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고야 여행2 - 나고야성에서 라이벌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기요마사를 회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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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에서 9시 29분에 출발한 뱀대가리 처럼 생겨서 보기에도 날렵한 신칸센 新幹線
히카리호ひかり 는 한시간도 안되어 10시 21분 나고야 名古屋(명고옥) 역에 정시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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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시대 말 일본을 최초로 통일하는 오와리(나고야)의 오다 노부나가 ***
여기 나고야는 오랜 전란인 센고쿠(전국) 시대를 끝내고 일본을 통일하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및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 영웅의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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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세월 동안 천황을 위해 충성을 바친 무사는 구스노키 마사시게 가 유일하고....
대부분의 무사들은 다이묘인 번주 를 모셨으니 그중에서도 저 세 인물을 추종했던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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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 4명은 역 구내 코인로까에 배낭을 넣고는 택시를 타고 1612년 도쿠가와의 아들
도쿠가와 요시나오 가 축성한 거성 나고야조 名古屋城 ( 나고야성 ) 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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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성 및 구마모토성과 함께 일본의 3대 성으로 꼽힌다는 나고야 성 은 일본
모모야마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로 나고옥(那古屋) 이라고도 한다.
스루가(시즈오카현)의 대영주 이마가와씨가 1528년에 쌓은 성인데 전란으로 폐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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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세키가하라 전투 승리후 일본을 재통일 하고 에도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지기 위해 1610년 부터 다시 축조해 1612년 완성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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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나고야 성은 1867년 메이지유신으로 에도막부가 끝날 때까지 오와리 尾張 도쿠가와
집안의 성 으로 사용되었는데 현재의 본성인 천수각은 2차 세계대전시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것을 1959년에 이르러 대소 2개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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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가문의 유물을 비롯해 나고야성의 역사를 보여 주는 1,000여 점의 문화재급
자료가 전시되어 있으며 천수각 지붕의 용마루 끝에 얹은 금으로 만든 샤치호코
(머리는 호랑이, 몸통과 꼬리는 물고기 모양을 한 장식물) 는 나고야의 상징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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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고야성을 둘러보니 특이한게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 의 동상이 두개나 서있네?
나고야성의 축성에 공이 커다는 뜻이겠지만 사연은 임진왜란으로 좀 더 거슬러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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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도요토미의 충복인 가토기요마사 (가등청정) 는 임진왜란 때에
조선과 화평을 주장하는 고니시 유키나가 (소서행장) 와 철전지 원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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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시 유키나가 는 오사카 해안 사카이의 상인 출신인데 조선의 쌀등 하사품 및
무역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던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종의지) 를 사위로 맞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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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사위와 함께 조선과의 무역 에서 쏠쏠한 재미를 보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임진왜란을
사전에 막으려고 일본과 조선 양국에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고....
화평 교섭을 하는 와중에는 심지어 조선과 일본 양국의 국서까지 위조 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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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고니시 유키나가(평화협상) 와 가토 기요마사(조선정벌) 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서로 선봉 을 맡으려고 필사적으로 다투어 고니시가 1군 가토가 2군으로 부산에 상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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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먼저 입성하는 자가 평양방면 진군 을 맡기로 했는데 고니시 유키나가는
진격중에도 사로잡은 조선인을 조정에 보내어 화평교섭 을
하려고 했으니 마침내 조선의 대신 이덕형과 연결이 되어 만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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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이 붙으니 고니시 유키나가는 동대문 으로 가토는 남대문 으로 서울에 입성하게 된다.
이것이 부산포에 상륙한지 스무날도 안되어 그렇게도 빨리 서울이 함락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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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 선조 임금이 의주로 도망가서 왜적을 피해 요동으로 들어가려 하자 명나라에서는
"조선이 일본과 짜고 일부러 일본군을 끌어들였다" 는 오해의 빌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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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부산서 적군의 아무 저항없이, 그냥 대군이 행군해와도 보통 스무날이 걸리는데,
어찌 조선의 서울이 스무날도 안되어 그리도 빨리 함락이 되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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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조선군이 일본군과 싸우지도 않고 일부러 길을 비켜준 것이 아니냐고...
명나라가 조선을 의심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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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일제시대에 조선총독부 가 서울에서 도시계획을 하면서 서울역에서 경복궁으로
통하는 일직선 도로를 내기 위해 남대문을 허물려고 했을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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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일본인 상공회의소장이 가토 기요마사 가 서울을 함락한 문인 조상(일본)의 유적(?) 을
손댈수 없다고 반대하여 도로는 남대문을 우회하여 양쪽으로 비뚜름하게 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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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보물 ( 국보는 일본내의 것만 해당된다! ) 을 정할 때에도
앞의 상공회의 소장의 주장이 먹혀서 “남대문을 보물 1호”로 정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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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에는 정신이 없어서 그냥 지나가고.... 6.25를 거친 다음에야 이승만 정부는
국보를 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1955년 대한민국 국보를 정할 때에
일제시대의 보물을 그대로 답습 하여 “남대문이 국보1호”가 되었는데 불타버렸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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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조선총독부 보물1호를 대한민국 국보1호로 승격시키고는 새로 보물을 정하면서
국보 1호가 남대문이니 그에 맞추어 "보물 1호는 동대문" 으로 정했던 것이다!
남대문과 동대문은 일제가 붙인 이름이니 원래 명칭 숭례문 과 흥인지문 으로 고쳐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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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는 남산에 신궁을 짓고 경복궁 전각을 헐어 조선총독부를 지으니 하늘에서 보면
"총독부가 日 자" 에 해당하는등 주변 도로와 더불어 大日本 (대일본) 이네!
또 백두대간 주요 봉우리 마다 1미터 쇠막대기 를 박아 조선민족의 혈을 끊으려한게 같은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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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시와 가토가 서울에 거의 동시에 입성하였기에 선조임금이 몽진한 평양지방으로 진격
하려고 칼부림까지 한 끝에 고니시가 총사령관 고바야가와의
묵시적인 지원 위에 추첨에 술수를 부려서는 평양 방면 진로를 차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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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시에게 조선왕을 추격할수 있는 진격로를 뺏기고는 분이 치민 가토는 함경도로 진격해
임해군과 순화군 두왕자를 사로잡은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홧김에 두만강을 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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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점 모두 가토 기요마사의 갑옷이다 ***
명나라 요동병 조승훈의 5천 군대를 평양성내로 유인해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둔 고니시는
평양에서 진격을 멈추고는 조선과 명나라에 화평교섭에 매달리며 시일을 헛되이 소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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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보급에 문제가 있어 진군하기도 힘들었다는 추측도 있지만 평양성에 조선의 군량미
10만석이 있었으니 만일 가토였다면 단숨에 의주까지 진격 했을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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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이순신의 대활약과 의병의 궐기로 해상과 육상에서의 보급이 끊어지니,
겨울이 되었는데도 다 헤어진 여름옷으로 추위에 지치다가.....
조선과 명군 이여송 5만대군의 반격을 받고 명나라와 협상 끝에 평양에서 물러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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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벽제관에서 추격하는 명나라군을 대파하니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명나라 이여송이
전투의지를 상실하는지라 일본과 명나라는 "협상" 에 들어가 휴전하고 서울에서 철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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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에 경기도까지 한반도 남부를 나누어 가지려는 일본측의 욕심으로
3년에 걸친 협상이 실패로 돌아가자 1,597년 일본군 14만이 재침하니 정유재란 인데
일본군은 남원을 거쳐 전주를 함락한후 1군은 전라도를 점령하고 2군은 충청도를 유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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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10월 일본군은 남해안으로 철수해 울산에서 순천가지 수십개의 왜성을 쌓고
장기전 에 들어가니 조선군과 명군이 진격하는데 울산성과 사천에서 왜군에 대참패를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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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니 일본의 주인 자리를 놓고 "내전" 에 들어갈
판이라 일본군은 1,598년에 조선에서 황급히 철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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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일본의 새 패자가 되려는 에도(도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히데요시의 어린 아들의
지위를 지키려는 이시다 미쓰나리 사이에 일본의 운명을 건 세키가하라 전투 가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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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시는 이시다와 막역지간이라 서군으로 참전하자 원수지간이 된 가토는 동군 도쿠가와군에
합류하니 1,600년 동서 18만 대군이 교토 동쪽 세키가하라 에서 격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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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을 생각하는 서군 영수 모리가 후방 오사카성에 머문데다가
서군 측에서 여러명의 배신자가 나오니 서군은 참패하고 고니시는 잡혀 참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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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 도산성 싸움의 경험을 바탕으로 쌓은 구마모토 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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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자신은 서쪽 규슈 구마모토의 영주로서 죽은 히데요시의 시동 으로 큰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두말없이 철천지 원수 고니시를 피해 도쿠가와의
동군에 참전했으니 그러고 보면 간첩 요시라 사건 도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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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가하라 전투에 승리해 일본의 패자가 되어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가 나고야성을
짓는데 가토 기요마사는 적극 호응해 전국에서 가장 큰 돌 을 운반해 왔던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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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엄청 큰 돌 위에서 힘쓰고 있는 저 가토 기요마사 (가등청정) 를 보며....
고니시 유키나가와 얽히고 섫킨 지난날을 회상해 보는 것이다!!!
나고야 성을 나와 시야쿠쇼(시청) 에 도착해 아쓰다 신궁 으로 가는 지하철을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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