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동지>(7회)
사내는 박을 쥐똥나무 앞의 벤치 위로 끌어 앉혔다. 한 사람이 죽음의 문턱을 밟고 돌아오는 동안 몇몇 사람들이 바로 옆 아파트 현관을 들락거렸지만 아무도 그 일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금요일 오후에 창수와 헤어진 뒤, 동지는 길태선 교수를 옥상 쉼터로 청해서 6.25 전쟁의 발단과 한반도의 분단 책임에 관해 물었다. 길 교수에게 그것을 물은 이유는 그 문제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거나 아니면 갑자기 관심이 생겨났기 때문이 아니라 재희와 그 역사 선생 중 누가 옳은지를 저명한 교수의 입을 통해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교수는 대략 십 분쯤 얘기를 이어 나갔다. “한반도 분단의 원인을 따지고 들어가면 밑바닥에 일본이 있다는 건 사실이지요. 2차대전 당시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였고 일본 군대가 한반도에 주둔함으로써 연합군이 한반도에 진주할 명분을 주었으니까요. 하지만 오늘날처럼 분단이 고착된 직접적인 원인은 얘기가 좀 더 복잡합니다. 먼저 6.25 전쟁을 누가 일으켰느냐, 북침이냐, 남침이냐에 대한 물음은, 진실이 무엇이냐의 차원이라면 이미 예전에 결론이 난 문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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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국제사회에서 논란거리가 아닙니다. 소련이 당시의 비밀 문건을 공개하여 남침임을 확인해주었고, 심지어는 김일성마저도 생전에 자신이 일으킨 전쟁이라고 실토한 적이 있어요. 그 밖에도 6.25 전쟁이 남침이란 명백한 증거가 차고 넘쳐요. 우스운 얘기지만, 만약 남에서 북으로 쳐들어갔다면 1950년 6월 25일, 그 일요일 전야에 왜 남한의 병사들에게 외박을 허용하고, 고위 지휘관들은 육군본부에 모여서 파티를 즐겼겠습니까. 입에 올릴 일고의 가치도 없는 문제지요. 다만 분단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의 문제는, 극히 중립적인 관점에서는, 미국과 소련에 똑같이 책임이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은 일본 서부의 군사도시인 히로시마에 첫 원자폭탄을 투하합니다. 두 번째의 원자폭탄은 8.9일 나가사키에 투하되는데 그 하루 전날, 일본의 항복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판단한 소련은 아시아에서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합니다. 8월 9일 한반도에 첫발을 들여놓은 소련군은 8월 12일에는 청진과 나진까지 내려왔어요. 그 속도라면 8월 말이면 부산까지 점령할 기세였지요. 그때 미군은 1,000㎞나 떨어진 오키나와에 있었으니, 미 육군이 한반도에 들어오기란 빨라도 한 달 뒤에나 가능했다는군요. 소련군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란 미국은 일본이 항복한 8월 15일 밤에 부랴부랴 38도 선을 그어서 그 남쪽으로는 내려오지 말라고 소련군에 통고합니다. 아시아 지역 전쟁에 참전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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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일주일이 안 된 소련은 미국의 제안을 수락합니다. 그 후 소련군은 미군이 한반도에 들어오기도 전에 남북을 연결하는 철도와 도로를 끊고, 전화와 우편물 교환까지 단절하여 38도선 이북 지역을 봉쇄, 고립시킵니다. 38도선을 그은 취지는 미군과 소련군이 일본군 무장해제를 분담하기 위한 경계선이었는데, 소련군은 그것을 한반도 분단선으로 굳힐 음모에 착수한 것이지요. 9월 4일에 미군이 한반도에 들어오자 소련은, 겉으로는 미군정 측과의 협상 테이블에 나와 한반도의 미래를 의논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소련군 대위 김일성을 앞세워 38도선 이북 지역을 공산국가로 만드는 작업을 착착 진행합니다. 이듬해 1946년 2월에는 정부 기능을 하는 ‘임시인민위원회’란 걸 구성하여 헌법과 법률까지 제정하고, 인민의 사유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합니다. 그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어요. 왜냐하면 3개월 먼저 1945년 5월7일, 나치 독일이 항복한 유럽 전선에서는 전쟁 중 소련군이 점령한 동부 독일을 비롯하여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동유럽 나라들에서 이미 같은 방법으로 공산화 작업을 진행 중이었으니까요. 결과적으로 2차 세계대전 중에 소련군이 발자국을 찍었던 나라는 예외 없이 모두 공산화되었고, 그 외에도 국제 공산당 코민테른의 지원으로 중국, 몽골, 베트남, 쿠바 등 여러 나라가 공산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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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소련은 공산주의를 양보하지 않았고, 미국은 자유민주주의를 양보하지 않았어요. 그 결과 한반도에서는 38도선을 경계로 두 개의 다른 정부가 수립되었지요. 이 년 후에 소련과 김일성은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으나 실패했습니다. 그 후로 분단은 고착되어 오늘에 이르렀고요. 그 후 육십 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반도가 공산주의 국가이기를 원하는 사람은 미국 때문에 분단되었다며 미국을 욕하고, 자유민주주의 국가이기를 원하는 사람은 소련 때문에 분단되었다며 소련을 원망합니다. 이들 또한 한 치의 양보도 없습니다.그리고 이들은 육십 년 동안 서로를 향해 무한 증오를 키워왔지요. 과연 분단의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요.”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이 분단의 책임을 미국에 있다고 주장하는 건 잘못 아닐까요? 그리고 6.25 전쟁처럼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여 가르친다고 누가 믿을까요?” 동지가 물었다. “명백한 사실이긴 하지만 그 증거 자료에 접근하거나, 그것을 소비하는 국민은 많지 않습니다. 관심도 부족해요. 그런 환경에서는 황당무계한 거짓말이라도 무서운 파괴력을 갖게 되지요. 사람들은 ‘숨겨진 진실’이라고 할 때 쉽게 현혹되니까요. 그리고 거짓이라도 일단 믿어버리고 나면 제 자리를 찾아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대부분은 아주 못 돌아오기 십상입니다.” “그렇게 역사를 왜곡하여 가르치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동지가 다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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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래의 우군을 양성하기 위해서지요.” 거기서 교수는 잠깐 말을 끊고 얼굴에 노여운 기색을 떠올렸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역사 왜곡은 비단 6.25 전쟁이나 분단 과정뿐만 아니라 근현대사의 전반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어요. 언젠가는 이것 때문에 나라의 운명이 크게 요동치는 날이 올 겁니다.” 교수의 말투나 표정은 학자로서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는 정도를 넘어 말하기 어려운 깊은 개인사를 얘기하듯 비장한 여운이 느껴지기도 했다. 동지는 역사 왜곡 문제에 대한 윤 선생의 생각이 옳지 않냐고 박에게 따져 물으려다가 그만두고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때 박의 목뒤의 옷깃에서 빠져나온 문신의 끝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문신은 짙은 청색의 물결 무늬 같은 것이었는데, 등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끝이 목의 옆을 감싼듯해 보였다. “할 말이 한 가지 더 있었지만 그만두겠소.” 그 말을 남기고 동지는 그곳을 떠났다. 박은 대략 십 분쯤 더 벤치에 엎드려 있다가 집으로 들어와 거실 바닥에 널브러져 누웠다. 세상에서 아무도 모르는, 오직 자신만이 아는 극한 고통의 기억과 그로 인한 공포가 현실로 차근차근 밀려왔다. 그는 갑자기 턱을 덜덜 떨며 울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 울음이 잦아들 때쯤에는 실성한 사람처럼 천정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너희 둘···· 너희 둘을 내가 언제까지나 지켜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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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국화 다실
그 일 후 표 창수는 ‘일묵서예’에 자주 나타났다. 주로 동지가 와서 머무는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들렀지만, 친구보다는 커널 장과 배갑수의 자리에 껴들거나 가끔 집주인인 지선과 얘기를 나누었다. 길태선 박사는 워낙 알려진 원로 교수이다 보니 인사만 깍듯이 하는 형편이었고, 재희는 왠지 말을 건네기가 어려웠다. 커널 장은 육군에서 복무한 퇴역 대령이었고, 배갑수는 KAL에서 오래 근무한 후 S여행사 사장을 끝으로 은퇴한 엘리트였다. 그들은 길 교수와 함께 화요일과 금요일에 서예 수업을 받았다. “윤재희 씨와 동지는 연인 사이가 맞는 겁니까?” 어느 날 지선에게 창수가 물었다. “아닌 것 같으세요?” 지선이 눈을 좁혀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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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윤 선생께서 주말마다 여기를 왜 오겠습니까마는, 그럼에도 두 사람 사이엔 뭔가 허전함이 보이거든요. 정말 연인관계라면 말입니다.” “특별한 분이지 않습니까. 정 선생님께서는····” ‘이 여자는 동지보다 두 살 위라고 들었는데 동지에 대한 존경심이 거의 신앙에 가깝다.’ 창수는 이곳을 드나든 후 오래되지 않아 그런 분위기를 감지했다. “선생님은 정말 미인이십니다.” 무심함을 가장한 듯한 말투로 창수가 말했다. “그럼요. 그만한 미모는 드물죠.” “아뇨, 물론 윤 선생님이야 미인이죠. 그런데 방금 제 말의 주어는 동양화 선생님인데요.” 창수의 말에 지선은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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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 1회부터 7회까지 한꺼번에 다시 읽어 봤습니다. 점차 ㅡ 가닥이 잡히며 줄거리가 엮어지네요.
조금 섣부르게 연재를 한 것 같아요. 구성이 마음에 안 들어서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보시는 분들도 어쩌면 느낄지도 모르겠어요.
연재의 성격 상 시나 수필과 달라서 매회마다 감상을 얘기하기도 어려운 것이니까 그냥 지켜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가다가 스스로 아니다 싶으면 그만 둘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는데, 만약 그런 날이 오더라도
문우님들께서는 그러려니 해주면 고맙겠습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하나요. 의외의 소재와 방향으로 흥미를 더해가는 발단의 과정이고 우리의 근현대 사회와 역사를 바라보는 무척이나 기념비적이 소설이 되지 않을까 크게 기대가 되는데요.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이념 갈등의 이야기를 좌익을 은근히 옹호하는 관점에서, 소설가 복거일은 우익을 다소 과잉 옹호하고 숭미를 하는 수준까지 상당히 앞서나가기도 하지만 자유 공산의 이념 갈등과 남북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소설은 잘 알지 못합니다.
해암이 이 소설로 이 문제를 정확하고 심도 있게 조명하는 이야기를 뫈성시켜볼 것을 강력히 성원합니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작품이 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한 번 칼을 빼었으니 적진으로 나아가야지요. 평가보다는 그저 줄거리를 이해하면서 담담한 마음으로 감상하렵니다. 때로는 새로운 경험과 지식을 접하고 때로는 때로는 멋진 표현과 참신한 발상에 박수를 치게 되겠지요.
이제 막 흥미를 더해가기 시작하네요. 이 시대 왜곡된 역사 교육산물의 대표자인 기레기 기자 창수, 사이비 진보 좌파 역사 선생인 박선생, 오늘 처음 등장한 객관적인 입장에 있어보이지만 보수 편향이라고 일각의 비판을 감수해야할 역사학자 길교수의 등장이 매우 시의적절합니다.
그런데 보다 흥미로운 소설적 논쟁을 이끌어 나가려면 좀 더 우익 쪽에서 다소 과격한 논리를 펴는 누군가가 있어야하지 않을까요? 커널 장이 혹시 그런 인식을 대변하는 인물인가요? 커널 장이 혹시 해암 스스로를 소설에 등장시키는 전후 반공시대의 정통적인 역사교육을 받고 자란 매우 적극적 보수 성향의 인물이 아닌가싶기도 하구요.. ㅋ~
소설의 무게 중심을 이념 문제에 둘만큼 저의 철학이 깊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래 지향했던 방향은 이념보다는 좀 다른 데 무게를 뒀기 때문에 나중에 산만한 구성이
될 수 있다는 점과 다른 한 가지 점에서도 제 나름의 고민이 있었기에 푸념을 한 것입니다. 어찌 됐든 이 연재가 곧
출판할 내용은 아니니까 그냥 쓰고 있습니다. 그냥 가볍게 봐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냥 재밌게 읽자구요. 점점 흥미가 고조되고 있어요. 다음 편을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