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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21. 묵상글 (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 사랑이 배고픈 사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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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사랑이 배고픈 사람
아시다시피 저는 식당을 하고 있는데 제가 식당을 하는 것이
돈을 벌 목적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서 사랑이라면
저의 식당이 필요한 사람은 배고픈 사람이고
제일 필요한 사람은 제일 배고픈 사람일 것입니다.
실제로 배고프지 않은 사람은 저의 식당을 찾지 않을 것이고,
돈이 많아 제일 맛있는 것을 찾는 사람은 저의 식당을 찾지 않습니다.
왜냐면 저의 식당은 음식값이 3천 원으로 싸고 가짓수도 세 개뿐이기 때문입니다.
부자들에게 음식값이 싼 식당은 자기 체면에 어울리지 않고,
세 개뿐인 음식으로는 그의 입맛을 다 채울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마태오 사도 축일에 왜 제 얘기를 길게 한 것일까요?
물론 마태오 사도 얘기를 하기 위해서이고,
주님께서는 왜 마태오 사도를 부르시고
마태오 사도는 왜 주님을 따랐는지 얘기하기 위해섭니다.
주님께서 마태오 사도를 부르신 것은, 그가 주님 사랑을 배고파했기 때문이고,
마태오 사도가 주님을 따른 것도, 그가 주님의 사랑을 배고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결론처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이 필요치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마태오 사도만 주님의 사랑이 필요한 걸까요?
마태오 사도만 주님의 치유가 필요한 병자이고,
바리사이나 우린 치유가 필요 없는 사람인가요?
그럴 리 없습니다.
병자임에도 자신이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치유 받으려고 하지 않듯
영혼의 병자 곧 죄인임에도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는 사람은
그 영혼의 병을 치유 받으려 들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주님의 사랑과 용서도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이라는 인식은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의 인식입니다.
나는 죄인이라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죄인이 아니라는 사람은 하느님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사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라고 느낄 것이고,
그의 죄가 크든 작든 큰 죄인이라고 느낄 텐데
율법 앞에 있을 때 나는 율법을 어기지 않았다고 그러니 죄 없다고,
다른 사람 앞에 있을 때 나는 저 사람에 비해 죄 없다고 할 겁니다.
그러므로 병이 의사를 필요로 하고 만나게 하듯
우리의 병이 구원자를 필요로 하고 만나게 하고
우리의 죄가 은총 곧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만나게 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또한 볼 수 있어야 하고 그래야 주님을 따라나설 수 있습니다.
아주 많은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자기 죄만 보고 주님의 은총을 보지 못하고,
그래서 하느님 자비에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기의 음습한 죄 안으로 숨습니다.
이는 더러운 빨래를 빨지 않고 구석에 처박고 햇빛에 널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마태오 사도는 자기 죄를 보았고 주님의 사랑을 봤으며 은총에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자기뿐 아니라 다른 죄인들도 주님께로 데리고 와서 나아가게 했습니다.
오늘 영성체 후 기도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복된 마태오가 구세주를 집에 모시고 잔치를 열었듯이
오늘 저희도 구원의 잔치에 참여하고 기뻐하오니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의 성체로
저희가 언제나 새로운 힘을 얻게 하소서.
우리도 마태오 사도처럼 주님 구원에 참여하고 있다면
우리의 집에서 구원의 잔치를 열어 많은 사람을 초대하고
우리와 함께 주님의 사랑으로 저희가 언제나 새로운 힘을 얻게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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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영적 가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여기서 말하는 “이 사람들”, 곧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이라고 불린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마태오복음>에서는 “제자들”(마태 12,49)로, <마르코 복음>에서는 “당신 주위에 앉아있는 사람들”(마르 3,34)로, 여기 <루카복음>에서는 “집 안에 들어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군중”으로 제시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제자들과 어린 아이와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감옥에 갇힌 자를 당신을 동일시 하셨습니다(마태 10,40;루카 9,48;마태 25,40). 그러나 “내 어머니”라고 칭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단지 십자가 아래서 요한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 하고 맡기셨을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머니를 맡을 수는 있어도, 우리가 어머니가 될 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을 가리켜 “내 어머니”라고 부르며, 당신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세 가지’로 말씀됩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께서 계시는 집 안에 들어와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은 이들’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뽑으실 때도 “그들이 나와 함께 있기 위함이다.”(마르 3,14)라고 말씀하셨고, 최후만찬의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에서도,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힘들어도 고통스러워도 받아들이기 어렵더라도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달콤하지 않아도, 손해 보더라도 함께 있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을 함께 하는 동행자요 동반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해서, 모두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과 함께 있되,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입니다. 다른 누구의 말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입니다. 성당에 와 있다고 해도, 수도원에 들어와 있다고 해도, 모두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분의 말이 합당하지 않아 보여도, 때에 따라서는 자신이 손해 볼 줄을 빤히 알면서도,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고 믿음과 사랑으로 따르는 이들입니다. 그러니 늘 “말씀”을 향하여 있고, “말씀” 아래에 있는 이들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가족은 “말씀을 듣고 순명하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신의 뜻을 성취하는 이가 아니라, 부르신 분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곧 자신의 뜻을 버리는 이요, 임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들 안에서 잉태된 말씀이 탄생됩니다. 그러니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이 어머니가 됩니다. 비로소 말씀을 탄생시키는 말씀의 어머니가 됩니다. 곧 말씀을 이루는 이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자매가 됩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당신 말씀 아래에 있게 하소서. 말씀을 듣고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주님!
저희가 당신으로 하여 모였고 당신으로 하여 함께 살아오니,
늘 당신 집 안에 함께 있게 하소서!
함께 있되, 당신 말씀을 귀 기울여 듣게 하소서!
귀 기울여 듣되, 순명하여 실행하게 하소서!
하오니, 오늘도 저를 약하고 가난하게 하시어, 당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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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
예나 지금이나 천대를 받고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태오라는 인물은 세금 징수원으로 천대를 받는 사회계급에 속해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세리를 부정하게 돈거래 하는 사기꾼이나 탐욕스러운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부르시고 그 집에서 함께 음식을 나누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마태5,44-46). 하신 말씀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9,11)하며 비위에 거슬린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3).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습니다. 매일 다짐하지만 흔들비쭉인 우리의 마음을 헤아리시는 주님이 계시니 행복합니다. 성경을 보면, 다윗이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2사무12,13). 하고 자기 죄를 고백함으로 용서를 받았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루옷을 걸치고 흙을 뒤집어쓴 채 단식을 하여(느헤9,1) 회개하였습니다. 요나도 죽음의 뱃속에서 살려달라 외쳤더니 그 호소를 하느님께서 들어 주셨습니다(요나2,3). 세리도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가18,13). 하고 기도했고, 자캐오는 주님의 부름을 받고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남을 속여 먹은 것에 대해서는 그 네 곱절을 갚아 주겠다고 말씀을 드렸고,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가19,8-9)는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십자가위의 오른 쪽 죄수는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저를 기억하여 주십시오.’하고 간청하여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가23,43). 는 확답을 얻었습니다. 죄인임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가운데 자비를 입게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에게 의사로서 다가가셨고, 외적인 병을 치료하는 것을 뛰어넘어 뿌리를 다스리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진정 회개하는 죄인에게 구원의 기쁨을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도 그분이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이웃에게로 다가가야 하겠습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밉살스러운 사람은 더 큰 사랑으로 더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보기 싫어도 사랑해야 합니다.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로마13,8공동번역). 우리는 사랑에로 불리움 받았습니다. “사랑의 핵심은 용서입니다. 사랑의 본질은 상대의 실수를 이해하고 도와줄 방법을 아는 것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그러므로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며,”(에페소서4,1-2) 최선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9,13). 하신 말씀의 의미를 되새기며 그 은혜를 기억하는 가운데 기쁨을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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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키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주로 앞 번호의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1979년에 입학했으니 벌써 43년이 지났습니다. 같은 교복을 입었고, 방과 후에는 학교에 남아 농구도 하였습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때는 격랑의 시대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였고, 신군부가 등장하였고,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광주 민주화 운동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격랑의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신학교에 가서야 알았습니다. 43년이 지난 친구들의 모습을 봅니다. 형준이는 일찍 미국으로 이민 와서 우편배달부 일을 하였습니다. 찬행이는 조경에 관심이 있어서 아직도 조경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정식이는 대학을 중도에 포기하고 자동차 중개업을 하고 있습니다. 달순이는 반도체와 친구가 되어 반도체 회사에서 일하였습니다. 저는 사제가 되어서 지금 미국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같은 학교를 다녔지만, 같은 과목을 배웠지만 친구들이 하는 일은 모두 달랐습니다. 이렇게 흐르는 시간 속에 우리는 익어가고 있습니다.
1982년에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교가는 이렇습니다. “진세를 버렸어라. 이 몸마저 버렸어라. 깨끗이 한 청춘을 부르심에 바쳤어라. 성신의 그느르심 아늑한 이 동산에 우리는 배우리라 구원의 Veritas!" 친구들은 10년간 신학을 배우고 1991년 사제가 되었습니다. 31년 동창사제로 지내고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니던 때는 교회에 큰 행사들이 있었습니다. 1984년에는 103위 성인의 시성식이 있었습니다. 성인이 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방한하셨고, 시성식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1989년에는 44차 세계성체 대회가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는 10년마다 100만 명씩 신자가 늘어나는 성장의 시대였습니다. 같은 신학교를 나왔지만 동창 신부님들의 직책은 많이 달랐습니다. 본당 사제로 지내는 친구, 교구청에서 지내는 친구, 신학교에서 지내는 친구, 장애인 복지시설에서 지내는 친구, 교포 사목을 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저는 뉴욕에서 가톨릭평화신문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직책은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 사제로 지내고 있으며 흐르는 시간 속에 익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셨습니다.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우리의 신앙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시작되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하는 직분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겸손과 온유를 다하는 것입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서로 참아 주는 것입니다.
오늘은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어둠 속에 있던 마태오는, 절망 중에 있던 마태오는, 조롱과 멸시를 받던 마태오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사랑과 자비의 주님, 용서와 온유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마태오는 이제 또 다른 세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주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우리들 또한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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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언젠가 이메일을 통해 도움을 청하는 메일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조금 난감했습니다. 솔직히 제가 이분을 알지도 못하고, 또 그 상황도 전혀 모르는데 어떻게 도울 수가 있겠습니까?
이 분은 몇 년째 저의 묵상 글을 보고 있다면서 친밀감을 표시합니다. 그러나 저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또 갑곶 성지 초창기에 자주 왔었다고 말합니다. 역시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저를 잘 알고 있으니, 도움을 당연히 줘야 하는 것처럼 메일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냥 무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분을 모르니까요.
어떤 형제님으로부터 필요할 때만 연락하는 친구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기 필요할 때만 연락하고, 친구의 연락에 대해서는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얼마 전에 그 친구가 경제적인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줬다고 하더군요.
“필요할 때만 연락하면,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없어.”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필요하지 않을 때도 깊은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필요할 때만 연락하면서 필요한 것을 얻기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과 이기심입니다. 그런데 주님께도 이런 모습을 취했던 우리는 아닐까요? 필요할 때만 기도합니다. 과연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관심이 컸습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보여주신 표징과 힘이 되는 말씀은 ‘메시아가 아닐까?’라는 가능성을 갖기에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로마의 지배를 받는 상태에서 진정한 해방을 가져다줄 메시아의 도래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지요. 그래서 계속해서 자신들이 믿을 수 있는 확실한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표징을 보여주어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로마로부터의 해방이라는 필요한 것만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욕심과 이기심에서 벗어나는 자신의 변화는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리들과 먹고 마시는 모습을 보면서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많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실천만을 우리에게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실천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자기 필요한 것만을 계속 청하고만 있는 우리가 아닐까요?
주님께서 부르는 사람은 능력 있고 재주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욕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을 지금 부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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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목표 없이 성공의 여행을 떠나는 자는 실패한다. 목표 없이 일을 진행하는 사람은 기회가 와도 그 기회를 모르고 준비가 안 되어 있어 실행할 수 없다(노먼 빈센트 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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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구원의 출구
-따름의 여정, 부르심과 응답, 공동체의 일치-
오늘은 성 마태오 복음 사가 축일입니다. 역시 순교자 복음 사가이기에 빨간 제의를 입습니다. 마태오는 갈릴래아 태생인 듯 하며 마르코 복음에 의하면 알패오의 아들로 원래의 이름은 레위였습니다. 예수님이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신 것처럼, 레위에게 마태오라는 이름을 주신 것으로 보고 있으며 교회 전통 역시 둘을 동일한 인물로 봅니다.
마태오라는 이름은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히브리어 ‘마티아’에서 유래하며 그 이름 뜻대로 마태오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은총의 선물처럼 주님께 불림을 받습니다. 열두 사도중의 하나인 마태오는 특별히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로 복음서를 저술했다고 전해집니다. 전승마다 차이는 있지만, 마태오는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에티오피아에서, “예로니모 순교록”에 따르면 페르시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것으로 알려 집니다.
교회미술에서 성 마태오는 성경에 언급된 ‘살아 있는 네 생물’중 날개 달린 사람(천사)의 모습으로 표현되며, 이렇게 일치시킨 분은 리옹의 주교 성 이레네오였습니다. 성 마태오가 복음 사가는 세리였던 경력으로 특별히 은행원과 장부 기장자, 회계사와 세무 직원들의 수호성인이 되었습니다. 동방교회에서는 그의 축일을 11월16일에 기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마태오의 성소는 그 이름 뜻처럼 순전히 하느님의 선물이었음을 봅니다. 마태오처럼 우리의 성소 역시 주님의 선물임을 새롭게 확인하게 됩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나 부르심을 받아 응답했기에 비로소 마태오의 운명은 바뀌고 완전히 새로운 삶의 시작이 된 것처럼, 우리도 그러합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날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새롭게 시작하는 날이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착안한 강론 제목이 ‘구원의 출구’입니다. 구원의 출구인 주님을 만나 부르심에 응답한 마태오입니다. 지하 주차장에서 출구를 통해 나오는 것처럼 출구를 찾지 못하면 자동차는 지하에서 계속 헤맬수 있습니다.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만일 마태오는 물론 우리가 구원의 출구인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마태오는 평생 구원의 출구를 찾지 못하고 세리 레위로 인생을 무의미하고 허무하게 마쳤을 것이며 우리 역시 방황하다 세상을 마쳤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세상에는 평생 구원의 출구인 주님을 찾아 만나지 못해 무의미하고 허무하게 살다가 아까운 인생 마치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마태오의 예수님과의 만남은 우연이 아닌 은총의 섭리였음을 봅니다. 세관에 앉아 진리이신 주님을 찾는 마태오의 갈망을 한 눈에 알아채신 주님은 즉시 그에게 명하십니다.
주님은 죄인 세리라는 선입견이나 편견없이 마태오의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마음을, 갈망과 열정을 직시하십니다. 참으로 부르심에 앞서 주님을 찾는 마태오의 간절한 갈망이 전제됨을 깨닫습니다.
“나를 따라라.”
구원의 부르심입니다. 길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다가 길이자 구원의 출구이신 주님을 만남으로 이제부터 단조롭고 무의미한 일상에서 탈출하여 참길이신 주님을 따르는 새 삶이 시작된 마태오입니다. “나는 불림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처럼, 지금까지 존재감없는 삶에서 이제부터 존재감 충만한 삶을 살게 된 마태오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죽는 그날까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따라 나서는 ‘따름의 여정’에 오르게 된 마태오요 우리의 삶이기도 합니다.
주변으로부터 죄인 취급 받으며 세관에서 “혼자” 고립, 소외된 삶을 살다가 마침내 예수님의 제자공동체에 합류하여 이제부터 “더불어” 주님을 따르는 구원의 여정에 오른 마태오입니다. 교회공동체, 수도공동체에 속한 우리의 모습도 마태오와 흡사합니다. 예수님 제자들의 공동식사는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잔치를 연상케 합니다. 공동체의 일치를 이뤄주는 공동식사의 미사잔치입니다. 바로 여기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하는 공동식사에 이의를 제기하는 바리사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의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참으로 예수님을 통해 회개한 죄인을 사랑하시는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회개한 죄인들의 공동체가 바로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요 우리가 속한 교회공동체입니다. 죄가 없어서, 잘나서 불림받은 우리가 아니라 병자요 죄인이기에 은총으로 불림 받았음을 깨닫습니다. 깊이 잘 들여다보면 세상에 병자 아닌 사람, 죄인 아닌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이걸 깨달을 때 저절로 감사요 겸손입니다.
이런 자비로운 예수님을 공동체의 중심에 모시고 혼자가 아닌 더불어 주님을 따르는 여정중의 우리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에페소서에서 바오로의 가르침이 참 적절합니다. 세상에 문제없는 공동체는 없습니다. 에페소 교회 공동체 역시 내외적으로 불화와 이단의 위협을 겪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오로 사도는 공동체 성원들 모두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라 하시며 공동체의 일치의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서로 사랑으로 참아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을 바라볼 때 이렇게 살 수 있고, 이렇게 살 때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을 닮습니다. 이어지는 공동체의 특성인 하나에 대한 강조가 참 인상적입니다. 하나의 희망,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 하나의 성령, 하나의 주님, 하나의 믿음, 하나의 세례, 하나의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모두가 하나 중심의 일치의 공동체임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특히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은 곳이 없다는 무소부재(無所不在), 그분의 힘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는 무소부지(無所不知)의 하느님에 대한 묘사도 은혜롭습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해, 만물 안에 계십니다."
참으로 공동체의 중심이신 주님과의 관계가 공동체의 일치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모두가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을 사랑하여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 공동체 일치의 유일한 지름길임을 깨닫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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