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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6. 9. 오순절 후 세 번째 주일
예배로 부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 이니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미 4:2b)
예배기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말씀하신 주님! 그 사랑의 초청에 응답하여 저희가 주님께로 나왔나이다. 예배하는 이 시간, 우리가 안고 온 모든 걱정과 근심과 인생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하옵소서.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며 영과 진리로 예배하오니 기쁘게 받아주옵소서. 우리의 몸과 마음이 심히도 지치고 피곤하오니, 하늘의 신령한 양식으로 채워주옵소서.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충만하게 받아서 우리 영혼이 하늘로 솟구쳐 날아오르는 독수리처럼 새 힘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옵나이다. 아멘
이 주일의 찬송
다 함께 주를 경배하세(12장) / 저 하늘 거룩하신 주여(194장) / 예수 나를 오라 하네(324장) 어지러운 세상 중에(340장) / 하늘 보좌 떠나서(437장) / 내 주 하나님(469장)
고백의 기도
우주의 만물을 창조하시고 세계 열방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주님께서는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사랑하셔서 유구한 역사 속에 동행하시며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겼을 때에는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해방을 허락해 주셨으며, 전쟁으로 온 땅이 황폐케 되었을 때에도 이 민족을 버리지 않고 경제의 회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국위가 선양되고 살만하여지니 이 백성들이 하나님께 등을 돌리려 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로운 삶을 저버리고 있으며,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비방하며 죄악이 관영한 시대를 열어 가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온혜를 망각하고 교만해지고 있는 이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보호하시는 팔을 거두지 마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고백의 기도를 드립니다 아멘.
사함의 확신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제목; 이스라엘에 평화가 있었더라.
본문: 사무엘상 7:12-14
☞ 마음 문을 열고
평화(平和)란 말의 한자를 보면 ‘화’자는 ‘벼 화(禾)’ 변에 ‘입 구(口)’를 씁니다. 그러니까 “입에 벼가 있으면 평화”라는 말입니다. 입에 쌀이 있어야 평화롭습니다. 평화(平和)는 모두가 균등하게(平)쌀(禾)을 입(口)으로 먹는 것입니다.
반대로 암(癌)은 한 사람이 세 입(品)으로 산(山)더미처럼 음식을 먹을 때 발생하는 불평등의 병입니다. 가진 것을 나누며 사는 사람이 피스메이커입니다. 움켜쥐는 사람은 언제나 트러블메이커가 됩니다. 세상에는 자기가 가진 것 외에 다른 것을 탐하니 항상 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봅니다.
평화는 세상의 힘으로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며 성도의 본분인 감사와 순종을 통하여 이 땅에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이스라엘 땅에 평화가 어떻게 찾아왔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에벤에셀과 에벤에셀
사자성어 ‘칠전팔기’는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째 또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실패를 거듭해도 굴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성경에도 칠전팔기의 정신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이 바로 그렇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있을 때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승리한 후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의미를 담아 그곳의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지었습니다(12절).
그런데 본래 에벤에셀은 다른 곳의 지명이었습니다. 사무엘상 4장에는 또 다른 에벤에셀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진을 쳤던 곳입니다. 블레셋은 건너편인 아벡에 진을 쳤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전쟁에서 블레셋 군사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며 패했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인 홉니, 비느하스와 함께 수많은 군사를 잃었고, 생명과도 같은 언약궤를 빼앗겼으며, 블레셋에 완전히 예속되는 수치를 당했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패전의 장소가 바로 에벤에셀이었습니다. 패전 장소인 에벤에셀을 모를 리 없는 사무엘이 블레셋과 다시 붙어 승리한 전쟁 장소에 패전 장소의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에벤에셀(삼상 4장)과 에벤에셀(삼상 7장), 같은 이름 다른 장소입니다.
앞의 에벤에셀은 패전한 곳이고, 뒤의 에벤에셀은 승리한 곳입니다. 전자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입니다. 실수, 실패, 과오, 상처, 아픔으로 얼룩진 시간입니다. 후자는 포기하지 않고 재도전해 승리를 이룬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했다는 삶의 간증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에는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이스라엘에 평화가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었다는 의미입니다.
지금처럼 평화롭고 평범한 일상이 그리웠던 때가 없는 것 같습니다. 전 세계는 평화를 잃어버리고 혼란한 가운데 2024년 상반기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은 늘어간다~.” 1980년대 한국교회에서 널리 불리던 복음성가의 가사입니다.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세계에는 평화의 소식보다는 전쟁의 소문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 이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무장단체 하마스 간 전쟁도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사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대피 경고를 내렸습니다. 문제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피란갈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은 이집트 접경지역인 시내 광야 쪽이라는 것입니다.
이집트가 이들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더욱이 광야요 사막 지역이라 대피하기에 적절하지 못한 곳입니다. 그래서 피란을 가지 않고 현재의 거처에서 이스라엘 공격을 피해 보겠다는 이들도 적지 않나 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셨던 약속의 땅과 그 땅을 향해 가는 통로였던 팔레스타인, 시내 광야의 북단에서 들려오는 전쟁 소식에 가슴이 아픕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북한은 남쪽을 향해 오물 풍선을 몇 차례 보냄으로 남북관계는 경색 국면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우리는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았습니다. 해마다 6월이 되면 교회는 나라와 민족의 평화를 위해 기도합니다.
올해는 더 더욱 간절하게 나라와 민족의 안녕을 위해 기도해야겠습니다. 일본 식민지와 한국전쟁 같은 과거의 아픔을 털어내고, 우리 국민과 인류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평화와 안녕을 위해 기도해야겠습니다.
특히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가 회복 유지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허물과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고, 그러자 평화가 사라졌던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실패가 오늘날에도 재현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죄와 허물을 벗고, 아픔을 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경험함으로 남은 시간들을 살아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무엘은 왜 기쁨과 영광과 평화의 장소에 과거의 슬픔과 모욕과 불안을 기억나게 하는 이름을 붙였을까요? 사무엘은 과거를 상기시킴으로써 오히려 과거를 잊고 새로운 삶을 준비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당한 수치를 씻으셨음을 나타내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칠전팔기 정신을 가졌던 것입니다.
과거의 실수와 실패, 아픔에 머물지 않고 다시 일어나 에벤에셀의 고백을 드렸을 때 이스라엘에 평화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 삶에도 다시 평화가 찾아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하나님께 온전한 제사를 드리라
사무엘의 명령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미스바에 모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백성들은 미스바에 모여 금식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블레셋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블레셋의 전쟁 준비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그들의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지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듣고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여”(삼상 7:7).
그런데 이 장면은 하나님을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여호와를 찬양하고 기도하려고 모였는데, 전쟁의 소식을 들었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데 어려운 일이 생기고, 고통스러운 문제를 만납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사무엘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삼상 7:9).
사무엘은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온전한’은 ‘전체’ 혹은 ‘완전한’이라는 의미인데, 제사와 관련된 단어와 함께 사용될 때는 제사를 드린 사람들의 식사를 위한 여분이 전혀 남지 않은 완전한 소멸을 나타냅니다(참조, 레 6:22-23).
이는 제사의 절차나 의식적인 면이라기보다는 제사 드리는 사람의 마음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온전한 제사를 드릴 때 일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삼상 7:10).
앞선 4장에서의 블레셋 전투, 즉 패전했던 에벤에셀 전투에는 이러한 제사에 대한 언급이 없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뜻을 묻지도 않은 채 무작정 전쟁에 나섰습니다. 결과는 패배였습니다.
온전한 제사를 드릴 때 두 번째 에벤에셀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 승리의 장소인 에벤에셀의 은혜를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즉시 감사를 고백하라
사무엘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 이 승리가 여호와께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이를 후대에 전하기 위한 증표로 돌을 취해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모든 승리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음을 인정하고 선포하는 감사의 고백입니다.
그렇게 고백한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은 전쟁의 승리뿐 아니라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지켜주셨고, 빼앗겼던 성읍도 되찾게 하셨습니다.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13-14절).
감사의 고백 후에 누리는 하나님의 축복은 신약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10명의 나병 환자가 고침을 받았지만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고백한 이는 오직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 한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눅 17:19).
육신의 질병뿐만 아니라 영혼의 문제까지도 해결해 주셨던 것입니다. 어떤 교회 주일예배에는 특별한 순서가 있습니다. 바로 감사의 고백 순서입니다. 설교가 끝나면 성도들이 자유롭게 손을 들고 감사의 고백을 합니다.
미리 신청을 받거나 준비를 시키지 않지만 감사의 고백이 끊어진 적이 없습니다. 건강에 대한 감사, 자녀에 대한 감사, 직장에 대한 감사, 심지어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크게 다치지 않아 이렇게 예배의 자리에 올 수 있음을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감사의 고백을 통해 많은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한 주간을 살아갈 영적인 힘을 얻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에벤에셀은 바로 이와 같은 감사의 고백입니다.
사무엘이 에벤에셀의 고백으로 감사를 드렸을 때 이스라엘의 평화가 계속되었던 것처럼 우리 삶에도 감사의 고백들이 넘치고, 더 나아가 참된 평화가 계속되기를 소망합니다.
4. 두 번째 에벤에셀의 축복, 평화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예배’와 즉시 드리는 ‘감사의 고백’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인정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곧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사사기의 기드온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둔 후에 교만해져서 우상숭배를 합니다. 또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우상숭배로 인도합니다. 백성들이 살아있을 때 타락이 시작된 최초의 사사가 기드온입니다.
기드온이 살아있을 동안 40년 동안 평안했다는 의미를 팀 켈러 목사는 ‘예배가 없는 평안, 순종이 없는 평안’이라고 정의합니다.
존 스토트 목사는 오늘날 기독교의 상태를 ‘쿠션 같은 종교’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면서 “고상하지만 얄팍한 기독교의 가면을 쓰고 그들은 존경을 잃지 않되 불편하지 않은 범위 내에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꼬집었습니다.
이전 시대 교회의 시험은 박해였습니다. 때로는 기독교를 믿는 것 때문에 순교를 각오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도 제사를 거부한다는 명목으로 박해를 받거나 유배당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사탄의 전략은 박해가 아닌 평안입니다. 박해의 시대에 순교를 각오하면서 신앙생활을 했듯 평안의 시대도 순교적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쁜 현실에 매몰돼 하나님을 찾지 못하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순종이 없는 평안을 경계하십시오.
첫 번째 에벤에셀을 뛰어넘은 두 번째 에벤에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마치 실패한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절망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권세, 어둠의 권세,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영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평화를 얻게 된 것입니다.
사무엘이 드렸던 제사와 감사의 고백, 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라는 100% 신뢰가 있었기에 블레셋이 쳐들어오는 중에도 번제를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이처럼 과거의 실수나 아픔, 실패와 고통을 뛰어넘어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 기반한 순종이 있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가 우리 삶에 찾아옵니다.
저와 여러분의 순종하는 삶을 통해 교회와 나라와 인류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고, 그 은혜를 증거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갈무리
어린 시절에 보았던 외갓집 시골 동네 앞에는 미루나무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네 아이들은 박목월 시인이 작사한 노래를 참 좋아했습니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조각구름 걸려 있네. 솔바람이 몰고 와서 살짝 걸쳐 놓고 갔어요.”
아이들이 그렇게 노래한 이유 중 하나는 병풍처럼 펼쳐진 나무가 만들어 내는 풍광이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동네 어른들에게 동네에 왜 그렇게 많은 미루나무가 심겼는지 물어본 일이 있었습니다.
답은 이랬습니다. 우리 동네에는 넓은 들판이 있었는데 바람이 불 때면 거치는 게 없이 동네로 세차게 불어와 거센 바람을 막아보기 위해서라고 하더군요.
미루나무는 두 가지 역할을 했습니다. 먼저 강풍을 막아 주는 방풍림이 됐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동네에 멋진 풍경을 선물해줬습니다. 문득 제 마음에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이런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하나는 교회를 생각할 때면 교인들이 우리를 보호해주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국민에게 무엇이 정말 아름다운 것인지 알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이 땅의 모든 교회와 우리 교회가 패배의 에벤에셀이 아니라 승리의 에벤에셀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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