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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Santiago) 순례길 800km 完走記새로운 無欲의 길을 설계하다!
글 : 이재홍 前 엔지니어링공제조합 감사
⊙ 손에 쥔 것 내려놓고 싶어 산티아고 순례길에 도전
⊙ 비가 오니 코트식 우의는 습기가 스며… 판초 우의를 샀어야
⊙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앞으로 인생을 살고 싶어”
산티아고 순례길이 끝나는 피니스테레(Finisterre). 세상의 끝(Finish, Terre)이라는 의미의 지명이며, 순례객들은 이곳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동안 입었던 옷과 신발을 태우는 의식을 행하기도 한다. 순례의 끝을 의미하는 0km 이정표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모습.
오랫동안 지켜 오던 직장을 떠나면 무엇을 할까.
50을 넘겼다면 이런 고민을 한 번쯤 해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다른 일을 한번 해볼까? 여행을 떠날까? 자연과 더불어 지친 몸과 마음을 힐링할까? 생각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내가 내린 결론은 간단하다. 더 이상 욕심 부리지 않고 사는 것. 바로 이것이었다. 가진 것 얼마 없지만, 손에 쥔 것 내려놓고 살고 싶었다. 거기엔 어떤 방법이 있을까.
나는 운 좋게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답을 찾았다. 800km를 한 달 동안 쉼 없이 걷는 고행(苦行)의 길. 그 길은 나에게 바로 내가 꿈꾸는 것과 똑같이 “욕심을 버리라”고 일러주었다. ‘2000리 길’을 걸으며 직장생활을 정리했고, 그 길을 걸으며 앞으로 30년 남짓 남은 ‘무욕(無欲)의 길’을 설계했다.
‘산티아고 순례길 탐방기’를 읽고 덜컥 겁먹어
‘산티아고 순례길’(Route of Santiago de Compostela)을 처음 알게 된 때는 작년 3월이다. 예수의 제자 야고보가 복음전파에 일생을 바치고 잠든 도시가 있는데, 그 도시를 방문하기 위해 많은 순례자가 따라나섰던 길이 산티아고 순례길이라 했다. 감사 퇴임을 1년 앞두고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없을까’ 고민하던 나에게 깊은 울림이 왔다. ‘이거다’ 싶었다. 이제 곧 내 나이 환갑.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시기였다. ‘이왕이면 마음을 깨끗하게 비우고 새 출발을 하는 계기를 만들어 보자. 그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 보자’고 마음먹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포털사이트를 검색했다. 인터넷 백과사전, 블로그에서 정보를 얻었다. 비용, 일정, 숙박 정보가 많았는데, 아직 전반적인 여행의 윤곽을 잡지 않은 상태라 한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 수많은 글을 일일이 읽을 수 없어 산티아고 순례길에 관한 책을 몇 권 구해서 틈틈이 읽었다.
책을 읽고 나니 겁부터 났다. 800km에 이르는 대장정, 폭우 속에서 아픈 다리를 움켜쥐고 걷는 사람, 완주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왔다. 대단한 각오와 의지 없이는 완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과연 이 정도로 힘들까? 읽는 사람에게 겁을 주려고 쓴 것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또 비용과 일정에 대해서도 기대했던 것만큼의 정보를 얻기 어려웠다. 여행에 관한 큰 그림은 그렸으나 걱정만 늘었다. 다시 인터넷을 찾았다.
책을 읽고 나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여행 후기를 이해하기 쉬웠다. 순례길의 출발지는 프랑스의 생 장 피드포르(Saint-Jean-Pied-de-Port)라는 곳이며,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파리에서 기차를 타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또 체력을 고려하여 순례일정을 잡고, 마드리드 발(發) 귀국 비행기를 예약해야 했다. 일단 왕복 항공권, 민박, 기차표가 필요했다.
항공편은 경비를 줄이기 위해 최대한 빨리 알아봐야 했다. 주로 포털 ‘다음’의 항공권 검색 페이지(http://air.travel.daum.net)나 인터파크투어(http://tour.interpark.com) 페이지 등에서 알아보았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 경유 노선을 알아보았다. 갈 때와 올 때 모두 모스크바를 경유하는 항공티켓을 95만원에 구할 수 있었다. 비수기(非需期)였기에 가능한 일이라 여겨진다. 항공권을 살 때는 일정을 정확히 예측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의 경우 예정보다 일찍 순례를 마치게 되어 마드리드에서 새로운 항공편을 구하려 했더니 편도직항 비행기삯이 120만원이나 해 포기했다. 어쩔 수 없이 나흘을 더 마드리드에 눌러앉아 있었다.
‘연관 검색어’로 교통, 숙박정보 검색
‘파리, 생 장 피드포르’로 검색해 보니, 순례길의 출발지인 생 장 피드포르로 가기 위해서는 파리의 몽파르나스역(Gare de Montparnasse)에서 TGV(테제베)를 이용해야 했다. 밤늦게 파리에 도착해 곧바로 다음 날 새벽에 출발하는 TGV를 타기는 힘들어 보였다. 마침 파리방문도 오랜만이니 몽파르나스역 근처에 민박집을 구하기로 했다. 검색결과 블로그와 카페 등에서 각 민박집에 대한 후기를 얻을 수 있었다. 이후 검색어를 조금씩 바꾸어 가며 새로운 정보를 얻었다. 나중에는 민박집의 가격과 시설을 비교해 볼 수도 있었다. 민박 홈페이지들도 적극적으로 정보를 제공해 준다. 예를 들면, “오시는 길은 드골 공항에서 교외 지하철 RER B선을 타고 Denfert Rochereau에서 내려 지하철 6번선으로 갈아탑니다. 이후 6번선 Charles de Gaulle Etoile 방향으로 3번째 정거장 몽파르나스역에서 내려 다시 13번선 Chatillon 방향으로…(중략) Plaisance역에서 전화를 주시면 마중 나갑니다” 같은 식이다. 검색 끝에 이틀에 40유로(10유로는 우리 돈 약 1만5000원)짜리 민박집을 구했다. 순례를 마친 후 마드리드를 돌아보기 위한 민박집도 같은 방식으로 이틀을 예약했다.
열차정보 역시 ‘몽파르나스, 생 장 피드포르, TGV’를 검색하여 얻을 수 있었다. 파리에서 바로 가는 열차가 없어 바용(BAYONNE)에서 환승해야 한다. 몽파르나스역에서 생 장 피드포르로 향하는 TGV 티켓은 TGV 예약 홈페이지(http://en.voyages-sncf.com/en)에서 53유로에 구입했다. 특히 TGV는 유럽여행객들이 많아 정보가 많다. ‘TGV 예약’ 등을 검색하면 홈페이지 접속, 노선검색, 결제, 티켓수령방법 등을 사진까지 첨부해서 설명한 페이지가 많다.
휴대전화 로밍은 따로 준비하지 않았다. 외국 공항에 도착하면 자동으로 데이터 차단 여부를 묻는 문자가 오는데, 그때 차단하면 되기 때문이다. 또 와이파이가 되는 지역이라면 카카오톡으로 얼마든지 가족, 친구들과 연락할 수 있고, ‘보이스톡’ 기능으로 통화까지 할 수 있다.
일정은 앉아서 해결, 과연 체력은?
순례 준비를 위해서는 일단 배낭무게를 줄여야 했다. 여행 경험자들 얘기로는 절대 10kg을 넘겨선 안 된다고 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무게와의 전쟁’이라고 할 만큼 중요하다고 했다. 특히 산지를 걷게 되면 비, 눈, 안개, 이슬 등 물기(습기)에 노출되기도 해 짐이 무거워질 수도 있다. 난 나이를 생각해서 그들보다 더 무게를 줄이겠다고 마음먹었다.
물품리스트부터 만들었다. 티셔츠 두 벌, 여름용 남방, 등산용 조끼, 등산용 바지 2개, 얇은 바람막이, 양말 세 켤레, 트레킹화, 슬리퍼, 히트텍(발열용 내의), 선글라스, 침낭, 장갑, 랜턴, 우비, 등산용 앞주머니(앞으로 메는 가방), 비상약(장염약, 몸살감기약), 반창고, 휴대전화, 카메라, 충전기, 선크림, 바셀린, 비누, 칫솔, 치약, 수건 한 개, 손톱깎이, 면도기를 챙겨 가기로 했다.
평소 등산을 자주 하는 편이라 등산용 조끼, 바람막이, 배낭은 새로 사지 않았다. 다른 트레킹 물품들도 쓰던 것을 가져가면 됐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위해 특별히 고민한 물품은 침낭과 신발이다.
신발의 경우 신경이 쓰였는지 큰딸이 Northface 고어텍스 트레킹화를 사다주었다. 침낭이 특히 중요했는데, 순례길 내내 머물게 되는 알베르게(Alberge·여행자 쉼터)에서 이불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부피와 무게에 민감한 장거리여행인 만큼 침낭만큼은 각별히 신경 써서 골라야 했다. 가벼운 침낭을 고르기 위해 아웃도어 용품점 5군데 이상을 방문했다. 고생 끝에 홈플러스 등산 매장에서 약 12만원을 주고 250g짜리 Mountia 크루저 하계용 다운 침낭을 샀다. 일단 배낭 무게를 6kg 정도로 줄였다.
배낭 무게를 줄이는 데 성공하고 나서도 ‘나이 육십에 매일같이 25km를 한 달 동안 걸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은 떠나지 않았다. 제2의 인생을 여는 여행인데, 중도에 포기해서 오히려 상처가 되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작년 10월 테스트를 해 보기로 했다. 실전처럼 걷기 위해 배낭 속에 침낭, 옷, 약, 세면도구 등을 넣었다. 어쩐 일인지 배낭 무게가 덜 나가서 일부러 책까지 넣어 7kg으로 만들었다. 집근처 잠실나루역에서 상암동 난지캠프장까지 정확히 25km를 걸었다. 다 걷고 나니 온몸이 기진맥진이다. 아차 싶었다. 평소 주말마다 청계산, 북한산, 검단산, 관악산 등으로 다녀 나름 자신이 있었는데도 25km는 결코 얕볼 수 없는 거리였다.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며 몇 번 더 훈련을 해 봐야겠다고 다짐했고, 실제로 출발 전까지 3번을 더 걸었다. 출발을 앞둔 4월 15일,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걸어 보고 ‘할 만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인천에서 ‘생 장 피드포르’까지
프랑스 파리(Paris)에서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 가는 여정. 파리 몽파르나스역에서 생 장 피드포르까지는 기차를 타고 이동한다. 생 장 피드포르부터 약 800km의 순례길이 시작된다. |
4월 24일. 혼자 집을 나와 인천공항에서 낮 12시50분 비행기를 탔다. 모스크바까지 아홉 시간 걸렸고, 공항에서 두 시간을 기다려 다시 4시간을 날아 파리에 도착했다. 중간 기착지에서 잠시 쉬니 의외로 더 편했다. 경비도 줄이고 숨도 돌리고 일석이조였다.
파리 드골공항(Charles de Gaulle Airport)에 도착한 것은 현지시각 24일 밤 10시였다. 도착하고 나니 눈앞이 캄캄했다. 민박집 근처 지하철역까지 가야 하는데,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곳에 혼자 떨어져 있다 생각하니 겁부터 덜컥 났다. 잠시 생각을 가다듬고 역사 밖으로 나갔다. 그랬더니 표지판이 잘되어 있었다. 공항에서 지하철역까지 ‘시키는 대로’ 따라갔다.
역에 내려가니 더 어리둥절했다. 표를 살 줄 몰랐다. 사실 서울에서도 지하철 표를 끊어 본 기억이 거의 없다. 교통카드면 ‘만사 OK’ 아니었던가. 발권기를 멍하니 바라보다 지나가던 파리의 젊은 남녀를 불러 세웠다. 영어가 되는지 안 되는지 더듬더듬 “하우캔 아이 티켓(How can I ticket)”이라 했다. 얼핏 듣기로 프랑스 사람들은 자존심이 세서 영어로 말하면 무시한다고 했는데, 나와 마주친 젊은이들은 다행히도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How’와 ‘ticket’이 있으니 buy 쯤은 빼먹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딜 가는지 묻고 5유로를 달라고 하더니 표를 뽑아 주었다. 어디에서 타야 하는지 친절히 알려주기까지 했다. 파리 젊은이들이 정말 고마웠다.
정해진 역에 도착해 민박집에 전화하니 직원이 마중나왔다. 10여 분을 걸어 도착한 민박집은 1980년대 한국 여인숙 분위기가 났다. 조선족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주인행세를 하고 있었다. 배가 고프다 하니 늦은 밤인데도 식사를 준비해 줬다. 된장국과 돼지고기 두루치기가 나왔다. 짜긴 했지만,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식사를 마치고 방에 들어갔다. 6인실에 이미 한국사람 다섯 명이 투숙하고 있었다. 밤이 늦어 대화를 할 틈은 없었다. 허름한 분위기라 잠이나 제대로 잘 수 있겠나 싶은데도 피곤한 탓에 금세 잠들었다.
25일 새벽 6시에 눈을 떴다. 이전에도 파리를 방문한 적이 있어 관광 욕심은 없었다. 대신 일정이 자유로워 센 강변을 마음껏 걸었다. 루브르 박물관과 에펠탑에는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 멀찍이서 구경만 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순례 시작 전 프랑스 관광을 하거나 순례를 마치고 스페인 관광을 한다. 만약 순례 전후로 관광일정을 잡는다면 일정을 넉넉히 잡는 것이 좋다. 오후에는 몽파르나스역으로 향했다. 기차는 다음 날 아침 7시에 있었지만, 인터넷으로 출력한 임시표를 승차권으로 바꾸기 위해서다. 발권기 조작법을 몰라 20분 넘게 헤매다 역무원의 도움으로 겨우 표를 얻을 수 있었다. 하루 일찍 들르길 정말 잘했다. 당일에 이런 상황을 맞았다면 더 허둥댔을 터였다. 민박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했다. 이번에도 돼지고기를 이용한 요리가 나오긴 했는데, 그야말로 국적 불명이었다. 볶음도 아니고, 찌개도 아닌 것이 애매했다.
한국 아주머니 만나 식비 절약법 배워
4월 26일 아침, 생 장 피드포르로 향하는 7시28분 기차를 타기 위해 일찍 집을 나섰다. 미리 바꿔 둔 표를 내고 열차에 올라 바용(BAYONNE) 역까지 약 6시간을 달렸다. 바용에서 환승을 해야 하는데 두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시내를 구경하기로 했다. 그러던 중 한국 여학생을 만났다. 대구에서 왔다며 자기도 산티아고 순례여행을 간다고 했다. 9개월간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 600만원으로 3개월간 유럽여행을 하는 중이라 한다. 유럽여행에 1년을 투자한 셈이다. 열정이 대단해 보였다. 먹고살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렸던 우리 세대와는 영 다른 모습이어서 ‘요즘 친구들은 저런 생각을 하고 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용에서 생 장 피드포르로 가는 열차는 1량짜리였다. 기관사도 80여 명의 승객과 같은 칸에 탔다. 안에서 보면 흡사 시내버스였다. 좌석이 꽉 차서 서서 가는 사람도 많았는데, 하나같이 배낭을 메고 가는 걸 보니 모두 순례에 나선 사람들로 보였다. 다들 몸뚱이만한 가방을 챙겨 들고 가느라 짜증이 날 만한데도 창밖으로 보이는 깎아지른 절벽과 울창한 숲에 취해 조용했다.
오후 4시. 생 장 피드포르에 도착하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열차에서 내려 사람들을 따라 걸으니 순례자 사무소가 나왔다. 줄을 서서 기다렸다 여권을 제출했다. 순례자 여권과 순례자의 길 가이드북, 그리고 순례자의 상징인 조개껍데기 하나를 받았다. 절차를 마치고 값이 저렴한(1박 5~7유로) 무니시팔 알베르게(Municipal Alberge·공립 여행자 숙박시설)를 찾으려니 만원이었다. 하는 수 없이 하룻밤에 15유로 정도 하는 사설(私設) 알베르게로 발길을 돌렸다.
알베르게에 들어가서 방 배정을 받으니 내 또래쯤 되는 한국 아주머니 두 분이 계셨다. 본인들을 친구사이라고 하더니 대뜸 마트에 가지 않겠느냐고 했다. 전문 여행가들처럼 보였기 때문에 도움이 되겠다 싶어 얼른 따라나섰다. 마트에 도착해서 각자 4유로씩 내야 한다고 하더니 그 돈으로 바게트 빵, 계란, 바나나, 소시지, 치즈를 샀다. 그러고는 곧장 알베르게로 돌아와 빵을 자르고 계란을 삶아 비닐봉지에 나눠 담았다. 내일 걸으면서 먹을 식량이라 했다. 나도 세 봉지를 배분받았다. 4유로어치, 우리 돈 6000원에 세 끼 식사가 해결된 것이다. 알베르게 주변에 있는 식당에선 한 끼에 10유로 정도 하는데 단돈 4유로에 세 끼를 때울 수 있으니 매우 경제적이었다. 매일같이 음식점에서 10에서 20유로 정도 내고 식사를 할 것이라 생각하고 예산을 그렇게 짰는데, 이렇게까지 비용절감을 할 수 있다니…. 역시 남들이 쓴 매뉴얼과 현장 경험은 또다른 묘미가 있었다. 알베르게 근처에 항상 마트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나고 나니 엄청난 비용절감 효과가 있었다.
식사 이후에는 다들 각자의 침대로 돌아갔다. 오늘은 나와 한국 아주머니 2명, 외국인 남녀 5명이 한방을 쓴다. 8명이 이층 침대 네 개에 흩어져 잔다. 침대는 딱 1명만 누울 수 있을 만큼 폭이 좁아서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걸릴 듯하다.
대장정(大長程)을 하루 앞두고 각오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멀리까지 와서 굳이 한국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오고가는 대화는 없었다. 어둠이 짙어오는데도 설렘 속에서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날이 밝으면 드디어 출발이다!
생 장 피드포르 순례자사무소에서 발급해 주는 순례자 여권(Credencial,크레덴시알). 순례자 여권이 있어야 순례자들을 위한 숙박시설인 알베르게에 머물 수 있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각 알베르게별로 고유한 확인도장을 찍어 주는데, 이 확인도장이 있어야 목적지에 도착해서 순례자 증명서를 받을 수 있다. |
[4월 27일 순례] 1일 차
간밤에 너무 추워 뒤척거린 탓인지 첫날부터 입맛을 잃었다. 그래도 걸어야 하니 억지로 빵으로 배만 채우고 조용히 알베르게를 빠져나간다. 다른 순례자들도 약속이나 한 듯 골목 이곳저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키 큰 사람, 코 큰 사람, 눈 파란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섞여서 말없이 한방향으로 움직인다. 장관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곳 생 장 피드포르에서 하룻밤을 보냈을까.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피레네 산맥을 넘는다. 첫날치고는 꽤 힘든 조건이다. 비가 와서 앉을 수도 없고 쉴 수도 없어 걸어가며 끼니를 때운다. 어젯밤 준비해 둔 빵과 바나나가 정말 요긴하다. 세 시간을 걷는 동안 피레네 산맥의 장관에 넋을 잃었다. 거대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묵직한’ 대자연을 느낄 수 있었다. 봄을 맞아 돋아난 새싹 위에 눈과 비가 섞여 내리는 장면을 보고 있자니 마치 환상 속에 있는 듯했다. 궂은 날씨에도 이런 게 이국적인 풍경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4월 28일] 2일 차
아침 6시에 일어났다. 다들 다음 포인트로 이동하기 위해 바쁘다. 눈발이 휘날리는 날씨가 한겨울을 연상케 한다. 가져온 봄옷을 다 껴입었는데도 떨면서 걷는다. 지난 세월, 내가 인생의 행로에서 걸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하나둘씩 떠오른다. 내가 모셨던 그분, 선거 때면 물불 안가리고 뛰었던 날들, 잠시 직장을 잃었던 시절의 아픈 기억…. 이런저런 생각에 주변 경치도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돌연, 앞으로 남은 나의 ‘제2 인생길’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까에까지 생각이 이르자 답답함이 밀려온다. 에이, 그 생각은 나중에 하자고 미뤄 뒀다.
[4월 29일] 3일 차
또 하루가 시작된다. 찬 봄바람 맞으며 사색하는 것에 어느덧 익숙해졌다. 주변에 한국인이 얼추 스무 명쯤 되는 듯하다. 하루 일행이 어림잡아 300명 정도 되는 것 같은데 그중 스물이면 얼마나 많은가. 한국이 정말 여유로운 나라인 것 같다. 한창 직장에서 일하고 있을 시기에 이렇게 여러 사람이 피레네 산맥 주변을 걷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걷는 동안 만큼은 한국사람끼리 오래 대화하는 일이 없었다. 걷기도 어려운데 굳이 입으로 에너지를 버릴 필요가 없다는 공감대가 있기나 한 듯이.
[4월 30일] 4일 차
봄비가 내린다. 여기저기서 한국사람들 소리가 들린다. 여기가 제주 올레길인가 싶다. 오늘 머문 알베르게에는 세탁실, 부엌, 샤워실 등이 모두 있어서 숙식해결에 불편이 없다. 특히 부엌 겸 식당에는 전기식 레인지, 각종 조리기구와 식기, 식탁 등이 잘 갖춰져 있었다. 가까운 곳에 식료품점도 있다. 스페인은 고기, 와인이 엄청나게 싸다. 소고기를 사도 우리 돈 만 원이면 두 사람이 포식을 한다. 와인은 1.5유로부터 몇십 유로까지 있는데, 보통 2~3유로짜리를 산다. 와인이 한 병에 4500원이라니. 고기도 사고 스파게티도 사서 알베르게 부엌에서 파티를 한다. 20대 한국 젊은이 둘, 40대 한국 중년 남성 한 명과 스파게티, 고기를 요리해 먹었다.
[5월 1일] 5일 차
생각이 많아진다. 예수의 제자 야고보가 왜 이 길을 걸었을까. 하늘의 뜻을 전하려 했을까.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 어딜 가나 순례객들이 보인다. 지쳐 쓰러져 산중 고독사(孤獨死)할 일은 없을 듯싶다. 멋진 경치를 보고 사진을 찍고 싶으면 뒷사람에게 부탁하면 된다. 말도 필요 없다. 사진기만 건네면 된다. 누구 하나 거절하는 이 없다. 대부분 혼자 온 사람들이니 서로 도울 수밖에 없다. 사진만 찍어 주고 스쳐 가는 사람이 있지만, 자기도 찍어 달라며 사진기를 건네는 이도 있다. 알베르게는 밤 열시면 불이 꺼진다.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서 자야 한다. 침대에 누우니 또 생각이 많아진다.
[5월 2일] 6일 차
‘산티아고 순례길’. 이름만 들으면 한 달 내내 산악지역을 걷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산악지역도 통과하긴 하지만 실제로는 마을에서 마을,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개념이다. 사진은 순례자 식당에서 캐나다 노신사(왼쪽에서 두 번째)와 파리 여성들과 만찬을 즐기는 모습. |
올해로 71세가 된 캐나다 노인과 순례자 식당에서 와인 한잔 했다. 자기를 안마사라고 소개하면서 처음 보는 여성들에게 손을 안마해 주겠다며 너스레를 떤다. 여성들도 흥미로운지 수줍은 듯 깔깔대고 만다. 노신사는 알기 쉬운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위트 있게 이야기를 이끌어 나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그에게 매료되었다. 어쩜 저리 멋질 수 있단 말인가. 한편으론 간단한 대화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내 영어실력이 원망스러웠다. 순례길 완주 이후 어학연수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5월 3일] 7일 차
바람은 불지만 모처럼 해가 보여 좋다. 주변에 발을 질질 끌며 걷는 이가 한둘이 아니다. 나도 인대가 늘어난 듯한 심한 통증에 속도를 낼 수 없다. 주변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출발한 지 일주일이 지났으니 무리가 오는 것도 당연하다. 힘들지만 돌아갈 수도 없고, 대신 걸어 줄 사람도 없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서둘러 공용 알베르게를 찾았으나 이미 만원이다.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려 사설 알베르게로 향했다. 아픈 와중에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손짓 발짓으로 사설 알베르게를 찾으려니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마저도 사설 알베르게는 공립 알베르게보다 시설이 부실하다. 방 분위기가 우중충하다. 불만족스럽다.
알베르게를 찾는 일은 늘 고역이다. 저렴한 공립 알베르게는 언제나 만원이다. 날씨가 추워 사람들이 찾지 않는 비수기도 이 정도인데, 온도가 선선해 걷기 좋은 성수기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누군가 “성수기의 순례는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한 순례가 아니라 알베르게를 찾기 위한 경보(競步)경기”라고 했을 만큼 숙소경쟁이 치열하다고 했다는 말을 이해할 만하다.
[5월 4일] 8일 차
30km를 걸었다. 오늘도 무릎이 시큰거린다. 한없이 펼쳐진 밀밭과 포도밭이 장관이었다. 어찌나 끝도 없던지 포도와 밀이 장엄해 보이기까지 하다. 순례자식당에서 무제한으로 주는 와인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 것도 같다. 스페인은 인구는 한국과 비슷한데 면적은 한국의 다섯배다. 이 나라엔 애초부터 보릿고개란 말이 없었을 듯싶다. 얼마나 기름지고 축복받은 땅인가. 우리 민족에게 이렇게 비옥한 땅이 허락되었다면 지금쯤 세계를 주름잡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자만일까.
[5월 5일] 9일 차
알베르게 주방에서 각자 준비한 요리를 나누며 파티를 즐기는 모습. |
여전히 밀밭과 포도밭이 이어진다. 도중에 서울에서 온 60대 중반 아주머니를 만났다. 생 장 피드포르에서부터 이따금 마주쳤는데 오늘은 특히 힘들어 보인다. 걷는 것인지 기어가는 것인지 모를 만큼 절뚝거리며 걸었다. 나도 무릎이 아팠던지라 남 돌볼 여유는 없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보조를 맞추어 함께 걷는다. 저 상태로 남은 20여 일을 어떻게 갈까 걱정된다. 그래도 평생에 이 길을 꼭 한번은 걷겠다고 다짐했단다. 시간이 더 지나면 힘들겠다 싶어 올해 꼭 가야 한단다. 젊은 사람도 절절매는 이 길을 무슨 사연이 있어 이리도 걷고 싶을까. 따로 사연을 묻지는 않았다. 여기 있는 사람 모두 자기만의 사연이 없지 않을 터. 만날 때마다 물어보려면 끝도 없다. 예정보다 두 시간 늦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60대 아주머니가 고맙다고 저녁으로 수제비를 대접하겠다고 했다. 다른 한국사람들과 다 같이 수제비를 즐겼다.
보통 오후 2시쯤이면 목적지에 도착하여 짐을 푼다. 아침 7시에 출발, 오후 2시쯤 도착이니 하루 평균 7~8시간쯤 걷는 셈이다. 아침과 점심을 빵으로 때우기 때문에 도착하고 나면 배가 무척 고프다. 그런데 주변 수퍼마켓은 평균 4시에서 5시 사이에 문을 연다. 그전까지는 낮잠 자는 시간이라 가게들이 문을 닫는다. 남는 시간 동안 알베르게에서 방 배정을 받고 빨래를 하고 정비를 한다. 마트가 열리면 장을 보고 돌아와 만찬을 즐기는 식이다. 수퍼 가서 장보고 시장구경도 하고, 만나서 떠들며 즐기는 와인 한잔. 이제 이 정도면 ‘순례인’으로 손색이 없다.
[5월 6일] 10일 차
밀밭과 포도밭이 이제는 무덤덤하다. 다리 통증은 조금 나아진 듯하다. 요 며칠간 통증으로 고생하다 보니 산티아고 순례길은 꼭 혼자 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와서 아프면 혼자 여행을 멈추면 될 텐데, 두세 명씩 짝을 지어 온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잘 걷는 사람도 동료가 아프면 멈춰야 하고, 꼭 누군가 아프지 않아도 걷는 속도가 서로 달라 처음부터 힘들어하기도 했다. “넌 다리가 아프니 버스를 타고 다음 알베르게까지 오라”며 동료와 이별하고 걷는 친구도 여럿 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완주하겠다며 먼 길을 찾아왔을 텐데, 동료와 일정을 맞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버스를 타는 마음은 얼마나 참담할 텐가. 어쩔 수 없이 동료를 두고 떠나야 하는 마음도 오죽하랴.
[5월 7일] 11일 차
이쯤 되니 아무 순례자나 붙잡고 물으면 어딘가 한군데는 성치 못했다. 절뚝절뚝 걷는 광경이 우습다. 나 자신도 우습다. 집에 처자식에 먹고살 것 멀쩡히 두고 이역만리까지 와서 왜 이렇게 사서 고생할까. 이제 겨우 열흘 걸었는데. 앞으로가 더 문제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세탁소와 부엌이 어딨는지부터 찾는다. 오늘 도착한 알베르게에는 부엌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밥을 사 먹어야 한다. 알베르게 부엌에서 제각기 준비한 요리를 나눠 먹으면서 와인 한잔 하는 기분이 이만저만 좋은 게 아닌데. 순례자 식당도 나쁘진 않다. 순례길에 있는 대부분의 식당에는 순례자 전용 메뉴가 있다. 빵, 감자튀김, 스테이크, 샐러드 등을 순서대로 주는데 이름은 같아도 요리는 그때그때 다르다. 와인은 테이블 위에 있어 그냥 마실 수 있다. 가격은 보통 10~15유로 정도이다. 식사 시작부터 후식까지 보통 한 시간 반이 걸린다. 새 친구를 사귀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식사시간이 더 길어지기도 한다. 식당에 들어가면 말없이 자리로 안내해 주는데, 혼자 오는 손님이 많아 모르는 사람과 한테이블을 쓴다. 그런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서로 어디에서 왔는지 묻고, 왜 왔는지, 자기 나라는 어떤 나라인지 설명을 한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너나 할 것 없이 북한의 위협에 대해 이야기한다. 누군가는 북한 얘기가 나오니 손으로 총 쏘는 시늉을 했다. 자기도 영어가 되지 않으니 그저 손짓만 하기 바쁘다. 손가락으로 총질하는 모양새가 여간 우스운 게 아니다. “완전한 평화는 아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는 평온하다”고 영어로 말하려니 말문이 막힌다. 편한 대로 “위해브 피쓰(We have peace), 노 프라블럼(no problum)” 하고 만다. 그러면 정말이냐며 허허 웃고 마는 식이다. 다른 한국인들도 외국인을 만날 때면 매일같이 겪는 일인 듯했다.
[5월 8일] 12일 차
세 시간 산행 끝에 아스팔트길이 나왔다. 나에겐 흙길보다 아스팔트길이 더 힘들다. 딱딱한 길이라 무릎에 무리가 온다. 다리를 질질 끌면서 걷기 시작한다. 가는 도중 통증이 심해 견디지 못하고 벤치에 주저앉았다. 따라오던 헝가리 친구가 무슨 일인지 묻더니 배낭에서 약을 꺼내 발라 주곤 훌쩍 떠났다. 순례길에선 누군가에게 문제가 생기면 누구 하나 그냥 지나치지 않고 도와준다. 참 고맙다. 약을 바른 후 30여 분을 더 걷다 보니 통증이 가셨다.
[5월 9일] 13일 차
전형적인 알베르게의 모습. 숙소에 도착하면 순례자 여권에 확인도장을 찍는다. 동시에 위생을 위해 베개커버와 침대커버를 하나씩 나누어 준다. 대부분의 알베르게는 수용인원을 늘리기 위해 이층침대를 사용한다. 빨래 너는 공간이 별도로 없는 경우 침대 머리맡에 빨래를 말리기도 한다. |
어제 저녁 알베르게에서 마주 보고 웃고 떠들던 얼굴들이 이제는 말없이 앞만 보고 걷는다. 다들 걸을 땐 말이 없다. 두 시간 걸으니 비가 내린다. 너나 할 것 없이 허둥지둥 비옷을 꺼내 입는다. 한국에서 온 여자 두 명이 저만치서 절룩절룩 걷는다. 너무 안쓰럽다. 업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도와줄 방법이 없다. 무슨 사연으로 왔을까. 비 오는 순례길은 여간 고달픈 게 아니다. 흙이 마치 찰떡같다. 신발바닥에 진흙이 쩍쩍 들러붙어 신발이 무겁다. 걷는 사람들은 그나마 형편이 낫다. 자전거 순례객에게는 이만한 고역이 없다. 다들 자전거에서 내려 끌고 간다. 나에겐 아스팔트가 지옥이고 그들에겐 비포장길이 지옥이다. 신발에 들러붙은 진흙을 떨어내려면 밀밭으로 걸어야 한다. 벌써 수많은 사람이 밀밭 한 귀퉁이를 밟고 지나갔다. 나도 따라 걷는다. 밀밭 주인에게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숙소에 도착해서도 비를 맞으며 한참을 줄 서서 기다렸다. 우의를 걸쳤지만 몇 시간 동안 내린 비를 맞으며 걸으니 물기가 스며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코트식 우의는 허술하다. 더 든든한 판초 우의를 샀어야 했다. 가장 뼈아픈 실수다. 꼭 판초 우의를 준비해야 한다. 침대맡에 옷을 말리고 싶지만, 방 하나에 40~50명이 누워 자니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땀 냄새, 몸 냄새, 코 고는 사람, 기침하는 사람으로 이만저만 불쾌한 게 아니다. 그래도 몸이 워낙 고단하니 하나하나 신경 쓰며 날 세울 겨를도 없다. 대책 없이 너무 힘들다 보니 되레 힘든 걸 잊는다. 아이러니하다.
[5월 10일] 14일 차
발바닥과 무릎이 얼얼하다. 중간 5~6km 지점에 숙소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계속해서 밀밭밖에 없다. 도대체 이 많은 밀은 누가 심었고, 누가 거둬 간단 말인가. 모르겠다. 애초에 17km를 걸으려 했지만, 무려 13km를 더 걸었다. 점심으로 빵, 바나나, 소시지만 먹은 터라 뱃가죽과 등가죽이 붙은 것 같이 배고프다.
오랜만에 집사람과 통화했다. 생각날 때마다 카카오톡으로 안부를 묻곤 했는데, 오늘은 보이스톡으로 통화까지 했다. 몸은 괜찮으냐고 걱정스레 묻는 아내가 사랑스럽다.
[5월 11일] 15일 차
순례길 복장 앞모습(왼쪽)과 뒷모습(오른쪽). 배낭과는 별도로 앞으로 메는 작은 가방을 착용했다. 주로 지갑, 휴대폰, 카메라, 우산 등 자주 쓰는 물건을 보관한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배낭 뒤에 수건, 양말 등을 말린다. 알베르게 입장 시 꼭 필요한 슬리퍼와 순례자를 상징하는 조개껍데기는 항상 매달고 다닌다. |
모처럼 날씨가 좋다. 배낭에 빵, 토마토를 넣고 걷는다.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이 상쾌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밀밭은 여전하다. 요 며칠 무척 지겨운 길만 이어진 터라 걷는 것 자체를 즐기지 못했다면 못 걸었을 것이다. 생각이 많아진다. 코흘리개 시절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태어나자마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형제 남매도 없이 어머니와 나 둘이서 세상을 시작했다. 혼자된 어머니는 핏덩어리 자식을 위해 모든 걸 바쳐 한세상 살다가 돌아가셨다. 아들 장가보내 놓고 저세상 갔으니, 단 한 번도 이 세상 재미 한 번 못 보신 그 ‘어미’의 한 많은 인생은 어찌 그리 가련한가. 어머니는 21세에 시집와서 23세에 청상과부가 되었다. 지금 세상 같으면 결혼할 생각도 못할 청춘에 혼자되었으니. 물려받은 재산도 없이 핏덩이 아들 하나 버릴 수 없어 피눈물 나도록 고생하며 사신 어머니가 눈에 어른거린다. 산촌에서 태어나 깡 산촌에 시집왔으니 배운 것,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농사일밖에 없었다. 아들 하나 제대로 키우는 것을 절체절명의 인생목표라 여기고 남의 집 일, 삯바느질, 구멍가게, 공장 일을 닥치는 대로 하며 우리 모자 입에 풀칠하려고 발버둥치신 어머니. 가슴이 미어진다.
환갑을 맞이하는 올해, 이 산티아고 길을 걸으며 불쌍 가련한 나의 어머니 생각을 하며 눈물짓는다. 산티아고 길이 나를 이렇게 서럽게 만드는가. 울고 싶다. 나의 어머니는 생전에 비행기 한 번 못 타 보고 저 세상에 가셨다. 어떻게 어머니에게 보상해야 하나. 방법이 없다. 하염없이 뙤약볕을 받으며 걷는다. 저 푸른 숲과 저 높고 맑은 산티아고 하늘은 어머니의 인생을 아는지, 그 슬프고 고달팠던 사정을 아는지. 그 어머니 덕에 이 아들은 이 길을 걷지 않는가. 어머니 너무 죄스럽습니다. 그저 송구할 뿐입니다. 용서를 받고 싶어도 길이 없습니다. 연약한 한 여자에게 이 세상이 너무 힘겨운 짐을 지웠습니다. 환갑 되는 이 아들, 이제 어떻게 속죄해야 합니까. 어떻게 보상해야 합니까. 산티아고 하늘에 묻고 또 묻습니다.
[5월 12일] 16일 차
바나나 하나 빵 한 조각으로 아침을 때운다. 밀밭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지평선 끝에 하늘이 발갛게 달아오르면서 대지에 붉은 물결이 인다. 장엄하게 떠오르는 일출 장면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위대하도다! 거창하도다! 스페인의 지면을 달구는 태양이 저렇게 웅장할 줄이야. 용광로 같은 태양의 정기가 나의 남은 인생을 밝혀 주기를 기도했다.
[5월 13일] 17일 차
17일간 17군데의 알베르게에 머물렀다. 알베르게 중 상당수는 기부(寄附)로 운영된다. 잠도 공짜, 밥도 공짜다. 그저 떠나는 길에 자기 주고 싶은 만큼만 성의를 표시하면 된다. 그래도 아무도 그냥 가는 사람이 없다. 나도 공립 알베르게에 내는 만큼 꼬박꼬박 성의를 표시했다. 참 본받을 만한 문화요, 제도다.
[5월 14일] 18일 차
오늘도 걷는다. 내 모습을 보니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 같다. 바지 두 개, 티셔츠 두 개, 양말 세 켤레, 침낭 하나. 이것이 내가 이 순간 갖고 있는 자산의 전부니 이보다 가난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행복하다. 저 푸른 하늘이 나를 덮어 주고 이 푸른 초원이 나의 모든 것이 되니 얼마나 부자인가.
진정 욕심 버리고 바람 따라 물 따라 살고 싶다. 한국에 두고 온 가족, 내 나라 생각이 옅어진다. 아무런 생각이 없다. ‘저 푸른 초원은 어딘가 끝이 있겠지’ 하고 그냥 걷는다. 나를 버리고 나를 이 푸른 초원에 맡기고 싶다.
[5월 15일] 19일 차
날씨가 지옥이다. 체감온도가 거의 0도다. 이렇게 온도 차가 심할 수가 있을까 싶다. 4시간을 걸어 레온(Leon)시에 도착했다. 스페인에서 큰 도시에 속한다. 숙소를 정하고 모처럼 시내에 나가 식사를 했다. 점심값이 비싸고 맛도 별로였다. 후회했다. 오는 길에 장을 보았다.
[5월 16일] 20일 차
어제 오늘 날씨는 초겨울을 방불케 한다. 도시를 벗어나 2시간 이상 걸은 것 같다. 길을 걷는데 노상(路上) 바(Bar)에 앉은 50대 신사가 나를 불러 세운다. 한국사람이냐 묻더니 커피 한잔 대접하겠다며 앉으라 한다. 스페인에 온 지 30년이 되었고, 태권도장을 운영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반가웠다. 근처에 한국 교민이 4가구 정도 사는데 서로 교류가 쉽지 않다고 했다. 이국땅에서 혈혈단신으로 열심히 사는 모습이 아름다워 속으로 박수를 보냈다.
[5월 17일] 21일 차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으며 ‘올라!’(Hola·스페인말로 ‘안녕!’) 하고 인사한다. 나도 따라서 인사한다. 세계 각국에서 온 남녀노소가 서로를 이해하고 눈동자로 서로를 감싸 준다. 누구나 부족한 게 있으면 서로 돕는다.
연일 바람 불고 추운 날씨인데 오늘은 우박까지 쏟아졌다. 내 몸도 힘들었지만, 함께 걷는 사람들과 농작물들이 걱정이었다. 숙소에 도착해 일행들과 함께 수퍼에서 소고기를 사서 만찬을 즐겼다. 생애 또 이런 맛을 느낄 수 있을까 싶다. 내일은 날씨가 쾌청했으면 좋겠다.
[5월 18일] 22일 차
잔뜩 구름 낀 하늘에 바람이 세차게 분다. 다섯 시간 동안 태풍 같은 바람을 견디며 걸었다. 이렇게 큰 바람을 오래 맞아 보기는 처음이다. 옆 사람과 대화가 안 될 정도의 강풍이다. 뼛속까지 추위가 스며든다. 체감온도도 뚝 떨어진다. 잠깐 즐겼던 3유로짜리 뜨거운 커피를 잊을 수 없다. 인터넷으로 찾아봤을 때 분명히 이곳 날씨는 따뜻하다 했다. 이렇게 추운데 누가 그따위로 거짓말을 했단 말인가. 정말 장난이 아니다. 만반의 준비 없이 오면 큰 고생 한다. 늘 긴장해야 한다. 집사람에게 너무 춥다고 카톡했더니 서울은 여름 날씨 같단다. 난로 옆에서 서울 생각을 하며 하루를 정리한다.
[5월 19일] 23일 차
800km 여정 중 가장 높은 지대(약 1500m)를 걷는다. 정면 바람을 안고 새벽 안개를 뚫고 걷는다. 5월에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린 길을 걷는 것은 처음이다. 설경이 아주 아름답다. 3시간을 걸어 철십자가가 있는 정상을 통과했다. 십자가 앞에서 너나 할 것 없이 소원을 빌고 기념사진을 찍는다. 아! 축복받은 스페인에, 창조주가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산을 주었는고. 이 멋진 광경 표현할 길이 없네. 무릎이 시리고 발바닥이 아파 서 있기도 어렵지만, 이 순간만큼은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
[5월 20일] 24일 차
어제까지 태풍같이 불던 바람이 잦아들었다. 오늘은 봄날씨다. 이런 변덕이 없다. 큰 산 하나 넘고 나니 기온이 완연 다르다. 순례객들의 행렬이 장관이다. 걷는 동안 한국사람 6~7명을 만났다. 주로 젊은이들이다. 영어도 잘하고 인터넷, 휴대전화도 잘한다. 궁금한 것을 물으면 척척이다. 장하다. 우리 젊은이들. 휴학하고 순례길에 오른 학생, 이 길을 걷고 싶어 직장을 그만두고 온 젊은이. 그들의 용기에 놀랐다.
[5월 21일] 25일 차
모처럼 새벽부터 맑은 하늘이 보인다. 여느 때처럼 짐 챙기고 빵 한 조각 먹고 배낭을 멨다. 가다 보니 길이 세 갈래였다. 나는 산길을 선택했다. 정상까지 3시간이 걸렸다. 아래로 내려다보는 풍경은 정말 아름답다. 저 멀리 보이는 산에는 하얀 눈이 덮여 있고 걷는 산에는 봄꽃이 만발해 있다. 여기가 정녕 지상인가, 천국인가. 아, 지난 세월이 있었기에 내가 여길 걷는 것 아닌가. 미움도 슬픔도 다 내려놓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순 없을까. 서울에 있는 친구들이 그립다. 아내가 보고 싶다.
[5월 22일] 26일 차
조용한 마을에 이르렀다. 알베르게가 만원이라 오늘 최장거리로 걸었다. 오는 동안 스페인의 산야에 도취해 지루한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걸었다. 보통 30km를 걸으면 체력에 한계를 느끼는데 오늘은 기록을 세워 뿌듯하기도 했다. 앞으로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산티아고까지 4일 정도 앞당겨 도착할 것 같다. 그다음 일정을 생각해 봐야겠다. 아침에 감자 두 개, 오다가 맥주 한잔 커피 한잔에 빵 한 조각만 먹고 걸었는데도 그렇게 배고픔을 모르는 건 왜일까. 뱃살은 많이 빠진 것 같다. 입고 온 바지가 헐렁해졌으니 말이다.
[5월 23일] 27일 차
아침에 2시간 걷다가 배가 고파 먹다 남은 빵 한 조각으로 점심을 때우고 6시간을 걸어 숙소에 도착하니 뱃가죽이 뒷등에 붙은 것 같다. 이 여행은 먹는 것이 가장 문제다. 돈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상황 자체가 문제다. 마트가 있고 숙소에 부엌이 있으면 저녁을 푸짐하게 먹을 수 있지만, 주변에 마트가 있고 동시에 부엌까지 딸린 알베르게는 흔치 않다. 순례자 사무소에서 모든 알베르게의 위치와 부엌, 샤워 등 편의시설 유무를 표시해 둔 표를 줬다. 그 표을 보고 걸으려 해도 체력 및 시간문제로 원하는 알베르게에 도착하긴 쉽지 않다. 새벽 5시경 일어나 아침을 차려 먹기도 힘들다. 점심을 사 먹고 싶어도 한국처럼 노점상이 많지 않아 식사시간을 놓치기 일쑤다. 하는 수 없이 걸으면서 빵을 먹어야 한다.
오늘은 외발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을 보았다. 황당했지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 일부러 불러 세워 말을 걸었다. 하루 50km씩 달려 보름 만에 순례를 마칠 예정이라 한다.
[5월 24일] 28일 차
산티아고까지 85km 정도 남았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4일 정도 걸으면 될 것 같다. 참 시간이 빨리 지나간 것 같다. 하루 평균 6~7시간을 걸으면서도 지루하지 않다. 아름다운 스페인 산야에서 지난 세월을 더듬으며 세계각지에서 온 친구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으니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서울에서의 기억이 이제 가물가물하다. 들판은 저리 넓은데. 밭을 가꾸는 농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5월 25일] 29일 차
한 달간의 고행 끝에 목적지에 도착해서 받은 순례자 증명서. 손에 쥔 것은 종이 한 장이지만 얻은 것은 그 이상이다. 늘 무엇인가 얻기 위해 몸부림쳐 온 나 자신을 되돌아보며, 이제부터는 나누면서 살기로 다짐했다. 정말 큰 소득이다. |
많이 걸었다. 24km를 예상하고 걸었는데 도착하고 보니 완전히 산촌이다. 식당도 없고 배낭에 먹을 것도 없어 하는 수 없이 8km를 더 걸어 도시에 도착했다. 24km를 걷고 8km를 더 걸으려니 정말 고단했다. 아침 점심을 부실하게 먹어 더 힘이 부쳤다.
이제 2~3일이면 산티아고에 도착한다. 설렌다. 딸에게 연락이 왔다. 아내의 생일을 맞아 서울 집에 다 모였단다. 가족 소식 들으니 반가웠다. 몸무게가 많이 줄었을 것 같은데 저울이 없어 잴 수 없다. 돌아가서 평소 잘 먹는 고등어조림을 실컷 먹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길은 지겹지 않은데 식사가 부실해 고생이다. 그럼에도 건강은 아주 좋은 것 같다. 어쩌면 평소 과식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강제로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
복도에서 자는 이탈리아 청년에게 왜 이 밤중에 복도에서 자느냐 물었다. 영어를 못하는지 그저 코 고는 시늉을 하며 얼굴을 찡그리고 귀를 막는다.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유쾌하다. 아마 코 고는 소리가 시끄러워 나와서 자는 모양이다.
[5월 26일] 30일 차
이제 내일이면 꿈에 그리던 산티아고에 도착할 수 있다. 감개무량하다. 많은 순례인들이 내일 정오 미사에 참여하려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평소 성당에 가지 않지만 나 역시 오늘은 32km 강행군을 했다.
몸이 많이 가벼워졌다. 가난한 몸, 풍성한 마음을 갖고 싶다. 이번 여정은 내 생애 추억의 한 페이지가 될 것이다. 나머지 인생 살아가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 같다. 하루에 행군 25km씩 한 달간 하루도 쉬지 않고 걸었다는 것에 내 자신이 대견하다. 내가 이런 체력을 갖고 있었는가. 내가 이런 의지를 갖고 있었는가. 아, 장하다, 이재홍!
[5월 27일] 31일 차
오전 11시. 출발한 지 한 달 만에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했다. 순례자 여권을 보여주고 산티아고 순례길 완주 증명서를 받았다. 곧바로 12시 성당 미사에 참여하여 감사기도를 올리고 성당 주변에서 인증샷을 찍었다. 서울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도착 소식을 전했다. 다들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아침도 거르고 점심은 먹지 못해 초췌한 상태로 마트에서 장을 봤다. 닭을 사서 주변 한국사람들과 백숙을 해 먹었다. 이후 저녁 미사에도 참석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지난 한 달간 아무런 탈 없이 하루도 쉬지 않고 잘 도착하게 해 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남은 인생 여정 아름다운 삶, 부끄럽지 않은 삶 되게 해 주소서. 이번 여행을 통해 진정 자신을 돌이켜 회개하게 해 주시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 갖게 해 주소서. 고개 숙여 기도드립니다.”
0km 지점. 세상의 끝에서 끝나는 순례의 길
[5월 28일]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한 사람은 인근 알베르게에서 이틀간 더 머무를 수 있다. 도착 이튿날 시외버스를 타고 산티아고에서 82km 떨어진 피니스테레라는 작은 어촌마을로 향했다. 대부분의 순례자는 산티아고에서 순례길을 마치지만, 3일을 더 걸어 이곳 피니스테레까지 오는 순례객들도 있다. ‘세상의 끝’에서 입었던 옷, 신발을 태우는 신성한 의식을 치르기 위해서다. 실제로 0km라고 쓰인 표지판과 옷을 태울 수 있는 모닥불이 있다. 구경을 마치고 다시 산티아고로 돌아왔다.
뜻밖에 일찍 끝난 순례길
다음 날 오후 4시 마드리드행 열차를 타고 여섯 시간을 달려 밤늦게 도착했다. 예약했던 민박집에 전화하여 예정보다 일찍 도착했는데 방이 있냐고 물었다. 다행히 방이 있었다. 원래는 6월 2일부터 마드리드에 이틀간 머무르려 했는데, 나흘이나 일찍 와 버렸기 때문에 여기서 엿새 동안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안되겠다 싶어 항공편을 새로 구하려 했더니 마드리드발 인천행 직항 항공권 가격이 무려 120만원이나 했다. 민박집이 하루에 25유로씩이니 그냥 마드리드 관광을 하며 기다리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이후 3일간 톨레도(Toledo), 세고비아(Segovia) 등의 도시를 둘러보다 6월 4일 귀국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산티아고 순례길, 벗들과 함께 다시 걷고 싶다
순례길 여행 전에는 ‘내 체력으로 해낼 수 있을까’ 싶었는데, 막상 가 보니 내가 잘 걷는 축에 속해서 스스로 놀랐다. 예상보다 일찍 도착해 시간도 남았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집에 돌아오니 도무지 맞는 바지가 없었다. 몸무게를 재 보니 7kg이 빠졌다. 내 욕심도 그만큼 사라진 기분이다. 걸을 때마다 욕심이 사라졌다. 배낭속에 바지 하나, 티셔츠 두 개, 양말 세 켤레 가지고도 한달을 잘 살아 왔다. 앞으로는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치고받고 싸우지 않고 현실에 만족하며 살고 싶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배웠던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 욕심을 내려놓는 마음으로 다가올 세월을 마주하고 싶다. 나 자신에게 물었다. “다시 한 번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기회가 있다면 다시 걸을 것인가?” 나의 답은 ‘Yes’다. 그땐 벗들과 함께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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