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이호성 국제기구 개발담당
“바비큐 고민 끝! 고기장인이 오신 답니다.” 박수, 웃음, 엄지척 이모티콘들.
노동절 주말, 친구가 야외 바비큐 모임에 초대하며 보내준 단톡방 메시지 내용이다.
여름의 끝자락을 기념하며 회사동료 가족들이 점심을 포함한 등산을 기획했는데,
나도 뒤늦게 초대를 받았다.
전날 출장준비로 늦게 잠자리에 들어 행사 당일 조금 늦게 공원에 등장하자
친구들이 ‘고기장인’ ‘바비큐 대가’가 왔다면서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바비큐를 할 때면 장 보는 것부터 고기를 굽고 써는 것까지 모든 것을 혼자서 했는데,
이날은 칼과 도마만 들고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했다.
이미 고기가 상당히 구워져 있어 나는 바로 장비를 꺼내 고기를 썰었다.
“이건 립아이(꽃등심)네, 이 부위는 기름이 많이 나와서
두께를 반으로 줄여 구웠으면 겉을 덜 태우고
속도 더 잘 익었을 텐데” -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스테이크를 익힘 정도에 따라 부위별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아이들 것은 완전히 익혀야 할 것 같다는 주문이 있어,
덜 익은 고기를 적당한 크기로 썰어서 더 구워 달라고
부탁했다.
오전 등반으로 허기가 심했는지 고기를 써는 나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모아졌다.
채끝살을 썰면서 “오늘 따라 뉴욕 스트립이 더욱 맨해턴 섬을 닮은 것 같지 않나?”라고
이야기하면 주변에서 “동서 방향의 스트리트는 났으니, 이제 가운데 5번 애비뉴를
만들어야 겠다”고 답을 하며 즐겁게 스테이크를 나누어 먹었다.
모두 어느 정도 먹고 난 시점에 구울 거리가 남아 그릴로 돌아가
소시지, 아스파라거스 등을 구우면서 문득 내가 어쩌다 ‘고기장인’이 되었을까 회상해 보았다.
6년 전 워싱턴 DC로 이사와 아는 사람이 없을 때, 비슷한 시점에 일을 시작한
회사 동료들을 아파트로 초대해 바비큐를 했던 것이 시발점이었다.
내가 바비큐에 5명을 초대하면, 초대받은 사람들이 한 명씩을 더 데려와
10명이 될 정도로 바비큐는 처음부터 인기가 높았다.
“회사 업무는 부업이고, 본업은 바비큐 아니냐”는 농담을 한 동안 자주 들었을 정도다.
고기가 먹고 싶은데 혼자 스테이크를 구워 먹기 어렵고,
새로운 친구들도 사귈 겸 시작한 것이 바비큐였다.
보통 여름날 퇴근 후 바비큐를 했는데,
모든 걸 혼자 준비하자니 신경 쓸 것도 많고
여러모로 품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이었다.
그럼에도 바비큐가 단발성 이벤트로 끝나지 않고,
나중에는 지인의 집에서 ‘출장 바비큐’를
여러 번 할 정도로 한 때 바비큐에 빠져 살았다.
왜 그랬을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듯이
내가 주최한 바비큐를 다녀간 사람들의 칭찬이
나로 하여금 꾸준히 바비큐 모임을 하게한 원동력이 되었던 것 같다.
지인들의 바비큐 칭찬은 여러가지 일로 심신이 지쳐 있던 나를 재충전 시켜 주었다.
내가 아무리 지치고 힘들더라도 칭찬에 인색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내일도 칼과 도마를 들고
‘워싱턴 고기장인’의 명성에 흠이 가지 않도록
정성껏 사람들을 위해 고기를 굽고 썰어주고 싶다.
<성이호성 국제기구 개발담당>
미주 한국일보
2019-09-09 (월) 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