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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6. 23. 오순절 후 다섯 번째 주일
예배로 부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니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미4:2)
예배 기원
영원히 경배를 받으실 하나님! 6월의 네 번째 주일예배를 드립니다. 살 같이 빠른 광음 속에서도 이 나라와 가정과 산업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특별히 이번 주에는 우리 민족의 아픔인 6.25를 기억합니다. 다시는 이 땅에서 동족상잔의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평화를 주옵소서. 전쟁의 폐허 속에서 드렸던 선조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옵나이다 아멘.
이 주일의 찬송
다 함께 주를 경배하세(12장) / 저 하늘 거룩하신 주여(194장) / 예수 나를 오라 하네(324장) 어지러운 세상 중에(340장) / 하늘 보좌 떠나서(437장) / 내 주 하나님(469장)
고백의 기도
우주의 만물을 창조하시고 세계 열방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주님께서는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사랑하셔서 유구한 역사 속에 동행하시며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겼을 때에는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해방을 허락해 주셨으며, 전쟁으로 온 땅이 황폐케 되었을 때에도 이 민족을 버리지 않고 경제의 회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국위가 선양되고 살만하여지니 이 백성들이 하나님께 등을 돌리려 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로운 삶을 저버리고 있으며,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비방하며 죄악이 관영한 시대를 열어 가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온혜를 망각하고 교만해지고 있는 이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보호하시는 팔을 거두지 마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고백의 기도를 드립니다 아멘.
사함의 확신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제목: 신자들은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본문: 약 3:8-10
☞ 마음 문을 열고
토끼에게 고지방 사료를 먹이고 콜레스테롤 수치를 측정하는 실험이 있었습니다. 몇 달 후 대다수 토끼에게서 부정적 수치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유독 한 무리의 토끼들은 혈관의 지방이 60%나 적었다고 합니다.
이유를 알아본 결과 그 토끼를 돌본 연구원이 먹이를 줄 때마다 다정하게 말을 걸고 쓰다듬었다는 겁니다. 식단이나 유전자보다도 큰 영향을 끼치는 게 바로 ‘애정’이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른바 ‘토끼효과(Rabbit Effect)’입니다.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은 사람뿐 아니라 동물에게도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끊임없이 자극적이고 공격적인 정보와 신호를 받습니다. 그 모든 메시지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위축시킵니다.
말은 소리입니다. 소리로 표현되는 말은 물리학적으로만 볼 때 공기의 진동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말은 단지 소리에 멈추지 않습니다. 말은 여러 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듣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어떤 경우에는 기쁨을 주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슬픔이나 분노를 야기하기도 합니다. 야고보 사도의 표현을 빌리면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옵니다. 심지어 똑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는가에 따라, 누가 듣는가에 따라 완전히 상반된 반응이 나옵니다.
소리에 불과한 말이 이렇게 큰 힘을 갖는 이유는 말이 메시지 혹은 영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관계는 인간의 말과 영의 관계와 어느 정도 유사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 영의 문제라면, 신앙이 신자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말입니다. 말은 마음속에 있는 생각이나 감정이 밖으로 표출된 것입니다. 말과 마음은 분명히 구별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분리되지 않습니다.
마음에 없거나 마음과 다른 말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겠지만 항상 그런 식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상대방에게 잘 보여야 할 때와 같은 특별한 상황이아니라면 인간은 대부분의 경우 자기 생각대로 말을 합니다.
만약 마음이 바뀌었다면 말도 바뀌게 됩니다. 마음이 바뀌었다고 말하는데 정작 말은 그대로라면 그 말은 신뢰할 수 없습니다.
1. 신자들은 모여서 주로 무슨 말을 할까?
신자가 모여서 말하는 주제와 비신자가 모여서 말하는 주제가 다를까요? 신자라고 해서 굳이 비신자와 대화의 주제가 달라야 할까요? 일반화해서 말하는게 불가능하겠지만 경험적으로 볼 때 신자의 대화와 비신자의 대화는 그렇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남자 신자들은 모이면 자연스럽게 주식, 재테크, 스포츠, 정치가 대화 주제가 되고, 여자 신자들이 모이면 자녀 교육, 미용, 드라마가 대화의 주제가 되는 것을 쉽게 보게 됩니다. 물론 신자도 얼마든지 세상적인 주제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제기하는 문제는 언어생활이 신앙생활에 대해서 어떤 영향을 주는가? 입니다. 만약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서로 얼굴 붉히고 대립한다면 비신자와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자녀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좋지만 어떤 학원이 좋다더라, 어떤 프로그램이 좋다더라와 같은 정보 교환만 이뤄진다면 맘 카페와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말이 난무하는 사회 속에서 신자들은 어떻게 말을 하면서 살아가야 할까요?
22대 총선이 끝났습니다. 총선은 그야말로 말의 잔치였습니다. 수많은 류의 말들이 난무하였습니다. 난무한 말들은 잔치에서 전쟁으로 변합니다. 총선을 전쟁에 종종 비유하는데 총선은 말로 하는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번 총선에서 여당과 야당 모두가 심판을 외쳤기 때문에 정책 선거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기독교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여당을 지지한 신자는 마냥 분개하고 야당을 지지한 신자는 마냥 기뻐해야 할까요? 선거는 끝났습니다. 그러나 정치하는 사람은 이제는 자신을 성찰할 시기입니다. 특히 총선 기간 동안 자신이 했던 수많은 말에 대해 깊이 성찰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검증되지 않은 수많은 정보들이 난립하고 있습니다. 온갖 정보가 난무하는 상황에서 신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가장 신뢰할 만한 언론을 분별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자신이 신뢰할 만한 언론에서 얻은 정보라 할지라도 그 정보를 무조건 신뢰하는 것은 지양해야합니다.
아무리 정직한 언론도 100% 진리만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정보 내용에서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면 카톡방에서 공유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만약 나중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면 그것에 대한 책임도 마땅히 져야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정치나 정치인에 대한 이야기는 믿을 수 없는 것이 많기 때문에 참고만 하고 다른 사람과 공유하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이 말은 어떤 정보도 공유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만큼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내용이 확실하게 사실이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이를 전달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그 비판이 사실이니까 말해도 죄가 없지 않는가? 하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신자도 거의 대부분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에 대해서는 좋은 말만 하고 상대방에 대해서는 나쁜 말만 하기 쉽습니다.
아무리 사실이라 하더라도 어떤 사람에 대해서 좋은 점은 말하지 않고 나쁜 점만 말한다면 그 말은 진실일 수 없습니다. 신자는 사실과 진실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점에서 거듭난 신자도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죄성을 여전히 지니고 있음을 늘 자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2. ‘별식’과 같은 뒷 담화
세상 속에서 신자들의 여러 언행 방식에 있어서 잘못된 언행에 대하여 진정한 자기 반성과 회개가 없다면 교회 생활에도 그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신자들이 교회 생활에서 입으로 쉽게 짓는 죄는 뒷담화입니다. 한국 사람처럼 뒷담화를 좋아하는 민족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신자도 이 점에서 예외가 아닌데 뒷 담화는 위기의 순간에 교회 공동체를 심각하게 해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유의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뒷담화가 조성될 여러 상황이나 제도가 존재합니다.
교회에는 구역, 셀, 전도회 같은 수많은 소그룹 모임이 있습니다. 이 모임들이 교회 성장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때로는 여러모로 해를 준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소그룹 모임에서 자신들의 삶을 서로 나눌 때 그곳에서 나눈 이야기들은 쉽게 다른 곳으로 옮겨질 수 있습니다. 공식 모임은 그나마 괜찮지만 통제되지 않은 비공식 모임에서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안 좋은 이야기들이 오고 갈 수 있습니다.
정도가 심하면 그 소그룹은 다툼과 원망의 근원지로 바뀝니다. 교회 안에서 남의 말을 하는 사람은 의외로 인기가 많습니다. 많은 신자가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8).
지혜로운 신자들은 남의 말 하는 것을 좋아하는 자와 될 수 있는 대로 거리를 두는 것이 좋습니다. 신자들이 남에 대해서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특히 어떤 경우에는 정확한 비판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점에서 교리문답(하이델베르크112문답)은 아주 좋은 지침이 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남의 말을 왜곡하지 않기입니다. 이 말은 남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 주장의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표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곡해로 인해 불필요한 다툼이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너무 많이 발생하고 확산되고 있습니다. 왜곡만 사라져도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반으로 줄어들 것입니다.
둘째 지침은 뒤에서 헐뜯지 않기입니다. 사람은 여러 가지 이유로 뒤에서 헐뜯습니다. 지위가 낮은 사람은 자신이 당한 것을 복수하기 위해서 헐뜯고, 지위 높은 사람은 마음에 들지 않는 부하를 따돌리기 위해서 헐뜯습니다. 손쉽게 남을 해치는 방법이 뒤에서 헐뜯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쉽게 이 죄를 범합니다.
신자들은 남에 대해서 말할 때 항상 “내가 이것을 당사자 앞에서 말할 수 있는가?”를 질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확실하게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으면 말해도 될 것입니다.
셋째 지침은 그 사람의 말을 들어 보지 않고 성급하게 정죄하지 않기입니다. 사람에 대한 판단은 항상 신중해야 합니다. 성급한 판단은 잘못된 판단으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성급한 판단을 예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사자의 말을 들어 보는 것입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것도 당사자 말을 들어 보면 납득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걸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동의는 안 되지만 이해라도 할 수 있으며, 보다 정확한 판단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이됩니다.
3. 하얀 거짓말?
거짓말은 목적에 따라 크게 3가지 종류로 구별될 수 있습니다. 1) 남을 해하기 위한 거짓말 2) 남을 기쁘게 하기 위한 거짓말 3) 자신의 유익을 위한 거짓말. 이 중에서 남을 해하기 위한 거짓말은 십계명에서 명시적으로 금하고 있기 때문에 신자들은 그 위험성을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를 위한 거짓말에 대해서 신자들은 상대적으로 가볍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우리는 아브라함의 거짓말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위해서 아내에게 누이라고 거짓말을 하도록 했습니다(창 12장).
그런데 하나님은 거짓말을 한 아브라함이 아니라 그녀의 거짓말에 속은 바로에게 벌을 내리셨습니다. 이와 유사한 일이 두 번이나 더 반복되기 때문에(20, 26장) 신자는 자신의 생명을 위해 거짓말을 해도 된다는 인상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역사적 본문을 오늘날 윤리적인 지침으로 삼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 본문의 중심 주제는 거짓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가장 가볍게 여기는 거짓말은 남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거짓말입니다.
이런 거짓말은 보통 하얀 거짓말로 불리는데 대표적인 예로 “새 옷이 정말 잘 어울리네요”와 같은 말입니다. 물론 신자들이 그와 같은 상황에서 항상 자신의 판단을 정확하게 표현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습관적으로 그런 식의 아첨을 남발하게 되면 상호 간의 신뢰감을 상실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최종적으로는 자신이 하게 될 어떤 말도 상대방으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할 것이다.
살 가망이 없는 환자에게 ‘진실을 이야기해 주어야 하는가’ 라는 것도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병명을 속여서 환자에게 희망을 갖게 하면 실제로 치료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대부분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미래가 어떻게 될지도 전혀 모릅니다. 그렇다면 사실을 이야기해 당사자로 하여금 죽음을 잘 준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신자의 의무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죽는 것도 유익이라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무엇보다도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복음이 될 수 있습니다. 착한 거짓말은 실제 생활이나 교회 생활에서 희망고문으로 종종 나타납니다.
“괜찮아. 다 잘 될 거야!”라는 말이 격려의 말이 아니라 빈말로 그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희망이라는 것은 정확한 사실에 기반 할 때 힘을 갖습니다. 희망이 사실에 기반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허망일 뿐입니다.
이와 같은 희망은 종종 비전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기도 합니다. 문제는 선포되는 메시지 전부가 거짓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기가 심히 어렵습니다.
일반적으로 강단에서 사실의 일부분만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서 멋진 삶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위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언뜻 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멋진 삶”, “위대한 계획”에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고난이 빠져 있다면 그것은 올바른 하나님 말씀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설교란 청중이 가지고 있는 “멋진 삶”을 성경이 말하는 멋진 삶으로 바꾸는 것이지 청중의 생각에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4. 자기 눈 속에 있는 티부터
상대방이 나쁜 일을 했음이 확실하게 밝혀졌다 하더라도 신자는 거기서 멈추지 말고 더 나아가 그것이 얼마나 나쁜지도 동시에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보통 인간들은 상대방의 자그만 잘못은 부풀리면서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관대한 경향이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예수님은 마태복음7:1-3에서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산상보훈은 남의 잘못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입을 닫고 있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비판을 하려면 그 비판이 공정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남을 비판하는 자는어떤 기준을 갖고 비판하는데, 그 비판이 정당한 비판이 되기 위해서는 그 기준이 자신에게도 동일한 잣대가 돼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신자가 정당한 비판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에게 있는 들보부터 제거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신자들은 성급하게 남을 비판하는 데 앞장서거나 그 비판에 참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이전보다 지역 간, 계층 간, 남녀 간, 세대 간 갈등이 훨씬 심각해졌고 그 기저에는 수많은 거짓, 비방, 조롱 등이 깔려 있습니다.
신자는 이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5. 교회 내 분쟁 & 치리
최근에 많은 교회가 여러 이유로 분쟁의 늪에 빠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분쟁이 시작되면 자연스럽게 파벌이 조성됩니다. 주동자들은 여러 방법으로 교인들을 최대한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상대방에 대한 비난입니다. 일단 비난이 시작되면 거짓에 의해 확산되고 그 이후에 제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사도 야고보는 혀의 능력에 대해서 이렇게 경고하였습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 3:8).
분쟁이 없으면 좋겠지만 아무리 평안한 교회라 하더라도 언제든지 분쟁에 휘말릴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 분쟁이 일단 생기면 단지 “사랑 합시다”, “기도합시다”와 같은 가벼운 말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말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사랑 안에서 참된것을 말하라”(엡 4:15). 아무리 참된 것을 말한다 하더라도 사랑 안에서 말하지 않으면 그 말은 교회를 무너뜨릴 뿐입니다.
바울은 또한 사랑의 속성 중 하나가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무례한 말은 아무리 그것이 바르다고 하더라도 용납돼서는 안 됩니다. 안타깝게도 무례하고 분노에 가득 찬 정치적 구호에 환호하는 신자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입니다.
☞ 갈무리
이제 차분히 진정하고 자신이 속한 교회의 들보부터 빼서 미래에 일어날 분쟁에 대비해야합니다.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메시지는 바로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가장 높고 위대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씀처럼 우리를 살리고 회복시키는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사실을 인식할 때마다 우리는 위로와 힘을 얻고 용기와 소망을 갖게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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