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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의 미래 스크랩 한국불교의 문제점과 그 개선 방안*
로터스 추천 0 조회 264 08.06.09 10:23 댓글 6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불교의 문제점과 그 개선 방안*

 

 

 

秀昌(摩聖)**

 

. 머리말

. 종파 난립의 문제

. 법사 제도의 문제

. 사찰 관리의 문제

. 승려 자질의 문제

. 맺음말

 

 

. 머리말

 

현대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제반 분야에서 그 발전의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그야말로 빛의 속도로 모든 현상들이 변하고 있다. 급변하는 현대에 어떻게 적응하느냐에 따라 개인은 물론 국가의 흥망이 달려있다. 역사적 산물(産物)인 종교도 예외일 수는 없다. 물론 종교의 본질 혹은 교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보편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종교적 현상은 그 종교가 몸담고 있는 주변 환경의 영향을 직접 혹은 간접으로 받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현재의 주변 상황들이 너무나 급속히 변하기 때문에 미래에도 종교가 제 기능을 다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염려하게 되는 것이다. 정수일 박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오늘의 ‘세계화(Globalization)’와 ‘지구촌(global village)’ 시대에도 종교의 본질과 기능에 대한 물음은 종교학계의 초미의 관심사로 제기되고 있다.1)

세계의 불교 지도자들도 이처럼 급변하는 시대에 불교가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이를테면 불교가 미래를 선도하고 사회의 제반 문제에 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미래에 불교가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불교가 세계의 정신사를 이끌 수 있을 것인가? 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2) 마치 미래학자들이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교학자들도 나름대로 그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비록 그들이 찾아낸 해결책들이라 할지라도 원론적인 것에 불과할 뿐 모든 불교국가에 똑같이 그대로 적용 가능한 구체적인 대안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나라의 불교역사와 사회적 환경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불교의 미래에 대한 비전은 한국의 불교도들에 의해 제시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한국불교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선 현재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점검해 보고, 그 개선점을 찾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왜냐하면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해결책을 강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불교가 안고 있는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몸이 치명적인 질병에 걸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모르다가 어느 날 그 질병에 걸려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을 때는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사실 의사가 무슨 질병인지를 안다는 것은 곧 그 병의 원인과 완치된 상태, 그리고 그 치료법까지 알 수 있음을 뜻한다. 반대로 무슨 질병인지 모른다는 것은 그 치료법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3)

현재 한국불교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은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여기서 그러한 문제들을 모두 다룬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무엇이 문제인지를 진단하는 것도 순전히 주관적인 것일 수도 있다. 필자는 평소 한국불교가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이 사회에 도움을 주는 종교로 남을 수 있을 것인가? 한국불교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 출발하여 한국불교의 문제점들을 다음의 몇 가지 주제로 분류하여 그 대안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즉 ①종파 난립의 문제(보수와 진보의 문제), ②법사 제도의 문제(출가와 재가의 문제), ③사찰 관리의 문제(경영과 법석의 문제), ④ 승려 자질의 문제(본업과 부업의 문제) 등이다. 여기서 제시한 문제점들은 필자가 개인적으로 남방 상좌부 불교국가의 사원에서 직접 생활하면서 느낀 것도 있고, 초기불교와 상좌불교사를 공부하면서 발견한 것도 있다. 이러한 필자 나름의 문제 진단과 그 해결책에 동의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전혀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이후에는 필자의 주장이 옳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 종파 난립의 문제

 

현재 한국불교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종파 난립일 것이다. 불교재산관리법 폐지 이후 한국불교에서는 수많은 신생 종단이 출현했다. 현재로선 그 정확한 현황조차 파악하기 어렵다. 소속 사암이 전혀 없는 한 개인의 종단도 있고, 심지어는 무속인이 불교의 종단명을 내걸고 영업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른바 승려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의 복장과 생활방식도 천차만별이다. 기존의 승려가 자신의 소속 종단을 탈종하고 별도의 종단을 창종하는 경우는 좀 나은 편이다. 자질이 부족한 이들로 말미암아 한국불교의 이미지가 크게 손상되고 있다.

이러한 종파 난립의 근본 원인은 특별한 법적 규제나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헌법으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누구나 새로운 종단을 만들 수 있고, 돈만 있으면 사찰도 건립할 수 있다. 종교 행위를 하는데 별도의 자격증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종단은 계속적으로 생겨날 전망이다. 그렇다고 어떤 외부의 힘이나 공권력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도한다면 한국불교 전체의 자멸을 초래할 것이다. 이러한 해결책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이 종파 난립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특별한 대책이 있는가. 그런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너무 크게 염려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러한 군소 종단들은 당대 혹은 그 다음 대에서 모두 소멸될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 근거를 불교사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불교의 역사는 한마디로 보수파와 진보파의 갈등과 대립 구도 속에서 새로운 불교의 탄생을 가져왔다. 일본의 불교학자 마스다니 후미오(增谷文雄)는 ‘불교의 역사는 이단(異端)의 역사’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불교의 이단은 기독교적 이단과는 그 양상이 다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기독교의 역사는 이단을 색출한 역사이며, 이단을 추방한 역사이다. 그것에 비길 때 불교의 역사는 그 양상을 달리한다. 다시 말해서 불교에서 이단을 대하는 태도가 기독교의 경우와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이다.4)

역사적으로 불교는 제2결집을 계기로 상좌부(上座部 Theravāda)와 대중부(大衆部 Mahāsaghika)로 분열되었다. 붓다가 돌아가시고 나서 백년쯤 지난 후의 일이다. 갠지스 강 중류의 북쪽에 위치한 베살리(Vesālī)라는 도시에 살고 있던 밧지족(Vajjian) 비구들이 열 가지 비율적(非律的) 행동 관습5)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모두 계율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제2결집’이라고 일컬어지는 장로들의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밧지족 승려들이 주장하던 열 가지 사항은 모두 비법(非法)이라고 판결되었다.6) 즉 계율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정통파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그러나 베살리의 비구들은 그러한 결정에 승복하지 않고, 다시 다수의 동지를 규합하여 다른 회의(그것을 大合誦이라 한다)를 열어 장로들과 결별하고 만다. 이것이 불교에서 일어난 분파(分派)의 시작이다. 그때 분립한 것이 바로 진보적인 성향을 띤 대중부였다.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명백히 붓다의 사상을 그대로 고수해 가려는 정통파에 대한 비판적 견해로 차있다.7) 이와 같이 상좌부와 대중부로 나뉘어진 것을 근본분열(根本分裂)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근본분열 이후, 또 다시 보수파와 진보파로 분열하여 18부파가 되었다. 이것을 지말분열(枝末分裂)이라고 한다.

이러한 지말분열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는 남방과 북방 모두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근본분열 이후에 발생한 18부파도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오직 원래의 상좌부만 남고 부파불교 시대의 수많은 부파들은 현존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한다. 불교사에 있어서 보수파와 진보파의 대결은 언제나 보수파가 승리했다.

한편 근대 한국불교사에서 큰 분기점이었던 불교정화(佛敎淨化)8) 혹은 불교분규(佛敎紛糾)로 불리는 일명 비구대처간의 싸움의 결과도 비구측의 일방적인 승리였다.9) 대법원에서 결혼하지 않은 비구들에게 사찰을 넘겨주라는 판결이 내려졌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정치적 음모와 여러 가지 사정들이 있었겠지만 세속 사람들은 사상과 교리 등은 문제로 삼지 않는다. 오직 어느 쪽이 계율을 더 철저히 지키느냐로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스리랑카의 불교사에서도 보수적이었던 상좌부의 대사파(大寺派 Mahāvihāra)와 진보적이었던 무외산사파(無畏山寺派 Abhayagiriya-vihāra)간에 1,000년에 걸친 반목과 대립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보수적인 대사파만 살아 남고 진보적인 무외산사파는 소멸되었다.10) 이 외에도 세계 불교사에서 보수파와 진보파의 대립에서 보수파가 승리한 예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와 같이 종교는 사회 현상과 달리 새로운 변신을 꾀하는 것은 곧 자멸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불교를 개혁한다는 것은 곧 쇠망을 의미한다. 혁신적인 사상 혹은 그 제도에 일시적으로는 동조하여 따르는 무리가 있을지 모르나 시간이 경과하면 그 속에서 다시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져 서로 반목하다가 결국에는 모두 자멸하고 만다. 따라서 최후에는 가장 보수적인 성향을 띠고 있던 집단만 남게 된다는 것이 역사적 교훈이다.

현재 한국에서 조계종이 대표 종단으로 존립하고 있는 것도 한국의 불교 종단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성향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교단, 즉 외형상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이 없는 종단들도 있다. 이러한 종단들은 앞으로도 계속 교세가 확장된다고 할지라도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종단으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적 전통성을 계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에 단 한 명의 비구가 남더라도 그가 속한 종단이 한국불교를 대표하게 될 것이다. 보수와 진보의 구별은 율장에 명시된 계율에 대한 엄격함과 느슨함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가능한 옛 전통과 계율을 존중하고 지키려고 노력하는 쪽이 보수파이고, 옛 전통과 계율을 무시하거나 지키지 않으려고 하는 쪽이 진보파이다.

특히 한국의 신생 종단들은 이념과 사상에 의해 분파 된 것이 아니고, 조직과 인맥, 그리고 재산 때문에 나누어진 것이기 때문에 붓다께서 제정한 계율에 의지하지 않는 한 시간이 경과하면 스스로 소멸될 것이다. 이러한 속성 때문에 불교에서는 이단을 추방하거나 제도적으로 새로운 종단을 만들지 못하게 막지 않는다.

따라서 아무리 새로운 종단을 만들어도 최후에는 가장 보수적인 성향을 띤 종단만 미래에 남게 될 것이다. 이러한 보수와 진보의 관계는 개개의 승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를테면 아무리 학식이 뛰어난 스님이라 할지라도 세상 사람들은 계율을 지키는 율사(律師)를 더욱 우대하고 존경한다. 경쟁 관계에 있는 두 스님 중에 어떤 중요한 자리에 지계자(持戒者)가 추대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결론적으로 종파 난립을 억제하기 위한 최선책은 전통 종단에서 신도교육을 강화시키는 길뿐이라고 생각한다. 불교의 교리와 전통 및 역사에 대한 확고한 식견이 갖추어지면 올바른 신행 생활에서 벗어날 염려가 없다. 또한 신흥 종단들도 추종자가 줄어들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간판을 내리고 문을 닫게 될 것이다. 시장경제의 원리가 종교 현상에도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 법사 제도의 문제

 

현재 한국불교계에서는 법사(法師)라는 신분으로 교화 활동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법사는 출가자의 신분이 아니면서 사찰 혹은 포교당을 직접 운영하고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별도의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 여가에 불교 포교를 위해 헌신하는 재가불자는 제외한다. 이와 같이 한국에서는 법사들이 종교행위에 종사하는 것이 통용되고 있다. 이것을 편의상 ‘법사 제도’라고 부른다. 이러한 법사 제도는 다른 불교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현상이다.

한편 상좌불교국에서도 한국의 종립학교의 교법사와 비슷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Dhamma Teacher’들이 있다. 이들은 ‘불교 학교(Dhamma School)’에서 교사로 일하거나, ‘불교명상 센터’에서 명상(Vipassanā)을 지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재가자 신분임에 틀림없다. 이들은 직업적인 종교인이 아니라 일종의 자원 봉사자들이다. 이들은 오직 불교 홍포를 위해 헌신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나라의 법사들과 같이 사찰 혹은 포교당을 직접 운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전통적으로 불교교단은 비구(Bhikkhu)비구니(Bhikkhuni)의 출가중(出家衆)과 우바새(Upāsaka)우바이(Upāsika)의 재가중(在家衆)으로 이루어진 이중구조(二重構造)로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 출가자도 재가자도 아닌 법사중(法師衆)이 추가되어 삼중구조(三重構造)로 되어 버렸다. 이러한 현상은 교단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이 법사 제도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거나 거론하지 않는다. 이 제도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거나, 알고 있더라도 법사들의 집단적인 반발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한국불교계에서 전개되고 있는 일부의 법사와 재가불자들의 움직임은 위험 수위에 도달해 있다. 이들의 활동 상황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주장과 활동은 마치 대승불교 흥기(興起)의 상황과 너무나 흡사하다.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초기 대승불교도들이 부파불교 교단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했던 것과 똑같다. 그들은 지금 한국불교 승려들에 대한 불만을 직접 혹은 간접으로 토로하고 있다. 그들은 승려들의 비리를 부각시켜 승단의 부패상과 무능함을 폭로하고 있다. 또한 중요한 종단의 정책과 운영 및 재정에까지 관여해야 되겠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자신들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초기 대승불교의 법사들이 했던 것처럼 자신들이 직접 나서야되겠다고 선포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법사들이 직접 한국불교를 이끌어 가야되겠다고 주장할 것이다. 결국에는 동조자들과 함께 법사종단 혹은 재가종단을 출범시킬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사태에까지 가서는 안되겠기에 여기서 이러한 법사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한국불교에서 법사(法師)라는 칭호와 제도가 생긴 것은 군종(軍宗) 법사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고 있다. 남북한이 대치하고 있는 특수한 상황에서 생긴 것이다. 이들은 승려이면서 또한 군인이라는 특수한 신분이었다. 이들이 군복무를 마치고 승단으로 복귀한 사람도 있었지만, 이들 중에는 군복무 당시 결혼하여 가정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이 제대 후 돌아갈 곳이 없었다. 이러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출가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재가자도 아닌 제삼의 신분인 법사라는 제도가 생기게 된 것이다. 그 이후에는 군법사가 아닌 일반 승려로서 환계(還戒)했거나 재가자 중에서 삭발염의(削髮染衣)하지 않고 교단에서 교화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법사 제도와는 약간 다른 경우이지만, 한국불교태고종에서는 한때 ‘유발승(有髮僧)’이라는 제도를 시행한 적이 있다. 비록 머리는 깍지 않았지만 승려 신분으로 인정한 것이었다. 또한 승려는 아니지만 사찰의 대표자 자격을 부여하는 ‘교임(敎任)’이라는 제도를 두고 있다. 교임은 승려는 아니지만, 사찰의 주지(관리자)로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몇몇 종단의 여성 수행자들은 삭발하지 않는다. 이들을 진정한 의미의 ‘비구니’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이러한 법사와 교임에 대해 좋게 말하면 전법의 사명을 띤 이 시대 부루나의 후예들이다. 하지만 이들에 대해 나쁘게 말하면 승려도 속인도 아닌 비승비속(非僧非俗)의 특수한 제삼의 부류들이다. 자타카(Jātaka 本生潭)에 나오는 박쥐족에 속한다. 쥐도 새도 아니라는 의미다. 새의 무리 속에 있을 때는 쥐로 행세하고, 쥐의 무리 속에 있을 때는 새로 행세한다.

원래 ‘법사(dharma-bhāaka)’라는 말이 최초로 등장하는 문헌은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 4라고 한다. 여기에 “젊은 선남자선여인이 법사(法師 dharma- bhāaka)가 되어 한 달에 81415일에 법을 설할 때, 공덕을 얻는 것 또한 헤아려서는 안된다”11)고 설하여, 법사가 되는 것은 남자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님을 나타내고 있다. 법사는 대승에만 있는 독특한 설법자였던 것 같다”12)라고 한다.

팔리어 담마-바나까(dhamma-bhāaka)는 ‘진리가르침을 암송하는 사람’ 즉 ‘송법사(誦法師)’를 일컫는 말이다. 중화민국에서는 남자 스님[비구]를 법사(法師)라고 부르고, 여자 스님[비구니]를 법니(法尼)라고 칭한다. 중화민국에서 ‘법사’라는 말은 우리 나라의 ‘스님’이라는 말에 해당된다. 현재 우리 나라에서는 ‘법사’라는 말이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첫째는 스님으로서 특별히 지정된 법회에서 ‘법을 설하는 자’ 즉 어떤 법회의 법주(法主)를 지칭하는 말이다. 둘째는 재가자로서 포교에 종사하는 전법사 혹은 포교사를 일컫는 말이다. 셋째는 남자 무속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가장 존귀한 출가승에게 붙이던 칭호가 무속인의 이름 뒤에 붙는 호칭으로 전락한 것이다.

한마디로 불교교단에서 본래 없던 법사 제도를 한국불교계에서 용인하는 것은 곧 교단의 쇠퇴를 뜻한다. 붓다는 󰡔��大般涅槃經(Mahāparinibbāna sutta)󰡕��에서 “비구들이여! 비구들이 예전에 정해지지 않은 것을 정하거나, 반대로 정해진 것을 깨뜨리지 않고, 정해진 배워야 할 바[學處]에 따라 행동하는 동안은, 비구들이여! 비구들에게는 번영이 기대될 뿐 쇠망은 없을 것이니라”13)라고 말했다. 이것은 일곱 가지 쇠망하지 않는 법[七不退法] 가운데 하나이다.

결론적으로 한국불교에서 법사 제도는 하루빨리 없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법사는 일반적으로 출가자 예우를 받지 못한다. 현실적으로 훌륭한 법사와 출가한지 얼마 되지 않는 사미승과 비교했을 때, 법사가 불교적 안목과 학식 등 여러 면에서 월등히 뛰어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스님께 예배 공양하기를 원하지 법사께 공양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며, 붓다께서 󰡔��사문과경(沙門果經 Sāmañña-phala Sutta)󰡕��에서 직접 언급한 출가 사문의 공덕인 것이다.14) 따라서 법사 신분으로 교화에 종사한다는 것은 그 사람 개인적으로도 불행한 일이다. 출가와 재가 중 어느 한쪽을 택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것만이 불교 교단과 자기 자신을 위하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출가자와 재가자의 구별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부처님이 제정한 계율을 지킴과 지키지 않음의 차이인 것이다. 출가자는 율장에 명시된 비구 227계와 비구니 311(팔리율장의 의함)를 준수하고자 노력하는 집단이고, 재가자는 최소한 오계(五戒 Pañca-sīla)를 수지하고, 특정월(特定月)과 특정일(特定日)에 팔재계(八齋戒 Aṭṭhagika Uposatha)를 지키며 생활하는 평신도를 말한다. 불교교단은 비구(比丘)비구니(比丘尼)로 이루어진 승단(僧團 Sagha)과 우바새(優婆塞)우바이(優婆夷)로 이루어진 재가 집단과의 화합 공동체이다. 불교는 두 집단 상호간에 원만한 교류를 통해 붓다의 가르침을 이 지상에 실현하는 것을 그 목표로 삼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대승불교 흥기(興起)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현재 한국불교의 일부 법사와 재가불자들의 활동과 움직임이 대승불교 흥기 당시의 상황과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이다.

히라가와 아끼라(平川彰)의 설에 의하면, 대승불교는 재가불교 운동에서부터 발전한 것이라고 한다. 대승불교를 일으킨 자들은 불탑을 신봉하던 재가신자들이었다.15) 역사적으로 대승불교가 탄생하였던 시대는 부파불교가 강력한 교단 세력을 확립한 시대이기도 하였다. 부파교단은 인도인이건 인도인이 아니건, 그리고 지배계층이건 피지배계층이건 그들의 신분을 문제삼지 않고 많은 헌납을 받아들여 발전하였다. 각지의 승원은 풍부한 토지와 기부금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승니의 생활도 보장되어 있었다. 승원 안에는 식당이 있어 탁발이 불필요하게 되었다. 물론 부파교단의 출가자 중에는 숲속에 머물며 탁발에 의해 얻은 음식 이외에는 먹지 않는 엄격한 옛 제도를 실천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많은 사람들은 승원 안에서 불교교의의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들은 아비달마(阿毘達磨)라는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으나, 한편 그러한 학문화전문화는 일반사회로부터 유리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16)

이러한 시대에 일반대중이 가장 마음을 기울인 것은 불탑에 대한 신앙이었다. 불탑을 조성하고 불사리를 봉안하는 일의 공덕은 매우 큰 것이지만, 불탑에 예배하고 향과 꽃을 헌공하는 일의 공덕도 큰 것이다. 불탑을 청소하는 것만으로도, 합장하여 ‘부처님께 귀의합니다’라는 말을 한번 하는 것만으로도, 쌓은 공덕이 한량이 없다고 한다. 이는 탑이 단순히 벽돌 또는 돌로 이루어진 건축물이 아니라 붓다 자신으로서, 탑에 예배하는 것은 곧 부처님께 예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7) 이처럼 불탑신앙은 민중의 불교로서 번영하였다. 또한 불상의 조성과 그 공덕도 아울러 강조되었다.

부파불교 시대에 대승이 탄생하고 발전하였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출가자 중심의 정통파불교로서는 부파불교가 번영하고, 재가자 중심의 민중적 불교로서는 불탑신앙이 번영하였으나, 그 사이에 또 하나의 흐름이 생성되고 이것이 발전하여 대승불교가 되었다.18)

이 새로운 흐름은 불탑신앙을 모태로 하면서, 붓다와 같은 깨달음을 얻는 것을 궁극적인 이상으로 하였다. 이러한 흐름을 낳고 발전시킨 사람들은 주로 종교생활에 헌신할 수 있었던 출가의 불탑 신앙자였다. 그리고 재가 신앙자 중에도 이에 열렬히 공명한 사람이 나타나, 출가와 재가로 이루어진 새로운 종교집단이 형성되었다. 그들은 또한 불탑을 거점으로 하고, 불탑신앙을 유지하고 있었다. 불과(佛果)를 희구하는 점에서 그들은 이미 대승의 입장에 있었지만, 그들은 아직 대승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다.19)

그런데 100년경 법사(法師, dharmabhāaka)로 칭하는 사람들에 의해 ‘대승(Mahāyāna)’이라는 기치를 내건 새로운 불교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새로운 다르마()를 제창하고, 이것이야말로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佛母)’이며, ‘부처님의 출세본회(出世本懷, 세상에 출현함에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바램)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불탑숭배를 대신하여 경()의 숭배가 중시되어, 법과 법사를 중심으로 하는 대승교단이 탄생하였다. 그리하여 3세기 중엽에는 인도의 거의 전역에 대승불교가 확산되었다.20)

이러한 대승불교의 태동을 모방하여 한국에서 새로운 법사 종단이 출현한다 할지라도 앞에서 논의한 것처럼 또 하나의 군소 종단이 출현하는 것일 뿐이다. 한국불교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할 것이다. 인도에서 발생한 대승불교 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주창했던 뛰어난 대승불교의 사상과 이를 실천에 옮겼던 출가보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 사찰 관리의 문제

 

여기서 논의할 ‘사찰 관리의 문제’는 현재와 미래의 불교교단은 어떤 형태로 유지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다시 말해서 사찰은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다. 이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재가자가 종단과 사찰의 경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승려가 사회 지탄의 대상이 되는 요인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금전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여자 관계이다. 전자의 금전과 관련된 경우는 승려가 직접 큰돈을 만지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삼보정재(三寶淨財)의 낭비를 막고, 불자들의 성금을 불교발전을 위해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재가자들이 어떤 형태로든 경영에 관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원래 출가자는 사의법(四依法)21)에 의존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붓다 당시에서도 이러한 사의법에 의한 생활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별도의 예외 조항들이 허락되었던 것이다. 하물며 현대인이 이러한 사의법에 따라 생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결국 출가자는 재가자의 시여(施與)에 의존하여 생활할 수밖에 없다. 그 대신 출가자는 수행과 교화에 전념함으로써 본분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종교가 튼튼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근거를 갖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종교 자신이 생산적이지 않은 한, 그것은 반드시 생산자나 지지자에 의존하게 된다. 불교교단은 어떻게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였던가. 원래 인도에서는 재가신자가 출가자의 경제생활을 지지(支持)하는 풍습이 있었다.22)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불교교단은 출가와 재가의 이중(二重)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출가자는 계율에 의한 청정한 공동생활을 영위했고, 그로 인해 재가 신자로부터 절대적인 귀의와 신망을 받았던 것이다.23)

요컨대 재가자는 물질로써 출가자를 공양하고, 출가자는 법으로써 재가자를 가르쳤다. 이와 같이 불교교단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재시(財施)와 법시(法施)가 원만히 이루어짐으로써 상호 공존할 수 있었다. 바람직한 불교교단이란 출가자와 재가자가 제 역할을 충분히 다할 때 비로소 불교라고 하는 하나의 전체 교단이 융성해 지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출가자와 재가자의 역할 분담이 가장 잘 이루어졌던 때는 부파불교 시대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부파불교의 지나친 출가중심주의적 성향 때문에 대승불교가 흥기하게 된다. 이러한 출가자와 재가자의 관계는 미래에도 그대로 지속될 것이다. 아마 이러한 관계가 지속되지 않는다면 곧 불교는 쇠퇴하거나 멸망하고 말 것이다.

종교는 이윤을 추구하는 생산적인 단체가 아니다. 특히 불교의 출가자는 다른 직업을 갖거나 생산활동에 종사하는 것이 계율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그리고 특별히 고정적인 수입이 있는 사찰을 제외한 나머지 사찰들은 대부분 신도들의 보시에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신도들의 보시금을 재가자가 직접 관리토록 하고, 출가자는 수행과 포교에만 전념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한국의 몇몇 종단과 일부 사찰에서는 재가자가 직접 경영과 관리에 참여하고 있다. 재가자들이 직접 경영에 참여함으로써 오히려 교세가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종단과 사찰 재정의 투명성으로 말미암아 출가자에 대한 신뢰가 높아간다. 사실 초기불교 교단에서부터 현재의 상좌부 교단에 이르기까지 삼보외호(三寶外護)와 가람수호(伽藍守護)는 재가자의 몫이었다. 그러므로 한국불교의 모든 사찰에서도 가능한 한 그 사찰의 운영을 재가자에게 맡기고, 출가자는 의례의 집전과 기타 신앙적인 지도에만 종사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재가자에게는 종단과 사찰의 경영권을 넘겨주고, 그 대신 출가자는 법의 자리[法席]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이원적(二元的) 제도야말로 가장 합리적인 불교 공동체의 운영 방안이 될 것이다

사찰은 승려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사찰은 사부대중(四部大衆)의 공유물이다. 재가자 없는 출가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출가자 없는 재가자는 생각할 수도 없다. 출가자의 역할과 재가자의 역할이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불교라는 교단은 이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비록 출가자가 사찰에서 생활하지만 그 관리는 재가자가 맡아야 한다는 말이다. 즉 사찰 관리의 주체는 재가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승단에 대한 불신이 사라지고, 재가자도 불교 교단의 일원이라는 주인 의식을 갖게된다. 초기 교단의 기원정사를 비롯한 수많은 사원들은 재가자가 마련하여 승단에 헌납했던 것이다. 그들은 사원의 헌납 후에도 승려들의 의식주 모두를 제공했다. 이것이 불교의 전통이다. 이러한 전통 때문에 현재의 남방 상좌부 불교국가에서는 사원의 대소사를 재가불자들이 자체적으로 해결한다. 이를테면 사원 건물의 신축과 개축 등도 승려가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 그러한 세속적인 일은 신심 돈독한 재가 불자들이 알아야 처리할 일이기 때문이다. 승려는 오직 수행과 교화에만 전념토록 되어 있다.

한국의 스님들은 사찰 경영권을 신도들에게 쉽게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설자리가 없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들은 수행력이 아닌 승려라는 신분으로 신도들 위에 군림해 온 것이 사실이다. 즉 ‘도덕적 위의(威儀)’가 아닌 ‘권세적 위의’로 다스려 왔다. 어떤 일부의 스님들은 법의 자리 즉 법석을 앞에서 논의한 법사들에게 내주고, 기업의 사장과 같은 경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출가자의 역할과 재가자의 역할이 뒤바뀐 경우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일 사찰의 관리 책임을 재가자 혹은 출가재가 공동체에서 관리한다면 한국불교의 만성적인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기복불교’24) 혹은 ‘치마불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기복불교를 조장하는 사람은 재가자보다 오히려 출가자들이다. 왜냐하면 기복을 조장해야 수입이 보다 증대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영험 있는 도량이니, 어떤 불상에 기도하면 효험이 있다는 등의 소문을 공공연히 퍼뜨리는 것이다. 만일 재가자들이 사찰의 재정 일체를 관리한다면 스님들이 자발적으로 기복을 조장할 까닭이 없다.

황인규는 기복불교와 관련하여 “출가인도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기를 권유하기 보다는 이를 방조한다”25)라고 지적했다. 출가자들이 기복불교를 방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장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명우 기자가 지적한 바와 같이 “새해 초하루나 정월 보름 법회 때면 대부분의 사찰에서 부적을 나누어준다. 액운을 없애기 위해 사찰에서 직접 제작한 부적을 요구하는 불자들이 많고, 사찰은 부적을 제공함으로써 힘들이지 않고 재정을 확보할 수 있다”26)고 토로하고 있다. 또한 한명우 기자는 3년 전 대구에서 “불교계 개혁과 발전을 위한 시민토론회”에서 어떤 발표자가 제기한 “일부 사찰이 재정적 토대를 유지하기 위해 신도들의 기복신앙에 영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면서 이런 관행이 계속될 경우 신도는 물론 일반인, 특히 지식인들로부터 강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27)는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또한 “영험이 있다는 소문만 나면 전국의 불자들이 모여들고, 그만큼 사찰경제는 윤택해지기 때문이다.28) 그래서 “사찰들이 재정확보를 위해 기복을 부추기고 있다”29)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지적들은 부정할 수 없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결국 사찰 경제를 출가자들이 전담하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재가자가 사찰의 경영을 맡는 것이 제도적으로 정착된다면 불순한 의도를 갖고 출가하는 승려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는 먹고살기 위해 승복을 입고 출가자 행세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만일 승려가 직접 돈을 만질 수 없게 된다면 진정한 의미의 구도자들만 승단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제도는 다음에서 논의할 승가의 자질 향상에도 크게 기여하게 될 것이다.

한편 진정한 의미의 사찰 발전이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사찰의 경제력이 향상되거나 외형적으로 크게 성장한 것을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세속적 가치에 의한 판단이다. 종교는 세속적 가치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어느 사찰에서 큰 건축물을 지었다고 해서 그 사찰이 발전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크게 잘못된 것이다. 종교의 본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외형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교세는 사찰의 수와 승려 수, 그리고 신도의 수로 개략적으로 판단할 뿐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종교에 있어서 발전의 기준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발전이 아닌 퇴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한국불교 사원의 경제력 향상과 승려들의 재산 축적이 진정한 의미의 불교 발전인가?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불교교단은 역사적으로 경제적 지지 기반에 따라 융성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하였다. 교단은 그가 몸담고 있는 사회환경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불교교단이 융성하기 위해서는 출가자와 재가자의 역할 분담이 원만히 이루어져야 한다. 어느 한쪽이라도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면 불교교단은 쇠퇴하고 만다. 사찰의 경영과 관리는 재가자에게 맡기고, 출가자는 본업에만 충실해야 할 것이다.

 

. 승려 자질의 문제

 

‘승려 자질의 문제’는 승려의 질적 향상을 위한 제언이다. 결국 종교의 주체는 그 종교의 성직자이다. 비록 불교교단이 사중대중의 공동체이지만 그 주도적인 역할은 출가 승단의 구성원인 승려들이다. 따라서 출가자의 자질이 향상되면 그것은 곧 전체 교단의 발전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측면에서 필자는 승려의 자질 향상을 위해 출가자의 본분이 무엇인지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승려의 본업(本業)과 부업(副業)이라는 부제로 논의를 진행한다.

출가자의 삶은 지혜와 자비의 완성을 위한 것이 아니면 출가행이라 할 수 없다. 그런데 한국의 스님들 가운데 출가자의 본분, 즉 본업인 수행과 포교보다는 부업에 더욱 열을 올리는 스님들이 간혹 있다. 스님들의 주된 부업은 시()()()()()()() 등이다. 어떤 스님은 부업을 위해 본업을 내팽개쳐 버린 경우도 볼 수 있었다.

일반신도들도 본업에만 전념하는 스님보다도 재주를 가진 스님을 더 선호하는 것 같다. 언론에서도 부업에 종사하는 스님들을 부각시켜 흥미꺼리를 제공해 준다. 승려가 수행의 여가에 시를 쓸 수도 있고, 서예를 할 수도 있다. 또한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할 수도 있고, 다도를 즐길 수도 있다. 비록 출가 승려일지라도 다양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출가자가 가야 할 길은 수행과 포교 두 가지 뿐이다. 만일 출가자의 업()이 수행과 포교가 아닌 장인(匠人)의 길이라면 세속 사람과 다를 바 없다. 그의 재주가 아까워 살려야겠다면 과감히 옷을 벗을 일이다. 왜냐하면 출가의 본래 목적이 서예나 다도 혹은 음악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혹 그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곧 수행이고 포교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승려가 기예(技藝)나 예능(藝能)에 종사한다는 것은 대승불교권에서만 통하는 일이다. 정통 상좌부 불교권인 스리랑카나 태국미얀마 등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출가자가 수행과 포교의 일 외에 다른 잡사(雜事)를 한다는 것은 불교교단은 물론 일반 사회에서도 전혀 용납되지 않는다. 그들은 기예(技藝)는 세속인이 할 일이지 결코 출가자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율장에도 출가자가 직업을 갖거나 생산활동에 종사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잡아함경󰡕�� 18에 의하면, 출가수행자는 사사명식(四邪命食)에 의해 생활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사사명식이란 ①논과 밭을 갈고 나무를 심어 생활하는 것(下口食), ②성숙(星宿)일월(日月)풍우(風雨) 등을 연구함에 의해 생활하는 것(仰口食), ③권세에 아첨하여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그들로부터 재물을 얻어 사는 것(方口食), ④점치고 관상 보는 것을 배워 사람의 길흉화복을 말하거나 의술로서 생활하는 것(四維口食)을 말한다.30) 이러한 네 가지의 삿된 방법으로 먹을 것을 구해서는 안된다. 출가 수행자는 오직 법으로서 먹을 것을 구하여 스스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위 경전에서 네 가지만 언급한 것은 당시에 이러한 삶을 살았던 수행자가 있었기 때문에 이를 경계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나열한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불수반열반략설교계경(佛垂般涅槃略說敎誡經)󰡕��에서도 판매무역을 하거나 전택(田宅)을 두는 행위, 인민노비축생을 기르는 일, 종식(種植)이나 재보(財寶)를 멀리 할 것, 초목을 자르거나 토지를 개간하고 땅을 파는 일, 탕약을 만드는 일, 점성술을 보거나 역술행위를 하는 것 등을 금하고 있다.31) 이로 미루어 출가자는 바른 직업이든 바르지 못한 직업이든 일체의 세속적 직업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반면 교단에서 인정하고 있는 활동은 오직 정신적인 부분에 관한 것이다. 어느 때 부처님은 바라문 바라드바자와의 대화를 통해 출가자의 수행은 농부의 경작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즉 수행생활이 물질적 생산활동과 다름없는 정신적 노동이라고 하였다.32) 다시 말해서 수행생활 자체가 사회적 생산행위의 한 분야임을 강조한 것이다.

이처럼 불교 교단에서는 예로부터 출가자가 법을 설한 대가로 보시를 받는 것 외에는 일체의 직업을 갖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 승려는 어떤가. 몇몇 스님들은 부업을 통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생산활동에 종사하고 있다. 그 중에는 가무(歌舞)에 종사하는 스님도 있다. 의식 있는 일반인도 노래하고 춤추는 직업을 좋은 직업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하물며 출가 수행자가 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것은, 남방 불교적 시각에서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만일 부처님께서 당시 출가자가 가수로 활동하는 자가 있는 것을 아셨다면 분명히 교단에서 추출시켰을 것이다.

이러한 부업에 종사하는 스님들은 그들의 작업이 포교를 위한 방편이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그들의 부업이 불교포교를 위한 방편들 가운데 하나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방편이 본업이 되고, 본업이 방편이 되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리고 방편보다는 부처님이 제시한 ‘붓다의 길’ 즉 정법(正法) 혹은 정도(正道)가 있다. 그 길이야말로 우회하지 않는 지름길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사실 승려가 불교를 소재로 한 미술품 혹은 훌륭한 음악을 창출할 수도 있다. 또 그것이 직접이든 간접이든 포교의 역할을 일부 담당하고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냉철하게 생각해 보면 그것 또한 생사윤회의 근본업(根本業)일 뿐이다.

승려가 이러한 기예를 본업으로 삼는다면 그를 진정한 의미의 출가자 혹은 수행자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오늘도 본업을 등지고 부업에 종사하고 있는 스님들은 하루빨리 출가자의 본분인 본업으로 복귀하거나, 아니면 세속으로 돌아갈 일이다. 불교의 발전을 위해 그들은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붓다께서는 󰡔��성구경(聖求經 Ariyapariyesana Sutta)󰡕��에서 ‘성스러운 구함’과 ‘성스럽지 못한 구함’에 대해 비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한 적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들이 두 가지 구함, 즉 ‘성스러운 구함’과 ‘성스럽지 못한 구함’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성스럽지 못한 구함’이란 무엇인가? 이는 비구들이여, 자아로 인해 태어남을 면할 수 없는 어떤 사람이 마찬가지로 태어남을 면할 수 없는 것을 구하고, 자아로 인해 늙음을 면할 수 없으면서 … 자아로 인해 병듦을 면할 수 없으면서 … 자아로 인해 죽음을 면할 수 없으면서 … 자아로 인해 슬픔을 면할 수 없으면서 … 자아로 인해 더러움을 면할 수 없으면서 마찬가지로 더러움을 면할 수 없는 것을 구하고 있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태어남을 면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겠는가?

비구들이여, 자식과 아내가 태어남을 면할 수 없고, 남녀 노비가 태어남을 면할 수 없고, 염소와 양이 태어남을 면할 수 없고, 닭과 돼지가 태어남을 면할 수 없고, 코끼리, , 암수의 말이 태어남을 면할 수 없고, 금과 은이 태어남을 면할 수 없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애착의 대상들이 태어남을 면할 수 없다. 그럼에도 자아로 인해, 사로잡히고 도취되고 탐닉에 빠져 태어남을 면할 수 없는 이 (사람)가 마찬가지로 태어남을 면할 수 없는 것을 구하고 있다. … 비구들이여, 이것이 ‘성스럽지 못한 구함’이니라.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구함’이란 무엇인가? 이는 비구들이여, 자아로 인해 태어남을 면할 수 없는 자가 마찬가지로 태어남을 면할 수 없는 것에서의 위험을 알고, 태어나지 않음 즉 얽매임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보장인 열반을 구하고, 자아로 인해 늙음을 면할 수 없는 자가 … 자아로 인해 병듦을 면할 수 없는 자가 … 자아로 인해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자가 … 자아로 인해 슬픔을 면할 수 없는 자가 … 자아로 인해 더러움을 면할 수 없는 자가 더러움을 면할 수 없는 것에서의 위험을 알고, 더럽혀지지 않음 즉 얽매임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보장인 열반을 구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로 ‘성스러운 구함’이니라.33)

 

출가자가 추구해야 할 것은 오직 ‘성스러운 구함’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 외의 ‘성스럽지 못한 구함’은 결국 다시 태어남의 원인이 되어 늙음병듦죽음을 되풀이하게 되는 것이다.

최근 승려의 자질과 관련된 매우 훌륭한 글을 만날 수 있었다. 원철 스님의 ‘도도덕적 위의(威儀)’와 ‘권세적 위의’라는 글이다. 여기에 그 일부를 옮겨 싣는다. 󰡔��산방야화(山房夜話)󰡕��에서는 위의를 ‘도덕이 높아서 생기는 위의’와 ‘권세가 높아서 생기는 위의’라는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도덕이 높아서 생기는 위의는 자연스럽지만, 권세 때문에 생긴 위의는 인위적으로 생긴 것이다. 자연스럽게 나온 위엄과 존경은 상대의 마음까지 복종시킬 수 있지만, 인위적으로 생긴 위엄과 존경은 그저 외형만을 복종시킬 뿐이다. 그러나 상대의 마음까지 복종시키는 위엄과 존경은 자기의 눈앞에서만 위엄스럽게 할뿐만 아니라, 만리 밖에서도 위엄과 존경을 받는다. 뿐만 아니라 현재는 물론 백세가 지나도록 그 명성이 알려져 존경과 위엄을 받을 것이다.” 공부의 힘으로 자연스럽게 몸에서 우러나온 위의는 감화력을 주어 마음으로부터 복종하게 만들지만, 힘으로 밀어붙인 위의는 그저 외형이나 굴복시키고 마는 찰나적 이슬 같은 권위에 불과하다는 말이다.34)

 

. 맺음말

 

이상에서 우리는 한국불교의 문제점들을 네 가지 주제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즉 ①종파 난립의 문제는 역사상의 보수와 진보의 측면에서, ②법사 제도의 문제는 불교 교단사의 출가와 재가의 측면에서, ③사찰 관리의 문제는 경영과 법석의 측면에서, ④승려 자질의 문제는 본업과 부업의 측면에서 다루었다. 비록 여기서 다루지는 않았지만 한국불교에 있어서 승가 교육의 문제는 심각하다. 승가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미 수많은 스님과 학자들이 의견을 개진해 놓았기 때문에 여기서 다루지 않았을 뿐이다.

사실 위에서 논의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도 승가의 교육에 달려있다. 다시 말해서 ‘한국불교의 미래는 승가교육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승가의 교육이 제대로 잘 이루어져 승려의 자질이 향상된다면 앞에서 언급한 모든 문제들은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올바른 출가정신을 가진 자라면 바른 길이 아닌 잘못된 길로 나아갈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사회의 모든 현상은 변화한다. 종교의 외형적인 모습도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원리를 벗어날 수 없다. 종교도 사회를 떠나 홀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속의 현대인들은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외면할 수 없다. 변하는 사회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된다. 옛날의 낡은 사고와 생활방식으로는 현대를 살아갈 수 없다. 또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보다 먼저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적 흐름이 과연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물질적 가치를 중시하고 그것을 향해 돌진해 간다면, 불교는 그것을 배격하고 정신적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 노력해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불교는 시대적 흐름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가야만 한다. 이와 같이 세속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회의 제반분야는 변화에 적응해야 살아남을 수 있지만, 불교는 오히려 세속적인 흐름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의 정체성(正體性)을 갖고 있어야만 제 기능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세간적 가치와 출세간적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끝으로 출가자들도 세속적 흐름에 따라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출세간적 지계 생활로 자신을 지켜 나가야 한다. 다시 말해서 현대의 출가자들은 이와 같은 이율배반적(二律背反的) 삶을 지혜롭게 병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붓다께서는 성도 직후 “탐욕과 노여움에 패배한 사람들에게 이 진리는 쉽게 깨닫기 어렵다. 이것은 세속 흐름을 거스르고, 미묘하고, 심원하고, 이해하기 힘들고, 섬세해서 욕망을 탐내고 암흑에 덮인 사람들은 볼 수가 없으리”35)라고 탄식했다. 자신의 가르침이 세속의 흐름에 역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붓다의 가르침은 인류가 이 지상에 남아있는 한 유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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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8.06.11 01:02

    첫댓글 1...종파의 난립은 막을 수는 없읍니다 그러나~ 승복에 종단과 사찰이름을 새기면 사이비 승려를 가려낼수 있고 스님들도 소속감을 가지게 되어 말과 행동을 조심하여 스로를 존경 받게 될 겁니다...! 2...법사 제도는 1번이 해결 되고 나면 유지 되어도 괜찮다고 생각 되오며 3...사찰 경영은 신도들이 맏고 스님들은 수행에 전념 해야 합니다... 4...참선,염불,사경,등에 치우쳐 중생의 고통을 외면하는 어리 섞음이 없도록,안거 기간 만이라도 병원에서 고통 받는 환자들을 위로하고,임종환자의 죽음을 돌봐 주시고,장례식장 에서 염불을 해주시고,대중 설법을 통하여 표교에 앞장 서시며

  • 08.06.11 01:00

    컴퓨터 교육을 받으시어 여인네들의 고민에만 해박한 지혜를 발휘 하실께 아니고...인터넷 접속을 통하여 청소년과 거사님들의 고민이 무었인지 아시어 모든 중생을 구제해 주셔야 합니다...!컴맹 목사는 거의 없지만~ 컴퓨터 하시는 스님들 별로 없읍니다...!

  • 08.06.11 09:31

    좋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스님들의 구체적인 생활대책이나 노후문제 등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 같습니다. 재가불자들의 사찰운영권 등에 따른 현실적, 구체적 스님들의 복지나 노후문제 등에 대한 대책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무조건적으로 운영권만 재가자에게 맡기면 현실적으로 한국의 스님들 중 누가 포교당에 나와서 법문, 강의하려고 하겠습니까. 종단에서 이것을 의무화, 제도화 하지 않는 한 해결이 어려운 문제입니다.

  • 08.07.10 12:38

    노후문제는 천주교나,원불교의 복지를 참고하면 될듯합니다.

  • 08.07.11 10:14

    원론적으로 지당합니다.하지만 구체적인 방법도 나와야 합니다.()^^*

  • 08.08.14 14:24

    잘배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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