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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22. 묵상글 (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 허무 예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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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22.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허무 예찬
허무 예찬(虛無 禮讚), 영원을 만나게 하는 이 세상 허무
저는 할아버지, 할머니 만나는 것이 좋습니다.
저도 이제 할아버지 돼 가는데도 할아버지, 할머니 만나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보다 젊었을 때, 아니 어렸을 때는 더 좋았습니다.
그것은 저의 더러운 피랄까, 탁한 피를 깨끗하게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옛날 제가 양로원에 잠깐 살았을 때 저의 피는 뜨거웠지만
이 뜨거운 피가 저를 자주 욕심을 부리게 했고 세상을 집착하게 했습니다.
그럴 때 양로원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저의 열정과 뜨거운 피를 정화해줬습니다.
욕심과 집착의 정화제가 할아버지, 할머니였던 것인데 그것처럼
오늘 독서 코헬렛서도 같은 정화제였는데 그것은 오늘 코헬렛서가 말하는
‘허무로다. 허무’가 이 세상 집착을 버리고 영원을 만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허무란 있던 것이 사라져 없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애를 썼는데도 애쓴 보람이 없는 것이고,
나를 위해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
내가 애를 써서 강이 흐르지 않거나 흐르지 않던 것이 흐르게 된다면,
내각 애를 써서 태풍이 순풍이 되고 바람의 방향이 바뀐다면,
내가 애를 써서 해가 뜨지 않거나 서에서 동으로 뜬다면,
그 애쓴 보람이 있으련만 아무런 변화가 없고 아무런 보람이 없습니다.
태양은 뜨고 지지만 떠올랐던 그곳으로 서둘러 간다.
남쪽으로 불다 북쪽으로 도는 바람은 돌고 돌며 가지만 제자리로 되돌아온다.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흘러드는데 바다는 가득 차지 않는다.
애써 말해도 말한 것이 다 헛것이고,
보고 또 봤어도 본 것이 다 못 볼 것들이며
듣고 또 들었어도 성에 차지 않고 마음에 남지 않습니다.
온갖 말로 애써 말하지만 아무도 다 말하지 못한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못한다.
그런데 애쓴 보람이 없어 애쓰며 살아온 것이 다 허무로 돌아가지만
그 허무가 영원을 만나게 합니다.
이 세상의 허무가 저 세상의 영원을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애를 쓴 이 땅이 허무하지 않다면 언제 하늘을 보겠습니까?
허무한 하늘을 왜 봅니까?
이 땅이 내게 허무하지 않다면 허무한 하늘을 보겠습니까?
그런데 허무가 영원을 잉태하고 있고,
허무에서 모든 것이 나온 것입니다.
허무가 곧 태허太虛이고 영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허무할 때마다 영원을 잉태한 허무한 하늘을 보게 하는데
그런데 오늘 그리고 저물어가는 이즈음
허무가 영원만 만나게 하지 않고
영원한 분까지 만나게 하면 더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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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22.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루카 9,7)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루카 9,7)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들뿐만이 아니라, 바로 앞 장면에서 보여준 제자들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될 것입니다. 이토록, 그분의 제자들마저 그 권능을 행하는 것을 전해들은 헤로데는 몹시 당황했던 것입니다.
“당황했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상태’로 ‘몹시 불안한 상태’에 빠진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헤로데의 이 혼란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본문에 따르면, 그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은 세 가지였습니다. ‘죽은 요한이 살아났다는 것’과 ‘엘리야가 나타났다’는 것과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헤로데는 자신이 목을 벤 요한이라고 단정합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이 사람은 누구인가?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였다.”(루카 9,9)
그가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한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의혹, 혹은 소문을 확인하거나 그분을 따르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왜곡된 마음으로 업신여기고 조롱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습니다. 이를 루카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해줍니다.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루카 23,11-12)
사실, 우리도 예수님께서 하신 “이 모든 일”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뿐만이 아니라, 그분의 제자들이 행한 권능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한다면, 우리도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상태’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몹시 불안할 때, 얼른 주님께 의탁하고 신뢰를 회복해야 할 일입니다. 오히려 온갖 혼란과 의혹, 조바심과 노파심, 불안과 두려움에 쌓이는 유혹의 순간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오히려 우리를 더 간곡히 부르시고 계실 때임을 알아차려야 할 일입니다.
오늘 저는 이러한 고백과 기도를 드려봅니다.
당신은 제가 당신을 찾기도 전부터 저를 찾으시며 저를 쫄쫄 따라다니시는 저의 추종자입니다.
제가 당신을 믿지 못해도 저를 믿으시는 저의 신자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제 곁에 있어주시며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아픔을 먼저 보시는 저의 벗입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못해도 저를 사랑하시는 당신은 저의 연인입니다.
말하기도 전에 저의 마음을 훤히 아시는 당신은 저의 스승이십니다.
끝까지 저를 놓지 않으시고 소중히 여기시는 당신은 저의 아버지이십니다.
하오니, 주님! 저는 당신의 사랑받는 새끼입니다.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당신의 소중한 존재, 당신의 것, 당신의 사랑입니다. 어쩔 수 없는 당신의 사랑, 그 놀라움, 사랑이신 당신을 찬미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9)
주님!
당신은 제가 당신을 찾기도 전부터 저를 찾으시며 저를 쫄쫄 따라다니시는 저의 추종자입니다.
제가 당신을 믿지 못해도 저를 믿으시는 저의 신자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제 곁에 있어주시며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아픔을 먼저 보시는 저의 벗입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못해도 저를 사랑하시는 당신은 저의 연인입니다.
말하기도 전에 저의 마음을 훤히 아시는 당신은 저의 스승이십니다.
끝까지 저를 놓지 않으시고 소중히 여기시는 당신은 저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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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22.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용서를 통해 자유를 회복하라
가끔 꿈 얘기를 듣습니다. 좋은 꿈을 꾸어서 복권을 샀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 무서운 악몽에 시달려 밤잠을 설치고 그 꿈 때문에 마음이 흔들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꿈은 꿈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꿈이고 아무리 험해도 꿈입니다. 그러므로 꿈은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좋게 생각하고 기뻐하고 또 예언의 성격을 지녔다면 철저히 준비하면 됩니다. 꿈에 끌려다녀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꿈대로 안 좋은 일이 생기게 됩니다. 좋지 않은 꿈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꿈을 다스리지 못하고 그 꿈에 매여 집착하기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을 꿈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물론 때로는 죄를 짓고 그 죄책감 때문에 꿈을 꾸는 사람도 있습니다. 좋지 않은 일을 행하여서 악몽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안 좋은 일이 생기면 하느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보다 본인 스스로 불안한 마음과 죄책감으로 몸을 괴롭히기 때문에 상황이 나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그 원인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저지른 과오나 잘못이 있다면 그 잘못에 대해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매달아 못 박은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용서를 넘어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허물에 대해서도 언제나 용서해 주시고 얽매인 것을 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죄의 고백을 통해 용서의 은총을 입어야 합니다. 자유를 회복해야 합니다. 죄의 종으로 익숙해져서 그냥 그대로 편안함을 즐겨서는 안 됩니다.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 대한 여러 소문을 듣고 몹시 당황하였습니다.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하였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하면서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였습니다. 헤로데가 불안해하고 당황한 것은 당연합니다. 사람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소유한 왕이라 할지라도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죗값을 스스로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존재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에 예수님이 무서워진 것입니다. 사랑을 전하러 오신 분을 심판관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심판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잘못한 것이 부끄러워서 그렇습니다." 내면에 굳은 심지가 있는 사람은 결코, 당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뻐합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1요한 1,9). 그리고 우리의 하느님은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에제33,11). 혹시라도 마음의 불안이 있다면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고 주님의 품 안에서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용서하시는데 더디지 않습니다. 우리가 머뭇거릴 뿐입니다. 혹 두렵습니까? 거짓을 벗어 버리고 진리를 추구하십시오! 용서하시는 주님과의 깊은 만남을 통해 자유를 얻기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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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득형씨는 권위와 권력을 설명합니다.
권위는
1)인간적인 매력과 인격에 매어지는 것
2)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따라옴
3)자리에 관계없이 평가가 높아감
4)죽은 뒤에도 없어지지 않음
5)지도자 선택의 첫째가는 기준이 됨
권력은
1)직제상 지위(자리)에 주어지는 것
2)사람들을 덮어놓고 복종시킴
3)자리가 높아질수록 더 강해짐
4)권위가 없는 사람일수록 더 휘두름
5)그 자리를 떠나는 동시에 없어져버림
권위와 권력은 분명히 다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만나는 헤로데는 권력을 잡았지만 권위는 없었습니다. 헤로데는 권력을 가지고도 불안해하였습니다. 권력을 이용하여 많은 사람에게 폭력을 사용했고 특히 당시 유다인들이 최고의 예언자로 알고 따르던 세례자 요한을 죽였는데 그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소리도 들렸고 여러 소문이 있었기에 불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어도 ‘도둑이 제 발이 저린다.’고, “때린 놈은 발을 오그리고 자도 맞은 놈은 발을 펴고 잔다’고 합니다. 자기가 한 짓을 알기에 늘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속적인 권력이 아니라 권위를 지니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혹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지배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권력의 마음입니다. ‘돈이면 다 된다’는 식의 마음으로 이웃에게 재물이나 지위를 가지고 대접 받고자한다면 그에게서 권위는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권위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우리는 그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로마13,1-2). 주님께서 생명을 주관하는 권위(루가12,5)를 가지셨고, 말씀대로 이루시는 힘을 지니셨습니다(요한5,39). 또한, 가르침대로 행하심으로써 권위를 지키셨습니다.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각자의 권위를 키워야 하겠습니다(2고린10,8).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자녀는 자녀로서, 아내는 아내로 남편은 남편으로서의 위치가 있습니다. 각자의 위치에 걸맞은 삶을 살아감으로써 권위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직장이든 가정에서든 각기 권위가 살아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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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22.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강남 교수의 ‘세계 종교 둘러보기’를 읽었습니다. 종교는 으뜸가는 가르침이고, 엉킨 실타래를 푸는 것처럼 인생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종교가 있지만 대부분의 종교는 3가지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궁극적인 실재에 대한 체험이 있습니다. 모세는 떨기나무 아래에서 하느님을 체험했습니다. 엘리야는 침묵의 소리에서 하느님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하느님을 체험했습니다. 부처님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마호메트는 동굴에서 하느님을 체험했습니다. 이와 같은 체험은 신비하고, 비이성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이와 같은 궁극적인 실재에 대한 체험에서 시작됩니다. 체험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본인의 노력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절대자의 계시로 인해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행동의 변화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로 나갔습니다. 엘리야는 바알의 거짓 예언자들을 물리쳤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발하였고,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였습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전하였습니다. 마호메트는 이슬람 왕국을 만들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은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에 행동이 없다면, 실천이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세 번째는 교리와 제도입니다. 종교는 교리와 제도를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4가지의 기본 교리를 이야기합니다. ‘천주존재, 강생구속, 삼위일체, 상선벌악’입니다. 교회는 7가지 성사를 이야기합니다. ‘세례, 견진, 성체, 병자, 고백, 혼인, 신품’성사입니다. 교회는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에는 직분에 따라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있습니다. 종교는 개인의 체험, 행동의 변화, 사회의 변화를 추구합니다.
오늘 우리는 헤로데의 가슴과 예수님의 가슴을 만납니다. 헤로데의 가슴은 예수님의 가슴을 알 수 없습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가슴에서 멀리 있었기 때문입니다. 권력에 취한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욕망의 노예가 된 사람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부족함을 모르는 사람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를 보아도 많은 시련과 아픔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가슴을 가까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세상의 뜻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욕망, 재물, 권력이라는 바벨탑을 쌓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욕심 때문에, 이기심 때문에, 원망 때문에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아픔을 주고, 상처를 주었습니다. ‘이념, 민족, 세대, 지역’이라는 갈등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자연재해로 인한 난민도 있지만, 우리의 폭력과 전쟁 때문에 생겨난 난민이 더 많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의 뜻대로 사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물질적인 부와 권력은 지녔지만 ‘미덕’이 없었던 헤로데입니다. 그는 화려한 궁궐에 살았지만, 인생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남을 위한 빵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대로 사시는 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서 빵을 많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질서와 세상의 편견을 깨끗하게 부숴버렸고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였습니다. 그분은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도 골고타의 언덕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도 행복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욕심과 우리의 이기심만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세상은 헛되고 헛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충실히 살아간다면 세상은 단 10분을 살았어도 의미 있고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은 그 삶의 길이로 측정할 수 있겠지만, 인생은 그 삶의 가치로도 측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갈망이 있는 사람과 가슴을 가까이하십니다. 예수님은 힘과 욕망과 재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 걸 찾는 사람의 가슴은 예수님의 가슴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곁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은 지금 굶주린 사람에게서도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지금 헐벗은 사람에게서도 예수님의 향기를 느낍니다. 지금 아픈 사람에게서 예수님의 아픔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가슴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슴은 해야 할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 느낄 수 있습니다. 헤로데의 가슴은 하고 싶은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 느낄 것 같습니다.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흘러드는데 바다는 가득 차지 않는다.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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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22.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실험자가 지도를 들고 길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지도를 보여주며 길을 알려 달라고 부탁합니다. 행인은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큰 나무판을 든 사람들이 우르르 지나가고, 동시에 지도를 든 실험자를 비슷하게 생긴 사람과 바꿔치기합니다. 행인은 과연 실험자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아챘을까요?
여러 차례 반복했지만 대부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성별이 바뀌었음에도 알아채지 못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주의 깊게 변화를 보지 않아서일까요?
실제로 우리 뇌는 변화를 생각보다 섬세하게 감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나 봅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가 관심이 없는 것은 제대로 보지 못한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기본적으로 인지능력의 불완전함을 가지고 있는 인간입니다. 특히 착각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겸손은 말만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계속된 성찰과 묵상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나의 실수를 줄이고 다른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여백을 만들게 됩니다.
헤로데 영주가 등장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는 몹시 당황하게 되지요. 왜냐하면 지은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헤로디아 딸의 청에 의해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 죽였습니다. 사실 은근히 제거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헤로데 영주에게 세례자 요한은 사사건건 자기 일에 반대하는 귀찮은 방해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라는 생각보다는 약속을 지킨다고 생각하고서 헤로디아 딸의 춤값으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 죽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민중 속에서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죽었던 요한이 부활하여 놀라운 기적을 행하고 있다느니, 엘리야가 다시 살아났다느니 하는 소문이었습니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자기가 지은 죄를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예수님을 자기가 죽인 요한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려고 했지만, 오히려 마음의 상태는 맨 밑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가장 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이고 싶었지만, 가장 힘없는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대로 판단하고 결정을 내린 것이라 생각했지만, 가장 잘못된 판단이었습니다.
자기 인지능력을 대단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겸손을 통해 우리는 제대로 된 판단과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삶의 후회를 줄여나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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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점만 찾지 말고, 해결책을 찾아라(헨리 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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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22.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은 하느님뿐이다-
“주님, 당신은 대대로
저희 안식처가 되셨나이다.
새벽부터 넘치도록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한생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시편90,1;14)
또 강론 제목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선택했습니다. 부제로는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은 하느님뿐이다’가 저절로 생각났습니다. 하느님은 빛입니다. 그러니 허무의 어둠을 몰아내는 것은 빛이신 하느님뿐입니다. 마치 밤의 어둠을 몰아내며 떠오르는 태양과 같은 하느님입니다.
삶이 선택이듯 빛과 어둠도 선택입니다. 빛이신 하느님을 선택하느냐. 어둠인 허무를 선택하느냐는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창밖 아래 진흙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창밖 하늘 위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묵상중 감히 9월9일자 제1독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제 말로 바꾸어 읽어 봅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평생 매일 강론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강론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내가 자유의사로 이 일을 한다면 나는 삯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한다면 나에게 직무로 맡겨진 것입니다.”(1코린9,16-17)
곳곳에서 원하고 요구하는 분들이 많기에 살아 있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강론을 써서 나누는 것이 간절한 소원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강론을 쓰는 행위는 마치 새벽 일찍 허무의 허공에 말씀의 태양을 떠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생명의 빛, 사랑의 빛을 상징하는 말씀의 태양이 허무의 어둠을 환히 밝히길 소망하며 하늘에 태양을 쏘아 올리듯 날마다 강론 태양을 허공의 어둠으로 쏘아 올리는 것입니다. 2020.12.1.일 제 집무실 게시판에 써붙인 글이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습니다.
“날마다의 강론은 내 사랑이자 운명이요, 하루의 양식이자 하루 삶의 의미요, 중심이자 방향이요, 유언이자 위로와 치유의 구원이다.”
역시 살기 위해, 살아 있음의 확인을 위해 쓰는 강론입니다. 날씨가 썰렁한 가을로 접어들면 저절로 본능적으로 빨라진 퇴근 걸음들은 대부분 따뜻한 집의 보금자리 품을 향합니다. 지친 영혼들의 위로처와 안식처가 되는 가정은 마치 주님의 집과 같습니다. 또 많은 이들이 가을을 맞이하면, 특히 나뭇잎들 지는 늦가을 만추晩秋가 되면 삶의 허무감에 영혼의 몸살을 앓기도 합니다.
우리 가톨릭교회의 전례를 통한 섬세한 배려가 참 놀랍고 고맙습니다. 가을철 삶의 허무감에 빠지지 않도록 허무의 계절을 기도의 계절로 바꿔줍니다. 9월 순교자 성월, 10월 묵주기도 성월, 11월 위령성월, 그리고 곧장 이어지는 대림의 기쁨에 허무가 침투할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허무의 어둠을 환희의 빛으로 바꿔주는 기도의 은총입니다.
어찌보면 삶의 허무는 하느님을 찾으라는, 기도하라는 신호로 하느님의 초대장일수 있습니다. 영혼의 질병과도 같은 삶의 허무와 더불어 삶의 무지, 무의미에 대한 답은 하느님 중심의 삶 하나뿐임을 깨닫습니다. 삶의 허무와 무지, 무의미의 어둠을 말끔히 자취없이 몰아내는 것은 빛이신 그리스도, 하느님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한결같은 기도로 빛이신 주님을 닮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삶의 허무, 무지, 무의미의 어둠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가톨릭 전례중 매일미사 말씀의 배치도 참 절묘합니다. 말씀을 골고루 균형있고 조화롭게 배치해 줌으로 영적 편식이나 과식을 막아 줍니다. 오늘 제1독서 코헬렛을 보니 참 반가웠습니다. 종파를 초월, 믿는 이건 믿지 않는 이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공감하는 지혜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명저를 쓴 토마스 아 켐피스는 역설적으로 코헬렛을 최고의 지혜라 찬탄했습니다. 바로 허무가 지혜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찾게 하고, 하느님을 섬기는 삶에서 허무에 대한 답을 찾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코헬렛 주제를 나타내는 2절 이후 내용도 가슴 서늘한 충격입니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성서는 달콤하고 향기로운 연인의 사랑을 소개하는 아가서가 있는가 하면 이런 극단의 인생 허무를 노래한 코헬렛도 있습니다. 바로 이 아가서가 코헬렛 뒤에 옵니다. 가을 인생에 접어든 이들의 필독서가 코헬렛이요, 이어 생명과 사랑의 빛이신 하느님을 만나 위로와 치유의 구원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허무’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은 본디, ‘입깁’ ‘실바람’을 뜻하는데, 추상적으로는 ‘허무’ ‘허망’ ‘무상’ ‘덧없음’ ‘헛됨’의 의미를 지닙니다. ‘우상’을 가리키는 중요한 말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한 이 말은 구약 성경 전체에서 73번 사용되는 데 코헬렛에서 38번 나옵니다. 이책의 중심 주제인 이 말은 맺음말 첫머리에서도 되풀이 됩니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1,2;12,8)
삶은 엄중한 선택입니다. 허무를 선택하면 필시 삶의 본질은 허무라 할 것이며 어둠으로부터 구원의 해방은 요원할 것입니다. 반면 빛이자 생명이자 사랑이신 하느님을 선택하면 삶의 본질은 허무가 아니라 사랑이라 할 것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선택함은 너무가 당연하고 자명합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기에 삶의 본질은 허무가 아니라 사랑이 맞는 것입니다. 하느님 선택에 이어 훈련이요 습관화입니다. 하느님을 선택하여 부단히 하느님과의 관계를 깊이하기 위해 우리는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규칙적으로 공동전례기도훈련에 매진함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견고히 합니다. 그리하여 삶의 허무나 무지, 무의미가 도저히 침투할 수 없게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짧은 단락의 루카복음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세례자 요한을 죽인 줏대없고 우유부단한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안절부절, 갈팡질팡, 두려움과 불안에 떱니다. 그대로 삶의 중심이 없음을 반영합니다. 하느님 중심이 없거나 잃어버렸을 때 누구나의 보편적 감정이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이런 이들은 십중팔구 허무와 무지, 무의미의 희생물이 되기 마련입니다. 도저히 삶의 허무와 무지, 무의미의 늪에서,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래서 하느님의 선택과 훈련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합니다. 하느님 중심에 깊이 믿음의 뿌리 내려야 비로소 안정과 평화입니다. 헤로데 영주의 반응을 보십시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그러면서 그는 예수를 만나 보려고 하였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흡사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화두같습니다. 바로 우리삶의 허무와 무지, 무의미에 대한 유일한 답은, 또 언제나 선택하여 일치의 삶을 살아야 할 분은, 생명과 사랑의 빛이신 하느님이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뿐이십니다. 참 어리석게도 늦게서야 빛이신 주님을 찾기 시작한 헤로데입니다.
바로 날마다 거행하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삶의 허무와 무지, 무의미의 어둠을 몰아내고, 주님의 생명과 사랑의 빛 안에서 ‘텅 빈 허무’가 아닌 ‘텅 빈 충만’을 살게 하십니다.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시편90,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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