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스마는 그 활동에 비해 다소 과소평가 받아왔던 것이 사실이다.1934년에 태어났으니 벌써 60대 중반인 그는 20세기 말에 이르러서야세계 정상의 첼리스트의 대열에 든다는 평가를 받았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태어난 그는 소년시절 아버지로부터 첼로를배우기 시작해 헤이그 왕립음악원에 입학한 이후로는 당시 암스테르담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의 첼로 주자인 카렐 본캄프에게 배웠다.
그리고57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일반적인 ‘신동’들보다는 훨씬 느린행보였다. 2년 후인 1959년, 25세의 나이로 멕시코에서 열린 파블로카잘스 국제 첼로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화려한솔리스트의 길을 택하지 않았다.
62년부터 그는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의 수석연주자로 활동하면서 당시 원전악기 연주계의 ‘무서운아이’였던 가장 진취적인 원전악기 연주가─리코더의 프란스 브뤼헨,바이올린의 얍 슈뢰더, 쳄발로의 구스타프 레온하르트와 함께암스테르담 4중주단을 결성해 원전연주사를 개척하기도 했다.
지금이들중 브뤼헨과 레온하르트가 바로크시대까지의 고음악 지휘 분야에서최고의 자리에 올라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첼리스트로서의 자리를지켜온 빌스마의 비중이 어느 정도 인지를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68년에 이르러 콘서트헤보를 떠나 본격적으로 솔리스트로서 활동을개시했지만 실내악 연주자로서의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근대,특히 현대의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연주하는 런던 4중주단을 결성해활동하기도 했다.
한편 70년대 들어서는 세계 각지를 순회하며 바흐의 무반주 첼로모음곡을 원전악기로 연주해 이 분야의 주창자로서도 자리매김을 했다.엔드 핀 없이 다리 사이에 끼우고, 거트 현을 채용해 연주하는 바로크첼로를 전세계에 널리 알린 것도 그였다.
역시 네덜란드 태생의 그의제자 페터 비스펠베이가 현대음악과 바흐를 중심으로 하는 고음악에치중하는 모습은 빌스마의 젊은 시절을 고스란히 투영한 것이라 할 수있을 것이다.
79년의 바흐 첼로 모음곡 전곡 녹음(세온)과 92년에 스미스소니안협회 소장의 스트라디바리우스 ‘셀베’(이 명기는 보통첼로보다 약간 크다고 한다)에 의한 재녹음(소니)은 이미 거트 현을사용한 원전악기 연주의 최고 음반으로서 자리를 굳힌 지 오래다.
한편 그는 이탈리아어로 ‘거트활’이라는 뜻을 지닌‘아르키부델리’를 조직해 소니의 원전연주 서브 레이블인비바르테에서 음반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교육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는현재 그는 하버드 대학, 헤이그 왕립음악원, 암스테르담 스벨링크음악원 등에서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