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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5월 28일 경성의 조선호텔 대연회장에서 22살의 청년이 조선 최고의 미인 김후동과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다.
이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인천부윤(인천시장) 요시마쓰를 비롯한 인천의 관계와 재계 유력인사들이 모두 참석했고, 결혼식 당일 비용만 무려 3만원(현재 30억원)에 달하는 초호화 결혼시기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18년 후, 1939년 10월 18일 허름한 집에서 반복창이 죽은채로 발견되었다. 대체 반복창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반복창은 1920년대에 미두시장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람이었다.
미두시장은 무엇인가?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미두시장
하지만 불과 백년 전, 이곳에서는 미두의 시세 즉 쌀과 콩의 시세를 결정하는 미두시장이 성행했었다고 한다.
미두시장의 정식명칭은 미두취인소
미곡의 품질과 가격의 표준화를 꾀하기 위해 설립된 기관으로, 쌀과 콩을 현물없이 10%의 증거금만 가지고 사고 팔던 곳이었다.
미두 거래는 정해진 기간에 쌀을 살 권리나 팔 권리를 사고 파는 개념으로써 오늘날의 선물 거래와 거래방식이 유사하다.
미두취인소에서 결정되는 미두의 시세가 곧 쌀 거래의 표준가격이 되었다.
그런데, 이 미두시장은 곧 투기시장으로 변질되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적은 돈으로 쌀으 사고 파는 권리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향후 쌀이 오를 것인지 내릴 것인지 예측만 잘하면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복창이 당시 인천 미두시장에 나타난 것은 1900년도
12살의 조선 소년 반복창은 이 곳 이천의 미두시장에서 명성을 날리던 일본인 아라키의 집에 들어간다.
(반복창은 맨처음에 아이를 돌봐 주는 사람으로 취직 했었다고 한다.)
아라키는 1896년 인천에 미두시장이 들어서자 미두 중매점을 차려 거래를 대행하거나 직접 사고 팔아 엄청난 부를 축적한 인물이었다.
그렇게 아라키의 하인으로 일하던 반복창은 2년 후 아라키의 중매점의 요비코가된다.
요비코란 중매점에 모인 미두꾼들에게 인천과 일본 오사카의 미두 시세를 소리질러 전달하는 사람이었는데...
미두시세는 그 해 날씨, 거래량, 농사의 풍흉 등에도 영향을 받았지만 조선의 쌀 소비지로 가장 큰 곳이 일본이었기 때문에 일본 오사카 도지마시장의 시세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 했다.
당시 인천과 오사카 사이에는 전화선이 연결되지 않아 전보를 통해 시세를 전달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시세를 미두꾼들에게 발 빠르게전달하는 사람이 바로 요비코였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미두꾼들에게 시세를 외치고 다니던 소년 반복창은 언젠가는 자신도 미두로 큰 돈을 벌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침내 1918년 19살의 반복창은 아라키에 의해 중매점의 시장대리인으로 발탁된다.
아이를 돌보던 하인에서 시장대리인으로 신분상승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반복창이 미두시장에서 시장대리인으로 데뷔한 지 4년 후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종전으로 전후 복구사업이 본격화되면서 일본경제는 유례없는 대호황을 누린다.
그로인해 소득이 늘어나 쌀의 소비가 증가했고, 게다가 그 해 가을 흉년이 들어 쌀값이 폭등하게 되는데...
시세변동이 거의 없어 소강 국면을 보이던 미두시장이 갑자기 들썩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인천으로 구름떼처럼 몰려왔는데...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두시장에 사람들이 몰린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쌀값이 10원만 오르내리더라도 현재 가치로 1억 원을 잃거나 벌 수 있는 구조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투기꾼들이 몰려들 수 밖에 없었다고 하나.
선물시장인 미두시장에서는 쌀값의 변동 폭이 중요했다.
미두의 최소 거래단위는 100석이었는데, 하루의 쌀값이 10원, 20원씩 오르내리는 것은 미두시장에 참가한 사람들이 하루에 최소 일이천원씩 따거나 잃었다는 의미였다.
요즘 가치로 따지자면 하루에 일이억원을 따거나 잃었다는 셈인데, 이렇게 미두시세의 변동 폭이 커지자 전국팔도에서 일확천금을 꾸꾸는 미두꾼들이 몰려들었고, 미두판은 더욱 호황을 맞이했다.
이에 반복창의 주인이었던 아라키 역시 쌀이 앞으로 폭등할 것이라고 여겨 투기적으로 매수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쌀값은 좀처럼 오르지 않았고, 계속해서 손해를 보게 된다.
아라키는 이를 한번에 만회하기 위해 주변에서 돈을 끌여 들였고, 나중에는 미두취인소에 증거금을 내지 않은 채 180만원어치의 쌀을 또 매수하는데 예측은 빗나가고 말았다.
1919년 더이상 불어나는 이자를 감당 할 수 없었던 아라키는 인천미두시장에서 부도를 낸 후 일본으로 도망을 가게된다.
아라키의 신용만 믿고거래를 하게 된 미두시장 역시 큰 타격을 입어 폐쇄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데...
배운 기술이라곤 미두가 전부였던 반복창은 미두시장의 폐쇄로 인하여 실업자로 전락...
다행히 석 달 후, 조선총독부는 자보늠을 100만원으로 늘려 미두시장을 다시 개장한다.
미두시장이 개장한다는 소식에 미두꾼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고, 반복창도 역시 수중에 있던 500원 가량의 돈으로 아라키처럼 미두를 직접 사고파는 미두꾼으로 나서게 된다.
미두 중매점에서 지내는 동안 쌓은 노하우 때문인지 그는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팔면 파는 대로 사면 사는 대로 이득을 얻는다.
반복창은 한 번의 벌이로 18만원(현재 가치 약 180억원 상당)을 벌기도 했으며, 그렇게 신들린 것처럼 정확히 쌀 시세를 예측해서 그의 재산은 20만원, 30만원으로 점점 늘어갔고 단 1년 만에 500원의 밑천에서 40만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부를 축척하게 된다.
현재의 화폐가치로 환산하였을 경우에 약 400억원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반복창이 미두로 거부가 되었다는 소문이 퍼져나갔고, 미두꾼들은 반복창을 '미두의 신' 이라 불렀으며 그를 따라 다녔다.
반복창이 중매점에 나타났다는 소식만 들려도 미두시세가 몇원씩 오르내렸고, 그가 사고 팔면 오사카 미두시장의 시세까지 출렁거렸다.
그렇게 미두꾼으로 나선지 1년여만에 21살의 청년 반복창은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까지 '미두계의 제왕'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는데..
그러자 득의 양양해진 반복창은 인천 외리에 400평의 집터를 구입하고 20만원을 들여 조선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서양식 저택을 지을 계획을 세운다.
의견은 분분하지만 인천 앞바다가 훤히 보이는 명당자였는데
그러나 지금은 텅 빈 집터만 남아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당시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21년 4월 반복창은 대저택의 안주인이 될 김후동과 조선호텔에서 초호화결혼식을 올린다. 김후동은 여고보를 졸업한 미모의 신여성으로 조선팔도에서 미의 여신으로 추앙 받을 만큼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대저택과 아름다운 아내까지 얻은 그는 세상에서 부러울 것 하나 없는 남자였다.
그런데, 다음 해인 1922년 그에게 불행이 찾아온다.
반복창의 운이 다했는지 갑자기 예측하는 시세마다 빗나가기 시작했고, 아라키처럼 손해를 한번에 만회하기 위해 투기적으로 거래하기에 이른다.
그는 실수를 만회하려고 노력했지만, 실패를 거듭했고
결국 전 재산을 순식간에 탕진하게 된다.
불과 2년 만에 가산의 탕진하고 빈털털이가 된 그는 아내와 이혼하고, 사기사건에 휘말려 고초를 겼다가 거듭된 실패와 상실감으로 30이란 젊은 나이에 중풍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는 비운의 신세가 되고 만다.
그런데 반복창이 미두의 신에서 빈털털이가 된 이면에는 놀라운 점이 숨어 있었다.
사실 일본은 조선의 쌀, 콩 등의 수탈과 미가조정을 쉽게하기 위해 미두시장을 설립했었는데
설립된 미두시자은 조선인들의 돈을 합법적으로 빼앗아 갈 수 있는 수단이었다.
반복창이 크게 돈을 벌자 수많은 조선인들은 제 2의 반복창을 꿈꾸며 미두시장에 돈을쏟아 부었다.
결국, 그 돈을 일본이 다 쓸어간 것이다.
그런데 천하의 미두의 신 반복창이 실패를 거듭하게 되면서 일본은 그의 돈까지 말끔하게 털어갔던 것이다.
즉 재주는 반복창이 부리고 돈은 일본이 벌게된 셈이었다.
반복창은 몰락 후에도 미두를 향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푼돈을 걸고 쌀값의 등락을 알아맞추는 도박인 합백에 빠졌고, 정신마저 이상해져 10년 동안 비참한 삶을 살다가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와 더부러 반복창의 흥망성쇠의 무대였다 미두시장도 그가 죽고 20일이 지난 1939년 11월 7일 조선에서 영워니 사라졌다.
일제시대 미두로 조선최고 갑부가 됐다가 순식간에 몰락해 비참한 최후를 맞은 미두시장의 풍운아 반복창
반복창은 죽고 사라졌지만 백여 년이 흐른 지금 아직도 이땅에는 일확천금을 꿈꾸다가 좌절하는 무수히 많은 반복창이 있는 것은 아닐까?
출처 : tv서프라이즈
김후동 : 반복창의 부인으로 그녀는 성공을 꿈꾸는 모던걸이다. 사랑도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결혼 전에는 돈을 위해서라면 웬만한 일들은 눈감고 행했을 만큼 대담한 여성이다. 어느 날
미두시장계의 최고인 반복창의 이야기를 듣고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당시에는 최고로 호화로운 결혼식을 올려 아이들과 함께 그녀가 그동안
꿈꿔왔던 삶을 누리고 살게 된다. 하지만 반복창의 사업이 어려움에 처하자 아이들을 데리고 부동산 투자의 대가인 김기덕에게
가버린다.
김
기덕 : 당시 부동산 투자의 대가이자 반복창의 친구로 세련되고 아름다운 김후동을 몰래 사랑한다. 반복창과는 서로 의형제만큼 각별한
사이이지만 그보다 반복창이 먼저 투자 사업에 성공을 하자 남모르는 열등감을 갖고 산다. 거기에 반복창이 김후동과 결혼까지 하자
김기덕의 반복창에 대한 미움은 하늘을 찌를 만큼 높아간다. 반복창의 사업이 점점 망해가자 그는 그 틈에 김후동을 데리고 오고 반복창에게는 눈꼽만큼의 도움이나 동정도 주지 않는 배신자이다.
출처 : 문화원형백과
신여성 :
신여성은 주로 일제강점기에 많이 사용되던 용어이다. 이 용어가 언제, 누구에 의하여 최초로 사용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일제강점기 초부터 널리 통용되었다.
특히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김원주(金元周, 일명 金一葉)가 『신여자』 제2호에 ‘신여자선언’을 발표하는 등 신여성에 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경우 1910년 쓰보우치(坪內逍遙)가 ‘새로운 여성’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한 뒤 이 말이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여류문인 히라쓰카(平塚雷鳥)가 『청탑』이라는 잡지를 통하여 본격적인 ‘신여성론’을 전개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신여자』가 김원주에 의하여 1920년에 창간된 것을 감안하면, 일본과 한국의 신여성론은 약 10년 간의 시차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한국 신여성론의 선두주자들이 여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유학을 마친 뒤 귀국하기까지의 기간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신여성’은 영국 빅토리아 후기 시대에 처음 나타나서 곧 다른 여러 사회에서 등장한 세계적 현상이다. 각 사회에서 신여성은 중등교육이나 고등교육을 받은 초기 세대들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가치와 태도를 추구하는 존재로 등장하였다. ‘신여성’이라는 어휘는 경제적 독립을 추구하고 기존의 결혼제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자신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표명하는 일군의 집단을 가리켰으며, 다양하고 뜨거운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다는 것이 세계적인 공통점이다.
출처 : 한구민족문화대백과
첫댓글 옛날 "기미"라고 했죠
장택상씨의 동생 직각대감도 기미로
돈 많이 날렸습니다.
재밌게 봤습니다 이에관련된 한 방송을 본 기억이 나네요(서프라이즈는 아님) 역시나 미두거래소때문에 그때 조선 갑부들이 수많이 재산을 탕진해서 거지가 되었다죠
그리고 조선최고의 미인 김후동이라니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하군요 요즘 김태희 스타일은 아니겠죠^^
김태희은 너무 잘생긴것같아여
제가 사는곳에서도 김태희의 펜많아요^6^
코난님께선 마음도 얼굴도 예쁜 여성을 만날것같아요^^그런 예감이 드네요^^
영상으로 찾아봐야겠네요.
한편의 소설이네요~~ 저는 처음듣는 얘기인데... 사람에겐 누구나 흐르는 운이 있는것 같아요~~ 욕심은 화근! 조선 제일의 미인상이 어땠을지도 무척 궁금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