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 뿌리 내리기, 성장의 시간, 죽는 낟알에 놀라기
지미 보니치 신부
(136) 바빌론 강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네.
거기 버드나무에
우리 비파를 걸었네.
우리를 포로로 잡아간 자들이
노래를 부르라,
우리의 압제자들이 흥을 돋우라 하는구나.
“자, 시온의 노래를 한 가락
우리에게 불러 보아라."
우리 어찌 주님의 노래를
남의 나라 땅에서 부를 수 있으랴?
(시편 137장 1-4절)
세계가 겪고 있는 맥락 안에서 희망을 생각할 때 이 시편이 저의 뇌리에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안에 품고 있는 이야기들이 참 많습니다. 저로 말하자면, 그 중 몇 가지를 언급하고 싶은데요, 희망을 추상적으로 말하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이 이야기들은 희망이라는 문제와 함께 제가 겪고 발버둥 치는 맥락과 관계 있습니다. 어쩌면 이 이야기들이 여러분께서 자신의 이야기와 연결 짓는 걸 돕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몰타의 시민으로서 저는, 이 섬의 부패를 폭로한 현지 여성 기자가 당한 야만적인 암살을 아직 용인하지 않았습니다. 진실을 감추고 정의를 배반하고 용기 있는 목소리들을 침묵하게 하려는 책략들 앞에 우리들 중 다수는 무력합니다. 진실과 정의는 아직 가능한 걸까요?
지중해 (Mare nostrum, 우리의 바다)는 점점 더 묘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2013년 10월 3일과 2018년 5월 3일 사이에 16 749명이 익사한 것으로 추산됩니다. 이러한 현실에 대응하기가 더 어려워질 뿐 아니라, 이민자들을 희생양으로 돌리고 가장 약한 이들을 보호해야 할 법률을 이용해 약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이들을 공격하는 포퓰리스트 (민중주의) 지도자들이 강력히 부상하고 있습니다. 몇 주 전에는, 한 아이가 엿새 동안 바다에서 시련을 겪은 끝에 여기 항구에 들어온 234명의 이민자들에 대해서 자기 어머니가 한 말을 되풀이 했습니다 : « 당신들 나라로 돌아가세요 ». 이런 다음에, 이 아이에게, 이 어머니에게, 그리고 이민자들에게 어떤 미래가 있을까요?
이런 이야기들은 고통과 진저리 나는 신 자유주의 경제의 지배, 그리고 기독교 공동체 내에 자기 모순으로 드러나는 청렴의 결핍에 이르게 하는 위선에 우리의 눈을 뜨게 합니다. 희망은 아직 가능한가요?
시편의 저자는 이국 땅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들이 운다면, 그들은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희망의 노래의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습니다. 희망은 유흥이나 이성의 상실과 혼동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관찰해 보면, 우리가 보잘 것 없다고 느끼며 낙담할 정도로 전 세계에 걸쳐 악의 위력에 영향 받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다시 울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희망할 가능성을 되찾습니다.
« 당신네 나라로 돌아가시오 » 라고 외치는 것을 듣고, 한 현지 여성 기자가 « 우리 나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은 우리들이다 »라고 썼습니다. 비극의 한 가운데에서, 그녀는 남성들, 여성들, 그리고 어린이들이 그들의 인간성, 그들의 마음, 그들의 가치들을 되찾을 수 있는 근원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파브리스 하자즈가 말한 것처럼요 : « 하느님은 사람이 사람으로 남을 수 있도록 사람이 되신 것 입니다 ».
이런 맥락에서, « 희망이 가능한가? » 라는 질문은 « 당신은 희망하는 사람입니까? » 같은 개인적인 질문이나, 더 나아가 « 우리는 희망을 구현하는 공동체로 변모 했습니까? » 라는 질문으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가 아니라 우리가 믿는 것으로 걸어갑니다. 우리는 우리가 울고 있을 때에도 다른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구현하신 희망을 볼 것을 희망하며 걸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제게 1996년 알제리 티브히린에서 살해된 수도사들의 식별 과정을 보여준 영화 ‘신들과 사람들’의 장면을 상기시킵니다. 공동체는 극단주의와 폭력의 파고에 직면하고, 상황은 더 나빠집니다. 그들은 떠나야 할까요 아니면 남아야 할까요? 한 수도사가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 « 저흰 어쩌면 떠날지도 모릅니다 ». 마을 사람 하나가 묻습니다. « 왜 떠나시죠? » 그가 대답합니다 : « 저희는 나뭇가지 위에 있는 새들 같아서 날아가지 않을지 알지 못합니다 ». 한 여인이 대꾸합니다 : « 새들, 그건 우리에요. 여러분은 가지고요. 당신들이 떠나면 우리는 길을 잃어요 ».
희망은 생존과 관련이 없습니다. 희망은 결과와도 관계가 없습니다. 희망은 소명이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 우리 삶 전체를 요구하는 사명입니다. « 희망을 놓치지 맙시다! »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복음의 기쁨』86)
1. 뿌리 내리기 : 가지의 확장은 오래되고 새로운 뿌리에 달려있습니다.
« 우리 나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은 우리들입니다 ». 우리 시대의 가혹한 현실에 직면해 우리는 처음의 사랑의 기억을 되찾고 새로운 대응 방식을 모색해야 할 소명을 받았습니다. 샤를 드 푸코는 나사렛 예수 안에서 숨겨진 삶을 찾도록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숨겨진 삶이 희망의 고요한 힘이 됩니다.
I.
우리의 희망의 본질 중 하나는 우리의 뿌리의 질입니다. 농부가 가지 치기를 할 때 나무는 더 튼튼해집니다. 어떻게 해서 그럴까요? 나무가 새로운 가지들로 더 커질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새로운 뿌리를 발달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이루어질 때, 나무는 오래된 뿌리만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뿌리로부터 힘을 얻습니다.
희망은 낙관이 아닙니다. 낙관주의자는 현실을 피하고 우리가 하느님의 왕국으로부터 멀리 있다는 것을 마주하지 않고, 개입되려 하지 않으며 자신을 깎기를 피합니다. 그는 일종의 마법으로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뿌리를 발달시켜려는 어떠한 시도도 없습니다. 그와 정반대로,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의 왕국으로부터 참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직면하도록 부름 받았고 우리의 뿌리를 발달시키고자 애씁니다.
• 우리 이웃들의 희망과 불안을 알고 그들과 함께 걸으며 그들이 새로운 뿌리를 발달시키도록 도울 것입니까?
• 우리가 살고 있는 곳과 이 세상에서, 우리를 깎고 더 멀리 나아가도록 우리를 격려하는 도전들은 무엇입니까?
• 그리고 우리가 재발견해야 할 오래된 뿌리는 어떤 것입니까?
II.
우리의 뿌리로 돌아오는 것, 그것은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 방식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프란츠 잘릭스는 1976년 아르헨티나의 끔찍한 전쟁 동안 납치되고 투옥되었던 예수회 사제들 중 한 명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비유를 설명하면서 그는 어떻게 예수님이 ‘성취에 대한 압력’을 내려놓도록 우리를 초대하시는지 보여줍니다. « 가지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포도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가지들은 열매 맺기에 온 힘을 모읍니다. 그들은 적시에 충분한 열매를 맺지 못할까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살아 남을 것을 걱정합니다. 예수님, 그 분 역시 포도가 자라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은 염려스러운 돌봄이 지나친 가지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압박하고 지쳐 버리는지 아십니다. 여러분은 열매에 집중하는 대신 포도 나무와 결합하십시오. 그러면 포도 나무의 힘이 여러분을 통과해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여러분은 압력,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강박 관념과 모든 긴장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너무 여러분 자신에 집중해 있어서 여러분과 포도나무의 연결이 끊어져 어떤 활기도 여러분 속에 흐르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합니다. 여러분의 근원으로 돌아오면 모든 것이 주어질 것입니다 ».
이 또한 샤를 드 푸코가 교회에 한 봉헌, 즉 나사렛에서 하느님의 신비를 재발견한 것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주변부 (나사렛) 로부터 권력의 중심 (예루살렘)에 예언적인 신호를 하십니다. 그분은 그것을 노기나 증오로 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위험에 빠뜨리는 몸짓을 사랑으로 하십니다. 하느님은 스스로를 낮추시고 그렇게 구원하십니다. « 스스로를 낮추지 않는 교회는 NGO (Non-Governmental Organization. 비정부 기구) 가 될 뿐입니다 » (사이프러스의 마론파 대주교 유세프 수에이프). 우리가 교회 그리고 우애회로서 우리 자신에 젖어 있게 되거나, 그냥 기관이 되거나, 우리 자신과 우리의 업적에 너무 집중하게 되면 희망의 원천이 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 명성을 얻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공하려고 하는 우리 시대의 문화에 끌려가지 않도록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 자신을 낮춤으로써 구원한다는 방식으로 예수님을 모방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요셉 라칭거 (Joseph Ratzinger) 는 그것이 바로 교회에 있어서 주요한 도전이며 희망이라고 인정합니다. 1976년에 출간된 책에서 그는 선언합니다 :
‘마지막 장소’를 찾아 나사렛을 발견한 것은 샤를 드 푸코였습니다. 가슴 가장 깊숙이 그를 사로잡은 것이 나사렛입니다. 그는 조용하고 가난하고 근면한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예수님 자신이 먼저 이 말씀을 사심으로써 그것을 설명해 주셨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헐벗고 돌아가시기 전에 나사렛에서 마지막 장소를 택하셨음을 알았습니다. 시리아의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예수님에 대한 살아있는 묵상 안에서, 거기서 새로운 길이 교회를 위해서도 열린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에 있어서 가난의 재발견이었습니다. 나사렛은 교회에 영속적인 메시지를 가집니다. 새로운 계약은 성전에서도, 신성한 산 위에서도 아니고, 아무도 대단한 것을 기대하지 않았던 성모님의 작은 거처에서, 노동자의 집에서, « 이교도들의 갈릴리 »의 잊혀진 장소들 중 하나에서 시작합니다. 그로부터 만이 교회가 새로운 출발과 치유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어떻게 우리는 계속해서 이런 교회의 부흥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2. 성장의 시간 : 씨앗 하나가 열매를 맺는데 100년 이상이 걸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고립된 개인들로 변모시키는 대량 소비 사회에서, 희망은 우리가 오늘, 여기서, 지금 취할 수 있는 열매와 혼동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은 왕국의 관점에서 좋은 씨앗을 뿌리는 인내와 더 관계 있습니다. 희망은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포함하며 현재뿐 아니라 미래에 관한 것입니다.
I.
샤를 드 푸코가 (아동 교육에 관해) 그의 여동생 마리 드 베니-아베스에게 쓴 글은 희망이라는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에 있어 우리를 깨우쳐 줄 수 있습니다 :
최선을 다해서 선하신 하느님이 주시는 빛으로 자식들의 미래를 만들어주려고 애쓰는 것은 부모의 의무지. 하지만 빛에 있어서, 선하신 하느님은 우리 모두에게,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고 그날 그날 우리의 길을 걸어가는 데에 필요한 만큼만 주셔. 우리는 우리의 소견에 따라 최선을 다하되, 성공하지 못하는 것에 너무 힘들어하지 말자. 하느님은 이 상태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그리고 종종 우리가 감히 바라고 꿈꾸지 못할 정도로 더 잘 우리의 일들을 돌보아 주실 것임을 확신하자. 그분께서는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것 보다 너무나 더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저는 샤를 드 푸코의 이 편지에 감동 받았습니다. 누이와의 애정 어린 관계의 단순함 속에서 그는 가슴 속에 희망의 비밀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공에 대한 자신감이 아닙니다. 그는 약속과 책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가능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분별 있는 사랑. 그것은 무엇보다 하느님의 선하심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입니다.
그것은 저에게 예수회 수도사 욜렌스 푸그가 차드의 마리아회 공동체를 방문한 일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가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
« 여러분은, 왜 여기, 이토록 불편하고 모든 것이 그렇게 어려운 곳에 여전히 머물고 계십니까? » 그리고 그들이 준 대답은 저로 하여금 오랫동안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 « 하느님의 어머니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가까이에 있고 싶어서 십자가 옆에 계셨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어머니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이 십자가에 못박혔기 때문에 십자가 옆에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형제들이 고통을 당하고 커다란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있습니다. »
그들은 사랑, 애정, 우애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얼굴들을 보고 그들의 삶을 온전히 내어줄 정도로 그 얼굴들에 감응하는 능력을 키운 것입니다.
II.
정보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우리는 무관심의 정신을 수반하는 피상성이 세계화될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희망은 [복음] 선포에 감동해서 진심으로 대응하고 구체적으로 동참한 개개인과 공동체에 달려 있습니다.
십자가 발치에서, 우리는 또한 사랑하는 우리 주님의 시각에 힘입어 길러집니다. 주님의 사역이 줄어들고 제자들이 용기를 잃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왕국의 비유들을 발표하십니다. 겨자씨는 그렇게 작지만, 자라면서 씨 뿌리는 사람을 놀라게 합니다. 좋은 씨앗을 뿌리지만, 적이 동시에 나쁜 씨를 뿌리는 것을 알게 되는 사람의 비유. 그분은 시간의 반죽 속에서 일종의 누룩과 같은 희망을 말하십니다.
우리의 희망은 하느님이 시간을 준비하시고 시간을 보전하시고 시간 속에 들어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역사 속에 개입하시고 계속 그렇게 하십니다. 하느님은 각각의 사람과 관계를 형성하시고 사람이 되신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간의 충만함으로 인도하십니다. 이는 일치의 성사, 그 분의 교회인 우리를 통해 계속됩니다. 우리가 시간의 한계를 경험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시간은 늘 모자랍니다). 우리는 또한 시간이 나빠지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적이 한 일을 볼 때 우리는 상황이 악화되어 가기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시간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시간은 생명을 주는 사랑에 젖게 되었습니다. 지금,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 시간은 없습니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통해 하느님은 우리를 계속해서 변모시키십니다. 그것이 언제나 하느님의 시간입니다.
우리의 역할은 하느님이 우리를 빚으시도록 계속 맡기는 것입니다. 시대의 표식을 분별하고 그에 답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최근 유럽의 사법 평화 위원회 책임자가 선언했습니다 : « 우리는 카이로스 순간들을 추구합니다. 우리가 모임을 가질 때 카이로스 순간들을 식별해서 우리가 있어야 할 곳으로 가려고 노력합니다. » [역자 주. 카이로스 kairos는 그리스어로 ‘적기’를 의미하는데, 크로노스chronos가 인간이 경험하는 물리적인 시간을 가리킨다면, 카이로스는 하느님의 결정적인 개입이 일어나는 ‘하느님의 시간’을 의미한다.] 카이로스 순간들은 큰 변모가 있는 곳에 있을 수 있습니다. 거기서 하느님이 개입하십니다. 이 하느님의 존재 하심에 대한 우리의 답변이 희망의 원천이 됩니다.
• 우리들 삶의 장소에서 우리가 응답했고 희망의 원천이 된 카이로스 순간들은 어떤 것들입니까?
• 우리의 역사 어디에서, 우리 우애회가 카이로스 순간들에 창의적으로 반응했던 긍정적인 경험들을 볼 수 있습니까?
• 우애회로서 우리가 오늘 응답하도록 부름받은 카이로스 순간들은 어떤 것입니까?
III.
하지만 그것은 또한 우리 자신의 것만이 아닌, 하느님의 행위에서 영감 받은 시각을 전제로 합니다. 샤를 드 푸코는 즉각적인 성공의 필요성으로부터의 자유를 그의 누이와 함께 나눕니다.『복음의 기쁨』222 속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에 따르면 : « 시간은 공간보다 우월합니다 ». 충만과 한계 사이에 긴장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즉각적인 결과에 집중하고 가시적인 결과만 추구한다면, 우리는 낙담하거나 오만하게 됩니다. 현실을 즉각적으로 변화시키고 싶어하는 욕망은 좌절감과 더불어 궁극적으로 무관심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 가능하지 않은데, 왜 굳이 그 무엇이건 시작하려 하겠습니까.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우리가 모든 것 (지배적인 공간)을 통제하는데 집중하기 보다 시간에 초점을 맞추기, 즉 ‘변화의 과정을 시작하기’를 권고하십니다. 이 변화의 과정은 우리들의 시간에 구애 받지 않습니다. 모세가 약속된 땅을 향해 해방의 과정을 시작했지만 그는 그곳에 들어가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이 점에 있어 영적인 깊이의 부족은 비관주의나 운명론, 무기력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제 주변에서 보는 것, 세상과 제 자신의 모든 악을 생각하면 저는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기 시작하고 결국 무관심한 사람들 편에 합류하고 맙니다. 제가 아무런 결과도 보지 못한다면, 무슨 이유로 편한 것을 멀리해야 하겠습니까?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교회로서의 우리의 사명은 하느님의 왕국에 의해 영감을 받은 삶으로 이끌 과정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권고하십니다. 샤를 드 푸코는 이러한 진리의 탁월한 비유가 아닐까요? 그의 사상과 삶은 몇몇 주교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이분들은 제 2 바티칸 공의회 때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이기를 제안했습니다. 당시에 그분들은 제한적인 성공을 거뒀습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더불어 이것은 우선과제가 되었습니다. 어떤 씨앗들은 자라서 열매를 맺는데 100년이 걸립니다. 타 종교 사람들과의 만남을 포함해서, 만남의 문화에 있어서도 같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관계는 우리의 명령에 따라 발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관계 그 자체의 신비에 자리를 내주어야 합니다.
• 어떻게 이 희망에 대한 이해가 우리가 포기해야 하는 것, 우리가 고발하고 공표해야 할 것을 식별하도록 우리를 도와줍니까?
3. 죽는 낟알에 놀라기 : 그것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I.
탈 낙관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세계적, 지역적인 수준에서 수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인간적인 경험의 핵은 예수 그리스도, 즉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육화된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 «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세상을 이겼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 ». 핵심은 우리의 세례, 우리의 죽음과 그리스도와의 부활입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하지만, 핵심을 놓치지 않으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신 해석을 통해 이 신비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은 땅에 떨어져 죽는 낟알입니다. 아주 종종, 우리는 파스카의 신비를 2막으로된 이야기로 간주합니다 : 1막 - 수난과 죽음, 2막 - 부활. 우리는 복음을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신화로 쉽게 변모시킬 수도 있습니다. 헐리웃 영화처럼 예수가 자신을 위해 불멸을 되찾는다는 것이죠. 이는 « 사후의 나의 삶 » 이나 « 이생에서의 안락과 행복 »과 같이 우리가 개인적이고 이기적으로 불멸을 추구하는 것을 정당화할 것입니다.
진실은 다릅니다 : 땅에 떨어진 낟알은 죽음과 동시에 성장합니다. 자기 자신의 헌신은 위대한 역동의 장이 됩니다. 우리가 이 삶과 부활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할 때 우리는 역동과 희망의 근원이 됩니다. 우리가 과거의 확신들을 버리고 하느님의 성령이 주시는 놀라운 일들에 열려 있을 때, 희망은 우리를 인도합니다.
• 하느님은 우리가 어디에서 헌신하도록 초대하십니까?
• 우리는 무엇을 포기하도록 요청 받습니까?
• 우리는 자신과 우애회 어디에서 새로운 삶, 신성한 삶의 징후들을 발견합니까?
II.
사람들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을 둘 때 우리는 희망의 표시가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멀리서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성육신에 관한 명상에 있어서 이냐스 성인은 피정 참가자에게 세상을 - 그것이 품고 있는 모든 악과 함께 - 바라보면서 하느님을 묵상하고 그런 다음 자신의 아들을 보낸다는 결정에 대해 깊이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영성체의 기쁨 (« 함께 하기 », « Almajja », « 엠마누엘 »)을 통해서 삶의 기쁨을 나누시면서 구원하십니다. 그리스도는 동행하시고 맞아주시며 솔선하시고 두드리시며 눈을 바라보고 삶으로 이끄십니다. 그분은 현재진행 중이고 결코 멈추지 않는 파스카 / 통행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물으십니다 : «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길 바라느냐? » 우리는 종종 사람을 만나기도 전에 약을 처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의사소통과 계약을 수립할 수 있게 하는 언어를 배우기도 전에 먼저 선행되어야 할 일을 사람들에게 말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개종을 권유해서 사람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근심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의 표현 속에서 희망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샤를 형제는 « 보편적인 형제 »가 되겠다는 그의 선택으로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그것이 « 쉬운 해결책 »을 선택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279. 이 확신은 “신비감”이라 합니다. 이는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주며 스스로를 하느님께 맡기는 사람은 분명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아는 것입니다. (요한 15장 5절 참조) 이 풍성한 결실은 때로 보이지 않을 수도, 손에 잡히지 않을 수도, 측정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라고 말하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삶이 결실을 맺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한 행동과 다른 이들에 대한 진심 어린 관심 가운데 그 어느 것도 헛되지 않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행동과 아낌없는 수고 가운데 무의미한 것은 없습니다. 고통스러운 인내도 헛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이 생명의 힘처럼 세상을 채우고 있습니다. 가끔은 우리의 노력들이 결실을 맺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사명은 장사나 사업 계획이 아니고 인도주의적인 조직이나 광고에 따라 모인 사람 수를 세는 공연도 아닙니다. 사명은 무엇으로도 가늠할 수 없는, 보다 대단히 심오한 어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활동을 통해서 우리가 결코 가 보지 못할 세상의 어떤 곳에 은총을 풍성하게 베풀려고 하시는 지도 모릅니다. 성령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원하시는 때에, 원하는 곳에서 활동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결과를 보려 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합니다. 우리는 오로지 우리의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창의적이고 아낌없이 헌신하면서도 하느님 아버지의 포근한 품속에서 쉬는 법을 배웁시다. 계속해서 전진하고 끝까지 노력하되, 하느님께서 그분 보시기에 좋게 우리의 노력에 열매를 맺게 해 주시도록 맡깁시다. (『복음의 기쁨』279)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우리들 삶의 헌신을 요구합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가장 큰 사랑의 하느님으로 자신을 나타내셨고, 그것이 우리의 희망이라면,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 속에 함께할 때 우리는 그들에게 희망의 한 방울이 될 것입니다. 파브리스 하자즈가 말합니다 : « 일치를 전하기 보다 고객을 유치하려고 하는 이 보여주기 식 그리스도교, ‘클럽메드’ [역자 주. 유명 리조트 체인] 와 같은 교회는 그만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분명 기쁨의 자식들입니다. 그러나 기쁨은 위기에서 오며 우리를 온전히 내걸고 증언하도록 격려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
결론
이국 땅에서 기쁨의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런 저런 방식으로, 우리는 항상 어떤 외국을 여행하겠지만, 우리가 목적 없이 여행하지는 않을 것이고 우리를 위해 머물 곳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이 머물 곳, 이 왕국의 증인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들, 특히 가장 약한 이들이 그들의 희망의 근거로써 한 줄기를 찾을 수 있도록 우리가 지상에 뿌려진 씨앗들이 되겠습니까?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시편 126장 5-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