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산 김대거의 출가>
대산 김대거는 석숭(石崇.249~~300)과 도주공(陶朱公. 범려.기원전 517년 ~ ?)과 같은 부자가 되거나 이태백(李太白. 701~762)이나 도연명(陶淵明. 365~427)과 같은 글을 잘 쓰는 문장가가 되어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김대거는 17세에 출가시에 대종사를 뵈오니,
대종사는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큰 부자나 영웅호걸이 되어 보기도 하고, 풍류객으로 멋있게 살다 가는 것도 물론 좋은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도인은 땀이 많이 흘리고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이 세상의 주인은 영웅호걸이나 풍류객이 아니라 큰 도인 되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펴는 사람이다. 지금이 어느 때냐, 이처럼 세상이 어지러운 때일수록 천하를 구제할 큰 도인이 필요한 법이다. 이곳을 잘 보아라. 여기가 바로 영산회상을 다시 건설할 책임을 지고 불보살들이 모인 곳이다. 대거도 진정으로 세상을 한번 잘 살펴보고 싶다면 저 사람들처럼 새회상 창립에 큰 인물이 되어야 할 것이다”하였다.
김대거는 삼산 김기천에게 『명심보감』 『음부경』을 배우고, 주산 송도성에게 『수심결』 『논어』를 배우고, 정산종사에게서 『도덕경』배웠다. 서대원에게는 불교를, 그리고 원불교의 『보경육대요령』 『취지규약서』를 연마하였다.
한번은 중국 북경대학 출신인 당숙 김경태와, 일본에서 유학중인 종형 등이 김대거를 데리려 총부로 왔다. 그들이 와서 보니 김대거는 목욕탕 책임자로 물도 긷고 불도 때고 변소청소도 하고 남의 머리도 깎아주고 그러고 있었다. 기가 막혔다.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느냐? 불법연구회 공부를 한다더니 고작 이런 일을 하려고 왔느냐?”꾸짖고 소태산 종법사에게 가서는
“남의 집 귀한 아들을 데려다 공부는 안 시키고 머슴꾼처럼 부려 먹으니 이런 법이 어디 있소?”하고 따졌다.
소태산은 굳이 변명하지 않고 “여기서는 그런일을 시키는 게 공부이니 어쩔 수 없소, 본인이 가겠다면 데리고 가시오”했다.
그러나 정작 김대거는 그들이 나이나 촌수로는 집안 어른들이지만 정신 연령은 아기라고 판단하고, 어서들 가시라고 달래어 쫒아 보냈다.
“내가 어쩌다가 대종사님 제자되어 이렇게 전무출신 했는가하는 생각이 들며 영생의 일이 이 일이고 내 집이 여기구나하는 결정이 되었다. 그 후에는 나를 죽인다 하여도, 세계를 다 준다하여도 동요함이 없게 되었다.”
https://namu.wiki/w/%EA%B9%80%EB%8C%80%EA%B1%B0
[정의] 전라북도 익산 지역에 있는 원불교 중앙총부 종법사를 역임한 종교 지도자.
[개설] 김대거(金大擧)[1914~1998]의 본명은 김영호(金榮灝)이며 법호는 대산(大山), 법명이 대거(大擧)이다. 아버지는 김인오(金仁悟)이고, 어머니는 안경신(安敬信)이다. 1962년부터 1994년까지 원불교 종법사를 역임하였다.
[활동 사항] 김대거는 1914년 4월 11일 전라북도 진안군 성수면에서 태어났다. 열한 살 때 할머니의 인도로 원불교에 귀의하였고, 1929년 출가하였다. 1937년부터 원불교 중앙총부 서무부장, 교무부장, 교감 등을 지냈다. 1946년 원불교 중앙총부 서울출장소장을 역임하였고, 1952년 원불교 최상위 교화단인 수위단 중앙에 피선되고 교정원장에 임명되었다. 1962년 2월 23일 정산종사(鼎山宗師)의 뒤를 이어 종법사가 되었다. 이후 1994년까지 원불교 최고 지도자로서 원불교 교단을 이끌었다. 김대거는 종법사 재임 기간 동안 교서 편찬을 비롯하여 종교연합운동과 해외 교화, 훈련 강화 등 원불교의 교세 확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1994년 11월에는 종법사직을 스스로 사임하고 투표로 선출된 좌산 이광정 종법사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선례를 남김으로써 원불교 최고 지도자의 임기제를 정착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1998년 9월 17일 “진리는 하나, 세계도 하나, 인류는 한가족, 세상은 한 일터, 개척하자 하나의 세계”를 게송으로 남기고 사망하였다. [사상과 저술] 김대거의 저서로는 『교리실천도해』, 『정전대의』 등이 있다. 또한 『원불교 교전』, 『불조요경』, 『예전』, 『정산종사법어』, 『원불교 교사』, 『원불교전서』 등 원불교 대중화를 위한 교서 발간을 주도하였다. 소태산 대종사의 일원주의와 정산종사의 삼동윤리를 계승한 김대거는 다가올 세계사의 변화를 예견하고 민족의 앞날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1962년 10월 『원광』에 발표한 「신생활운동요강」은 새마을운동의 이념적 토대가 되었으며, 사회 혼란의 해결책으로는 대참회(大懺悔)·대해원(大解寃)·대사면(大赦免)·대정진(大精進)·대보은(大報恩)·대진급(大進級)의 법문을 정치인들에게 강조하였다. 또한 통일 문제에도 관심을 보여 용공(容共)·화공(和共)·구공(救共) 사상을 제창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김대거의 사상은 원불교가 급변하는 정세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길을 여는 데 기여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묘소] 원불교 중앙총부의 대산종사성탑에 김대거의 유골을 안치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원불교 3대 종법사를 지낸 대산 김대거(84)종사가 1998년 9월 17일 전북 익산 원불교 중앙총부에서 열반했다. 1914년 전북 진안군에서 출생한 대산 종사는 원불교 교세를 확장하고 운영을 체계화하여 오늘날의 원불교로 만든 종교지도자다.
본명은 영호로 11살 때인 1924년 원불교 교조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에 귀의, 시봉으로서 교리를 연마하다가 1962년 정산 송규 종사에 이어 교단운영을 맡았다. 이후 교화 교육 자선의 3대사업을 더욱 발전시켰다. 천석꾼의 아들로 한시를 잘 지었던 대산 종사는 1946년 해방 직후 서울출장소장 때 이승만, 김구 등과 교분을 쌓기도 했다.
1995년까지 33년 동안 국내외에 수많은 원불교 교당을 개설하고, 교도들을 훈련시켰다. 대산 종사는 원불교를 13개 교구 5백여 교당에 신자수 1백30만명의 국내 4대 교단으로 교세를 확장시켰으며, 특히 심전(心田)개발, 인류공동시장 개척, 종교연합운동에 앞장섰다. 교리해설서 `정전대의`를 저술하기도 했으며, "진리는 하나, 세계도 하나, 인류는 한 가족, 세계는 한 일터, 개척하자 하나의 세계"라는 열반송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