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12월02일(토요일) 해남 두륜산 산행일정 회비 57,000원 11월3일 결제, 25번 좌석 예약
산 : 해남 두륜산 [두륜산(頭輪山)은 전라남도 해남군에 있는 산이다. 가련봉(703m), 두륜봉(630m), 고계봉(638m), 노승봉(능허대 685m), 도솔봉(672m), 혈망봉(379m), 향로봉(469m), 연화봉(613m)의 8개 봉우리가 능선을 이루고 있다. 대흥산·대둔산이라고도 부른다. 난대성 상록활엽수와 온대성 낙엽 활엽수들이 숲을 이루고 있어 식물분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979년 12월 26일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정상 부근의 북미륵암에 국보 제308호(2005년 9월 28일 지정)인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또한 북미륵암에는 보물 301호인 대흥사 북미륵암삼층석탑이 세워져 있는데,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산행코스: [ 오소재 약수터-오심재-노승봉-두륜산 가련봉 정상-만일재-두륜봉-진불암-북미륵암-일지암-대흥사-대흥사 주차장(경내버스주차장)-대흥사 매표소-두륜산도립공원 전기차 충전소 ] (약 10km) 일시 : 2023년 12월 02일(토요일) 산행코스 및 산행 구간별 산행 소요시간 (총 산행시간 4시간20분 소요) 06:50~11:30 “좋은사람들” 버스로 서울 양재역 12번 출구 전방 국립외교원 앞에서 출발하여 전남 해남군 북일면 흥촌리 산117-4 번지에 있는 오소재 약수터로 이동 (381km) [4시간40분 소요] 11:30~12:10 전남 해남군 북일면 흥촌리 산117-4 번지에 있는 오소재 약수터에서 산행 출발하여 오심재로 이동 12:20~12:40 노승봉(685m) 정상으로 이동 13:40~14:00 휴식 13:20~13:40 두륜산의 최고봉인 가련봉(703m) 정상으로 이동 [가련봉 정상을 기준으로 북쪽에는 양촌 저수지가, 북동쪽에는 주작산과 덕룡산이, 동쪽에는 강진만과 그 뒤로 장흥 천관산이, 동남쪽에는 완도군의 고금도가, 남쪽에는 완도와 해남의 달마산이, 남서쪽에는 두륜봉과 그 뒤로 대둔산이, 서쪽에는 천년고찰 대흥사와 그 뒤로 멀리 진도가, 서북쪽에는 멀리 신안군이 위치한다.] 13:40~14:00 사진촬영 12:40~13:00 만일재로 이동 13:00~13:20 두륜봉(630m) 정상으로 이동 13:40~14:00 휴식 13:40~14:00 진불암(眞佛庵)으로 이동 [진불암(眞佛庵)은 표충사를 옆으로 계곡을 따라 약 1km 가량 올라가는 두륜산 중턱에 자리잡은 대흥사의 암자이다. 진불암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수 백년 된 은행나무가 암자의 역사를 묵묵히 말해 주며 정교하게 쌓아올린 돌탑 하나가 찾는 이의 눈길을 끈다. 진불암은 정확한 창건 연대를 알지 못한다. 진불암과 고진불암 「대둔사지」에는 1630년(인조8)에 수월극현(水月克玄)대사와 덕호(德浩)가 함께 중건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보다 훨씬 이전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693년(숙종19)에 이홍록(李弘錄)이 덕탄(德坦)과 함께 중건했고, 1750년(영조26)에는 북미륵암을 중수한 바 있는 온곡대사(溫谷大師)와 함께 우일(宇一)장로가 진불암을 중수했다. 또한 채미대사(採薇 大師)의 글에는 영곡(靈谷) 영파(影波).만화(萬化).운담(雲潭).아암(兒庵) 등의 승려가 이 암자에 거쳐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진불암은 조선중기 이후 여러 차례의 중건과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현재 진불암은 응진당, 향적당, 요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응진당은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안에는 불상으로 석가 부처님과 28나한상, 문관상이 있다. 그리고 1987년 봉안된 범종과, 1972년의 진불암 중수 불사 당시의 시주자 이름이 적힌 현판도 있다. 불화로는 삼세후불탱화를 비롯해서 칠성탱화.신중탱화.산신탱화가 있다. 이들 탱화는 낭월 고재석스님이 그렸다. 진불암에서 북암으로 넘어가는 삼거리에 토굴이 있는데, 진불암의 옛주인 청화스님의 수도처이다. 진불암은 대흥사의 암자중 신도들이 많은 탓인지, 크고 작은 옹기들이 장독대에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다. 한편 「대둔사지」에는 고진불암과 16나한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고진불암은 현재의 진불암 근처에 있다. 옛날 기록에 말하기를 강진의 백도방(白道坊)에 서씨라는 어부가 있었는데 하루는 바다 한 가운데서 고기를 잡다가 서쪽 나라의 배를 만났다고 한다. 배 안에는 16대 아라한상이 실려 있어 '그것을 두륜산방(頭輪山房)에 봉안하고 편액을 진불(眞佛)이라 한다' 했다. 진불은 곧 응진(應眞)으로서 나한을 뜻하는 것이다. 그 후에 정사(精舍)를 산방(山房) 곁에 건립하여 이름을 진불이라 했으며, 또 달리 고진불(古眞佛)이라 했다. 1740년에 위일장로(位 一長老)가 중건했으며, 또 1791년에 정능선로(定能禪老)가 중건했으니 전후 다섯번을 중건했다'. 고진불암은 진불암 바로 위에 있는 암자로, 지붕은 슬레트로 지어진 건물이다. 이 암자는 스님들의 수도처로 사용되고 있다.] 13:40~14:00 북미륵암(北彌勒庵)으로 이동 [북미륵암(北彌勒庵)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의 본사인 대흥사의 산내 암자. 대흥사 북미륵암은 만일암의 북쪽에 있기 때문에 북미륵암이라고 불리는 산내 암자이다. 1970년경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동삼층석탑에서 3점의 고려시대 금동불상이 수습되어 현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2004년 마애불을 보호하는 전각인 용화전을 해체 공사하였다. 북미륵암 창건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대둔사지(大芚寺誌)』에 의하면 “건륭갑술에 온곡영탁(溫谷永鐸) 대사가 북암을 중수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북미륵암은 1754년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동일한 기록에 따르면 13세기 진정국사 천책이 남송 순우연간[1241~1252]에 북미륵암에 주석하였고, 천책의 발우가 18세기 후반까지 북미륵암에 전승되었다고 되어 있다. 18~19세기에는 연담유일(蓮潭有一), 벽담행인(碧潭幸仁), 아암혜장(兒庵惠藏) 같은 고승들이 북미륵암에서 강학(講學)을 열었다. 용화전, 요사채 등의 건물과 2기의 3층 석찹이 있다. 용화전은 마래여래좌상을 봉안하기 위한 건물로 1985년 4월에 중수하였다. 1995년 4월에 중수한 요사채는 스님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ㄴ’자의 건물이다. 그 밖에 신중탱화, 산신탱화와 1987년에 조성한 동종 및 위패가 있다. 대흥사 북미륵암에는 문화재로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국보 제308호, 2005년 09월 28일 지정],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301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동삼층석탑[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45호, 2004년 2월 13일 지정]이 있다.]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海南 大興寺 北彌勒庵 磨崖如來坐像) 종목 국보 제308호 (2005년 9월 28일 지정) 주소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산8-1 북미륵암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海南 大興寺 北彌勒庵 磨崖如來坐像)은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 북미륵암에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이다. 바위면에 고부조(高浮彫)되어 있는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은 공양천인상이 함께 표현된 독특한 도상의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여래좌상으로 규모가 크고 조각수법도 양감이 있고 유려하여 한국의 마애불상 중에서는 그 예가 매우 드물고 뛰어난 상으로 평가된다. 본존불의 육계(肉髻)가 뚜렷한 머리는 언뜻 머리칼이 없는 민머리(素髮)처럼 보이나 나발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이목구비의 표현이 단정한 얼굴은 살이 찌고 둥글넓적하여 원만한 상이다. 그러나 눈 꼬리가 약간 위로 치켜 올라가고 입을 굳게 다물어 근엄한 인상을 풍긴다. 귀는 큼직하니 길게 늘어져 어깨에 닿았으며, 유난히도 굵고 짧아진 목에는 두 가닥의 선으로 삼도(三道)를 나타내었다. 손(手印)과 발은 항마촉지인에 오른 발을 왼 무릎 위로 올린 길상좌(吉祥坐)를 하였는데, 손가락과 발가락을 가냘픈 듯 섬세하고 가지런히 묘사하여 사실성이 엿보임과 더불어 곱상한 느낌을 준다. 법의(法衣)는 양어깨를 다 덮은 통견의(通肩衣)로 그 주름은 거의 등간격으로 선각화(線刻化) 하여 사실성이 뒤떨어지고, 무릎 사이로 흘러내린 옷자락은 마치 키를 드리운 것처럼 늘어지는 등 도식적(圖式的)인 면이 강하다. 이는 통일신라 말기로부터 고려시대로 이행해 가는 변화과정을 잘 보여준다 하겠다. 대좌(臺座)는 11엽의 앙련(仰蓮)과 12엽의 복련(覆蓮)이 마주하여 잇대어진 연화대좌로 두툼하게 조각되어 살집 있는 불신(佛身)과 더불어 부피감이 두드러져 보이며, 다른 예에서와는 달리 자방이 높게 솟아올라 있어 특징적이다. 머리 광배(頭光)와 몸 광배(身光)는 세 가닥의 선을 두른 3중원(三重圓)으로 아무런 꾸밈도 없이 테두리 상단에만 불꽃무늬(火焰紋)가 장식되어 있으며, 그 바깥쪽에는 위·아래로 대칭되게 4구의 천인상을 배치하였다. 둔중한 체구로 다소 경직되어 보이는 본존불과 달리 경주 석굴암 내부 감실(龕室)의 보살상을 연상케도 하는 4구의 천인상은 날렵한 모습으로 부드러움과 함께 세련미가 엿보인다. 천인상들의 조각표현은 이 당시의 거의 유일한 예이자 우수한 조형미를 반영하는 수작으로 평가된다.]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삼층석탑(海南 大興寺 北彌勒庵 三層石塔) 종목 보물 제301호(1963년 1월 21일 지정) 주소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357,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삼층석탑(海南 大興寺 北彌勒庵 三層石塔)은 전라남도 해남군 대흥사 북미륵암에 있는 고려시대의 삼층석탑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301호로 지정되었다. 두륜산 정상 부근의 북미륵암에 세워진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기단에는 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돌로 되어 있으며, 몸돌에는 네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새겼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밑면의 단의 수가 층에 따라 다른데, 1·2층은 4단, 3층은 3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탑의 머리장식으로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앙화(仰花:솟은 연꽃모양의 장식)가 남아 있다. 한반도의 남쪽 끝인 해남에 이처럼 구성이 가지런한 탑이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양식에서 일부 간략화된 곳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으며,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14:00~14:30 일지암(一枝菴)으로 이동 [일지암(一枝菴) 일지암터는 40여년 전에 응송스님과 낭월스님이 그 터를 확인하여 그곳에 건물을 중건하였다고 한다. 터가 있는 곳은 샘에서 물이 흘러나와 늘 질척거렸다고 한다. 물이 나오고 양지 바른 곳이라서 이곳에는 산돼지나 노루가 다니는 길목이었고, 그래서 숯꾼이나 초군들이 짐승 덫을 설치하던 곳이라고 한다. 초의선사는 이곳에서 유명한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을 펴냈고, 선다일여의 가풍을 드날리며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와 같은 석학, 예인들과 교류하며 쇠퇴해 가는 차문화의 중흥을 도모해 일지암은 한국 차의 성지로도 주목을 받고 있다. 이곳에는 옛 정취가 그대로 살아 숨쉬는 차나무가 심어져 있고 선다를 음미했던 다정(茶亭)이 있으며, 집 뒤의 바위틈에서 솟는 물이 나무 대롱에 연결된 돌물확에 담겨져 흐른다. 이 다천(茶泉)과 돌물확, 차를 끓이던 다조(茶俎,돌부), 그리고 위아래의 연못과 좌선석(坐禪石) 등은 옛 모습대로 복원된 것이다. '일지암' 편액이 붙어 있는 정자는 1980년 한국다인회 회원들이 다도의 중흥조 초의가 기거했던 일지암을 기념하기 위해 복원하여 놓은 것이다. 이 초정(草亭)은 가운데에 방 한 칸을 두고 사면에 툇마루를 두른 4평 규모의 띠집이다. 그리고 일지암 본당은 윗연못에 평석을 쌓아올린 4개의 돌기둥이 누마루를 받치게 하여 독특한 운치를 자아내게 한다. 윗 연못에서 잉어가 한가로이 노니는 등 누마루에서 구름 낀 산경을 멀리 내려다보는 다회(茶會)와 선유(仙遊)는 자연과 우주의 섭리를 음미하게 할 만하다. 그래서 초의의 시(詩)·선(禪)·다(茶)의 경지가 한데 어우러진 차문화의 산실이 됐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초정과 연못 사이에 축조된 석축에는 '다감(茶龕)'이라 새겨진 평평한 면이 끼여 있고 그 앞에는 이보다 넓은 판석이 하나 놓여 있는데, 이 돌 평상을 차를 마시며 선을 하던 좌선석으로 보기도 한다. 초의선사는 대둔사의 13대 종사로 일찍이 이곳에 기거하며 다도를 중흥시킨다. 그는 「동다송」이라는 우리 나라 최초의 다서를 저술하고 차를 재배하여 널리 펴는 등 다도의 이론적인 면이나 실제적인 면을 크게 정리하고 닦음으로써 다도의 중흥조로 추앙받고 있다. 당시 대흥사(대둔사) 가까이는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 유명한 다인(茶人)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초의와 차를 통하여 더욱 두텁게 교유하였다. 다산은 이곳과 가까운 강진에서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대흥사(대둔사)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추사 또한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된 까닭에 대둔사와의 관계를 맺게 되고 초의와도 남다른 친교를 가졌다. 이런 까닭으로 19세기초 대둔사를 중심으로 한 우리의 다도는 다시 한번 중흥을 이루게 된다. 이 때문에 대흥사(대둔사) 일지암은 우리 나라 다도의 요람으로 불리고 있으며, 매년 음력 8월1일 초의의 열반일을 기해 추모행사인 초의제를 거행하고 있다.] 14:30~15:00 대흥사로 이동 [천년고찰 대흥사(大興寺)는 우리 국토의 최남단에 위치한 두륜산(頭崙山)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사찰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22교구의 본사이다. 현재 해남, 목포, 영암, 무안, 신안, 진도, 완도, 강진, 광주 등 9개 시군의 말사를 관할하며, 서·남해 지역 사찰을 주도하고 있다. 두륜산을 대둔산(大芚山)이라 부르기도 했기 때문에 원래 사찰명은 대둔사(大芚寺)였으나, 근대 초기에 대흥사로 명칭을 바꾸었다. 일찍이 서산대사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處)으로 만년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萬年不毁之地)”이라 하여 그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보관한 도량이다. 이후 대흥사는 한국불교의 종통이 이어지는 곳(宗統所歸之處)으로 근대 승보사찰의 종가집으로 한국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도량으로 변모하였다. 즉 제1대종사 풍담(風潭) 의심스님으로부터 초의(草衣) 의순스님에 이르기까지 13분의 대종사(大宗師)가 배출되었으며, 만화(萬化)스님으로부터 범해(梵海)스님에 이르기까지 13분의 대강사(大講師)가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그리고 13 대종사 가운데 한 분인 초의선사로 인해 대흥사는 우리나라 차문화(茶文化)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넓은 산간분지에 위치한 대흥사는 향로봉, 고계봉, 노승봉, 가련봉, 도솔봉, 혈망봉, 연화봉의 8개 봉우리로 들러 싸여 있으며, 크게 남원(南院)과 북원(北院) 그리고 별원(別院 : 표충사, 대광명전, 성보박물관)의 3구역으로 나뉘어져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대흥사 남원구역(南院區域) 두륜산의 넓은 산간분지에 자리 잡은 대흥사는 특이한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 절을 가로 지르는 금당천(金塘川)을 사이에 두고 남쪽과 북쪽으로 전각들을 배치하였는데, 다른 절에서 볼 수 있는 정형화된 가람배치 형식을 따르지 않고 전각들을 자유롭게 배치한 공간구성이 특징이다. 해탈문을 들어서면 탁 트인 공간이 나오고 청정법신 비로자나 부처님께서 누워 계신 두륜산 정상의 와불(臥佛)을 친견할 수 있다. 정면에 전각들이 모여 있는 곳이 금당천의 남쪽에 해당하는 남원구역이다. 남원에는 중심 법당인 천불전이 있고, 용화당과 적묵당 등이 돌담으로 구획되어 있다. 종무소, 동다실 등을 지나면 만나는 이층 누각 형태의 전각이 바로 대흥사 범종루(梵鐘樓)이다. 정면3칸, 측면2칸의 2층 누각 건물로 정면에서는 단층으로 보인다. 범종에는 '호국대범종(護國大梵鐘)'이라는 글씨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고, 여느 범종과는 달리 다소 투박한, 그래서인지 조금 더 자연스러운 느낌이 드는 비천상(飛天像)이 장식되어 있다. 범종각 바로 옆으로는 대흥사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명품 느티나무가 자리를 잡고 있는데, 바로 '대흥사 연리근(連理根)'이다. 가까이 자라는 두 나무가 서로 만나 합쳐지는 현상을 '연리(連理)'라고 한다. 오랜 세월을 함께하며 햇빛을 향해, 바람을 따라 서로 부대끼고 겹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뿌리가 만나면 '연리근(連理根)', 줄기가 겹치면 '연리목(連理木)', 가지가 하나되면 '연리지(連理枝)'라고 부른다. 이렇게 두 몸이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 각각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연인의 사랑에 비유되어 일명 '사랑나무'로도 불린다. '삼국사기'와 '고려사기'에도 연리나무에 관한 기록이 전하는데, 우리 조상들은 연리나무가 나타나면 희귀하고 경사스러운 길조(吉兆)로 여겼다. '대흥사 연리근'은 천년이 된 느티나무로 그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왼쪽은 음의 형태이며 오른쪽은 양의 형태로 언뜻 남녀가 천년을 사랑하고 있는 듯 하다. 사람들이 함께 연리 나무 앞에서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 하면 사랑의 소원이 성취되고, 사람의 마음 속에 바라는(사랑, 소원, 희망, 승진, 건강, 화합, 우정, 합격, 성공 등) 소망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범종루를 지나면서 남원구역의 중심 법당인 천불전의 입구가 되는 가허루를 지나가는데, 가허루(駕虛樓)는 정면5칸, 측면 2칸의 단층 주심포 맞배지붕 건물로 남원의 출입문에 해당한다. 건물 중앙은 통로이고, 나머지 공간은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정면 좌우측에는 돌벽을 쌓았으며, 뒷면은 판장문으로 단장하였다. 가허루의 편액은 조선 후기의 명필 창암 이삼만(1770∼1845)이 썼다. 보물 제1807호인 대흥사 천불전(千佛殿)은 조선 순조11년(1811)에 불탄 것을 완호스님이 순조 13년(1813)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정면3칸, 측면3칸 규모의 팔작지붕 다포계통의 목조건물로서 높이 쌓은 장대석 기단 위에 세워졌다. 천불전은 언제 어느 곳에나 항상 부처님이 계신다는 의미에서 천불을 모시고 있는 전각이다. 지붕과 건물의 맵시가 매우 경쾌하며 정면3칸의 분합문 전체가 아름다운 꽃창살로 꾸며져 있다. 법당에 모셔진 천불상 조성과 관련된 일본표류 일화가 1821년 풍계 현정스님이 저술한 '일본표해록'에 전해져 온다. 천불전(千佛殿) 현판은 조선 후기의 명필 원교 이광사(1705∼1777)가 썼다고 한다. 천불전이란 과거에도 천불, 현재에도 천불, 미래에도 천불이 삼세(三世)에 거쳐 이 세상에 출현한다는 것으로, 어느 때나 무한한 부처가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세워진 건물이다. 즉, 어느 곳에서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승불교의 근본사상을 나타낸 것이 바로 천불이다. 봉향각(奉香閣)은 가허루를 지나면서 마당 왼쪽으로 보이는 건물로서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채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 기둥 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보아 용화당보다 후대에 중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단층 주심포 팔작지붕 건물로 정면5칸이며 단아한 글씨체의 편액이 걸려 있다. 용화당(龍華堂)은 봉향각의 맞은 편에 있는 요사채로 정면8칸, 측면3칸 규모의 단층팔작지붕이며 익공양식으로 매우 단조로운 건물이다. 승려의 교육학당인 강당 겸 선방(禪房)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조의선사의 스승인 완호대사가 1811년(순조11)에 준공하였으며, 그 뒤 이용에 편리하도록 증축된 부분이 있다. 현판은 성당 김돈희(1871∼1936)가 썼는데, 그는 서화협회회장,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을 역임하였고 안진경, 황정견의 서법을 익혀 예서, 해서에 특히 뛰어났다고 한다. 천불전의 앞마당에는 맑은 약수가 흘러나오고 있는데, 시원한 물맛이 이렇게 청량할 수 없다. 가허루를 지나면 적묵당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이는데, '관람객은 출입을 금한다'는 팻말이 세워져 있다. 적묵당(寂默堂)을 중심으로 정진당(精進堂)과 세심당(洗心堂)이 좌우에 배치되어 있으며, 좌측으로 일로향실(一爐香室)이 있다. 원래 서산대사의 유물을 보관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요사채로 사용하고 있다. 적묵당을 지나면 관음전이 자리잡고 있다. 관음전(觀音殿)=관음33응신전(觀音三三應身殿) 관음전은 정면5칸, 측면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관음전 대신 관음33응신전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관음전에는 33응신을 관세음보살 후불탱화 4폭에 담아 봉안하고 있는데, 33응신은 사찰에 따라 조각상으로 봉안한 경우도 있다. 관음33응신전이란 고통과 고난을 구제하는 관음보살은 때와 장소, 까닭을 막론하고 중생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몸을 바꾸어 나타나 중생을 구해준다고 한다. 이를 응신(應身)이라 하며, 응신의 수는 경전에 따라 32신 또는 33신으로 설명하고 있다. 대흥사 북원구역(北院區域) 이곳은 침계루 앞의 금당천을 기준으로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북원이라고 한다. 신라 말에 조성된 응진당 삼층석탑이 있으며 사찰에서 가장 고즈넉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이다. 북원의 중심인 대웅보전에는 원교 이광사(1705∼1777)가 쓴 편액이 걸려 있고, 백설당에는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쓴 무량수전 편액과 해사 김성근(1835∼1919)이 쓴 백설당 편액이 걸려 있어서 조선후기 명필의 필체를 비교해 볼 수 있다. 현재의 건물은 대부분 1899년 북원 일대의 화재로 소실된 것을 새로 복원한 것이다. 대흥사의 남원과 북원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금당천(金塘川)에 놓여 있는 다리가 심진교(尋眞橋) 이다. 심진교를 건너면 침계루를 만나게 되는데, 침계루(枕계溪樓)는 맞배지붕의 정면5칸, 측면3칸의 2층 누각식 건물이며 북원의 출입문으로 남원과 북원을 가로지르는 금당천에 접하여 자리잡고 있는 2층 누각 건물이다. 심진교를 지나 누 아래의 어칸 통로를 통해 중정(中庭)으로 출입하며, 대웅전 맞은 편에 위치하고 있다. 침계루로 들어 가는 입구에 걸려 있는 침계루(枕溪樓) 현판은 원교 이광사(1705∼1777)가 쓴 동국진체 글씨이며, 반대편에는 '원종대가람(圓宗大伽藍)'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역시 이광사의 글씨이다. 침계루를 지나면 정면으로 대웅보전이 자리를 잡고 있다. 대흥사 대웅보전(大雄寶殿)은 대흥사의 중심법전으로 대흥사 가람 북원에 자리한다. 심진교와 침계루, 대웅보전이 남북으로 일직선을 이루며, 여기서 직교하여 좌측에 대향각과 우측에 백설당이 중정을 형성하며 배치되어 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전각으로 다포계 양식의 팔작건물이다. 건물은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 한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민흘림 기둥을 세웠으며, 기둥머리는 창방으로 결구하여 평방을 얹었다. 공포는 다포로 내삼출목(內三出目)ㆍ외이출목(外二出目)을 주간마다 2구씩 공간포를 놓았으며, 건물 안팎으로 화려한 조각솜씨를 뽐내듯 처마 아래 촘촘히 배열되어 있다. 포의 형상은 교두형(翹頭形)으로 외부로 뻗은 쇠서 위에 연봉을 조각하였으며, 내부는 모양을 판형으로 만들어 운봉형(雲峰形)으로 단장하였다. 건물 전면은 주간 모두 2분합의 두툼한 빗살문을 달고 하부 2단을 구획하여 화려하게 수장된 안상문양과 태극문을 궁방에 치장하였다. 측면과 배면에는 중인방까지 막돌을 쌓아, 상부에 팔상도와 법당을 수호하는 사천왕도를 벽화로 장엄하고 있다. 특히 이 건물의 외부장엄 중 눈길을 끄는 것은 어칸 상부에 자리한 2행 종서의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는 편액이다.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글씨로 추사와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현재 이 글은 백설당에 걸린 추사의 ‘무량수각’ 편액과 함께 대흥사 명필로 손꼽혀 장성 백양사 및 승주 송광사에서 그 글을 모각할 만큼 뛰어난 필적으로 알려져 있다. 이외에 건물 계단석 소맷돌에는 두 눈을 부릅뜬 사자머리 한 쌍이 주목을 끄는데, 구한말 일본 석공이 조각한 것으로 귀신상의 모습을 하고 있다. 대웅전 축대 앞에는 괘불을 고정한 용두를 조각하여 불전을 수호하는 벽사의 뜻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건물 내부는 우물마루 상부에 이단층의 우물천장을 가설하고 그 내부에 반자와 운궁형 닫집을 형성한 화려한 불전으로, 대들보 사이에 용두와 칠보문양을 단장하고 있다. 대들보는 자연목을 그대로 이용한 투박한 수법이지만, 대들보 위를 넘어서 뽑아낸 충량의 용두는 불전의 신성함을 더하며 다소 과장된 장엄의 극치를 보여준다. 후불벽 앞에 가설된 수미단 상부에는 목조 삼세불을 비롯하여 육봉선사(六峯禪師)가 화주한 삼불회도가 헌괘되어 있으며, 중앙 불단 좌우로 20세기 초 대흥사 불화 조성에 참여한 명응환감(明應幻鑑)ㆍ예운상규(禮芸尙奎)와 그의 권속들이 그린 삼장탱ㆍ신중탱ㆍ칠성탱ㆍ감로탱 등이 봉안되어 있다. 이외 대웅보전에는 영단을 비롯하여 수미단 우측에 근래 조성된 목조관음보살좌상과 천수천안 관음탱이 모셔져 있으며, 천장 상부에 서수를 탄 동자들이 비천하는 목조각이 장엄되어 있다. 현재의 대웅전은 침계루에 걸린 ‘대웅전중창상량문(大雄殿重創上梁文)’과 ‘대웅전중건기(大雄殿重建記)’를 통해 1667년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나, 화려한 치장과 치목수법, 조각기법 등으로 보아 1899년 북원 일곽의 화재 이후 육봉선사의 발원으로 중건된 것으로 보여진다. 대웅보전(大雄寶殿) 현판은 당대의 명필 원교 이광사(1705∼1777)가 썼는데, 여기에는 추사 김정희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추사 김정희(1786∼1856)가 1804년 제주도로 귀양 가다가 대흥사에 들러 대웅보전 현판을 새로 써서 이광사의 현판 대신 걸게 하였는데, 이광사의 글씨를 폄하한 자신의 오만함을 뉘우치고 제주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대흥사에 다시 들러 자신이 썼던 편액을 떼어내고 이광사의 편액을 다시 걸게 하였다고 한다. 대웅보전 바로 옆으로는 오색연등 아래 윤장대가 자리잡고 있다. 윤장대(輪藏臺)는 절에서 경전을 놓은 공간에 축을 달아 회전하도록 만든 책장이다. 윤장대를 돌리면 경전을 읽는 것과 같은 공덕이 쌓여 소원이 성취된다는 의미가 있다. 전경(轉經)이란 경을 회전시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부처의 법을 법륜(法輪)이라고 하며, 부처가 법을 설하는 것을 전법륜(轉法輪)이라 한다. 법의 수레바퀴가 때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굴러갈 수 있듯이, 부처의 가르침 역시 어느 한 사람, 어느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모든 곳에서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에 법륜이라 하는 것이다. 윤장대는 오른쪽으로 세번 돌리며, 윤장대를 돌리면서 소원을 빌고 마음의 위안을 받게 된다. 대웅보전 옆으로 위치한 윤장대를 지나면 응진당과 산신각이 한 건물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전체건물은 정면5칸, 측면3칸의 주심포식 맞배지붕 건물로, 응진당(應眞堂)이 정면3칸, 측면3칸으로 구획되고, 산신각(山神閣)은 정면2칸, 측면3칸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 사이 판장으로 담을 쌓고 출입이 용이하도록 쪽문을 달아 놓았다. 응진(應眞)은 번외를 끊고 불법의 이치를 터득하여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만한 공덕을 갖춘 성자(聖者)를 뜻하며, 응진당(應眞堂)에는 목조석가삼존(석가부처를 중심으로 문수, 보현보살)과 16나한, 판관, 사자, 인왕을 권속으로, 그 후면에 석가모니후불탱과 16나한탱, 사자탱을 봉안하고 있다. 응진당(應眞堂) 현판은 해사 김성근(1835∼1919)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대흥사 명부전(冥府殿)은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는 건물이다. 지장보살은 부처가 될 수 있슴에도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보살로 남아있는 보살이다. 지장보살은 지옥의 열왕을 모시고 있어서 시왕(十王)전, 지장전, 또는 쌍세전이라고도 부른다. 정면3칸, 측면2칸의 조심포식 맞배지붕 건물은 1899년 북원 일곽의 화재 뒤에 다시 건립된 것으로, 1901년 지장탱의 봉안과 함께 시왕과 명부 권속들이 함께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명부전의 현판은 구한말 서예가인 해사 김성근의 글씨라 한다. 응진전 앞 삼층석탑(보물 제320호)은 대흥사 내 유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통일신라 9세기 후반기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탑의 규모는 조금 작으나 세련되고 정교하게 만들어졌으며 마치 몇 년 전에 만들어진 것처럼 돌의 색깔이 무척 밝다. 1967년 1월 보수공사 때 기단 안에서 높이 12Cm의 동조여래좌상 1점이 발견된 바 있다. 무염지를 지나면 대흥사의 별원구역으로 이동하게 된다. 초의선사가 조성한 대흥사 무염지(無染池)는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항상 깨끗한 곳'이라는 이름의 연못이다. 실용면에서는 '향로봉의 화기를 막는다'는 풍수에 근거하고 있으며, 실제로 화재 시 물 공급자 역할도 가능하다고 한다. 특히 무염지의 전체적인 배치는 굴곡모양 연못과 중심에 위치하지 않은 작은 섬을 만들어 놓아 보는 위치에 따라 모양이 다르게 보이며 특히 절에서 바라보면 마음 '심(心)'자 모양으로 보인다고 한다. 무염지를 뒤로 하고 조금 걸으면, 별원(別院)에 속하는 성보박물관이 나타난다. 대흥사 성보박물관(성聖寶博物館)은 서산대사 휴정의 유물(보물 1357호)을 전시하기 위해 1978년 문을 연 공간이다. 유물관 안에는 서산대사가 쓰던 벼루, 칠보염주, 신발 등을 비롯하여 승병을 이끌며 사용했던 승군단 표지, 소리나팔, 호패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 서산대사에게 내려진 선조의 교지와 친서, 금병풍 등도 감상할 수 있다. 고려 후기 양식의 탑산사 동종(보물88호)과 조선시대 양식의 태극무늬 동종 등도 있다. 성보박물관 건너편에는 '만월당(滿月堂)'이 위치한다. 만월당과 성보박물관 사이에 위치한 '문수전(文殊殿)'은 대흥사의 가장 윗쪽에 자리잡고 있는 전각이다. 문수전(文殊殿)의 현판은 학정 이돈흥 선생이 썼다고 한다. 별원구역의 윗편에는 표충사구역이 자리잡고 있다. 표충사구역(表忠祠區域) 표충사는 서산대사 휴정(1520∼1604) 스님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당으로서 조선시대 대흥사의 위상을 짐작하게 해준다. 서산대사는 9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듬해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서울에 올라와 절에 기거하며 글과 무예를 익혔다. 그러던 중 영관대사의 설법을 듣고 불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훗날 스스로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다. 명종 4년(1549)에는 승과에 급제하고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고 유명한 산을 돌아다니며 후학들을 만나 친절히 지도해 주었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늙은 몸을 이끌고 전국의 승려들에게 격문을 돌려 나라를 지키는데 앞장서도록 하였다. 묘향산에서 1,500여명, 그의 제자인 유정은 금강산에서 700여명, 처영은 지리산에서 1,200여명의 승병을 모집하여 순안, 평양 등지에서 왜구를 토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전쟁 이후 그는 승려로서 최고의 존칭과 정2품 당상관 작위를 받았으며 묘향산에서 선조 37년(1604) 입적하였다. 대흥사는 임진왜란 이후 서산대사의 의발(衣鉢)이 전해지고 그 법맥을 이어왔기 때문에 선(禪)과 교(敎)의 종원으로서 자부하였다. 이에 1788년에 사액사우의 건립을 추진하여 표충사로 지정되었고 정조대왕이 직접 쓴 표충사(表忠祠) 편액이 내려졌다. 호국문과 예제문을 지나가면 표충사와 표충비각이 있다. 현재의 건물은 대부분 1836년에 다른 곳으로 이건되었다가 1860년 10월에 다시 현재의 자리로 옮겨 지은 것이다. 표충사당 좌측편에 조사전(祖師殿)이 있다. 조사전은 3단의 바른층쌓기 방식의 장대한 기단 위에 단촐하게 세워져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의 주심포계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건물 외부는 다듬어진 2단의 원형 초석 상부에 두리기둥을 세워 전면 1ㆍ2분합의 격자창호로 장엄하고 있으며, 건물 내부는 3폭의 조사진영을 봉안하고 있다. 진영은 창건주 아도조사(阿度祖師)를 비롯하여 대흥사 13 대종사와 13 대강사의 진영을 모신 3폭으로 구분되는데, 6명(1폭)ㆍ5명(2폭)으로 2단 구성 아래 진영을 배치하고 있다. 대광명전 구역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는 대광명전은 표충사 동쪽에 위치하며, 초의선사가 조선 헌종 7년(1841)에 다시 지은 것이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맞배지붕집이다. 내부는 불단이 있는 중앙부 위에만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을 높게 달고, 연꽃무늬와 구름·학 등을 그렸다. 초의선사가 직접 단청하였다고 하는데, 색채와 문양면에 있어서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뛰어난 작품이다. 또한 자연적인 곡선을 보이는 내부의 대들보도 이 건물의 특징이다. 대광명전 구역은 대광명전을 중심으로 동국선원(東國禪院), 수심당(修心堂) 등이 있으며, 선원(禪院)에 해당하는 구역으로 특별히 정숙하여야 한다.] [대흥사에는 員嶠 이광사(李匡師)가 쓴 편액이 4점 있다. 대웅보전(大雄寶殿), 침계루(枕溪樓), 원종대가람(圓宗大伽藍), 그리고 천불전(千佛殿)의 현판 글씨가 그의 작품이다. 원교 이광사는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양명학자, 서화가로, 소론 명문가였던 집안이 몰락하고 유배생활을 하게 되면서 학문에 전념했다. 그는 '원교서결' 등 서예이론서를 저술하여 조선 서예사에 이론적 체계를 구축했고 조선 후기 서예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후기에는 자신만의 원교체를 만들었다. 그는 문인 취향의 산수화, 인물화, 초충도 등의 그림도 남겼다.] [추사 김정희가 편액을 떼라고 한 까닭 대흥사 편액에서 얻은 깨달음 하나 오마이뉴스 기사 등록일 : 2011.05.24. 글 : 김대오(dae55555) 개교기념일을 맞아 학교 선생님들과 함께 해남 대흥사로 야유회를 갔다. 신록이 우거진 산책길을 따라 걸어 부처님이 누워계신 와불 형상의 두륜산 산 능선 아래 자리 잡은 대흥사 경내에 들어섰다. 서산대사가 입적을 앞두고 자신의 가사와 발우를 '재난이 미치지 않고 오래도록 더렵혀지지 않을' 해남 대흥사에 보존하라고 했다는데, 그래서인지 왠지 신성한 땅에 들어서는 느낌이 든다. 일본으로 떠내려갔다가 돌아온 옥불이 있는 천불전(千佛展), 1000년 사랑나무 연리근(連理根)도 모두 나름 의미 있고 멋졌지만 추사 김정희의 편액 이야기가 가장 큰 깨달음을 주었다. 헌종5년(1839년) 9월, 전라도 강진을 출발하여 제주도 유배길에 오른 추사 김정희는 초의(草衣) 선사를 만나기 위해 잠시 해남 대흥사에 들렀다. 그리고 '대웅보전(大雄寶殿)' 현판의 글씨를 보고 누가 썼냐고 묻는다.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라고 하자 촌스럽다며 당장 떼어 내버리라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현판을 써 주며 대신 걸게 한다. 헌종14년(1848년) 12월 6일, 추사는 제주도 유배에서 해배된다. 8년 3개월 만의 제주도 유배생활을 끝마치고 교분을 나누던 초의선사를 뵙기 위해 다시 대흥사에 들러 자신이 쓴 현판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그 편액 속에 담긴 자신의 교만과 독선을 깨닫는다. 그리고 추사는 스스로 명필 이광사의 글씨를 못 알아보았으니 이광사의 현판을 다시 걸고 자신이 쓴 편액을 내리라고 말한다. 추사 김정희는 8년여 간의 힘든 유배 기간 깊은 자아성찰을 통해 타인의 부족함도 포용하고 자신을 버릴 줄 아는 지혜를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추사는 대웅전 우측의 백설당에 '무량수각(無量壽閣)' 현판 글씨를 써 준다. 지금도 남아있는 추사의 편액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면서도 모두를 포용할 것 같은 자태로 대흥사 대웅전 곁을 지키고 있다. 최고의 명필로 꼽히는 추사 김정희의 사찰 편액이 적지 않은데 죽기 3일 전에 썼다는 봉은사의 경판전(經板殿)에 걸린 '판전(版殿)'과 영천 은해사(銀海寺)에 걸린 '대웅전(大雄殿)' 편액만이 직접 쓴 것이고, 다른 사찰에 걸린 추사의 대웅전 편액은 모두 모각한 것이라고 한다. 어수룩하게 보이기 어렵다는 의미로 중국어에 '난더후투(難得糊塗)'라는 말이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꼭 빼어난 재능을 휘두르며 뽐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나아감과 물러남을 알고 때와 장소에 맞게 자신의 처신을 올리고 내리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은 세상이니 말이다. '물이 깊으면 파도는 고요하고 배움이 넓으면 언성은 나직하다(水深波浪靜, 學廣語聲低)'는 이치를 추사는 어쩌면 고단한 유배기간 깨달았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지 않고 나와는 다른 타인을 인정하고 품어 안는 그 깊은 성찰의 깨달음을 말이다. 대흥사를 내려오며 생각해 본다. 온 산을 물들이는 것은 화려한 꽃이 아니라 그 꽃을 받들며 피어나는 수많은 나뭇잎들의 푸르름이라고.] 15:00~15:10 대흥사 관람 15:10~15:50 매표소를 지나서 전남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146-14 번지에 있는 두륜산도립공원 전기차 충전소로 이동하여 산행 완료 15:50~16:00 휴식 16:00~20:30 “좋은사람들” 버스로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146-14 번지에 있는 두륜산도립공원 전기차 충전소를 출발하여 서울 양재역으로 이동 (388km) [4시간30분 소요]
두륜산 산행지도
대흥사 지도
북미륵암 위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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