들의 욕구만 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욕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그분은 우리의 필요에 민감하십니다. 사실 인간의 욕구는 한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가질수록 더 갖고 싶고, 마실수록 더 목마릅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신들의 욕구대로 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소욕이 채워지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감사가 작아지는 거예요. 육체의 소욕을 좇다가는 절대 감사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시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내 생각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욕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면 감사가 자동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내안에 있는 욕구를 걷어내면 감사가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 영혼이 주려야 합니다. 주린 영혼이라는 말은 내 영혼의 배고픔과 갈급함을 의미합니다. 영적인 배고픔과 갈급함을 느끼는 자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마치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이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고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을 채워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레미야서31장25절의 말씀을 보면 실감이 날 것입니다. “이는 내가 그 피곤한 심령을 만족케 하며 무릇 슬픈 심령을 상쾌케 하였음이니라 하시기로/내가 께어보니 내 잠이 달았더라”. 선지자 예레미야는 장차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될 것을 꿈을 통해 깨닫고 큰 기쁨과 위로를 얻었습니다. 자기 백성들을 생각할 때마다 피곤한 자기 심령이었지만 만족함이 되었고, 자기 백성들로 인해 슬픈 심령이었지만 상쾌함을 얻은 것입니다. 시원함을 얻은 것이지요.
바로 그것이 본 시편 기자가 고백하는 감사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영혼을 만족케 하시고, 주린 영혼을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자기를 사모하는 자의 영혼을 만족케 하십니다. 심령이 주리고 가난한 자에게 좋은 것을 채워주십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크고 놀라우신 행사로 인하여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분으로 인하여 감사하고, 그분이 행하신 일로 인하여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맥추절을 지키는 성도의 바람직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좋으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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