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족의 청제국 서론 만주족에 대한 문제」 12주차 질문(1)
202013666 역사교육과 이진우
[ 질문 ]
Q. PP.46~47에는 “만주족의 차별을 보증해 주던 만주족의 생활양식과 뛰어난 전투력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옹정제와 건륭제는 반복하여 조칙을 내려 만주어 학습의 중요성과 무술의 유지를 강조했고, 만주족을 검박하고 상무적인 생활양식으로 이끌었다. …(중략)…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만주의 법도를 규정하고 지키려는 노력은 헛수고가 되었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만주족과 한인이 동화되었을 경우 만주족의 차별성은 무너지게 된다. 저자는 “만주의 법도가 무너진 시기를 동화의 흔적이 나타나는 1800년으로 잡으면, 만주족은 바로 그 후에 권력을 잃었어야 옳지만, 만주족은 19세기에도 20세기에도 동화되지 않았고, 만주족의 집단의식을 유지하였다고 말한다.” 저자는 만주족의 집단의식이 존속한 이유로서 팔기를 주목해야한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PP.48~49) 저자의 주장대로 팔기가 만주족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유지해 나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팔기가 만주족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유지해 나갔던 방법과 정책이 궁금하여 질문합니다.
A. 팔기는 두 가지 방법을 통해 만주족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유지해 갔다. 하나는 중국 내지에 팔기제를 폭넓게 배치함으로써 왕조의 만주족 정체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일단 팔기의 절반 이상은 경사와 황궁 주변의 방어선에 집중함으로써 황실은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부족적 충성심을 갖춘 나머지 팔기는 중국의 중요한 지방도시에 분산 배치되었다. 만주족의 충성스런 군대인 팔기가 지방 주요 도시에 계속 주둔하고 그 지역을 관리하게 되자, 지역의 한인들에게 최고통치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계속 상기시켜줄 수 있었다. 지방의 팔기는 지속적으로 황제와 소통했으며, 황제와의 연결망은 청조에게는 또 하나의 감독기구로 기능했다.
다른 하나는 팔기 구성원에게 요구하는 생활방식이 17~18세기 만주족의 민족성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팔기제가 지방에 주둔할 때 만성의 성벽, 군사적인 배치, 도시의 건축학적 특징에 의해 만성 내에 있는 사람들과 팔기는 물리적으로 격리되었다. 팔기제는 특히 만주족과 몽골족 팔기에게 사회적으로 차별적이고 동시에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했고, 경제적으로도 기인과 구별지었다. 팔기제는 노골적으로 민족적 기구였댜. 비록 약화되고 변질되었지만 만주족의 다양한 특징적인 문화적 관습과 함께 만주족 집단이 같은 생활방식과 제도와 같은 과거에 대한 믿음을 지닌 하나의 결집력 있는 후손 집단으로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마크 C. 엘리엇, 『만주족의 청제국』, 푸른역사,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