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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열풍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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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생생외국 경험방 스크랩 `비지스(Bee Gees)의 음악의 원천은 `호주`다.
한풍 추천 2 조회 1,525 17.05.29 19:58 댓글 6
게시글 본문내용


'비지스(Bee Gees)의 음악의 원천은 '호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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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지스의 노래 '메사츄세스(Massasthusetts)'는 호주 뉴사우스웨일즈 서남부 도시

 '와가와가(WagaWaga)라는 곳의 슬픔과 기쁨과 고생스럽던 추억이라고 합니다.

비지스는 베리가 16살, 쌍둥이 로빈, 모리스가 13살 되던해에 본격적으로 노래로
돈을 벌어야 식구가 먹고 살수가 있었답니다. 아직은 세계에 아니 호주에도 알려
지지않은 그들은 '리스모어, 카우라, 베가, 와가와가' 등 NSW의 도시들을 5~7시간 간격으로
차로 움직이며 공연하느라 쌍둥이 동생들은 많던 웃음도 잃어버렸고 형 베리는
동생들을 때리기 까지 하며 두 동생을 긴장 시키곤 했다고 합니다.
그 추억들을 미국의 메사츄세스로 샌프란시스코등으로 바꿔 불렀던 것이지요.



 


1959년에 영국에서 호주, 브리즈번으로 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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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지스'는 3형제 그룹이다. 

1946년에 맏형 베리 깁이 태어났고 3년 후에 쌍둥이 로빈과 모리스가 태어났다. 

모두 영국 맨체스터에서 태어났다.

'비지스(Bee Gees)'라는 그룹 이름은 깁 형제들(Brothers Gibb)이라는 뜻.


아버지와 어머니는 실패한 음악인들이었다. 

'비지스' 가족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1959년에 호주 브리즈번으로 이민 왔다. 

이와 관련하여 '비지스'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우리 가족은 초기 식민지 시대처럼 호주로 유배당한 셈이다.
영국에서 가난했던 부모는 돈 벌러 다니느라 우리 3형제가 말썽을 피우는 걸 몰랐다. 
결국 경찰이 우리를 끌고 집으로 가서 딱 세 마디 했다. 20 파운드 플랜!"

'20파운드 플랜'은 인구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호주정부가 
영국의 극빈자들을 상대로 20파운드만 내면 
호주에 정착시켜 주겠다고 약속한 이민정책이다. 
그 당시 20파운드는 호주로 오는 배에 탈 수 있는 1인 편도요금에 불과했다.

200년 전에 영국은 빈민들을 죄수로 둔갑시켜서 식민지 호주로 유배시켰다. 
같은 맥락으로, 십중팔구 범죄자가 될 것으로 보이는 
'비지스' 3형제를 호주로 유배시켜버린 것. 
'20파운드 플랜' 등의 노래는 그런 사연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비지스' 3형제의 공통점은 학교 다니는 걸 싫어하고 
밤낮없이 노래 부르고 연주하기를 좋아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11-14살의 나이에 그룹을 만들어서 클럽과 바에서 공연했다. 
지금도 있는 서퍼스파라다이스의 '팜 라운지(Palm Lounge)'도 그중의 하나다.



Barry, Robin and Maurice Gi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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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열호주역사학회에 이런 내용의 인터뷰 내용이 있습니다.
학회에서 호주 출신 대중스타 비지스, 올리비아 뉴튼 존(이상 영국), 
멜 깁슨, 니콜 키드먼(이상 미국), 러셀 크로우(뉴질랜드)가 
전부 외국 출생이어서 특집으로 마련한 자료입니다.

 



시드니에서 혹사당한 '비지스'

3형제는 음악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수입이 가족 전체의 생계 밑천이어서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었다. 그러다가 1962년에 큰 꿈을 안고 시드니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그러나 13-16세에 불과한 3형제는 시드니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그나마 나중에 주목을 받은 것은 그들의 뛰어난 가창력과 
큰형 베리의 천재적인 작곡솜씨 덕분이었다. 
베리의 아버지조차 아들의 작사, 작곡 솜씨에 놀라곤 했다. 
15-17살의 어린 나이에 어른들이나 느낄 수 있는 사랑의 상처를 
서정적으로 담아냈기 때문이다. 
베리는 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시드니가 나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호주는 비틀스를 능가하는 우리 3형제의 실력을 

도무지 인정해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 아픔을 남녀 간의 사랑으로 비유해서 노래를 만들었다. 

'나를 잊지 마세요(Don't forget to remember)도 그런 식으로 만들었다"



http://www.bsnpubs.com/rso/atcobeegeeskids.jpg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To love somebody)'

'비지스'의 베리 깁이 16살에 시드니에서 작곡한 노래입니다. 
시드니에서의 활동은 비극 그 자체였다. 
아무리 힘들어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동생들(쌍둥이 로빈과 모리스, 당시 13살))이 
좀처럼 웃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매일 고물자동차를 타고 
5-6시간씩 달려서 와가와가, 카우라, 리즈모어, 비가 등에서 공연을 했다.

그런데도 동생들이 배가 고프다고 했다. 그러면 동생들을 때려주었다. 
그렇게 활동하면서 우리 3형제는 실력을 연마했다. 
아니 당장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매일 공연했다.

"나는 남자다. 용감한 남자다. 그런데 당신은 모른다. 당신은 정말 모른다. 
내가 사랑하는 방식을... 누군가를 사랑할 때 어떤 식으로 사랑하는지를 "
이라는 내용의 가사를 부를 때마다 나는 지금도 목이 멘다. 
언뜻 연인에게 하는 얘기 같지만 사실은 동생들에게 전하는 형의 절규였다"
-Berry Gibb

"내가 조크를 시작했을 때 세상은 울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울기 시작했을 때 세상은 웃기 시작했습니다"라는 
가사에도 시드니와 얽힌 절절한 사연이 있더군요.




'비틀스' 극복하러 다시 영국으로.....

시드니 '로열호주역사학회' 건물 뒤쪽에 
3형제가 소속됐던 페스티벌레코드사가 있었다.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혹사당하고 착취당했다. 
지금도 한국에서 암암리에 벌어지고 있다는 '노예계약'을 체결한 것.

그러나 3형제의 뛰어난 가창력과 사람을 황홀하게 만드는 
하모니(和音)에 대한 소문이 영국으로 전해졌다. 
그 결과 RCA, EMI 등에서 프러포즈를 받았지만 
페스티벌레코드사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이 호주에서 사라졌다.

1967년 1월 3일, 무작정 영국으로 가는 배에 올라탄 것. 
그들은 인도양과 수에즈 운하를 거쳐서 영국에 도착했다. 
주머니에 몇 백 파운드밖에 없었으니, 그야말로 빈털터리의 귀향이었다. 
그러나 영국 음악계는 '혈연으로 연결된 하모니'가 성공할 것으로 믿었다.

그들은 불과 며칠 안에 폴리돌레코드사와 계약을 맺었다.
'비지스(Bee Gees)'라는 그룹 이름도 그때 만들었다. 
Gibb 형제들의 이름을 합성한 것이었지만 
비틀스'와 비슷한 발음으로 만든 것은 지극히 상업적인 이유였다.


http://www.hurstville.nsw.gov.au/IgnitionSuite/uploads/images/OssieByrne_BeeGees1966.jpg


'비지스'의 첫 빌보드 1위곡인 '매사추세스(Massachusetts)'에 얽힌 스토리는 더욱 기가 막힙니다. 
실제 이 음악의 배경은 호주 내륙의 와가와가(WaggaWagga)였습니다. 
하루는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가운데 7시간을 운전해서 와가와가에 갔습니다.

중간에 비에 미끄러져서 죽을 고비도 넘겼고요. 그
런데.... 막상 그곳에 도착해보니 도시 전체가 정전이 됐습니다. 
그냥 돌아오면서 그들은 많이 울었답니다. 

그 가사를 메사추세스로 바꾼 겁니다.
"그녀를 혼자 남겨두고 캘리포니아로 돈 벌러 가는 날, 
메사추세스 도시 전체가 깜깜해졌고...."라는 가사가 나오지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비지스'는 미국 진출을 노렸다. 

그러면서 내놓은 음반이 
'1941년 뉴욕 광산의 참사(New York Mining Disaster 1941)'였다. 
중간에 다음과 같은 가사가 나오는 애절한 노래다.

"미스터 존스, 내 아내를 만나본 적 있나요?(Have you seen my wife, Mr. Jones?)
/ 그렇다고 큰 소리로 말하지는 마세요(Don't go talking too loud) 
/ 갱도가 무너져 내릴지도 몰라요, 미스터 존스(You'll cause landslide, Mr. Jones)"

전형적인 팝 발라드이지만 '비지스' 특유의 서정과 비애가 듬뿍 묻어나는 명곡이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광부가 동료광부와 함께 무너져 내린 막장에 갇혀서 
나눈 대화를 가사로 만들었다. 결국 그들은 구조되지 못했다고 한다.





베리 깁은 시드니에 거주할 때
뉴스를 접한 뉴캐슬 지역에서 사망한 광부들을 떠올렸다.
그가 10대를 보낸 호주는 아름답고 제법 부유한 나라였다.
그러나 노동자와 서민의 삶은 부박(浮薄)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비지스'는 '1941년 뉴욕 광산의 참사'라는 특이한 제목의 노래를 통해서
호주의 비극을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렇듯 '비지스'의 히트곡은 주로 영국에서 작곡됐지만,
노래의 배경들은 대부분 호주와 노동계층이다.(70-80년대의 디스코 곡 제외)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절에 겪었던
고단한 삶과 사랑의 경험이 노랫말과 곡으로 승화된 것.

비록 상업적인 이유로 노래 제목에다 뉴욕이나 메사츄세스 등을 넣었지만,
사실은 그들의 슬펐던 어린 시절을 회고하는 시드니나 브리즈번, 뉴캐슬 등의
추억을 노래한 것이라고 한다.


The Bee Gees performing on Dutch television in 1968.
From left to right: Barry, Robin, and Maurice Gibb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d/d0/The_Bee_Gees.png



Clocking up rap sheets to make most young troublemakers blush,
the Bee Gee brothers were headed for borstal.

In post-war Manchester, money was tight and Barry, Robin and Maurice
Gibb’s parents were too busy working to keep an eye on their boys.
In the third of our exclusive Bee Gees series, Barry recalls:
“The police would come to the door all the time demanding t
hat our parents ‘get these boys off the streets’.

“We were going to end up in borstal if our parents didn’t take
control over us. Mum and dad were trying to earn a living ?
I don’t think they were aware of what we were doing.”




Playing truant became the norm and there was shoplifting, petty
thieving and even the odd arson attack. Robin says:
“We were young tearaways. Mind, the mischief we got up to was
probably tame by today’s standards.”

Parents Hugh and Barbara worked tirelessly to keep the family afloat.
As well as Barry and the twins Robin and Maurice they also had daughter
Lesley, and Barbara would soon be pregnant with fifth child Andy.

“As much as our mother doesn’t like to hear about it today, we were flat
broke,” says Robin. “I don’t mind admitting that ? it was post-war Britain
and people were finding their feet.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en/thumb/3/33/Best_of_bee_gees.jpg/220px-Best_of_bee_gees.jpg

“I still have memories of my father counting out pennies to see if we’d make
it to the end of the week. It was almost Dickensian. But we weren’t aware
of finances. We were too busy having fun.” School fell by the wayside.
“We couldn’t handle it,” says Barry. “And testosterone kicked in.
During our teens it was women before everything, even dinner!”

Things came to a head when the local copper suggested to Mr and Mrs Gibb
they might want to think about making a fresh start elsewhere at a time
when families in Britain were being lured to Australia for a tenner.



http://resources3.news.com.au/images/2010/10/17/1225939/779191-bee-gees.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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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7.05.30 10:45

    첫댓글 제가 학교를 wagga wagga에서 다녔습니다. 완전 촌 동네입니다.

  • 작성자 17.05.30 17:26

    지금은 재법 큰도시로 탈바꿈 했읍니다.

  • 17.05.30 22:08

    @한풍 1995년에 CSU 다녔는데 혹시 동문?

  • 17.05.30 18:35

    저 아재들이 부르는 노래에 글에서 설명한 그런 슬픈 사연이 있었다니.
    신세한탄을 주옥같은 노래로 승화시켰군요.

  • 17.05.31 21:40

    Bee Gees... 저의 어린 시절의 추억을 함께한 그룹이죠...

  • 17.07.10 14:06

    내가 젤 좋아하는 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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