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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지 집성촌 종가 스크랩 봉화.풍정리.전주이씨..영모당...
이장희 추천 0 조회 26 15.01.08 19: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진입로

정면 안쪽 마루 왼쪽 벽

정면 오른쪽 사경

오른쪽 측면

왼쪽에서 본 정면

오른쪽 측면 지붕

사당 정면 가운데 문짝

영모당

추원재

추만구택

문중 이야기
- 추만 이영기와 그의 선조들

이정(李?, 1407~1454)은 조선 태종의 7남이다.

신령궁주이며 증직으로 신빈(信嬪)이 주어진 영월신씨의 소생이다.

전주이씨 온령군(溫寧君)파의 파조이다.

이정은 효성과 우애가 뛰어났다.

스스로를 겸양하여 낮추는 미덕을 갖추고 있었으며, 지조가 높아 부귀에 쉽게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묘는 양주 미사리에 있다.

이정이 타계하였을 때 3일 동안 조정과 시장이 문을 닫았으며,

나라에서는 마포 40필, 저포 3필, 미곡과 콩 100석, 종이 200권, 석곽을 보내 장례에 쓰게 하였으며, 금표 지역 안에 예장할 수 있게 하였다.

시호는 양혜(良惠)로 주어졌다.
이정은 아들이 없어서 어머니가 같은 아우 근령군(謹寧君) 이농(李?)의 2남 이종(李踵)을 양자로 받아들여 후사를 이었다.

양자인 이종은 우산군이다.

자는 계이(繼而), 호는 정재(靜齋)이며, 승헌대부에 이르렀다.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유학에 이름이 높았다.
1498년(연산군 4)에 무오의 당인으로 이름이 올랐으며, 1504년(연산군 10)에는 죄가 더해져서 2남 무풍군(茂豊君) 이총은 적소에서 먼저 사사되었고,

이종은 전 집안이 절도로 유배되었다.

1506년에 적소에서 다섯 아들과 함께 화를 입었는데, 태연자약하게 담소를 주고받으면서 죽는 것을 마치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이 여겼다.

당시의 뜻있는 선비들은 이종의 인격을 흠모하여 그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다. 이 해 중종이 등극하자 신원을 하여 주고 예장을 하게 하였다.

1705년(숙종 31)에 정려가 내려지고 시호가 정민(貞愍)으로 주어졌다.
이종의 장자는 용성군(龍城君) 이원(李援)이다.

이원은 자가 문연(文淵), 처음에 부정(副正)으로 제수되었으며,

승헌대부가 증직으로 주어졌다.

무오년에 사화에 연루되었으며, 1506년(연산군 12) 적소에서 화를 당하였다. 중종반정 이후에 군호가 주어졌으며, 1705년(숙종 31)에 정려가 내리고, 1901년(순종 5)에 정민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묘는 고양에 있고, 배위는 평산신씨이다.
이종의 2남은 이총(李摠)이다.

자는 백원(百源), 호는 서호주인(西湖主人), 또는 구로주인(鷗鷺主人)이다.

자질이 뛰어나고 충성과 효성이 뛰어났으며 맑고 깨끗한 인격과 절조를 갖추었다.

시재가 뛰어나고 음률에 뛰어나 당시 선비들 중 교유하는 자가 많았다.

양화나루에 별장을 짓고 작은 배 하나를 띄워 놓고 어망을 비치해 놓고 마음에 맞는 선비들과 노닐었다.

속된 선비가 만나러 오면 손수 배를 몰아 도피하여 만나지 않았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 정여창(鄭汝昌), 매계(梅溪) 조위(曺偉) 등과 교유하였다.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이다.
연산군 무오년에 사화에 연루되어 장형을 받고 거제로 유배되었다.

단천역에 이르렀을 때 현감 용재 이종준(李宗準)과 더불어 송나라 이사중(李師仲)이 당개(唐介)에게 준 시를 벽에 썼는데, 이것을 도백인 이승건이 연산에게 장계로 알렸다.

1504년(연산군 10)에 적소에서 사사되었다.

중종반정 이후 묘지가 내려지고 도정(都正)으로 증직되었다.
정암 조광조가 경연에서 7부자의 벼슬을 올리고 정려를 내려 줄 것을 주청하였다.

숙종 때 정려가 내려지고, 영조 때 군호가 주어졌으며, 정조 때 소민(昭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 시호에 이총의 덕목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고 하여 순종 때 논의를 거쳐 충민(忠愍)으로 시호가 바뀌어 내려졌다.

묘는 벽제에 있으며, 배위는 정부인 평양조씨, 후 배위는 정부인 의령남씨이다.
이종의 3남 이정은 한산군이다.

자는 이직(而直), 호는 서호주인(西湖主人)이다.

1471년(성종 2) 생인데, 증직으로 자헌대부가 주어졌다.

호기롭고 영준하며 음률에 밝았다.

양화나루에 집을 지어놓고 마음에 맞는 선비들과 교유하며 시를 주고 받기를 즐겨하였다.
이종의 장남 용성군 이원, 2남 무풍군 이총, 3남 한산군 이정, 4남 화원군 이간(李揀), 5남 금천군 이변(李?), 6남 청양군 이건(李?)이 모두 다 당시 선비들이 알아주던 재사였지만, 이총이 특히 뛰어났다.
당시 이종 자제들의 성가는 연산군이 우려할 정도로 높았다.

무오년에 이종과 여섯 아들은 차례로 사화에 연루되는데, 사사될 때 한산군 이정은 36세였다.

무풍군 이총은 먼저 사사되고, 1506년(연산군 12)에 같은 날 6부자가 차례로 사사되었을 때, 좌랑 이장곤은 6왕손이 태연자약하게 담소하며 죽어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인물을 아까워하였다.

중종반정 후 한산군 이정에게도 묘지가 주어지고, 도정 벼슬이 주어졌으며, 1540년(중종 34)에는 군호가 주어졌다.

시호는 민절(愍節)이고, 묘는 양주에 있다. 배위는 정경부인 평양조씨이다.
전주이씨 영모당은 이 한산군 계열에 속한다.

다시 말해 전주이씨 영모당 계열은 온령군파이면서

그 안에서 다시 한산군파로 구분된다.

배출 인물


이시겸(李時謙),이선(李瑄)

- 제사 인물
이정(李?),이총(李摠)

- 추만 이영기와 그의 후손들


이영기(李榮基, 1583~1661)의 자는 광선(光先), 호는 추만(秋巒)이다.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592년(선조 25)에 왜구를 피해 영남으로 내려왔다가 12세인 1594년(선조 27)에 외가인 풍기를 찾아왔다.

이 과정에서 부모를 잃었고,

춘양의 풍정에 다래덤불을 치고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물러나 공부하고 자연 속에서 노니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벼슬길에 나서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집 옆에 사덕정을 짓고 노닐며 지역사림과 교유하는 생활을 사랑하였다.

향년 79세이며, 증직 승정원 좌승지이다.

묘는 예안의 건지산에 있다.

배위는 증 숙부인 안동권씨이며, 아들은 5형제를 두었다.
이영기의 장자는 이시겸(李時謙, 1610~1691), 자는 익보(益甫)이다.

향년 82세이다.

묘소가 척곡에 있다.

배위는 숙부인 순천김씨이다.

2남은 종가가 늑동에 있으며, 묘는 명호 화장산에 있다.

3남은 종가가 척곡에 있고, 묘는 척곡 사실터에 있다.

4남은 종가가 법전에 있고, 묘소는 재산 웃재에 있다.

5남은 종가가 척곡에 있고, 묘는 법전 소지리에 있다.
이시겸의 장자 이각(李珏, 1629~1712)은 자가 중보(重玉)이다.

향년 84세였다.

묘는 상운면 청현에 있으며, 배위는 우계이씨이고,

후 배위는 영월신씨이다.
이각의 장자는 이인협(李仁浹, 1676~1733)이다.

자는 세이(世而)인데, 묘는 쌍현에 있으며,

배위는 광산김씨, 후 배위는 봉성금씨이다.
이인협의 장자는 이구(李?, 1698~1732)이다.

자는 자방(子方), 묘는 풍정에 있으며, 배위는 남양홍씨이고,

후 배위는 한양조씨이다.

아들이 없어서 아우인 이규의 아들 이종현(李宗顯, 1725~1792)을 양자로 받아들여 후사를 이었다.

이종현은 자가 효승(孝承), 묘는 풍정에 있다.

배위는 남양홍씨이다.

풍정리에 자리를 잡은 전주이씨의 한 계열은 지역에 묻혀 지방사림의 일원으로 살아갔던 사람들이다.


풍정리
- 좁은 골짜기가 모여 이루어진 풍정리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풍정리는 36번 도로의 아래쪽, 서쪽으로 창평, 동쪽으로 척곡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남쪽으로는 봉성·양곡·도천 등이 있다.

나지막한 산들로 둘러싸인 좁은 골짜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갈방산의 남동쪽 산록이 펼쳐져 있는 곳이다.

36번 도로를 타고 봉성 쪽에서 동행하면 다덕 고개를 지나면서 풍정리 입구로 들어선다.
입구 쪽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은 갈방고을이다.

갈뱅이라고도 한다.

갈방산 산록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하여 갈방인데, 1940년대에 다덕광산이 번성할 때 이주해온 사람들이 개척한 마을이다.

갈방마을에서는 남쪽으로 좁은 골짜기가 남행한다.

길도 그 사이를 가르며 봉성 쪽으로 남행한다.
갈방마을의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불미골이다.

전주이씨 마을로, 야동이라고도 불린다.

불미골의 아래쪽으로는 명창골이 있다.

명동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명청동이라고 하였다.

명월청풍에서 온 이름이다.

숙종 때 선비인 이시선이 여기 정자를 짓고 머물렀다.

맑은 연못과 소나무가 있어서 정자이름을 송월재라고 하였다.
명창골에서 길은 3갈래로 갈라진다.

동쪽으로 샛길이 만들어져 척곡 쪽으로 나간다.

그대로 남행하는 길은 삼거리를 지나서 시드물에 이른다.

풍정이라고도 하며, 풍정리의 본동이다.

마을 앞 냇가에 맑은 우물이 있고,

우물 근방에 큰 신나무가 있어서 시드물이라 한다.

우물가 바위에는 풍정이라는 글자가 명각되어 있다.

시드물의 서쪽에 있는 것은 엉고개이다.

아현이라고도 한다.

그 서쪽으로는 좀 떨어진 지점에 봉성역이 있다.

아현은 500년 전에 봉화금씨가 개척하였다.
시드물의 남쪽으로는 가마고개가 있다.

부현(釜峴)이라고도 한다.

고려 때는 부고개촌이었다.

이수라는 선비가 여기 와서 살면서 앞산 봉우리가 가마솥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부현으로 고쳐 불렀다.

전주이씨들이 살고 있다.

여기에는 1940년대에 번창하였던 다덕광산의 광구가 여럿 남아 있다.
시드물의 남동쪽으로는 심수가 있다.

심새라고도 한다.

이 마을에는 원래 우물이 없어서 냇물을 식용하였는데, 질병이 많이 생겼으므로 여기 저기 샘을 찾다가 마을 한구석의 큰 향나무 밑을 파서 샘을 얻었다고 하여 심수라고 한다.
심수의 동남쪽으로는 돌다리·석교가 있다.

옛날 비가 와서 냇물이 불었을 때 홍장군이라는 장사가 큰 돌을 놓아 딛고 건널 수 있게 하였다고 해서 돌다리로 불렸다.

시드물에서 동쪽으로 갈라지는 길을 따라가면 노림이다.

노리미라고도 한다. 여기에는 영모당과 사덕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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