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면 더디고 느린 것들이 그리워진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푸른 가을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번잡한 사무실이 답답하게만 느껴진다. 낙엽이 깔린 길을 마냥 느리게 걸어보고만 싶다. 시간이 늦게 흐르는 곳이 어디 없을까? 가을날, 마음이 약간 뒤숭숭한 분들에게 군산을 추천한다. 세월에서 약간 비껴서 있는 곳. 낡은 담벼락과 후미진 골목과 구불구불한 철길이 있는 곳이다. ◆100년 전 근대 속으로 떠나는 여행 = 군산은 일제강점기 일본인을 위한 도시로 개발됐다.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과 물자를 일본으로 실어 나르는 항구도시의 역할을 했다. 광복 전에는 사람과 물자가 끝없이 몰려들면서 번성했지만 광복 후 쌀의 수송이 끊기면서 자연스럽게 퇴락하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던 도시답게 도시 곳곳에 적산가옥(敵産家屋)이라 불리는 일본식 목조 기와 건물과 근대 서양 양식의 건물들이 많이 남아있다. 군산은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뉘는데 내항을 중심으로 한 구시가지는 대부분 일본인이 거주하던 지역이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월명동까지, 일본인 마을을 조성했는데 지금도 당시의 건물들이 여럿 남아 있다. 군산 개항 100주년 광장을 중심으로 몰려 있는 옛 조선은행과 나가사키 18은행 군산시점 건물, 군산세관 건물 등이다. 옛 조선은행 건물은 3층짜리 건물로 구리 기와를 얹은 모습이 눈에 띈다. 나가사키 18은행은 1907년 지어졌고, 군산세관 건물은 1908년 지어졌다. 군산세관 건물은 독일사람이 설계하고 벨기에에서 수입한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 1990년까지 사용하다 지금은 세관 박물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일본식 사찰 동국사도 눈길을 끈다. 정면 5칸, 측면 5칸, 가파른 단층식 팔작지붕을 이고 있는 이 절은 다다미로 만든 대웅전과 요사채가 함께 있어 우리나라의 사찰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시인 고은이 머리를 깎고 불교에 입문한 사찰이기도 하다. 대웅전 뒤편에는 일본 대나무가 무성한데 원래 이름은 금강에서 따온 금강사였으나 광복 후 동국사로 바꿨다. 대문 기둥에 금강사라 쓰인 문패가 남아 있다. 동국사에서 내려와 신흥동으로 들어서면 일본식 집들이 눈에 띈다. 그중에서도 유명한 곳은 히로쓰 가옥. 군산에서 큰 포목점을 하며 돈을 벌었던 히로쓰가 지은 일본 무사들의 고급주택인 야시키 형식의 대형 목조주택이다.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야쿠자 두목 하야시의 집으로 등장하기도 했고 영화 '타짜'에서 극중 백윤식이 조승우에게 '기술'을 가르치던 집도 바로 이곳이었다. ◆70년대의 정취를 간직한 경안동 철길마을 = 가을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곳은 군산 이마트 건너편에 있는 철길마을이다. 낡은 판자집들이 양편으로 늘어서 있고 그 가운데로 철길이 놓여 있다. 70년대 풍경 그대로다. 철길은 경암사거리에서 시작해 군산경찰서와 구암초등학교를 지나 원스톱 주유소에서 끝난다. 총 연장은 2.5㎞. 이 철길의 이름은 '페이퍼코리아'선. 1944년 4월 4일 개통됐다. 군산시 조촌동에 소재한 신문용지 제조업체 '페이퍼코리아'사의 생산품과 원료를 실어 나르기 위해 만들었다. 철길을 따라 늘어선 집에는 실제로 사람들이 살고 있다. 벽에는 빨래가 걸려 있고 문 밖에는 시든 국화 화분이 놓여 있다. 철길마을은 70년대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철길 옆으로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기차는 하루 평균 두 번 다닌다. 오전 8시 30분~9시 30분, 오전 10시 30분~낮 12시 사이에 마을 사이를 지난다. 때론 이 시간대를 벗어나기도 한다. 어떤 날에는 1회 더 운행한다. 오전에 이어 오후 3시 전후 군산역을 출발했다가 오후 5시 무렵 되돌아 나오기도 한다. 철길마을을 지나는 기차는 5~10량의 컨테이너와 박스 차량을 연결한 디젤기관차다. 시속 10㎞ 정도의 속도로 운행한다. 차단기가 있는 곳과 없는 곳 모두를 합쳐 건널목이 11개나 되고 사람 사는 동네를 지나야 하니 빨리 달리지 못하는 탓이다. 기차가 달리는 동안 역무원 3명이 기차 앞에 타고 호루라기를 불고 고함을 쳐대며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다. 기차가 지나는 사이 주민들은 화분도 들이고 강아지도 집으로 불러들인다. 요즘은 디카족들의 출사 여행지로 인기가 높다. 주말이면 카메라를 멘 사람들이 철길을 담기 위해 몰려든다. 하지만 사진을 찍을 때는 조심스러워야 한다. 주민들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미리 양해를 구하는 것이 좋다. 철길마을에서 임권택 감독이 영화 '천년학'을 찍기도 했다. 해가 저물 무렵 철길을 서성여 보자. 가을 밤은 우물처럼 고요하고 평화롭다. 항구도시의 시끌벅적함과 번잡함은 찾아볼 수 없다. 철길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 새 마음 한편이 고요해 질 것이다. △가는 길=서해안고속도로 동군산나들목으로 나와 26번 국도를 탄다. 군산고속버스터미널과 군산경찰서를 지나면 이마트다. 길을 건너면 철로변 살림집 뒤로 뻗은 페이퍼코리아선 철길이 보인다. [최갑수 여행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