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최근 불법 정치후원금을 받은 혐의로 여당 3선(選) 의원을 소환 조사했다. 얼마 전까지 여당의 사무총장을 지낸 의원이다. 그에게 적용된 불법자금 수수액은 5000만원가량이다. '박연차 게이트'에서 이름이 오르내리거나 이미 기소된 정치인들의 개별적인 뇌물 수수액 역시 1억원을 넘지 않는다.
보통 억(億)대를 훌쩍 넘던 정치인의 불법 자금 단위가 천만원대로 낮아진 셈이다.
이 돈이 적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또 액수가 얼마가 됐든 국회의원이 불법으로 돈을 받은 것을 눈 감아줘서도 안 된다. 그러나 뇌물 수수 단위가 과거에 비해 크게 적어진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다.
한때 조(兆) 단위 설까지 돌았던 선거 비용도 대폭 줄었다. 이명박 후보가 중앙선관위에 신고한 2007년 대선 비용은 373억여원이다. 최근 치러진 미국 중간선거 때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도전한 멕 휘트먼 후보의 선거 비용은 1억4200여만달러, 우리 돈으로 1600억원을 넘는다. 미국의 1개 주(州)지사 후보 선거 비용이 우리 대선 후보의 5배 가까이 된다. 이 때문인지 최근 들어 '고(高)비용 정치'에 관한 우려도 쑥 들어갔다.
그러나 청목회(전국청원경찰친목협의회) 사건을 보면 한국 정치는 여전히 '돈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 문제가 된 소액(少額) 후원금 제도는 돈과 관련된 정치의 틀을 바꿀 수 있는 획기적인 방안이다. 2002년 대선 때 벌어진 '차떼기 사건'으로 홍역을 치른 여야(與野)가 2004년 초 기업·기관·단체가 정당과 정치인에게 직접 돈을 주지 못하게 틀어막는 대신 국민에게서 소액 헌금을 걷을 수 있도록 정치자금법을 고치면서 등장한 제도다.
문제는 자발적인 소액 후원금으로 연간 모금 상한선인 1억5000만원을 걷을 수 있는 정치인이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데 있다.
정치인은 돈 아쉬운 것은 절대 참지 못한다. 그래서 찾아낸 게 소액후원금 제도를 교묘하게 비트는 각종 편법이다. 10만원 정치후원금을 내면 10만원을 돌려받고 여기에다 세금 공제 혜택까지 주는 제도가 주 타깃이 됐다. 목돈을 받아놓고 10만원 이하로 걷은 것처럼 쪼개거나, 대기업과 기관, 노조(勞組)·단체 소속원들이 대거 '자발적으로' 10만원씩 후원한 것처럼 꾸미는 수법이 동원됐다. 미국에서도 성행하는 '번들링(bundling)'과 유사한 방법이다.
처음에는 기업·기관·단체들이 직원이나 노조원에게 후원금 내기를 독려하는 정도였다면, 최근 들어선 아예 해당 의원들과 이 문제를 놓고 사전에 상의하거나, 목돈과 함께 10만원 후원자로 적어낼 명부(名簿)를 건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청원경찰들도 어디선가 이 방법을 듣고, 5000여명이 8억원 조금 넘는 돈을 모았다. 청목회는 그간의 로비 활동을 자신들의 인터넷 카페를 통해 사실상 생중계했다. 이들보다 더 많은 돈으로 더 큰 로비를 벌이는 기업·기관·단체들은 훗날 물증(物證)이 될 만한 흔적을 절대 남기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청목회 로비는 '순진'했다.
여야 의원들은 "소액 후원금까지 문제 삼으면 앞으로 정치를 어떻게 하느냐", "10만원 이하 후원금은 출처 확인이 불가능하다"고 항변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직하지 못한 주장이다. 정치권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편법과 탈법을 동원해 소액 후원금 제도를 악용해 왔는지는 정치인들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또 한국 정치가 청원경찰들처럼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손을 벌리는 구차한 신세가 되어선 안 된다는 것도 정치인들이 누구보다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청목회 사건이 터진 이후 여의도에서 나온 말들은 하나같이 궤변의 연속이다.
청목회 로비를 받은 의원들은 "힘없는 사람을 도운 게 무슨 죄냐"고 했고, 야당 중진은 "국민이 주는 새경을 왜 안 받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정치가 '불쌍해서 도와줬고 그 대가로 돈 받았다'는 희한한 논리를 들이댈 만큼 군색해진 것이다. 검찰 수사에 대한 정치권의 주장에는 귀담아들을 만한 내용이 적지 않다. 그런데도 국민 여론이 계속 검찰 손을 들어주는 까닭은 자명(自明)하다. 지금의 정치권 모습에 부아가 치밀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