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24) <중앙 Sunday>김명호(57세)교수는 건국대ㆍ경상대 중문과 교수를 거쳐 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해외에서 중국 전문서점으로 유명한 싼롄(三聯)서점의 서울점인 ‘서울삼련’을 10여 년 경영하며, 중국 관련 전문서적과 희귀 사진을 수집했다. 김일성과 저우언라이의 마지막 만남(1) |제1호| 2007년 4월 25일
1975년 4월 17일. 캄보디아가 공산된다. 그날 김일성은 평양을 출발, 중국 방문길에 오른다. 국경 도시 단둥(丹東)엔 차오관화(喬冠華) 외교부장이 마중 나왔다. 베이징(北京)에 도착한 시간은 18일 오후 4시쯤. 덩샤오핑(鄧小平) 부총리가 마오쩌둥(毛澤東)의 부인 장칭(江靑)과 함께 나와 영접했다. 김일성은 들떠 있었다. 베트남 전쟁 또한 월맹군 승리로 대세가 기울고 있었던 것이다. 마오쩌둥과의 회담에 이어 열린 18일 환영 만찬에서 김일성은 호전적 발언을 쏟아냈다. “우리는 남조선에서 혁명이 발생하는 경우 즉각 개입할 것이다. 전쟁으로 우리가 잃는 것은 군사분계선이요, 얻는 것은 조국의 통일이다.”
이튿날인 19일 김일성은 베이징의 305병원을 찾았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 문병이었다. 저우는 72년 방광암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어떻게 사람의 오줌만 보고, 방광암에 걸렸는지 아느냐”는 마오쩌둥의 무관심 속에 제때 치료할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사진을 보면 건강한 모습의 김은 평소의 습관대로 연신 담배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반면 75년 3월 세 번째 수술을 받은 저우는 병색이 완연하다. 당시 저우의 증세는 대장으로까지 종양이 퍼져 몹시 쇠약한 상태였다. 그러나 손님이 찾아오면 언제나 옷을 단정하게 차려입었다. 왼쪽 가슴엔 문혁(文革) 당시 유행하던 마오쩌둥 배지를 다는 것조차 잊지 않았다. 암투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을 위해 담배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세심한 배려도 눈에 띈다. 그러나 저우는 구두를 신지 못했다. 두 발이 퉁퉁 부었기 때문이다. 대신 특별히 제작한 헝겊 신발을 신었다. 김과 저우 사이엔 침을 뱉는 타구가 놓여 있다. 빨간 카펫이 깔린 접견실은 저우의 병실 옆에 마련된 것이었다. 이날 김일성과 저우의 회담은 30년대 이래 의형제 관계였던 두 사람 간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저우는 이듬해 1월 8일 사망했다. 78세. 중국 핵 개발 아버지 덩자셴(2) |제2호| 2007년 4월 27일
▲신장 뤼부포 핵실험장에서의 덩자셴(왼쪽). 사진은 덩이 사망한 뒤 공개된 것이다.
1956년 4월 25일 마오쩌둥(毛澤東)은 “원자탄을 가져야 한다. 남들에게서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으려면 이 물건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선포했다. 당시 중국의 대표적 물리학자 중 한 사람으로 첸싼창(錢三强) 원자력연구소 소장이 있었다. 그는 루쉰(魯迅)에게 처음 소설 쓸 것을 권한 첸쉬안퉁(錢玄同)의 아들이다. 그해 8월 첸싼창은 미국 유학 후 귀국해 물리연구소에서 일하던 덩자셴(鄧稼先, 1924~88)을 방문했다. 첸쉬안퉁이 루쉰을 찾아가 글 쓸 것을 권한 지 40년 후였다. “국가에서 대포를 한 방 갈기려 한다. 작업에 참여하라.” 덩자셴은 첸싼창의 은어를 알아들었다. 그날 밤 덩은 부인(許鹿希)에게 말했다. “집안 일을 책임져주기 바란다. 나는 앞으로 해야 할 일에 생명을 바치겠다.” 당시 덩의 나이 34세. 이후 제2기계부에 설립된 핵무기연구소 이론부 주임이 된 그는 전국에서 전공과 상관없이, 우수한 대학졸업생 23명을 선발했다. 그리고 베이징(北京) 교외 옥수수밭 자락에 연구소를 세웠다. 중ㆍ소 관계 악화로 소련 과학자들이 철수한 뒤엔 ‘596’ 프로젝트를 주도했다. 596은 중국이 독자적 핵개발에 나선 1959년 6월을 뜻한다. 당시 중국공산당 서기처 총서기 덩샤오핑(鄧小平)이 연구원들을 격려했다. “비장한 마음으로 일해라. 잘못됐을 경우 모든 책임은 우리 서기처가 진다.”
1964년 10월 16일 신장(新疆) 뤄부포(羅布泊) 사막에 세워진 높이 120m의 철탑 위에 중국 최초의 원자탄이 걸렸다. 오후 3시 섬광과 함께 버섯구름이 일었다. 오후 5시,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인민대회당에서 음악무용극 ‘동방홍(東方紅)’ 출연자 3000여 명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1차 핵실험 성공을 발표했다. 이후 87년까지 32차례 핵실험이 있었는데 이 중 덩자셴이 직접 참가ㆍ지휘한 게 15차례였다. 84년 1차 핵실험 성공 2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덩은 자작시로 감회를 표했다.
붉은 구름 치솟아 하늘 끝까지 물들이고 거대한 원자탄의 힘은 땅을 뒤흔들었네 20년간 기를 쓰고 험한 곳을 기어올랐으나 지나간 세월이 덧없음을 이제야 알겠네
덩자셴은 청대(淸代)의 대시인이며 서예가인 덩스루(鄧石如)의 6대손이다.
소시민으로 살다 간 마오의 차남 안칭(3) |제3호| 2007년 5월 1일
▲1960년대 초 마오쩌둥 일가의 모습. 왼쪽부터 안칭, 장사오린, 마오쩌둥, 류쑹린, 사오화.
마오쩌둥은 세 번 결혼했는데 세 명의 부인 모두 불우했다. 첫째부인 양카이후이(楊開慧)는 총살당했고, 둘째부인 허쯔전(賀子珍)은 강제로 이혼당한 채 마오 생전엔 베이징 출입도 못했다. 장칭(江靑)의 시샘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오의 셋째부인 장칭도 감옥에서 자살했다.
양카이후이는 마오의 무장 폭동 실패 후 아들 셋을 데리고 친정으로 피했으나 체포돼 숨졌다. 당시 안잉(岸英)이 8세, 안칭(岸靑)이 6세, 안룽(岸龍)은 3세였다. 양의 사망 후 공산당 비밀조직은 삼형제를 상하이로 빼내, 비밀당원 둥젠우(董健吾)가 성공회 신부 신분을 이용해 운영하던 다퉁(大同)유치원으로 보냈다. 그러나 안룽은 병사했고, 둘째 안칭은 거리에서 경찰에게 얻어맞아 머리를 다쳤다. 1933년 상하이 공산당 조직이 와해돼 유치원도 해산됐다. 이때부터 둥젠우의 전 부인이 형제를 양육했다.
36년, 홍색(紅色) 신부로 알려진 둥젠우는 동북군벌 장쉐량(張學良)에게 접근해 자신의 아들과 친구의 아들 두 명을 프랑스에 보내고 싶다며 도움을 청했다. 장쉐량은 10만 프랑이라는 돈을 지원했고, 마오의 두 아들은 파리를 거쳐 소련으로 갈 수 있었다. 장쉐량은 영문도 모른 채 마오의 두 아들을 구해준 셈이다. 안잉에 비해 안칭의 소련 생활은 알려진 게 별로 없다. 다친 머리를 치료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47년, 안칭은 형보다 1년 늦게 귀국해 다롄(大連)의 요양원에 있다가 중국 건국 이후엔 군사과학원과 중앙선전부에서 연구와 러시아 서적 번역에 종사했다. 안잉은 한국전쟁에서 전사했다. 60년, 안칭은 장원추(張文秋)의 차녀 사오화(邵華)와 결혼했다. 장원추에겐 첫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안잉의 부인 류쑹린(劉松林)이다. 그리고 둘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사오화와 장사오린(張少林) 두 딸을 두었다. 장의 딸 둘이 마오쩌둥 며느리가 된 셈이다. 마오는 훗날 류쑹린을 재혼시키고 수양딸로 삼았다. 며칠 전 안칭이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평범한 삶이었다. 태자당(太子黨)이라는 괴상한 용어로 불리는 사람들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그러나 안칭에겐 아무리 생각해도 붙이기에 적당한 용어가 없다.
‘은둔의 화가’ 류전샤의 슬픈 가족史(4) |제4호| 2007년 5월 1일
▲20여 년 전 쑤저우 공업미술대학교 교장 시절의 류전샤. 김명호 제공
류전샤(劉振夏ㆍ66)는 일반 중국인들에게 익숙한 이름은 아니다. 그러나 중화권 예술계에선 큰 영향력을 가진 화가다. 1980년대 ‘위포(漁婆)’라는 수묵인물화가 중국을 떠들썩하게 했는데 그 주인공이 류전샤다.
그는 명예와 이익은 뒷전으로 했다. 쑤저우(蘇州) 한구석에 은거해 작품에만 몰두했다. 4개의 원칙을 고수하며 이를 어긴 적이 없다. ‘내보이지 않고(不發表), 전시회를 열지 않고(不展出), 팔지 않고(不賣), 주지 않는다(不送)’는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림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화폭은 하나의 여행지다. 여행을 하면 많은 사람을 만난다. 많은 사람이 나를 사랑했고, 나 또한 그들을 사랑했다. 화폭에는 그들과 나눈 많은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이쯤 되면 그의 사불(四不)이 이해가 간다.
고희(古稀)가 다 돼 책을 한 권 냈는데 중화권 예술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림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모이다 보니 한 권의 책이 된 것이다. 대만에서 그에 관한 기록물을 만든 적이 있다. 말미에 그를 일컬어 “회화의 대사(大師), 문자의 대사”라고 했지만 그 자신은 한사코 “나는 대사가 아니다”고 부인했다.
류전샤는 어렸을 때 부친이 실종됐고, 이어 모친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외가에서 자랐는데 외조부에겐 늘 반혁명분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그에게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수십 년이 지난 뒤 바다 건너에서 온 편지 한 통으로 의문이 풀렸다. 아버지는 국민당 고급 장교였고, 큰아버지는 대만 국방부장을 지낸 구주퉁(顧祝同)이었다. 성이 류(劉)인 것은 외가 성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특수한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다. 고통 속에서 분출되는 쾌락이다. 그림이 완성됐을 때 쾌락을 느낀다. 그러나 그 또한 순간일 뿐 곧 사라져버린다. 남는 것이라곤 끝없는 불만족과 함께 오는 번뇌일 뿐이다.”
쑤저우는 인구가 1200만 명에 이르는 대도시다. 역사적으로 많은 재자가인(才子佳人)을 배출했다. 쑤저우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다. 모른다면 쑤저우 사람이 아니라고 단언해도 괜찮을 것이다.
‘마지막 황제’ 푸이의 두 부인(5) |제5호| 2007년 5월 2일
▲앞줄에 앉아 있는 이들 중 오른쪽에서 둘째가 완룽, 셋째가 원슈다. 1920년대 베이징의 일본 공사관에서 촬영했다.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는 한날 두 명의 여인과 결혼했다. 원래 황후 후보는 네 명이었다. 사진을 놓고 한 명을 선택케 했다. 지독한 근시였던 푸이가 희미한 상태에서 보니 용모나 차림새 모두 비슷했다. 결혼에 관심이 없던 그는 별생각 없이 한 장을 집었다. 몽골족 출신 원슈(文繡)였다. 태후 한 명이 반대해 푸이는 다시 다른 사람을 골랐다.
완룽(婉容)이 황후로 낙점됐다. 원슈는 황제가 한 번 선택했다고 해 한 단계 아래인 황비가 됐다. 당시 푸이와 완룽이 17세, 원슈는 13세였다. 완룽은 미인이었으나 샘이 많고, 의지가 약했다. 원슈는 장난기 넘치는 용모에 고집이 셌지만, 드러내는 성격은 아니었다. 푸이는 이들을 거의 찾지 않았다. 완룽에겐 영어 이름도 지어주고, 가끔 자전거도 타게 했지만 원슈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완룽과 원슈는 푸이가 서로 상대에게 가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푸이의 관심은 외국에 쏠려 있었다. 스스로 변발을 자르고, 인도 시인 타고르를 만나고, 일본 간토(關東) 대지진 때는 30만 달러어치의 골동품을 의연금조로 보내기도 했다. 이들은 1924년 자금성에서 쫓겨날 때까지 2년을 함께 살았다.
베이징을 떠나 톈진의 일본 조계(租界)에 살게 되면서 원슈에 대한 완룽의 행패가 심해졌다. 톈진 생활 7년 만에 원슈는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위자료 5만 위안(元)을 받았다. 상하이의 4인 가족 생활비가 40위안을 넘지 않을 때였다. 그러나 원슈는 변호사와 친지들에게 위자료로 받은 돈 대부분을 강탈당하다시피 했다. 원슈 나이 23세였다. 베이징으로 돌아온 원슈는 초등학교 교사, 화베이(華北)일보 교정 일을 했는데 신분이 알려져 그만두고 말았다. 이후 생계를 위해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고, 길에서 사탕을 팔기도 했다.
푸이는 원슈의 행동이 위자료를 탐낸 친지들의 부추김 때문이었고 다시는 결혼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원슈는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 군 장교와 결혼했고, 1953년 심근경색으로 숨졌다. 푸이가 푸순(撫順)의 전범수용소에서 개조교육을 받고 있을 때였다. 완룽이 46년 아편중독으로 만신창이가 돼 이미 세상을 등진 뒤였다.
국민당 비밀 첩보조직 이끈 다이리(6) |제6호| 2007년 4월 24일
▲다이리(오른쪽)와 그의 오랜 연인이었던 천화가 항저우로 꽃구경을 나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김명호제공
장제스(蔣介石)가 위원장인 중앙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軍統)은 국민당 정부 시절 공식 편제엔 없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기관이었다. 공산당 분쇄, 대일 정보수집, 매국노(漢奸) 제거, 침투와 전복, 선전 등이 임무였다. 다이리(戴笠ㆍ1897∼1946)라는 인물이 조직을 대표했다. 농촌과 도시는 물론 전 세계 어디든 중국인이 있는 곳엔 그의 공작원이 있었다. 한 미국인 무관은 다이리 특무요원을 32만5000명으로 추정했다. 한 역사학자는 100만 명 이상으로 보았다. 태평양전쟁 말기엔 일왕의 궁성 안에도 정보원을 침투시켰다고 했다. 일본 패망 후 며칠 만에 많은 매국노가 체포됐다. 외출하는 주인들을 운전사들이 모시고 간 곳이 다이리의 비밀 거점이었다. 차에 탄 채 불에 타 죽거나, 음식 잘 먹고 숨진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다. 운전사와 요리사는 다이리를 라오반(老板ㆍ주인)이라고 부르던 공작원이었다.
그는 신비로운 인물로, 사진을 못 찍게 했다. 말(馬)처럼 생겨 노출을 꺼렸다지만, 사실 그는 ‘말대가리’라는 별명을 좋아했다. 동물 닮은 얼굴이 귀인(貴人)이라는 속설을 신봉했다. 중국 고전에 해박했으며, 서양 것은 무기와 먹는 것 외에 신뢰하지 않았다.
다이리는 1946년 3월 비행기 추락으로 숨졌다. 상하이 경비사령관 양후(楊虎)의 부인 천화(陳華)는 자살이라고 했다. “위원장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혼자 죽지 않겠다.” 다이리가 천화에게 한 마지막 말이다. 두 사람은 연인 사이였다. 다이리 사후 그의 특무들은 보고라인을 상실했고, 위장부대와 유격대원은 주인을 잃었다. 훗날 이들은 공산당에 투향(投向)하거나 투항했다. 중ㆍ미 합작소를 다이리와 함께 운영했던 한 미국 장군은 “다이리가 죽지 않았다면 공산당은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그는 도청기법의 창시자였고, 미 전략정보국(OSS)의 동업자였다. 정보를 독점했고, 운영도 효율적이었다. 그러나 그가 죽자 모든 게 와해됐다. 가장 효율적인 것처럼 위험한 것도 없다.
다이리 사후 내전이 터졌고 3년 뒤 국민당은 패했다. 타이베이에 온 장제스는 총통 관저 좌우의 길을 우농로(雨農路)로 명명(命名)했다. 우농은 다이리의 자(字)였다.
‘우파 두목’으로 몰린 장보쥔과 그의 딸(7) |제7호| 2007년 4월 29일
▲교통부에서 부원들에게 둘러싸여 비판받으며 괴로워하는 장보쥔의 모습은 반우파투쟁의 상징이 됐다. 김명호 제공
1957년 낡은 습관에 젖어 있는 세력들에 의해 공산당이 침식되기 시작했다며 대규모 계급투쟁이 몰아닥쳤다. 제일 먼저 호응한 것이 지식분자들이었다. 당 조직이나 간부들에게 비판적인 의견을 제출했다. 사회주의를 인정하고 옹호한다는 대전제하에서였다. 직장마다 대자보가 나붙기 시작했다. 이어서 반우파투쟁이 벌어졌다. 50여만 명이 당 지부 서기의 도장 하나로 우파분자로 확정됐다. 그 후 이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 있다. “태평성세의 개로 태어날지언정 난세의 인간이고 싶지는 않다.”
진보적 지식인들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에 많은 공헌을 했다. 공산당도 이들을 연합해야 할 하나의 계급으로 인정했기에 실권은 없지만 직급은 높은 자리가 주어졌다. 당의 보호 아래 언론과 학문의 자유를 충분히 누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난데없이 우파라는 모자가 씌워졌다.
우파 두목으로 지목된 인물이 장보쥔(章伯鈞)이었다. 민주세력의 연합체인 민주동맹의 실질적 책임자로 교통부장, 정협 부주석, 광명일보 사장 등을 겸하고 있었다. 광명일보는 민주동맹의 기관지였다. 부장으로 있던 교통부에서 비판받으며 곤혹스러워하는 모습은 두고두고 반우파투쟁의 상징이 됐다. 그는 실각한 후에도 직급이 3급에서 7급으로 강등됐을 뿐 하루 열세 시간까지 노동을 해야 했던 50여만 명의 우파들에 비해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하다가 문화대혁명이 진행되던 1969년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말년은 비참했고 81년 모두가 복권될 때에도 제외됐다.
그의 딸 장이허(章 和)가 반우파운동 때부터 보고 겪었던 부모는 물론 그들과 가까웠던 지식인, 스승, 문인, 예술가들의 고난을 유려한 문체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은 2002년 61세 되는 해부터였다. 자신도 20대 말에 우파로 몰려 20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옥중에서 딸을 낳고 남편과 사별했지만 개인의 억울함이나 불만을 토로하지는 않았다.
이 사진의 주인공은 반세기가 지난 후 정부는 크고 사회는 작은 줄만 알았던 대다수 중국인의 고정관념이 바뀔지도 모를 일에 자신의 딸이 한몫 단단히 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中 최후의 고전 시인 천싼리(8) |제8호| 2007년 5월 6일
▲베이징의 야오자(姚家) 후퉁(胡同ㆍ골목)에 있는 자택 서재에서 독서 중인 만년의 천싼리. 김명호 제공
1936년 국제 펜클럽 회의가 런던에서 열렸다. 신문학과 구문학을 대표하는 후스(胡適)와 천싼리(陳三立)가 초청을 받았다. 천은 참석하지 않았다. 자신이 중국을 대표한다고 생각지 않았다. 인도 시인 타고르가 방문해 시집을 선물했을 때도 어쩔 줄 몰라 했다. “타고르는 인도를 대표하는 시인인데 나는 중국을 대표하는 시인이 아니다.”
천은 젊은 시절 부친의 개혁운동을 보좌하다가 관직에서 추방당한 후 시작(詩作)과 교육에만 전념했다. 그의 교육은 전통을 고집하지 않았다. 사서오경 외에 수학ㆍ영어ㆍ음악ㆍ회화를 중요시했다. 중국의 고전을 섭렵한 뒤에 서구의 지식을 수용케 했다. 자손들에게는 과거에 응시해 지식을 가지고 공명을 다투는 일을 하지 못하게 했다. 그의 아들 인커(寅恪)는 소년 시절 고전의 세계에 빠져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구학의 기초가 확실하게 자리 잡고 있어 서구 여러 나라에 유학을 했어도 근본이 동요되거나 전통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지 않았다. 서양학문을 일찍 접촉했지만 배척은 물론 숭배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사상 속에 동서문화의 충돌이 있을 수 없었고 오랜 유학생활을 했음에도 서구화된 적이 없었다.
천싼리는 세상소식도 등한시하지 않았다. 루산(廬山)에서 요양하던 중에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하자 상하이에서 비행기가 올 때마다 전황을 캐묻고 수심에 잠겼다. 꿈속에서 일본인들을 미친 듯이 질타하는 바람에 온 가족이 깨어나곤 했다.
33년 천은 베이핑(北平ㆍ베이징)에 거처를 정했다. 틈만 나면 자손들을 데리고 열강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 폐허들을 둘러보았다. 국치(國恥)라며 통탄했다. 37년 7월 시국은 급전직하, 중ㆍ일 양국 간에 전운이 감돌았다. “나라가 환란에 처했다. 절대로 떠날 수 없다”며 피란 가지 않았다. 톈진과 베이핑을 점령한 일본 군부가 그를 모시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응하지 않았다. 첩자(偵探)들이 문 앞에서 서성대자 청소부들을 불러 쫓아버렸다. 복용하던 약과 곡기를 끊고 5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85세였다. 그는 ‘청말사공자(淸末四公子)’ 중의 한 사람이며 중국 최후의 고전 시인이었다.
옌안의 밤 사로잡은 江靑(9) |제9호| 2007년 5월 13일
▲1930년대 상하이에서 란핑이란 예명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장칭.
1933년 봄 배우가 꿈이었던 19세의 칭다오(靑島)대학 도서관 직원 리윈허(李雲鶴)는 부두 창고에서 공산당에 입당했다. 영문과의 셰익스피어 강의를 몰래 듣다가 쫓겨난 후였다. 훗날 중화인민공화국의 초대 톈진(天津)시장이 된 황징(黃敬)의 소개로 당에 들어갔다.
30년대의 상하이(上海)는 하루 아침에 기적을 일굴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좌익단체에 가입한 탓에 감옥에 갇히기도 했지만, 연극 평론가 탕나(唐納)의 도움으로 ‘인형의 집’에서 노라 역으로 출연하며 란핑(藍 )으로 개명했다. 호평을 받았고 잡지 표지에 얼굴도 실렸다. 영화에도 출연했지만 170여 개의 공연장과 관람석 10만을 자랑하던 영화의 중심지에서 그는 삼류배우였다. 36년 탕나와 결혼했는데 황징이 지난(濟南)에서 소식을 전했다. 허위로 가득찬 도시를 떠난다는 편지를 남기고 지난으로 갔다. 탕나가 따라와 죽는다고 강물에 투신했는데 수영을 잘해서 미수에 그쳤고, 황징은 혁명 근거지 옌안(延安)으로 떠났다. 탕나에게 끌려 돌아와 보니 다른 스캔들이 파다했다. 탕나는 또 자살을 기도했고, 란핑은 영화사에서 해고당했다. 겨우 23세 때였다.
상하이는 그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전쟁과 혁명의 시대였다. 중ㆍ일전쟁 폭발 직전인 37년 8월 옌안으로 갔다. 항일군정대학(抗日軍政大學)에 입학하며 이름도 장칭(江靑)으로 바꿔버렸다.
옌안의 황혼은 경극(京劇) 공연과 함께 하는 날이 많았다. 장칭은 항상 주연이었다. 경극 애호가였던 마오쩌둥(毛澤東)은 장칭의 연기와 노래를 들으며 담배가 끝까지 타들어 가는 것도 몰랐다. 분장실까지 찾아와 뜨거운 차를 권하는 마오의 손끝을 본 장칭은 사진을 한 장 선물했다. “그 사진은 오랫동안 주석(主席)의 노트 사이에 끼여 있었다”고 마오의 비서는 훗날 말했다. 마오의 두 번째 부인 허쯔전(賀子珍)과 장칭이 동굴 속에서 충돌했다고들 하지만 장칭은 허쯔전이 시안(西安)으로 떠난 직후에야 옌안에 도착했다. 장칭의 옌안 진입은 빠르지도 않았고 늦지도 않았다.
상하이를 떠날 때 치파오(旗袍)를 찢어버린 장칭은 1991년 5월 14일 자살하는 날까지 다시는 치파오를 몸에 걸치지 않았다.
중국 최초의 여성 누드 모델 파동(10) |제10호| 2007년 5월 20일
▲상하이美專 학생들이 누드 모델 쳔샤오쥔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함께 사진을 찍었다. 김명호 제공
1911년 설립된 중국 최초의 미술전문교육기관 상하이미전(上海美術專科學校)은 1914년 교과과정에 인체사생을 개설하고 남자 모델을 공모했다. “혼이 그림에 빨려들어가 기(氣)가 손상되고 사람이 죽는다”고 믿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응모자가 없었다. 15세 소년이 자원했다. 이름이 허상(和尙)이었는데 실제 승려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회가 거듭되자 능청스러울 정도로 태연해졌는데 발육이 덜 된 인체의 사생에 학생들이 싫증을 냈다. 상하이미전은 높은 보수를 내걸고 장년 모델을 구했다. 지망자들이 많았지만 소묘 교실에 들어오면 진땀을 흘리다 달아나곤 했다. 20여 명이 그랬다.
1917년 5월 청둥(城東)여학교에 재학 중인 여학생이 미전 교장 류하이쑤(劉海粟,1895~1992)를 찾아와 누드 모델을 자청했다. 잡화상집 외동딸인 천샤오쥔(陳曉君)이었는데 딩후이(丁輝)라는 미전 학생과 사귀고 있었다. 며칠 전 비너스(Venus) 석고상을 함께 보던 딩후이가 “아름답지만 생명이 없고 중국 여인이 아니다”라고 투덜대면서 예술을 위해 헌신할 여성이 없다고 한탄했다. 천샤오쥔은 활달하고 노래와 무용을 좋아했는데 ‘예술’이나 ‘헌신’ 같은 용어에 민감할 연령이기도 했지만 무슨 일이건 결정하는 데 질질 끄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 해 여름 학생성적(成績)전람회에 누드 사생 50점이 전시되었다. 부인이 조르는 바람에 전람회 구경을 왔다가 혼비백산한 청둥여학교 교장 양바이민(楊白民)이 ‘시보(時報)’에 류하이쑤를 생식기 숭배자이며 요괴(妖怪)라고 비난하는 글을 실어 문제를 제기했다. 천샤오쥔이 퇴학당했음은 물론이다. 류하이쑤는 즉각 반박했지만, 류를 비난하는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상인연합회에서는 류를 동물에 비유하는 성명서를 냈고 상하이(上海)현 현장은 인체 사생 금지령을 선포했다. 상하이와 주변 5성(省)의 연합군 사령관이며 최대 군벌 중의 하나였던 쑨촨팡(孫傳芳)까지 가세해 류에게 체포령까지 내렸던 모델 파동은 10년이 지나서야 가라앉았다.
1985년 90세 기념 전람회에서 류하이쑤는 저우언라이(周恩來)의 부인 덩잉차오(鄧穎超)에게 예술 생애를 회고하면서 모델 파동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24년간 가계부 쓴 대문호 루쉰(11) |제11호| 2007년 5월 27일
▲1928년 상하이 징윈리(景雲里) 자택 서재에서의 루쉰. 사진=김명호 제공
루쉰(魯迅ㆍ1881~1936)의 경제상황을 궁금해 하는 이들이 간혹 있다. 제대로 된 수입이 있었을 것 같지 않다는 얘기다. 1909년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루쉰은 항저우ㆍ사오싱ㆍ난징에서 3년, 베이징에서 14년, 샤먼ㆍ광저우에서 1년, 상하이에서 9년 등 27년간 사회활동을 했다. 처음 3년은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단오절에서 중양절까지 겉옷을 한번도 갈아입지 못했다. 사탕 물고 담배 피우며 밤 늦게까지 책 보는 게 습관이었지만 사탕도 남이 사다 주는 것만 먹었다. 교사 월급 30은원(銀元)이 박봉은 아니었으나 도서 구입비가 지나치게 많았다. 1은원은 당시 한 가구 한 달 부식비로 현재의 약 50위안에 해당한다.
루쉰은 12년 5월 5일 베이징 교육부 시절부터 36년 10월 19일 상하이에서 세상을 뜨기 전날까지 24년간 매일 일기를 썼다. 일기는 두 가지 특징이 있었다. 수입에 관한 기록이 수천 군데일 정도로 상세하고, 매년 구입한 책과 가격을 연말에 따로 정리했다. 가계부를 겸한 책 구입장부 격이었다.
고정 봉급 외에 원고료와 강연료가 루쉰의 주 수입원이었다. 베이징 시절 교육부에서 월 300은원을 받았다. 8개 대학에 출강한 적도 있었지만 강의료는 많지 않았다. 22년부터는 인세도 들어왔다. 참고로 베이징대 도서관에서 사서로 근무하던 마오쩌둥(毛澤東)은 매달 8은원을 받았다.
상하이 시절은 고정 수입이 없었지만 경제적으론 아주 풍족했다. 인세와 편집비가 인민폐로 환산해 54만 위안에 달한 해도 있었고, 매달 평균 2만 위안 정도를 웃돌았다. 24년간 총수입이 12만 은원을 넘었던 루쉰이 가장 중시한 것은 책이었다. 베이징 시절 2000은원짜리 집을 사면서 도서 구입으로는 4000은원을 썼다. 총서와 전집류를 포함해 1만7000여 종의 책과 탁본, 고대 판화 등을 모두 자력으로 구입했다. 루쉰이 교육부를 사직하고 외로운 전사(戰士)로 나설 때 차이위안페이(蔡元培)가 계속해 300은원을 지급하려 했지만 거절했다. 손을 벌리거나 후원금을 요구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자유로운 사고와 독립된 인격 형성에 장애요소가 무엇인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루쉰이었다.
300년 비밀결사 '靑幇' 최고의 두령 杜月笙(12) |제12호| 2007년 6월 3일
▲1930년대 상하이 기차역에 나온 두웨성(오른쪽 둘째). 가운데 는 상하이 경비총사령관 양후. 사진=김명호 중국 역사와 함께해온 비밀결사의 깊은 뿌리와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민족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한족 부흥운동의 배후에는 그들이 있었고, 아주 복잡한 성격의 역사적 인물들을 배출했다. 가로회(哥老會) 지파인 청방(靑幇)은 17세기 초 만주족이 청(淸)을 건국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 3세기 후인 1920∼30년대엔 상하이를 지배하다시피 했다. 이 시기 청방 두령이 두웨성(杜月笙ㆍ1888∼1951)이다.
그는 아편 운반과 판매를 통해 세를 키웠다. 최대 도박장 궁싱(公興)구락부도 그의 소유였다. 14세 때 먹고살기 위해 상하이로 나와 과일가게 종업원으로 시작, 23년 만에 황진룽(黃金榮), 장샤오린(張嘯林)과 함께 트로이카를 형성한 두웨성은 목욕탕이나 오락장을 운영하던 황이나 장과는 격이 달랐다. 조직과 기획에 뛰어났고, 문화인이나 지식인과 친분이 두터웠다. 루징스(陸京士)는 두의 전기를 쓰며 그의 충실한 제자로 기억해주기를 소망했다. 당대 국학의 최고봉 장타이옌(章太炎)은 온갖 고전을 뒤져 새 이름과 호를 지어주며 두의 고향 푸둥(浦東)에 사당(杜氏祀堂)을 지을 것을 고집했고, 명변호사 친롄쿠이(秦聯奎)는 도박으로 탕진한 거금을 돌려받은 후 두의 영원한 부하가 됐다.
대표적 신문도 두의 계열사와 같았다. 대공보(大公報) 총편집 쉬서우청(徐壽成)은 두의 사후 평전을 집필, 그를 그리면서 남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에게 선생(先生)이라는 칭호를 붙였고 그의 제자나 학생으로 자처했다. 그가 언론계 인사들을 상대로 부모에게 효도하는 데 쓰라고 푼 돈이 연 200만 은원(銀元)이었다. 유학(儒學)으로 무장된 폭력이 가장 두렵다는 루쉰의 말은 그를 지칭한 것이었다.
1927년 3월 저우언라이가 지휘하는 상하이총공회 노동자들이 조계(租界)를 제외한 지역을 점령했을 때 중화공진회(中華公進會)를 조직해 무자비하게 해산시키고, 300여 명의 사망자와 5000여 명의 행방불명자를 낳은 4ㆍ12 사건의 핵심 인물도 그였다. 또 국공 합작 파열과 장제스의 국민정부 수립 등 역사적 사건에 관여치 않은 게 없었다. 그는 300년 청방 역사상 최고의 인물이었고 상하이의 황제였다.
세 살에 황제 된 光緖帝(13) |제13호| 2007년 6월 10일
▲짜이톈(오른쪽)짜이펑 형제. 짜이톈은 광서제가 됐고, 짜이펑은 마지막 황제 푸이의 아버지가 됐다. 사진=김명호 제공
기원전 221년 진시황(秦始皇)이 황제를 칭한 이래 494명의 황제가 있었다. 추증(追贈)된 73명을 빼면 421명이었다. 이들 중 29명이 열 살이 안 돼 황제에 올랐다. 어린 황제가 가장 많았던 왕조는 청(淸ㆍ1636∼1911)이었다. 12명의 황제 중 창업기 2명(順治ㆍ康熙)과 말기 3명(同治ㆍ光緖ㆍ宣統) 등 모두 5명의 어린 황제가 있었다. 순치와 강희는 6세와 8세 때 황제가 됐다.
동치는 6세에 즉위했다. 함풍(咸豊)의 유일한 아들로 서태후(西太后) 소생이었다. 서태후는 아들이 황제가 되는 바람에 태후가 됐지만, 함풍이 8명의 대신에게 동치를 보좌하게 했기 때문에 실권은 없었다. 서태후는 시동생인 공친왕(恭親王)과 순친왕(醇親王)을 동원해 고명대신들을 제거하고 수렴청정을 폈다.
동치는 19세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형제 중에서 황위 계승자를 정해야 했지만 서태후는 순친왕의 둘째 아들로 갓 3세를 넘긴 짜이톈(載<6E49>)을 황제로 지명했다. 청의 11대 황제 광서제(光緖帝)다. 서태후는 수렴청정에 복귀했다. 광서는 황제의 아들이나 동생이 아닌 사람 중에서 최초로 황제가 된 이다. 또 황제로 세상을 떠난 마지막 황제였다.
광서의 재위기간은 34년이었지만 친정은 중간 10년에 불과했다. 마지막 10년은 감금 상태였다. 광서는 1908년 서태후보다 하루 먼저 세상을 떠났다. 서태후는 광서의 동생이며 순친왕을 계승한 짜이펑(載豊)의 아들 푸이(溥儀)를 황제로 지명하고 세상을 떠났다. 짜이펑은 아들이 황제가 된 이후 1911년 혁명으로 청이 멸망할 때까지 섭정왕이었지만 혁명에 저항하지 않았고, 푸이가 괴뢰 황제로 있던 만주국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 덕에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어느 정도 대접을 받다가 1951년 세상을 떠났다.
개국 황제들은 자기 분수가 뭔지를 생각해 본 적이 없고, 되는 일은 없어도 큰소리부터 치고 보는 건달기와 용의주도함을 동시에 갖춘 사람들이었다. 시세를 꿰뚫어 볼 줄 알고 판단이 서면 차마 못할 짓도 거리낌없이 해치워버리는 비범한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온갖 풍상을 다 겪은 그들이 꿈에도 생각 못했던 것이 있다면 어린 황제와 수렴청정이었을 것이다.
물ㆍ햇빛ㆍ바람을 무서워한 林彪(14) |제14호| 2007년 6월 17일
▲1949년 2월 공산혁명에 성공해 베이징에 입성한 린뱌오 동북야전군 사령관(가운데). 사진=김명호 제공
1966년 10월 장칭(江靑)이 중화인민공화국 원수이며 부총리 겸 국방부장인 린뱌오(林彪)를 찾았다. 감기에 걸렸다는 장칭의 말에 린뱌오는 “물(水)은 차가운 성질(寒性)이다. 찬 기운이 모공을 통해 진입하면 내장의 더운 기운(火)과 충돌해 모순이 발생한다. 그게 감기다. 나는 58년부터는 목욕을, 63년부터는 세수를 하지 않는다”고 진지하게 말했다. 물을 무서워한 그는 산수화(山水畵)만 봐도 식은땀을 흘렸다.
50년대부터는 복장에 관심이 많았다. 모양이나 색상이 아니라 옷의 온도였다. “0.5도 차이만 나도 냉기를 느끼거나 땀이 난다. 온도의 장악이 건강의 관건이다”라고 했다.
그는 부동자세로 보고하는 것을 싫어했다. 긴장해서 땀이 난다고 했다. 빛을 무서워해 어두운 방 안에 있기를 좋아했다. 집무실도 없었다. 잡기는 해본 적도 없고 배우려 하지도 않았다. 운동과 등산은 원래 싫어했고, 사냥이나 낚시는 할 줄도 몰랐지만 물과 햇빛ㆍ바람을 무서워했기에 할 수도 없었다. 아는 노래가 한 곡도 없었고 주말마다 열린 중난하이(中南海) 댄스파티에도 참석한 적이 없었다. TV와 신문은 보지 않았다. 의학사전과 지구의를 보는 게 유일한 취미였다. 맹물에 데친 배추를 주로 먹었고 누런콩(黃豆)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먹었다. 딸의 애칭도 더우더우(豆豆)였다.
린뱌오는 중국 역사에 남을 명장이었다. 중일전쟁 때 핑싱관(平型關) 대첩(大捷)을 지휘해 중국인들에게 첫 승리를 안겨주었고, 국공 내전에선 랴오선(遼瀋) 전역(戰役)에서 승리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톈진(天津)을 점령하고 베이징(北京)을 해방한 것도 그가 지휘한 동북야전군이었다. 스탈린은 그를 상승(常勝)장군이라고 찬양했다.
그는 한국전 참전을 거부했다. 마오쩌둥(毛澤東)과의 관계가 소원해졌고 병마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통증이 있거나 병상에 누워야 할 병은 아니었다. 긴장ㆍ설사ㆍ식은땀 등이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정신병자로 낙인이 찍혔다.
환자로 위장해 자신을 보호하고 상황을 저울질하는 것은 중국의 전통적 정치행위 중 하나였다. 린뱌오가 정신병자였는지, 아니면 관직이 올라갈수록 더 청교도적이며 고행승(苦行僧) 같았던 생활습관 때문에 정신병자로 보였는지 아직은 알 길이 없다.
紅衛兵이 탄생하던 그날(15) |제15호| 2007년 6월 24일
▲新華서점 앞에서 새 줄 서 기다리다가 마오쩌둥 선집과 포스터 등을 구입한 뒤 좋아하는 홍위병들. 사진=김명호 제공
홍위병(紅衛兵)은 국가 조직이나 군대가 아닌 젊은 학생들의 집합체였지만 문화대혁명(1966∼76) 초기 2년간 중국의 사회ㆍ정치ㆍ문화 등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소멸된 인물군체(人物群體)였다.
홍위병은 문혁 전야인 1966년 5월 칭화(淸華)대학 부속중학에 출현한 독립적인 학생조직의 명칭이었다. 그 후 모든 중학에 홍위병 조직이 만들어졌고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1966년 5월 1일 칭화대 부속중학 예과 651반 학생 11명이 베이징 교외로 야영을 떠났다. 651반은 전부터 교육혁명의 필요성을 자주 논의하던 좀 유별난 반이었다. 우의 증진이 목적이었지만 교육혁명에 관한 토의로 시간을 보내던 중 저우언라이 총리가 알바니아 대표단을 접견한 자리에서 문혁이 절실히 요구되는 곳이 교육계라고 했다는 소식을 라디오를 통해 듣게 됐다. 신호탄이나 다름없었다. 야영에서 돌아온 이들은 651반의 핵심요원이 됐다. 얼마 후 부속중학 당 지부서기가 교내 방송을 통해 발표한 문혁 관련 보고가 학생들을 자극했다. 651반에서 ‘마오쩌둥 사상의 절대적 권위수립’ 등 3개 항목을 구호로 채택하자 많은 학생이 호응했다. 또 실명이나 필명을 이용한 각양각색의 정견들이 담장에 붙기 시작했다.
5월 28일 밤 서로 다른 의견을 주장해온 각 조 조장들이 다음날 원명원(圓明園)에서 회합을 열기로 했다. 칭화대 부속중학 정문 서쪽이 서구 연합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 채 폐허처럼 방치된 원명원이었다. 담장도 없고 지키는 사람도 없고 찾아오는 이도 없는 이 국치의 상징이 학생들에게는 훌륭한 정원이자 놀이터였다. 맑고 시원한 물이 곳곳에서 솟았고 형형색색의 들꽃들이 퍼져 있고 야생동물들이 출몰했다 사라지곤 했다. 폐허의 여기저기에 흩어진 거대한 돌 더미들은 삼삼오오 모여 열띤 토론을 벌이는 무리들 서로를 차단해 주었다.
29일 극비리에 회합한 각 조 조장들은 차후 서로의 정견을 개진할 때 서명을 통일하자는 전대미문의 합의를 도출해냈고 642반 장청즈(張承志ㆍ1948∼ )의 필명을 모든 대자보에 통일적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현재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의 한 사람인 장청즈의 필명이 ‘홍위병’이었다.
張學良과 宋美齡-上 (16) |제16호| 2007년 7월 1일
▲시안사변 한달 반 전인 1936년 10월말 뤄양에서 자리를 같이한 장쉐량과 쑹메이링, 장제스 (앞줄 원쪽부터). 김명호 제공
장쉐량(張學良, 1901∼2001)은 1925년 6월 상하이 미국영사관 만찬에서 국민당 원로 후한민(胡漢民)의 소개로 쑨원(孫文)의 처제 쑹메이링(宋美齡, 1897∼2003)을 처음 만났다. 한 세기를 일관한 두 사람의 우의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둘 다 장제스(蔣介石)를 모를 때였다. 그리고 2년 반 뒤인 27년 12월 쑹은 장제스와 결혼했다.
28년 6월 장쉐량은 부친인 동북왕(東北王) 장쭤린(張作霖)이 일본군에 의해 폭사하자 친일세력들을 제거하고 동북의 군정 대권을 장악했다. 난징 국민정부의 장제스는 북벌군을 이끌고 베이징에 진입했지만 장쉐량과의 제휴가 필요했다. 장쉐량은 통일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국민당의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가 계양된 곳은 동북에 한 곳도 없었다. 장쉐량이 베이징에 왔을 때 그를 암살하거나 난징으로 유인해 감금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쑹메이링은 “장쉐량은 소인이 아니다. 국가 이익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장군과 친구가 돼야지 왜 제거할 궁리만 하는가”라며 장제스를 설득했다. 장제스와 장쉐량의 첫 대면은 성공적이었다. 다음날 만찬엔 쑹메이링도 참석했다. 쑹과 장쉐량의 두 번째 만남이었다. 두 사람이 구면이라는 사실을 장제스는 이날 처음 알았다. 장쉐량은 뭔가 복잡해 보였고 장제스는 곤혹스러워했다. 선양에 돌아온 장쉐량은 두 달 후 동북 전역에 청천백일기를 게양했다.
장제스는 중국을 통일했다. 장쉐량은 “쑹이 없었다면 나는 쉽게 결정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훗날 말했다. 장제스는 장쉐량에게 동북 5개 성의 군권과 행정권을 일임해 중국의 실질적 2인자임을 모두가 인정하게 했다. 쑹은 제1부인이 되었다. 중국의 황금 10년이 시작됐다. 장제스는 이때부터 공산당 섬멸을 지휘해 장시성의 중앙소비에트 홍군(紅軍) 주력에 치명타를 안겼다. 장정(長征)에 나선 홍군은 옌안에 안착했다. 장제스 명령으로 동북을 일본에 내준 장쉐량은 시안에 주둔하고 있었다. 장제스는 장쉐량에게 옌안을 공격하게 했다. 주저하는 장쉐량을 재촉하기 위해 시안에 온 장제스를 장쉐량은 36년 12월 12일 밤 감금했다. 이때 쑹메이링은 시안사변이 발생한 줄도 모르고 신병치료차 상하이에 머무르고 있었다.
張學良과 宋美齡-下(17) |제17호| 2007년 7월 8일
▲대만 타이베이 스린(士林) 관저에서 그림을 그리는 쑹메이링과 이를 지켜보는 장제스. [김명호 제공]
쑹메이링(宋美齡)은 시안을 폭격하려는 난징 정부의 결정을 보류시키고 1936년 12월 22일 시안으로 떠났다. 비행장에 나온 장쉐량(張學良)을 보는 순간 난징에서부터 굳어 있던 쑹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장제스(蔣介石)를 대신해 장쉐량과 옌안에서 급파된 저우언라이(周恩來)와 협상했다. 내전 중지, 항일전쟁 준비, 옌안을 지방정부로 인정, 장쉐량 신변보장과 장제스를 최고지도자로 추대할 것 등에 합의했다.
쑹이 온 지 3일 만에 모든 게 평화적으로 끝났다. 12월 25일 장제스는 석방돼 장쉐량과 함께 난징으로 돌아왔다. 성탄절에 장제스를 석방한 아주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쑹의 성탄 예배 참석 때문이었다. 시안 사변이 난해하고 희극성이 강한 이유는 순전히 장쉐량과 쑹 두 사람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제스는 난징까지 배웅한 장쉐량을 감금했고 7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풀어주지 않았다. 대만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호랑이를 풀어놓아선 안 된다”는 당부를 장징궈(蔣經國)에게 세 번이나 했지만 쑹은 장쉐량을 장제스 시신 앞에 인도해 작별을 고하게 했다. 장쉐량은 “두터운 정은 골육(骨肉)과도 같았지만 정견의 차이는 철천지원수와도 같았다”는 대련(對聯)으로 반세기에 걸친 은원을 정리했다.
장쉐량은 쑹의 각별한 보호를 받았다. “쑹이 하루를 더 살면 나도 하루를 더 살 수 있다”고 술회했다. 88년 1월 장징궈도 세상을 떠났다. 뉴욕에 있던 쑹이 귀국해 국민당 원로들과 접촉했다.
90년 6월 국민당이 마련한 장쉐량의 90세 축하연이 열렸다. 53년 만에 장쉐량의 모습이 공개됐다. 쑹은 불참했지만 당일 이른 새벽에 복숭아 9개를 장쉐량에게 보냈다. 참석했어도 앉을 자리가 마땅치 않았을 것이고 나이도 94세였다. 두 달 후 이들은 교회에서 우연히 만나 10여분간 안부를 주고받았다. 마지막 만남이었다. 다음해 3월 장쉐량은 미국으로 떠났고 6개월 후 쑹메이링도 뉴욕으로 돌아갔다.
미국 컬럼비아대 장쉐량 자료실에는 쑹이 대륙 시절 직접 그려 선물한 폭하청천도(瀑下聽泉圖)가 제일 앞에 걸려 있다. 500여 통의 편지도 소장돼 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쑹메이링과 주고받은 100여 통이다.
袁世凱의 한국인 부인들(18) |제18호| 2007년 7월 15일
▲위안스카이는 슬하에 17남15녀 모두 32명의 자녀를 두었다. 자녀들과 함께 자리한 위안스카이(가운데). [김명호 제공]
부인은 하나지만 ‘이타이타이’(姨太太, 혼례를 올리지 않고 한 집에서 독립적으로 생활하는 부인)는 많을수록 좋다는 것이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지론이었다. 그에겐 부인 외에 9명의 이타이타이가 있었다.
부인 위(于)씨는 허난(河南) 지주집안 출신이나 문맹이고 신구(新舊) 예절도 몰랐다. 위안은 중화민국 대총통이 된 후 외국 공사들과의 첫 번째 접견을 위씨와 함께했다. 한 외교사절이 위씨에게 정중히 악수를 청하자 위씨는 “꿱” 소리를 지르며 손을 뒤로 감췄다. 깜짝 놀란 위안스카이는 이후 그 어디에도 위씨와 동행하지 않았다. 장남 위안커딩(袁克定)이 위씨의 유일한 소생이었다. 커딩은 독일에 유학했고 영어도 유창했다. 위씨는 독일이 중국의 한 지역 명칭이고, 영어나 독일어도 중국의 숱한 방언 가운데 하나인 줄 알았다.
이타이타이 중 첫 번째인 다이타이타이(大姨太太)는 위안이 젊었을 때 도움을 준 기녀 출신이었고 둘째와 셋째, 넷째가 한국 여인이었다. 위안은 조선 말기 조선 주재 상무대표(駐朝商務代表)로 권세를 휘두를 때 양반집 딸 김(金)씨를 부인으로 맞았다. 김씨 집안에서는 하녀 둘을 딸려 보냈다. 이(李)씨와 오(吳)씨였다. 귀국 후 위안은 하녀들도 이타이타이로 삼았고 서열을 나이 순으로 정했다. 하녀 이씨가 둘째가 되고, 양반집 딸 김씨는 셋째가 됐다. 이씨는 4남2녀, 김씨는 2남3녀, 오씨는 1남3녀를 낳았다. 위안의 자녀 32명 중 15명이 한국인 이타이타이들의 소생이었다. 이들은 모두 고관 자녀들과 혼인했다.
위안의 차남으로 당대 최고의 골동품 수집가였던 위안커원(袁克文)은 김씨 소생이었다. 위안커원이 유산 한 푼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위안자류(袁家 )는 미국에 건너가 고학으로 물리학을 공부했고, 양전닝(楊振寧)· 리정다오(李政道)· 리위안저(李遠哲) 등 노벨상 수상자들을 키워낸 “중국 물리학계의 제1부인” 우젠슝(吳健雄)과 결혼했다.
위안스카이의 손자 70여 명과 그 자손들 중에는 괄목할 업적을 낸 이가 많다. 1973년 저우언라이(周恩來)는 “대(代)를 이어 발전을 거듭하는 게 위안씨 집안의 특징”이라며 한국인을 할머니로 둔 위안자류·우젠슝 부부에게 덕담을 건넸다.
한 사람의 올림(픽19) |제19호| 2007년 7월 22일
▲1932년 LA 올림픽에 중국 대표로 유일하게 출전한 류창춘. 김명호 제공
1919년 5·4 신문화운동(新文化運動)은 민주(民主)와 과학(科學)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모든 분야에 확산시켰다. 체육도 예외일 수 없었다. 부동자세, 구보, 총검술 등 군대식 체조들이 조금씩 멀어지고 육상이나 구기 종목 등이 생활 속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24년 국민체육의 확산에 주력했던 왕정팅(王正廷, 1882∼1961)에 의해 사회체육조직인 중화전국체육협진회(中華全國體育協進會)가 탄생했다.
왕정팅은 중국 최초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었다. 이때부터 외국인에 의해 주도되던 전국운동회가 중국인에 의해 조직되기 시작했다. 그간 전국운동회의 심판과 코치는 모두 외국인이었다. 중화전국체육협진회는 얼마 후 IOC에 정식으로 가입했다.
31년 9·18사변을 일으켜 둥베이(東北, 만주)를 장악한 일본은 32년 LA 올림픽에 동북의 선수를 일본 대표로 참가시켜 동북이 일본의 영토임을 국제사회에 선전하고자 했다. 둥베이 대학 체육과 학생 류창춘(劉長春)에게 눈독을 들였다. 다롄(大連) 출신으로 단거리 선수였던 류창춘은 100m 10.07초라는 중국 최고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가 32년에 세운 기록은 23년간 깨지지 않았다. 둥베이대학을 중국 체육의 요람으로 만드는 게 꿈이었던 설립자 장쉐량(張學良)은 32년 7월 1일 류창춘을 중국 대표로 올림픽에 출전시키겠다고 발표했다. 장쉐량이 경비를 지원했다. 대표단 6명 중 선수는 류창춘 혼자였다. 7월 8일 상하이(上海)에서 배를 타고 개막식 이틀 전 LA에 도착했다.
LA 올림픽은 2000여 명의 선수가 선수촌에 머문 최초의 올림픽이었다. 류는 여독이 풀리지 않았다. 400m는 포기하고 100m와 200m에 출전했다. 첫 경기에서 4위와 5위를 하는 바람에 탈락했지만, 류는 중국 최초의 유일한 올림픽 선수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중국인을 대표로 출전시키려던 일본의 기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류는 4년 후 베를린 올림픽에도 중국 대표로 출전했다.
베이징(北京) 올림픽을 1년 앞두고 중국에서는 류창춘의 일대기를 영화로 제작 중이다. ‘한 사람의 올림픽(一個人的奧林匹克)’이라는 쓸쓸하지만 비장감 넘치는 제목이다.
중국 올림픽의 아버지 王正廷(20) |제20호| 2007년 7월 28일
▲중국 최초의 국제올림픽위원회 종신위원이었던 왕정팅. 지난 3월 제10기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大) 5차 회의에 저장(浙江)성 대표로 참가한 텅터우촌 당위서기 푸치핑(傅企平)은 펑화(奉化)의 수이우창(稅務場)촌을 올림픽 성화 교체 지점으로 채택해줄 것을 건의했다. 왕정팅(王正廷, 1882∼1961)의 고향 마을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이를 계기로 지난 반세기 동안 잊혀졌던 왕정팅이라는 인물이 하루아침에 관심의 대상이 됐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왕은 고향에서 교회 학교를 마치고 1896년 톈진(天津) 북양(北洋)대학에 2기생으로 입학했다. 당시 톈진은 기독교청년회(基督敎靑年會, YMCA)를 중심으로 체육활동이 전국에서 가장 활발한 곳이었다. 1897년 11월 처음 개최된 교내 육상경기에 참가하면서 체육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1899년 미국인 선교사의 제창으로 4개 대학 연합운동회를 조직할 때 간사로 참여했고 1902년부터 톈진 YMCA가 주관한 톈진 운동회를 내리 3년간 직접 조직했다. 졸업 후 도일(渡日)해 중국YMCA일본지부(支部)를 결성했고 미국에 건너가 미시간대학과 예일대학에서 국제법을 전공한 후 11년에 귀국했다.
그는 현대체육의 중요성을 이해한 최초의 중국인이었다. 중국을 대표해 필리핀·일본과 함께 동양 최초의 국제적 체육단체인 원동체육협회(遠東體育協會)를 조직했고 13년부터 시작된 아시안 게임의 전신인 원동운동회(遠東運動會, Far East Games)를 상하이에 유치해 중국 최초의 국제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20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원동체육협회를 정식으로 승인했고 22년 그를 중국 최초의 IOC 종신위원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34년 일본이 만주국(滿洲國)을 원동체육협회에 가입시키려 하자 중국은 탈퇴했고 협회와 운동회는 해체됐다.
왕정팅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전까지 파리강화회의 전권대표, 중소(中蘇)교섭 전권대표, 중국대학 총장, 두 차례의 외교부장, 재정부장, 국무총리 대리, 주미대사, 참의원 의장, 중국적십자사 총재, YMCA 전국협회 총간사 등을 역임했다.
푸치핑의 건의가 있고 난 후 “잊혀진 외교관” “중국 현대체육의 비조(鼻祖)” “중국 올림픽의 아버지”라는 수식어가 그의 이름 앞에 붙게 됐다.
李鴻章의 화려한 미국 방문(21) |제21호| 2007년 8월 4일
▲광서제의 부친 순친왕(가운데)과 자리를 함께한 이홍장(오른쪽). 다리를 벌린 채 발을 땅에 붙이고 두 손을 펴 무릎을 눌러주면 허리가 꼿꼿해지고 위엄 있는 모습이 나온다는 좌여종(坐如鐘) 자세로 앉아 있다. [김명호 제공]
111년 전 여름(1896년 7월 21일 정오) 대청제국(大淸帝國)의 전(前) 직예총독(直隷總督) 겸 북양대신(北洋大臣)인 이홍장(李鴻章)이 미국 뉴욕항에 도착했다. 6개월 전부터 유럽 여러 나라를 순방하며 숱한 화제를 뿌린 74세의 노정객(老政客)을 보기 위한 인파가 아침부터 대로의 양 옆을 메우기 시작했다. 부두 주변 건물의 옥상, 창문, 나무 위는 물론 정박한 배들의 갑판까지 인산인해를 이뤘다. 자리를 잡기 위해 밤을 새운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이렇게 많은 인원이 자발적으로 나와 국빈을 환영하기는 미 합중국 건국 이래 처음이었다.
이홍장의 수행원은 40명이었다. 요리사와 차 끓이는 사람, 발 닦아주는 사람, 귀 후벼주는 사람 등 세분화돼 있었다. 갑판 위에 나타난 이홍장이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선 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천천히 좌우를 둘러보자 조복(朝服)을 걸친 미국 주재 중국외교관들과 넋 나간 듯이 바라보던 화교상단(華僑商團) 대표들이 동시에 몸을 90도로 굽혀 국궁례(鞠躬禮)를 행했다.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졌다. 호기심 많은 뉴욕인들에겐 역시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뉴욕 타임스는 “살아 움직이는 공자(孔子)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고 보도했다.
부두에 부려놓은 큰 짐만 300건이었다. 이홍장 혼자만 차(茶) 마실 때 쓸 히말라야 설수(雪水)와 광천수를 담아 밀봉한 대형 도자기, 도저히 형용이 불가능한 요리 재료와 술들이 들어 있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한 쌍의 앵무새와 꼬리가 긴 금계(金鷄) 등 이홍장이 평소 옆에 두고 즐기던 조류들도 일행이라면 일행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가장 보물처럼 끼고 다닌 것은 객사(客死)했을 경우 관목(棺木)으로 쓸 몇 쪽의 목판(木板)이었다.
이홍장은 일주일간 머물며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陸軍士官學校)를 구경하고 종교인들을 만났다. 대통령도 두 차례 만났지만 만주어(滿洲語)와 한문(漢文)으로 된 황제(皇帝)의 국서만 전달했다. “국력이 약한 나라는 외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자신의 생각인 양 회담 같은 것은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가 떠난 후부터 화교를 대하는 미국인들의 태도가 많이 개선됐다.
90세 老정객의 못 다 이룬 國共담판(22) |제22호| 2007년 8월 12일
▲장스자오(왼쪽)와 마오쩌둥. 평소 장을 존경했던 마오가 매우 공손한 모습으로 서 있는 게 이채롭다. [김명호 제공]
1956년 봄 중국공산당은 건국 후 최초로 국공합작(國共合作)을 제의했다.
49년 국공(國共)의 마지막 담판에 국민당 대표로 참석했다가 베이징에 눌러앉은 문사관(文史館) 관장 장스자오(章士釗)가 홍콩행을 자청했다. 홍콩에 나가 장제스(蔣介石)와의 대화 통로를 개설해 보겠다는 장스자오의 요청에 마오쩌둥(毛澤東)과 저우언라이(周恩來)가 동의했다.
장제스에게 전달될 편지가 작성됐다. 말미에 “펑화(奉化)의 선영과 옛집은 여전하고, 시커우(溪口)의 화초(花草)도 예전과 다름없다”라는 구절을 첨가했다. 펑화와 시커우는 장제스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찾았던 고향 마을이다. 펑화에는 부모의 무덤이 있고, 시커우는 일초일목(一草一木)이 눈에 선한 곳이었다.
홍콩에 도착한 장스자오는 국민당 주재원인 홍콩시보(香港時報) 사장 쉬샤오옌(許孝炎)과 회견했다. 쉬는 곧바로 귀국해 장제스에게 편지를 전달했다. 장제스의 부관은 “그날 밤 총통의 침실은 새벽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편지는 전달됐지만 대만해협(臺灣海峽)을 사이에 둔 샤먼(廈門)과 진먼(金門) 간의 포연은 그치지 않았다. 특히 5월 15일부터 일주일간 쌍방이 퍼부은 화력은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이때 느닷없이 필리핀이 남해제도(南海諸島)의 주권을 요구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포격이 중지됐고 국공 모두 남해제도는 중국 영토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대만은 함대를 파견해 국기를 게양하고 군대를 주둔케 했다. 중국에서는 모른 체했다.
저우언라이의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민족과 중국의 이익에 중요한 일이라면 언제고 손을 잡고 단결할 수 있다”라는 성명이 발표된 3일 후 문화인 차오쥐런(曺聚仁)이 대륙으로 들어간 것을 시발로 여러 명의 밀사가 양안을 오갔으나 문화대혁명으로 중단됐다.
장스자오는 73년 봄 마오쩌둥에게 다시 홍콩행을 자청했다. 그해 5월 장을 태운 전세기가 카이탁 공항에 착륙했다. 홍콩에 착륙한 최초의 중국 민항기였다. 다음날부터 십여 년 전 좌절된 국공 고위급 회담을 실현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이 90세의 중국 노인은 한 달 후 평생 냉정하고 엄숙했던 화려한 삶을 홍콩에서 마감했다.
난징대학살의 주범 다니 히사오(23) |제23호| 2007년 8월 18일
▲형장으로 향하는 난징대학살의 주범 다니 히사오. 장군 신분을 고려해 형구를 채우지는 않았다. [김명호 제공]
1945년 11월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중국 내 설립한 전범처리위원회는 베이징, 난징, 선양, 쉬저우, 지난, 타이베이 등 10개 도시에 전범구치소와 전범재판소를 개설했다. 그중 가장 관심을 끈 것은 이듬해 2월 난징에서 개정된 전범심판 군사법정이었다. 재판장 스메이위(石美瑜, 1918∼1992)와 5명의 심판관, 2명의 검찰관으로 구성된 난징 군사법정은 피고인들의 면면이 다른 지역을 압도했다.
난징대학살(南京大虐殺)의 주범 다니 히사오(谷壽夫, 1882∼1947)와 학살계획의 입안자, 중국인 죽이기 경쟁을 벌여 도쿄니치니치신문(東京日日新聞, 지금의 每日新聞)에 대서특필됐던 일본군 장교 등 화제의 인물들이 중국의 특별 요청으로 도쿄에서 압송돼 왔기 때문이다. 이들 외에 거물급 중국인 첩자(漢奸)들도 난징 법정에서 심판을 받았다.
다니에 대한 심판은 2월 6일에서 8일까지 중산둥(中山東)로의 리즈서(勵志社) 강당에서 공개적으로 진행됐다. 개정 첫날 1000여 명이 방청석을 메웠고 법정 밖에는 스피커를 설치했다. 육군 중장 다니가 지휘하던 일본군 6사단은 중화문(中華門)을 통해 난징에 입성한 후 28건의 단체학살을 자행했다. 19만 명 이상의 무고한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살인 경기’를 벌였던 ‘황군(皇軍)의 영웅’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와 노다 쓰요시(野田毅)도 6사단 소속 장교였다. 다니는 난징 공격은 시인했지만 민간인 학살은 부인했다. 학살 현장에서 목숨을 건진 100여 명이 증인으로 출석했고 발굴된 유골들 이 증거물로 제출됐다. 만행 장면을 찍은 기록물도 법정에서 상영됐다.
마침내 47년 3월 18일 군사법정은 다니에게 총살형을 선고했다. 4월 26일 다니는 중국 헌병들에게 이끌려 법정을 출발했다. 중산(中山)로에서 10년 전 만행이 있었던 중화문까지 군용 트럭 위에 앉아 중국인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보기 위해 수만의 인파가 거리에 운집했다. 흥분한 모습을 보인 사람들은 없었고 거리는 정적에 휩싸였다. 트럭 위에 앉아 형장으로 향하는 그의 모습은 지난날의 광란을 회상하는 담담한 모습이었다. 위화타이(雨花臺) 집행장에 도착한 다니는 중화문 쪽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新인구론’ 주장한 베이징대 총장 馬寅初(24) |제24호| 2007년 8월 26일
▲‘신인구론’ 발표 직후 베이징대학 기숙사에서 학생들과 담소하는 마인추. [김명호 제공]
1953년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과학적인 인구조사가 전국적으로 실시됐다. 총인구 6억193만8035명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국토 면적에 비해 인구가 적다는 쑨원의 우려가 무색해졌다. 전란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아무리 죽어도 줄지 않고, 죽이면 죽일수록 늘어나는 게 사람”이라는 말이 맞는 듯했다. 매년 1300만 명이 늘고, 2% 증가율이란 예측이 나왔다.
민생에 치명적인 게 인구 증가라고 확신하던 마인추(馬寅初, 1882∼1982) 베이징대학 총장은 57년 7월 5일 인민일보에 ‘신인구론’을 발표했다. 4년에 걸친 조사를 토대로 한 이 논문은 이후 50년간 중국의 모든 분야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가 열거한 인구의 급속한 증가 이유는 언제 보아도 흥미롭다. 예전엔 졸업이 실업을 의미했지만 사회주의 실시 이후 국가가 직장을 마련해주니 경제상황이 개선돼 결혼 숫자가 늘어났다. 부부가 같은 도시에 근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니 출산 기회도 많아졌다. 임신부에겐 56일의 휴가를 주고, 농촌의 산파들을 전문가들로 대체해 영아 사망률도 줄었다. 양로금 지급으로 노년 사망률도 감소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내전이 종식됐고 각지에 산재한 비적을 소탕해 비명횡사하는 숫자가 줄었다. 자본주의 국가에선 없애기 불가능한 창기(娼妓) 문제까지 해결해 이들도 가정을 꾸리게 됐다. 정부에서는 자녀가 많은 가정에 보조금을 주는 등 모든 여건이 출생률은 증가하고 사망률은 감소할 수밖에 없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대로 가면 식량과 취업, 생활 수준 등에서 모순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며 인구 억제를 통한 인구 품질의 제고를 역설했다. 그의 ‘신인구론’은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58년 1월 마오쩌둥이 “인구가 많은 게 좋을까 아니면 적은 게 좋을까? 지금은 인구가 많아야 한다”고 한마디 했다. 이때부터 ‘많아야 좋다(人多好)’는 것이 인구 문제의 주류사상이 됐다. 마인추는 호된 비판을 받았고 60년 1월엔 베이징대학 총장직에서 쫓겨났다. 이후 집 안에서만 칩거하던 그는 79년 베이징대 명예총장과 인구학회 명예회장으로 복귀했다.
노년 인구의 사망률 감소를 걱정했던 마인추는 82년 100세로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났다. |
첫댓글 대부분 처음 보는 사진이네. 사진만 봐도 격동의 중국 근현대사의 단면을 보는 듯하네. 소개해줘서 고마우이.
희귀한 사진 마다
짤막하지만 중국의 역사 단편을 콕집어 올려주니...
내가 일요일 마다 재미있게 읽는 기사일세~ ^^
시작했으니 계속 올려볼까 하네!
중국에 있으면서도 이처럼 요약 잘된글과 사진을 접하기가 쉽지않은데,아주 간결하고 의미전달을 잘한 내용 감사합니다!중구서 이정도 썰(?)은 풀어야 사람대접받지요,특히 사업장이 장제스고향과지척이고,장쉐량을 대만에 모셔(?)갈때까지 연금한 별장 ,루신의고향,북경대 초대총장의집 등이 있어서,역사의 파란이깃든곳이라서,공부좀해야 사람취급받으며 일을한답니다.참!우리가 방문한 완시다공장 부인이,임표의딸 조카랍니다,사진오릴께요,원자탄 개발자명단에는 우리총경리 캔디의 시아버지명단이 있다합니다.
사진도 희귀사진들이고...
김명호 교수의 군더더기 없는 담박한 글 솜씨가 일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