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과 수행의 성취 / 칠통 조규일
날 짜 : 2005/01/06 08:25:33
영성계라고 불리는 여러 사이트를 둘러보았습니다.
각기 조금씩 다르지만 몇가지 공통적인 것은 있더군요.
앞으로 대변혁이 있으며 도통군자(빛의일꾼)가 나타나서 우리보다 의식적으로
진화한 외계인의 도움으로 전 인류의 의식상승을 일으킨다.....
그런데 그 빛의 일꾼들은 전생이 이미 깨달은 외계인이거나 혹은 깨달은
지구인이어서 이번생에는 특별한 수행이 없어도 자신이 누구인가를
스스로 자각하기만 하면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
도통군자는 증산도에서 말하는 것 아닌가 싶고
빛의 일꾼은 님이 자주 가시는 모교수님의 싸이트에서 말하는 것으로 들었고
모교수님과 함께하는 스님에게 어떤 분이 저를 물어 보았다고 하더군요.
그랬더니 중요한 부분에 있으며 중요한 일을 할 거라는 ..등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에게 그 분이 물었을 때
저는 나도 모르는 나의 일들을 그들은 잘도 알고 있네요.
그냥 웃고 말았지요.
전에도 누군가에게 말했듯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설령 부처가 살아 돌아와도 스스로 깨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면 깨달음은 있을 수 없다.
물가까지는 끌고 갈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물을 먹는 것은 어디까지나 본인이어야 하고
누가 누구를 구하고 구제한다 하나
구제는 스스로 하는 것이라 이야기한 적이 있는 듯합니다.
모싸이트에서는 스스로 부처인지를 인식 자각하게 하지요.
그리고 인식 자각한 이들을 깨달음을 얻었다고 인가해 주고 있지 않나요.
인가 받은 그들이 특별한 수행 없이
스스로 누구인가를 자각하기만 해서 깨달음을 인가 받은
또 인가 받은 그들이 깨달음에 도달해 있나요?
깨달음에 대하여 정리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무엇을 깨달음이라고 하는가?
깨달음에는 흔히 사용하는 인식의 깨달음이 있고
이외의 여러 가지 인식들로 인한 각기 다른 깨달음이 있지요.
이름은 깨달음이지만 각기 다른 인식의 깨달음은 각기 서로 다르지요.
깨달음에 대한 오해들...이라는 글에서 밝혔듯
깨달음 공에 있지도 않고
견성에 있지도 않으며
오직 돈오에 있다할 것입니다.
그럼 돈오는 무엇입니까?
자성경계의 일원상을 안팎없이 깨는 것입니다.
이는 어떤 능력있는 이가 있어 깨준다할지라도
능력 있는 분으로 인하여 잠시 잠깐 깨져 있을 뿐 아주 �은 찰나에 이루어지나
본성의 속성에 의하여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인하여 원상태로 돌아오지요.
이것으로 봐서는
깨달음은 어느 정도는 능력 있는 분의 영향을 받을 수는 있지만
스스로 깨지 않고서는 되지 않는다할 것입니다.
사실 저는 별로 그런 류의 글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전생의 깨달음에
관하여 궁금하기도 해서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글 중에서 그런 관련글을 본 적이 있었는데 지금 기억이 확실하지
않지만 그와는 약간 다른 쪽의 문제인듯 싶습니다.
즉, 전생에 깨달아서 다시 이번생에 환생하였다면 과연 특별한 수행이 없이
이생에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거나, 아니면 수행이 조금더 빨리 성취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써 놓고 보니 유치한 질문입니다...^.^;;;
시간 나시는 대로 소일삼아 답변 부탁드립니다....()
전생에 깨달아서 이번생에 환생했다면
수행이 조금 더 빨리 성취될 수 있지만
수행하지 않고서는 이룰 수는 없다 할 것입니다.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하여
업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업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업이 있고 없고를 떠나 있게 되는 만큼
깨달았다 하여도 집착하면 더 강하게 집착되어져서
집착하는 곳으로 떨어진다 할 것입니다.
그러니 전생에 깨달을 얻어
업이 있고 없고를 떠나 있다가
이생에 다시 오게되면 있고 없고를 떠나 있던 업이
몸을 받아 태어나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하여 배우면서
배우는 것으로부터 집착하게 되어
마음의 그릇은 다를지라도 업의 인연 속에 산다하겠으나
업의 인연 속 업을 다하는 가운데 업을 짓고
업을 짓는 가운데 업을 다하면서 살아가는 이생에서
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일반인과 다름없이 살게되겠지요.
다만 전생에 수행한 것이 있어 수행에 관심은 있으나...
관심 만으로 수행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전생에 깨달은 분들은 다시 수행하기 위하여
수행할 수 있는 여건 내지는 환경이 되는 쪽으로 선택하여 온다고 보시면 될 것입니다.
그런 만큼 전생에 연속적으로 몇번을 돈오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하여도
이생에서 수행하지 않는다면 일반인으로 살 수밖에 없고
이생에서 수행한다면 전생에 수행되어진 만큼 빨리 이루어낼 수 있다 하겠습니다.
(지금 말하는 이것에 대해서도 이미 설명을 했던 것으로 생각이 나네요.)
그러니 특별한 수행이 없어도 자신이 누구인가를 스스로 자각하면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은
전혀 아니다 하겠습니다.
이세상 세상사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꿈속의 일인가요? / 칠통 조규일
날 짜 : 2004/12/25 07:51:33
한가지 질의드립니다.
이세상 세상사 어느것 하나 빠짐없이
꿈속의 일이라 하는데요...
진정 그러하온지요?
이순간 자판을 두들리는 아바타 진정 꿈속~ 의 등장하는
인물 맞습니까?
칠통님도 허깨비고 저또한 허깨비 인가요?
세상사 모두
꿈속의 일임이 자명한가요?
무명에 사는 사람은 무명의 세상이고
분명 명확한 세상에 사는 사람은 분명 명확한 세상이고
진리로 사는 사람은 진리의 세상이지요.
이 세상 어느 것 하나 꿈속의 일이 아닌 것이 없고
이 세상 어느 것 하나 부처의 일이 아닌 것이 없지요.
허깨비 세상에서 보면 허깨비이고
진리에서 보면 진리이고
부처에서 보면 부처이고
본성에서 보면 본성이고
절대자에서 보면 절대자지요.
전체가 하나로의 가늠할 수 없는 바다에서
바다를 뭐라고 이름할 것인가에
이름이 바다이고 바다가 이름일 것이며
이러한 이름들에서 바다를 보고
바닷물을 뭐라고 이름할 것인가에
이름이 바닷물이고 바닷물이 이름일 것이며
이러한 이름들에서 바닷물보고 바다를 보고
바닷물이 물결치는 물결을 따라 뭐라고 이름할 것인가에
이름이 파도고 물결이며 포말..이름이 그러할 것이며
이러한 이름들에서 바닷물을 보고 바다를 보고
바닷물 속에 있는 것들과 바닷물에 떠 있는 것들을 보고
바다와 바닷물과 더불어 함께 있는 것을
저마다 각자의 이름을 가졌고
그 이름들은 이름이 그러할 뿐
그 이름을 통하여 바닷물을 보고 바다를 보고
전체의 하나를 보고 저마다의 하나에서 전체를 보면
보는 견처를 따라
저마다 다르다 할 것입니다.
바닷물 속 있는 것들과 바닷물에 떠 있는 것들과
바닷물의 물결치는 물결을 따라 포말을 따라
보고 그것들로 산다면
그것들로 사는 한은 바닷물을 보지 못하고 바다를 알지 못하니
바닷물에서 바다에서 볼 때에
그것들로 사는 모든 것들은 꿈이 아닌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들로 살되 바다이고 바닷물인지 알고
바다의 바닷물로 산다면
그것들로 살되 그것들이 아니고 바다고 바닷물인 것인 즉
이들에게 있어서는 꿈이 꿈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바다고 바닷물로
바다 바닷물로 지칭하여 이름한 자체 그대로
언제나 현실 속에 있고
바다에 바닷물이 흐르고 변하는 변하고 흐르는 흐름 속
여여한 가운데 오고 가는 여래라 할 것입니다.
지금 말하는 이것도 말이 이러한 것이지
진실된 있는 그대로를 인식하지 못하고
의식으로 생각으로 인식만 한다면
이글 뿐만이 아니라
부처님의 8만4천 법문을 다 꿰어도
모든 것이 꿈이고 꿈 속의 일이라 할 것이나
깨어나 이러한 사실을 알고
이러한 속에서 산다면
어느 것 하나 실체 아닌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런 속 모든 것은 저마다의 이름이 그러할 뿐
이름에 빠지지 않고 실체를 보고 체에서 용을 볼 것인 즉
이러한 분들에게는 꿈은 꿈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실체고 실상이라할 것입니다.
그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있는 그곳은 어디인가?
할!
근기에 맞는 수행이나 업장소멸법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 / 칠통 조규일
염치 불구하고 이렇게 글을 드리게 된 것은
선생님의 법문 중에 업의 생성과 인과, 인연에 대해서는 이해가 갑니다만
업장 소멸과 복, 공덕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자 하오며
또 근기에 맞는 수행이나 업장소멸법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이렇게 글을 드립니다.
업에...선택에...누구를 따라 왔던...
한 나라의 구성원이 되고 한 가족 가정의 구성이 된 것은
구성원이 된 분들과의 공통의 업이 있어
공업의 작용을 받으면서도 개별적 업의 영향을 받는다 할 것입니다.
이런 인과의 법칙에서
현재 자신이 속해 있는 가정이든 가족이든 사회든...
본인의 업(카르마)에 의하여 이루어진 꿈속 현실이고 현실 속 꿈으로
인연의 업이 나타난 형태의 형상들이라 할 것입니다.
이는 꼭 정신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까지도 포함합니다.
자신의 업을 보기 위해서는 현재 이루어지는 현상이라는
나를 비롯해 가정, 가족, 사회...이해관계 속
꿈속 현실과 현실 속 꿈을 올바로 보면
올바로 보는 가운데 자신의 업이 드러날 것입니다.
본성이 여여한 가운데 흐르고 흐르며 오는 것이
본성의 표면을 흐르듯 오는데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그것에 깊고 깊게 섞여 있어 맞이하고 보내니
맞이하니 인연의 업의 나타났다고
보내니 인연의 업이 사라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과거 현재 미래... 그럼에도 그 어느 것에도 점을 찍어 말할 수 없는
현재라고 하는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
주인공 본성에 있지 못하고
주인공이라고 하는 본성에서 여래를 보지 못하고
"내가" "나" 라고 하는 나의 업에서 업이 상(相)으로 드러나 오는
인트라망 하늘망에서 인트라망 하늘망을 바라보니
언제나 나는 여래(如來) 속 업을 보고
업에서 현재를 인식하고 인과 연을 맞이하니
맞이하는 인과 연이 바로 님의 업으로 인한 것이며
업으로 인한 현재라고 하는 나, 가정, 가족, 사회....속에
나타나고 드러난 인과의 법칙 속
"지금 여기"에서의 환경과 생활에 갈잡(渴雜)하여 있되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근기가 다르다할 것이며
어떤 환경과 생활 속에서
어떤 생각과 의식 인식하고 인식 의식 생각한 것으로부터
그 인연의 업 업의 인과가 나타나는 것을 알고자 하는
나타난 것을 벗어나기 위한 의심과 의문의 문제를 가지고
어떻게 대처 대응하느냐에 따라 그 근기가 다르다 할 것입니다.
그런 만큼 자기 자신의 근기에 맞는 최고 최상의 수행이란
생활 속 이루어진다할 것입니다.
생활 속... 사회 가족 가정..너와 나 우리...속에서
지은 업은 맞이하여 풀되 업을 짓지 말아야할 것이나
어떤 것이 맞이하는 업이고 업을 짓지 않는 것인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본인에게 다가오는 업의 인연이 그것이 어떻게 오고 나타나
나에게 부딪치고 부딪히든 업의 소멸에 감사하게 생각하고
반갑게 맞이하여 맞이하는 그 자체를 복으로 감사한다면
"지금 여기서" 행하는 모든 행이 감사하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니
맞이한 것이 업의 소멸이든 짓는 업이든
악업이 아닌 선업을 쌓고 복덕을 쌓는 것이 될 것입니다.
질문하신 "근기에 맞는 수행이나 업장소멸법.."은
주어진 현실... 직장, 가족 가정에서 열심히 생활하며
업의 인연으로 나타난 지은 업은 맞이하여 푸는 가운데
생활 속에서 수행을 하되...생활과 전혀 관계없는...
의심 의문이 없는 화두로 수행하기보다는
생활 속 본인의 수행의 경지에 맞는 최상 최고의 의심과 의문을 화두로
참구하는 수행 정진 속 업장을 하나 하나 소멸해 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
업으로 쌓여 있는 본성을 밝히며
본성을 밝히기 위한
본성과 본성의 속성 업이 한 덩어리 되어 뒤섞여 있는 업장을
하나 하나 들추어 파헤쳐 느슨하게 하여
소멸이라기보다는 놓아버리는
그럼으로 인과를 떠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업을 소멸하는가?
생각 인식 의식..깨어서...마음으로...심생기하여
심생기로 본성을 둘러싸고 있는 업을 파헤치는 것입니다.
본성에서 본생기로 본생기에서 기생심으로 업이 된 것들을
심생기로 해서 업을 녹이고 또는 파헤쳐
기생심 본생기 본성으로 본성에서 절대자로 역관하여 가는 것입니다.
"업장 소멸과 복, 공덕의 생성과 소멸 "
앞에서 밝힌 것과 같이 생활 속 업장 소멸과
수행정진 속 감사하는 마음에 복을 짓고
감사하는 마음에 그 대상에게 잘하니 선업의 공덕을 쌓고
쌓은 선업의 공덕은 업이 되고
업이 된 선업, 악업 공덕은 ....
"우리 모두는 깨달아 있다....있을 뿐"이란 책
"인과를 받는다 했는데"란 글에서 밝힌 것과 같이 이루어지고
또한 수행정진 속 수행공덕을 쌓게 되는데
수행하는 사람은 물든 마음을 좇기보다는 맑은 마음을 쫓고
어떤 것을 선택함에 있어
어둔 것을 선택하기보다는 밝은 것을 선택하니
맑고 밝음 마음을 가지고 밝은 곳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밝디 밝은 본성으로 나아감에
맑음 마음을 쫓으니 주변의 인연들을 맑은 마음으로 대하니
조금이라도 더 맑아지게 하는 수행공덕이 있게 되고
있는 곳이 어디든 밝은 곳을 보고 밝은 곳으로 나아가니
밝은 곳을 바라보는 만큼 주변의 인연들에게
밝은 곳을 바라보게 하는 수행공덕이 있게 되고
맑고 밝아진 만큼 주변을 맑히고 밝히고
주변을 맑히고 밝히는 수행공덕이 있게 되고
수행정진으로 의식이 깨어난 만큼
주변에 의식이 깨어나게 수행공덕이 있고
수행정진으로 경지가 높아진 만큼
더 많은 주변을 깨어나게 하는 수행공덕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 정진하는 수행자에게는
수행하는 행이고 수행한 행이지만
그것을 받는 주변의 인연들은 그저 감사하게 되는 것이지요.
본인도 모르게 본성으로부터
그렇다 보니...복이 되고 공덕이 되고...
이것은 인과와 다름없이 인연법 인과의 법칙으로
한치의 어긋남 없이 나타나게 됩니다.
제 현재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업장을 소멸하고
관념을 정화시키고 한 단계 성숙한 삶을 살 수 있을지
한 말씀 일러주시고 도와주시기를 두 손 모아 청합니다.
현실 생활에 최선을 다하는 가운데
나를 사랑하고 아내를..자식을 사랑하고
부모를...조상을 사랑하고 이웃과 주변...사회동료를 사랑하며
부딪쳐오는 모든 일들에..그것이 좋고 나쁘고..힘들든 수월하든..
매사에 업장 소멸됨에 감사하는 생활 속
수행 정진하며 관념을 정화시키고
한 단계 수행의 경지가 높아지는 만큼 한 단계 성숙한 삶을 살 것입니다.
선악이 둘이 아니고
좋고 나쁨이 둘이 아니고
희노애락이 둘이 아니고
한통속인지를 알고
한통속에 있으면
평상심 속 여래를 볼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인생이
님의 업의 화현이고 공업의 화현이니
업장 소멸에 감사하며
주어진 일 하는 일에 감사하며
하고자 하는 일 벌어진 일에 감사하며
주어진 하는 하고자 벌어진... 일을 피하고자 넘어서려 벗어나려고
물질을 쫓기보다는 처해진 일들에 최선을 다하는
최선을 다하는 가운데 따라 오는 물질에 감사하며
피하기보다는 맞서 대응하여 초월해 가야할 것입니다.
일반인들은
탐진치 삼독에 빠져
"나" "내 것"을 위하여 물질을 좇고
처한 현실이 좋지 않을 경우 피하려 가려하고 돌아가려 하지만
수행자는
탐진치 삼독을 벗어나려 수행하고
가아의 "나" "내 것"을 저버리고 진아를 쫓아 수행해 가되
처한 현실이 좋든 좋지 않든 업의 소멸로 보고 감사해 하며
대응 초월해 가야 한다할 것입니다.
2003. 8. 20
어떤 것이 정법인가요? / 칠통 조규일
"어디에 있던지 꾸준히 하면 되는 걸까요.?"
이미 정법에 대하여 여러 곳에서 설명한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정법(正法)이란 ?
어떤 수행단체나 종교단체를 불문하고
언제 어디에 있던지. "지금 여기서", 늘, 항상...
옳고 바르게 사는 것, 옳고 바르게 수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밝음과 어둠에서는 밝음
선(善)과 악(惡)에서는 선(善)
긍정(肯定)과 부정(否定)에서는 긍정(肯定)...
이분법론(二分法論)에서는 늘 밝은 쪽 빛을 향하여 가는 것을 말합니다.
살아가며 수행하는 見, 念,.. 바라봄에 있어서
正見을 가지고 수행하며 살아가는 것을 정법(正法)이라할 것입니다.
어둠에서 벗어나 빛으로 나아가라고 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칠통 조규일
빛과 어둠이 생긴 것은 이분론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데 본성은 텅 빔이라고 합니다. 어둠은 빛의 부재인 것이고 모든 것은 빛으로 이루어져있으니. 빛이 아닌 것이 어둠일 것이고, 텅 빔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 즉 참아, 본성이라면 즉 어둠과 텅 빔은 같은 것이다. 어둠=텅 빔이란 등식이 성립하는데.. 신의 말씀에는 어둠에서 벗어나 빛으로 나아가라고 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그것의 참의미가 무엇일까요? 제가 생각하는 어둠이랑 무랑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어느 분이 본성은 텅 빔이라고 말씀하셨는지 모르겠으나
본성은 텅 빔 속 無한 듯 有하고 有한 듯 無한 텅 빔입니다.
有無가 개별적인 듯하면 개별이 아니고
有無의 공통집합(共通集合)인 듯하면 합집합(合集合)이고
합집합인 듯하면 공통집합이고 개별이고 자연입니다.
본성은 있는 그대로의 여래(如來)입니다.
이도 언어에 얽매인 것이니 언어에 얽매이지 말고 바로 보시길 바랍니다.
명상담론 "우주의 생성 천지창조에 대하여..."란 글과
"창세기를 읽고...절대자..."란 글을 읽어보시면
제가 살펴본 생각하고 있는 천지창조 우주론을 가늠하여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저의 문학서재 연재코너 명상담론 2. 뒷부분에 글이 있을 것이니 읽어보세요.
그러면 빛과 소리 어둠에 대하여 나름대로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더불어 "유일신 하나님도 없고 부처님도 없다"
"불랙홀의 생멸로 별과 행성이 생멸한다"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신의 말씀에는 어둠에서 벗어나 빛으로 나아가라고 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의 참의미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깨어나라"는 말이고
무엇으로부터의 깨어남이냐 하면
무명(無明)으로부터의 깨어남이라 할 것입니다.
무명은 밝지 않음의 밝음이며 밝음의 어둠이고
어둠 속 어둠 칠흑의 어둠이라 할 것입니다.
칠흑의 어둠에서 밝지 않음의 밝음으로
밝지 않음의 밝음에서 본성의 밝디 밝은 빛으로 나아가라는 말입니다.
칠흑의 어둠에서 본성의 밝디 밝은 빛으로 나아갈수록
밝아짐만큼 지혜가 생기고
생긴 지혜만큼 보고 듣는 것을 바르게 하여
우주의 삼라만상 그 실체 실상을 확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둠(무명)에서 벗어나 빛(깨달음, 頓悟)으로 나아가라고.."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
사바세계 무명의 세계고 윤회의 세상 윤회의 수레바퀴 속이고
지금 살아 있음의 삶이 윤회로 인한 삶이고
윤회로 인하여 끊임없이 생멸하고
생멸이 있으니 생로병사가 있게 되는데..
이러한 윤회의 주체가 업이고
업의 주체는 탐, 진, 치 삼독으로 인한 것이고
탐, 진, 치 삼독은 "나"라고 하는
"나"의 무명으로부터 생한 것이니
무명으로부터 벗어나 빛으로 나아가면 빛으로 가까이 가는 만큼
빛의 밝힘으로 인하여 하나 하나 그 실체가 모습을 드러내니
실체 실상의 모습이 드러난 만큼 확연하여
확연한 것으로부터는 무명의 "나"
"나"로 인한 삼독에 빠지지 않고
삼독에 빠지지 않는 만큼 업을 더 이상 짓지 않고
더욱 밝아지는 만큼 "나"를 이루는 이루고 있는 업까지도
즉 전에 업이란 의식 잠재의식 무의식..까지도 밝아져
현재의 "나"라고 하는 "나"를 이루고 있는
의식의 식, 잠재의식의 식, 무의식의 식(識)이 드러나고
드러난 식(識) 아는 것이 나라고 인식한 인식의 "나"의 실상 실체가 확연하니
더 이상 무명의 탐, 진, 치 삼독에 빠지지 않고
점차적으로 무명으로부터 벗어나고 업으로부터 벗어나서는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 ...정토..하나님 나라..천국, 극락...에 들고
진리의 세계에... 본연의 빛에 드는... 빛의 세계에 들라는...빛이 되라는 것입니다.
음중양을 보니 이를 중도(中道)의 봄이고 행입니다.
님이 생각하는 어둠과 무의 차이점은...??
빛과 어둠, 유와 무 이분(二分)의 양면성 이분론에서의
빛 없음의 어둠이고 있음 반대로의 없음 무(無)를 말한 것입니다.
그럼으로 무(無)의 허공(虛空: 대기권 안팎)을 가늠하고
가늠한 무의 허공(대기권 안팎)으로부터 빛의 없음 어둠을 말한 듯싶습니다.
그럼으로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
대기권 안팎의 허공 그 끝없는 허공의 무(無)에 가득한 어둠을 생각하고
이것이 본래의 참 자아 본성이라 하며 텅 빔과 무(無)가 같다 하는데...
성경 창세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생각으로부터 인식한 것으로 이끌어 낸
종교의 믿음이 전제가 되어 믿는 종교의 창세기 천지창조로부터
이끌어 낸 생각의 끝자락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으로 아무 것도 없는 무(無)의 허공이 끝없이 펼쳐진 우주의 허공
그 허공의 어둠은 텅 빔이다 그럼으로 아무 것도 없는 텅 빔은 어둠이다
그 어둠 깊은 파동에 텅 빔 속 빛이 있으라 함에 빛이 생겼다 하니
빛 이전은 어둠이고 어둠 이전은 텅 빔이고 텅 빔 이전은 무(無)이니
본성 참 자아는 어둠이고 텅 빔이라 한 것입니다만
앞에서 설명한 것을 참조해 보시고
"창세기를 읽고..."란 글을 읽어보시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님이 말한 어둠은 빛이 없는 어둠을 말한 것으로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은 상태의 무(無)를 이름한 것이 아니니
빛이 부재한 어둠으로... 빛으로 이루어진 유(有)가 없으니
당연히 빛 없는 어둠의 무(無)라 하지만
어둠에 관계한 어둠 속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은 상태의 유무(有無)가 없으나
어둠의 무(無)를 이름함으로 유(有)를 이름했으니
이는 없음으로의 유(有)이기도 하고 있음으로의 유(有)이기도 합니다.
어둠에 아무 것도 없다는 텅 빔이 아니라 있는 텅 빔이라 할 것입니다.
이는 빛으로의 이루어짐이 아니라 어둠으로의 이루어짐이라 할 것입니다.
어둠으로의 이루어짐은 빛으로의 이루어짐이 유(有)가 없음으로
빛의 부재 무(無)에서 유(有)의 어둠으로의 이루어진 것 유(有)라 할 것입니다.
그러니 님이 말한 어둠과 텅 빔의 차이점은
어둠에 무(無)라 했으나 무(無)가 텅 빔에 있는 있음의 유(有)를 말함이고
텅 빔에 어둠을 이야기했으나 텅 빔의 무(無)가 아니라
어둠으로 가득 찬 허공의 유(有)를 말했으니
이것이 님이 말한 어둠과 텅 빔의 차이점입니다.
그러니 텅 빔은 텅 빔이 아니고
어둠은 어둠이 아니고
무는 무가 아니라 이름이 어둠이고 텅 빔이고 무라고 할 것입니다.
이는 등식의 성립이 아니라 인식으로의 아는 것 알고 있는 식(識)의 나타남
드러남 이루어짐의 인식 등식의 성립이라 이름할 것입니다.
2002. 6.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