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김일성의 남침으로 일어난 전쟁이다. 북한군이 3.8선을 넘어왔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가 경상도를 제외한 대한 민국 전 국토를 점령했다.
낙동간 전선이 형성되었고 아군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낙동강 전선은 대한민국의 마지노선이었다.
그때 미군의 선발대가 부산항에 들어왔다. 유엔군은 계속해서 부산항으로 속속 들어왔다. 낙동간 전선에서 북한군이 대공세를 취했다. 북한군이 공격 실패로 교착상태에 빠졌다. 34 |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이 수복되어 중앙청에 태극기가 게양됐다.
북한군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전세역전이다. 이제는 국국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었다. 순식간에 북한의 수도 평향에 입성했다. 당신 중국에서 중공군 30만 대군이 북한을 지원하기위해 압록강을 건너왔다.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전선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국군과 유엔군의 작전상 후퇴가 시작되었다. 1.4 후퇴다.
중국에서 2021년 10월6일 중국 공산당 100주년 기념으로 영화 '장진호'를 개봉했다. 사상 최대인 2,300억원을 들여서 만든 영화다. 당시 장진호에 투입된 중공군은 12만 명을 미화해서 영웅르로 만든 영화다.
그 만큼 장진호 전투는 치열했고 한국전쟁에서 가장 격렬했던 것을 현재의 중국도 인정한 것이다. 35 |
-장진호 전투 일기
6.25 당시 북한 김일성은 평양을 떠나서 강계로 수도를 옮겼다. 그 강계지역 아래 호수 '장진호'가 있다. 당시 미 해병대와 미군과 국군 3만 명이 장진호 지역에서 진을 쳤다. 야간에 몰래 압록강을 건너온 중공군 30만 명 중 12만 대군이 미 해병대를 포위했다. 미 해병대의 최대 위기였다.
영하 30도의 강추위로 탱크와 차량의 오일이 얼어붙었다. 미군의 기동력이 묶여 버렸다. 그러나 사투 끝에 미 해병대는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었고 결력하게 싸웠다. 그래서 중공군의 남하를 2주간 저지했다. 덕분에 흥남항을 이용한 후퇴작전도 성공할 수 있었다.
장진호 전투는 중공군 1만9천여 명이 사상자를 냈다. 미군도 1천 29명의 사상자를 낸 피의 대 격전이다.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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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 전투 일기
1.4후퇴한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대열을 정비하고 3.8선 지역에서 북한군과 대처했다. 당시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북한군이 지연 전술을 펼치면서 보다 더 유리하고 좋은 위치를 차지하려고 전 전선에서 일제히 대공세를 강행했다. 당시 동부전선에서 철원, 김호, 양구 지역을 '철의 삼각지'라고 했다.
철원 북쪽에 '백마고지'가 있다. 지리적으로 철원지역의 중요한 요충지다. 이 지역은 육군 제9사단의 작전 지역이다. 1952년 10월 6일~15일까지 10일 동안 중공군 3개 사단의 인해전술로 격전이 벌어졌다. 고지의 주인이 12번 바뀌었다. 그러나 제 9사단은 치열한 격전을 치루며 끝끝내 고지를 사수했다. 당시 고지가 포탄에 의해서 하얗게 변했다. 하늘에서 보면 마치 백마가 누워있는 것처럼 37 |
보인다고 해서 '백마고지'라고 부르고 제9사단을 '백마부대'라고 한다. 백마고지 전투에서 중공군 1만 4천여 명 사상자를 냈다. 국군도 3천 396명의 사상자를 냈다.
'장진호 전투'와 '백마고지 전투'는 한국 전쟁에서 한국군과 미군이 가장 많이 전사한,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로 기록된다.
다시 생각해 본다. 전쟁은 악마의 최고의 작품이다. 그래서 전쟁을 일으킨 악마인 전범자에게는 용서란 없다. 전 인류의 심판만이 있을 뿐이다.
언제나 내 조국은 내가 지켜야 한다. 내 나라는 구호로 지키는 것이 아니다. 나의 몸으로 피 흘려 생명으로 지켜야 한다.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으로'''.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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