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룡의 서울역사문화 (제48화)
충과 효와 삶의 애환이 깃든 한강의 다리
박 경 룡(서울역사문화포럼 명예회장)
서울시는 경기도, 수원시, 화성시와 공동으로 조선시대 정조대왕의 성대한 능행차를 2022년 10월 8일부터 9일까지 재현했다. 창덕궁에서부터 도심을 지나 한강시민공원 이촌지구(여의도 방면)∼노들섬을 잇는 ‘충효의 배다리(舟橋) 건너기’ 행사를 가졌다. 작은 배들을 일렬로 세운 뒤 그 위에 널빤지를 올려서 만든 다리 위로 한강을 건너는 체험행사이다.
이 곳의 배다리 설치 장소는 조선시대 정조가 아버지(사도세자)가 묻힌 화성의 융릉에 가기 위해 한강을 건넜던 곳이어서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노들나루에 배다리를 가설하는 주교사(舟橋司)라는 관아를 한강 남쪽에 두고, 주교대장(舟橋大將)을 배치하기도 하였다.
한편 경술국치 직전의 1910년 5월에 우에다(上田) 라는 일본 상인이 마포에서 여의도까지, 다시 여의도에서 영등포를 잇는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놓은 적이 있다.
우에다는 마포쪽 선교(船橋) 입구에서 다비에 조리를 신고 지키고 앉아 다릿세를 받았다. 영등포쪽에서는 그의 아내가 마치 거지처럼 방석 위에 무릅을 꿇고 앉아 다릿세를 받았다. 그리고 밤에는 철조망으로 만든 다릿문을 걸어놓고 들어가곤 하였다.
한 번 건너는데 8 전, 쌀 반 되 값의 비싼 도강료였으나, 국가에서 받는 나룻배의 뱃삯보다는 훨씬 쌌으므로, 날마다 많은 이용자들로 붐볐다.
이에 화가 난 것은 마포·노량진·영등포의 나룻꾼들이다. 그들은 생업을 잃게 되자 폭동을 꾸몄다. 이에 호응한 1만 명의 군중이 ‘척왜(斥倭)’를 부르짖으며 다리를 부수려고 하였다.
이 당시 일본군이 동원되자, 군중들은 투석전을 벌이며 이들과 대치하였다. 이 때 한성부에서는 주모자 김모(金某) 등 네 명을 불러 들인 후에 울면서 타일렀다 한다. 조선이 일본 세력을 거역할 수 없는 실정을 설득하고, 장마가 지면 자연 다리가 떠내려가게 될 테니, 꾹 참고 있어 달라고 타일렀다.
이보다 10 년 전인 한강에는 한강철교와 인접한 약 4자(尺) 폭의 사람들이 건너다닐 수 있는 한강 인도교가 미국인 모르스에 의해 준공되었다. 총 270 일 동안의 총 공사비 40만 원을 들인 이 한강 인도교는 그 후 조선 정부와 시공자간에 시비가 생겨 철거하였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말이 많았다. 풍문에 의하면, 인도교 때문에 황실에서 한강 나룻배의 도진세(渡津稅)를 받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등, 또 기차소리에 놀라 뛰어드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라는 등.
또한 인도교를 걷던 임산부가 유산을 하여 부정을 탔다는 등, 그것을 구실로 보수파가 책동을 했다는 등, 국왕의 능 참배 때 다리 폭이 좁아 연[大駕]이 통과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등, 그래서 주교(舟橋)로 행차하자니 국왕 머리 위로 사람들이 다니는 꼴이 되기 때문이라는 등 그 이유가 구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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