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4일(일),
오늘은 제34차 마애종 슬로우답사일입니다.
어제 저녁 친구들과 늦게까지 마신 숙취로 인하여 10시 20분 경에 깨어났습니다.
아뿔싸!!!
10시까지 신촌역 집결인데 시간도 많이 늦었고 술도 덜깨어 몽롱하여서 순간 갈까 말까 망설여졌지만,
그래도 회장님과 총무님께 늦게라도 참석한다고 문자를 보내고 출발을 하였습니다.
12시가 거의 다 되어서 연세대학교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연세대학교 안내도
연희궁터(衍禧宮址).서잠실터(西蠶室址)
연희궁은 조선 초기에 지은 이궁(離宮)의 하나이다.
1420년 세종이 부왕인 태종을 위해 고쳐 지었으며, 세종 자신도 1426년에 이 곳에 잠시 머물렀다.
또한 세종은 이 궁에 국립양잠소격인 잠실도회(蠶室都會)를 설치하였으며, 그 뒤 세조는 서잠실(西蠶室)이라고 하였다.
1505년에는 연산군이 이를 개축하여 연회장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연세대학교 상징탑, 신촌 독수리
연세역사의뜰로 들어갑니다.
늦었지만 수경원의 사진을 찍고 갑니다.
수경원(綬慶園)터와 광혜원(廣惠院)
이 지역 일대는 옛날 수경원이 있던 자리이다.
수경원은 조선왕조 제21대 영조(英祖)의 후궁인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원묘(園墓)이었다.
영빈은 1남 6녀를 두었는데, 외아들이 바로 사도세자(思悼世子)이다.
1969년에 수경원이 경기도 고양시의 서오릉 터로 옮기고 봉분이 있던 자리에는 1974년 연세대학교회(루스채플)를 세웠다.
영빈의 원묘를 옮긴 뒤에 3개의 석함에서 두 벌의 지석(誌石)과 한 벌의 명기(明器) 및 영조가 어필로 쓴 의열묘(義烈墓) 현판이 찾아져 현재 우리대학 박물관 민속실에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수경원의 부속건물인 정자각(丁字閣)과 비각(碑閣)은 뜰 안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한편, 이 목조 한옥은 광혜원을 실제 크기로 복원한 것이다.
광혜원은 1885년 4월 10일에 개원된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병원이자 연세학원의 연원(淵源)이 되는 기관으로서, 우리 연세인의 의술발전을 꽃피운 산실이 되었다.
광혜원은 처음에 제동에 있는 홍영식의 저택을 사용하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원래 건물의 형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자 1985년 5월 연세대학교 창립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복원사업이 추진되어 마침내 1987년 4월 10일에 봉헌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우리나라 현대의학의 발상지를 보존하고 기념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정자각은 연세기록보존소, 광혜원은 연세사료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 뜰 안은 박물관 야외전시장으로서 석조예술의 터전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렇듯이 이 곳은 연세의 뿌리를 확인하고 역사를 이어주며 보람찬 미래를 키우는 자랑스러운 연세의 소중한 공간이다.
2003년 10월 30일
연세대학교
정자각(丁字閣)과 광혜원(廣惠院) 건물 사이에 백송(白松) 한그루가 자라고 뜰 앞에는 동문이 기증한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수경원의 원묘(園墓)는 서오릉으로 이장(移葬)되고 주인을 잃은 정자각만 남아 있습니다.
정자각 아래 비각(碑閣)도 마찬가지로 텅 비어 있습니다.
※ 서오릉으로 옮겨진 수경원(綬慶園)과 표석(表石)
광혜원(廣惠院)의 모습
광혜원 대청마루에 걸터 앉아 박석환 회장님의 해설을 듣는 선생님들
(문애심 총무님 제공 사진)
정자각 앞 야외전시장에 전시된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정자각 뒤쪽에는 태평양전쟁을 기념하는 흥아유신기념탑(興亞維新記念塔)이 세워져 있습니다.
조선총독 남차랑(南次郞)이 글을 쓰고 세웠습니다.
(문애심 총무님 제공 사진)
광혜원의 전경을 둘러봅니다.
이한열 동산.
이 곳은 한국사에 민주주의의 한 획을 그은1987년 6월 민중 항쟁의 불씨가 된 이한열 열사의 추모비가 위치한 이한열 동산이다.
198769757922
이 숫자는 이한열 열사 사건이 1987년에 일어난 해이고, 6월 9일에 최루탄을 맞고, 7월 5일에 사망을 하였으며 7월 9일에 장례식이 치뤄졌는데 그 때 나이가 22세였습니다.
(문애심 총무님 제공 사진)
이 곳에서 일행을 만났습니다.
연희전문학교의 시작이 된 건물이 있는 곳으로 올라갑니다.
계단 앞에 플라타너스의 표피가 하얀 색을 띠고 있습니다.
플라타너스는 버즘나무라고도 부릅니다.
꽃은 5월에 피고, 열매는 10월에 익는데 길게 늘어진 자루에 2~6개씩 달립니다.
연세대학교 방문 인증샷을 남깁니다.
찍사를 바꾸어서 또 한 컷.
앞으로 돌아보면 곧게 뻗은 길 양쪽으로 캠퍼스 건물들이 있습니다.
정면의 언드우드관과 좌측의 스팀슨관, 우측의 아펜젤러관으로 이루어진 세 건물이 연세대학교가 시작된 건물입니다.
언더우드 박사의 동상
이 곳은 수경원 뒤로 옮겨져 있는 흥아유신기념탑이 세워져 있었던 자리입니다.
언더우드관
이 건물은 연세대학교위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서 1924년에 완공된 연면적 2,700㎡의 근대식 4층건물이다.
연희전문학교 설립자인 고 원두우(元杜尤, H. G. Underwood)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언더우드관이라 하였다.
처음 건립 당시 4층건물은 상당히 높은 건물이었습니다,
스팀슨관
아펜젤러관
이 곳은 연세대학교의 포토존입니다.
부모들이 어린 자녀를 데리고 이곳을 보여주면서 SKY의 꿈을 심어준다고 합니다.
청송대(聽松臺)
청송대는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 숲이 우거진 연세인의 뒤뜰로 이양하의 수필 '신록예찬'의 모티브가 된 공간입니다.
연세대학교 뒤의 벌고개를 따라 올라갑니다.
벌고개라는 이름은 안산(鞍山)에서 흘러 내려온 왕릉(수경원)의 지맥이 손상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차원에서 이 곳을 밟으면 벌을 받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벌고개를 올라 안산(鞍山)자락길을 설명하는 박석환 회장님
이 고개를 넘어가면 봉원사가 있습니다.
봉원사 앞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습니다.
점심 식사 후 봉원사 아래쪽에 있는 마애부도를 만나러 갑니다.
커다란 바위에 5기의 마애부도가 있습니다.
바위에 감실(龕室)을 조성하고 부도(浮屠)를 조성하였습니다.
청신사(淸信士) 이각초(李覺初) 출세지탑(出世之搭)라고 적혀 있습니다.
옆에는 설담대사(雪潭大師) 덕호출세지탑세(德昊出世之塔)라고 적혀 있습니다.
옆의 바위에는 세 기의 마애부도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상궁 청신녀 준법화 무술생 김씨 출세지탑(尙宮 淸信女 竣法華 戊戌生 金氏 出世之塔),
청신녀 갑술생 안씨 경불화 사리탑(淸信女 甲戌生 安氏 敬佛華 舍利塔) 이라 적혀 있습니다.
오른쪽 마애부도는 담쟁이 덩쿨이 글씨를 가렸습니다.
마애부도를 설명하는 회장님
마애부도군을 살펴보고 봉원사(奉元寺)로 들어갑니다.
봉원사로 올라가는 입구에 부도탑군(浮屠塔群)이 있습니다.
석종형(石鐘形)의 송암당대종사(松巖堂大宗師)의 부도탑과 송암당기환대종사송덕비(松巖堂基煥大宗師頌德碑)
박기환 대종사는 철종의 사위이자 개화파인 박영효의 손자입니다.
봉원사(奉元寺)
신라 제51대 진성여왕 3년(889년) 도선국사(道詵國師)가 현 연세대 터에 창건하고 반야사(般若寺)라 하였다.
제21대 영조(英祖) 24년(1748년) 찬즙(贊汁), 증암(增巖) 두 스님에 의해 지금의 터전으로 이전하였고, 영조는 친필로 봉원사(奉元寺)라 현액하였으며, 신도들 사이에는 이때부터 새로 지은 절이라 하여 '새절'이라 부르게 되었다.
제22대 정조 12년(1788년)에는 전국 승려의 풍기를 바로잡기 위한 8도승풍규정소(八道僧風糾正所)가 설치되었으며, 제26대 고종 21년(1884년) 발생한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축을 이룬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 인사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이동인(李東仁) 스님이 5년간 주석하였던 갑신정변의 요람이기도 했다.
1911년 주지 보담(寶潭) 스님의 중수와 사지(寺地)의 확보로 가람의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1945년 주지 기월(起月) 스님과 대중의 원력으로 광복기념관을 건립하였다.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당시 병화로 광복기념관이 소진되었고, 이 때 영조의 친필 현판 등 사보와 이동인 스님 및 개화파 인사들의 유물이 함께 소실되었다.
봉원사 입구에 연지(蓮池)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대웅전(大雄殿) 아래 계단 양쪽으로 옥으로 만든 16나한상이 있습니다.
봉원사는 나한전(羅漢殿)을 별도로 짓지 않고 야외에 조성하여 영산재(靈山齋-석가가 제자들에게 설법을 한 모습을 재현하는 법회) 때 함께한다는 의미입니다.
16나한 옆에 범종각(梵鍾閣)이 있습니다.
대웅전(大雄殿) 앞마당에는 부처님오신날 준비로 연등(燃燈) 준비가 한창입니다.
대웅전 용마루 가운데에 청기와(靑瓦) 세 장을 올려서 영조가 현액한 왕실과 권련된 권위있는 사찰임을 나타내었습니다.
대웅전의 서쪽에 삼천불전(三千佛殿)이 있습니다.
기둥머리에는 여의주(如意珠)를 물고 있는 용머리를 조각하였습니다.
화려하게 단청을 입힌 다포식(多包式)으로 창방 아래에 주악비천상(奏樂飛天像)을 그렸습니다.
창살은 연꽃이 활짝핀 솟을빗연꽃살로 장식하였고, 아래쪽에 연꽃과 용머리를 조각하였습니다.
잉어가 헤엄치는 연꽃과 원앙이 노니는 난초, 장수를 기원하는 소나무와 사슴 그림을 투각(透刻)하였습니다.
건너편을 바라보면 대웅전의 동쪽에 있는 건물은 1966년 주지 영월(暎月) 스님과 대중의 원력으로 소실된 염불당(念佛堂)을 중건하였는데 이 건물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서(別墅)였던 아소정(我笑亭)을 헐어서 옮겨 온 것입니다.
툇마루 안에는 현판이 몇 개 걸려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쓴 '산호벽수(珊瑚碧樹-바다의 산호와 푸른 나무)'
좌측 말미에 김정희의 호(號) 완당(阮堂) 낙관이 새겨져 있습니다.
가운데에는 추사의 스승인 옹방강(翁方綱)이 쓴 '무량수각(無量壽閣)'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현판 좌측 말미에 옹방강 낙인이 새겨져 있습니다.
가장 우측에도 추사 김정희가 쓴 '청련시경(靑蓮詩境)'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툇마루 위에는 영가(靈駕)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영가는 영혼의 다른 말로 이생에서 삶을 마치고 떠난 영혼이 다음생의 생명을 받기 이전까지의 상태를 말합니다.
가(駕-멍에 가)는 수레를 뜻하는 말로 영혼이 갈 길을 찾아 움직이는 존재임을 나타내기 위해 영가라고 합니다.
(자료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원불교 대사전))
풍경(風磬)소리가 청량하게 울리는 대웅전 영역을 둘러봅니다.
우물 옆에는 아기부처의 몸을 씻어주는 구룡토수(九龍吐水)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명부전에서는 조선의 건국과 멸망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명부전(冥府殿) 현판 글씨는 조선을 건국한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의 글씨입니다.
태조 이성계는 1396년(태조 5)왕비 강씨(王妃 康氏)가 승하하자 존호(尊號)를 신덕왕후(神德王后)라 하고, 정동(貞洞)에 정릉(貞陵)을 조성하고 , 왕후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한 흥천사(興天寺)를 창건하였으며,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모실 명부전을 짓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명부전의 편액(扁額)을 삼봉 선생에게 쓰도록 명(命)하였습니다.
태종 이방원이 신덕왕후의 능을 지금의 정릉으로 천장(遷葬)하였습니다.
이후 능을 보살피지 않다가 1669년(현종 10)에 신덕왕후를 종묘에 봉향(奉享)하면서 다시 원찰을 세워 신흥사(新興寺)라 개명(改名)하였습니다.
1794년(정조 18) 지금의 돈암동 흥천사로 이건된 때 명부전 건물은 당시 팔도승풍규정소(八道僧風糾正所)가 있던 이곳 안산(鞍山) 봉원사로 이건되어 천불전(千佛殿)이라 명명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명부전이 중건되자 삼봉 선생이 쓴 편액을 다시 게안(揭安)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기둥에 걸린 주련(柱聯) 글씨는 조선을 일본에 넘긴 이완용(李完用)의 글씨입니다.
지장대성위신력(地藏大聖威神力) : 지장보살 마하살의 위신력은,
항하사겁설난진(恒河沙刼說難盡) : 항하(갠지스강, ganges)의 모래처럼 많아서 말로 다할 수가 없다.
한글학회 창립한 곳.
이 곳 유서 깊은 봉원사는 우리 말 글의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1908년 8월 31일 국어연구학회(지금의 한글학회)가 창립 총회를 연 곳으로 그 높은 뜻을 길이 남기고자 학회 창립 100돌에 이 표지석을 세우다.
극락전(極樂殿) 내부를 둘러봅니다.
극락전 문에는 꽃 문양을 투각(透刻)한 통판투조꽃살창(通版透彫꽃살창)으로 되어 있습니다.
극락전 내부에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모셨습니다.
지장보살의 옆에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내외분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있습니다.
칠성각 아래에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상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되돌아 나오는 길에 요즈음 보기 드문 공중전화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봉원사는 태고종(太古宗) 본산(本山)으로 대처승(帶妻僧)들이 살고 있는 사하촌(寺下村)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답사를 마치고 신촌역 앞의 카페에서 차 한 잔을 하면서 마무리를 하였습니다.
오늘도 박석환 회장님의 명품 해설을 들으면서 마애종 슬로우답사의 한 페이지를 남겼습니다.
첫댓글 강호인해설사님 정성가득한 연세대-봉원사길
답사기 감사합니다. 바쁘신중에도 참여해주셔서 반가웠습니다~~~
회장님과 함께하는 답사길은 언제나 즐겁습니다.
오타를 교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답사 때 뵙겠습니다.
강호인님이못오셨구나?그럼누가 카페에다
올리지? ㅠ..했는데
힘든상화에서도 와주셔서
감사해요~^^
무더운 날씨 였는데
선생님 들 열정은 더욱 뜨거워 보입니다
더위 시키는 봄비 보고
강호인샘 따뜻한 마음 느끼며
함께 못한 아쉬움 달래봅니다^^
연세대~봉원사길 함께하지 못해 아쉬웠었는데 강호인샘의
정성 가득찬 수고로움이
내 맴을 달래주네요~~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활력넘치는
선생님!
수고많으셧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