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 선교 여행의 시작
사도행전 13:1~12
이제 우리는 사도행전의 내용적 단계에서 새로운 문으로 진입하는 대목에 이르었습니다. 그 동안은 주님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유다 지역으로 그리고 사마리아와 그 북쪽의 이방 도시 안디옥까지 이르게 되었으나 그 너머의 광대한 이방 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전도는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이전에 일어났던 빌립 집사에 의한 에디오피아 내시의 전도나 고넬료의 집에서의 복음 전도 그리고 안디옥 성읍에서의 이방인 성도들로 구성된 교회 설립은 특이한 예외 정도로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때가 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드넓은 이방 지역에서 영적인 어두움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복음의 진리의 빛을 비추어 그들을 건져내시고자 하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결정적인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쓰시고자 작정하신 교회가 안디옥 교회였고 그 교회의 수석 장로인 바나바와 바울이 그 이방 선교 사역의 수행자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방 선교의 중심이 되었던 안디옥 교회와 이방 선교의 주역인 바나바와 바울이 어떤 면이 있었길래 그토록 귀하게 사용되었는가를 함께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다양한 성도들이 복음 안에서 하나 되었다는 점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매우 다양한 계층의 성도들과 지도자들로 이루어진 교회였다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이방 선교를 위하여 특별히 안디옥 교회가 쓰임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 교회가 다양한 혈통과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서 조화를 이루며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던 것이 그 한 이유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안디옥 교회는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한 그 동안의 교회들과 달라서 이방인들에 대하여 동질감을 많이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안디옥 교회는 드넓은 세상의 수많은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영적인 부담감을 가지고 남다른 열심을 가지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그 다섯 명의 신앙 지도자들의 면면만 봐도 매우 다양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바나바는 지중해 한 가운데 있는 섬 나라인 구브로 출신인 유대인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사랑이 많고 격려의 은사를 가진 훌륭한 주의 목회자였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좀 특별한 분입니다.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은 누구냐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간 구레네 시몬으로 여겨지는 사람입니다. ‘니게르’라는 말은 ‘흑인’, ‘검다’라는 말이요 ‘시므온’은 ‘시몬’이라는 이름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이 시몬을 북부 아프리카 구레네 출신의 시몬으로 이해할 수 있는 까닭은 마가복음 15:21 말씀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진 구레네 시몬을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로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은 마가 요한이 베드로의 조수로서 로마에서 사역할 때에 그 로마 교회의 기독교 공동체에게 너무나 익숙한 알렉산더와 루포라는 젊은이의 아버지로 구레네 시몬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루포와 그 어머니를 두고서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무리할 때에 고린도교회에서 쓴 편지인 로마서 16:13에 보면 그 로마에서 살고 있는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고 부탁하면서 “그 어머니 루포의 어머니는 내 어머니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루포의 어머니 곧 구레네 시몬의 아내로부터 언제 어떻게 사랑과 보살핌을 받았길래 ‘내 어머니’라고 말할 정도가 되었을까요? 사도 바울이 아직 가지도 않았던 로마에 가서 살고 있는 루포의 어머니를 두고 ‘내 어머니’라고 말할 정도로 깊은 교제를 그녀와 깊은 교제를 나눈 계시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한 가장 좋은 해답은 사도 바울이 나이 44세 정도에 안디옥 교회에 와서 사역할 때에 그 교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니게르 시므온 곧 구레네 시몬 가정에서 사도 바울을 정성껏 돌보아주었던 것이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특히 구레네 시몬의 아내 루포의 어머니가 마치 어머니처럼 사도 바울을 자상하게 섬겼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 인연으로 인하여 사도 바울은 이제 로마로 가서 살고 있는 루포의 어머니 곧 구레네 시몬의 아내를 자기 어머니처럼 고맙게 여기면서 로마 교회에 편지를 써 보낼 때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극진한 안부를 물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할 때에 고통스럽게 이리 저리 쓰러질 때에 로마 병정이 군중 중에 한 사람으로 구경을 하던 구레네 시몬을 지목하여 억지로 사형수가 매달리는 그 십자가를 지라고 함으로 할 수 없이 억지로 십자가를 졌는데, 그 결과로 그 본인은 변화되어 구원을 받고 주의 종이 되어 안디옥의 훌륭한 영적 지도자가 되었고 그의 자녀들까지도 훌륭한 주의 종이 되고 초대 교회의 믿음의 귀한 일꾼들이 되었고 그 아내마저 사도 바울에게 내 어머니라고 불릴 만큼 귀한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었으니, 그 가정이 큰 복을 받은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가 처음에는 알지 못하고 지기 싫었지만 억지로라도 주님이 맡겨놓은 십자가를 질 때에 이것이 궁극적으로는 크나큰 복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정에서나 몸된 교회에서나 직장에서 억지로 지게 되는 힘든 십자가일지라도 주님의 섭리 속에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려고 그렇게 하시는 경우가 있음을 기억하고 원망 불평하지 말고 순종하는 자가 됩시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억지로 진 그 십자가를 인하여 상상하지 않는 크고 놀라운 영육간의 축복을 더해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세 번째 교회 지도자는 구레네 사람 루기오였으니, 이 분 역시 저 북 아프리카 출신입니다.
네 번째의 교회 지도자로는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헨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마나헨은 헤롯 안디바와 함께 어릴적 같은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란 사람입니다. 그래서 궁정 어디나 돌아다닐 수 있는 귀족의 자제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헤롯 안비바는 당시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의 분봉왕이었기 때문에 마나헨도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왕의 최측근으로서 세상적으로 원하는 것들을 다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을 눈으로 보고 들으면서 심령의 은혜를 입었고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아 초대 교회의 은혜 가운데서 결정적으로 삶의 목표를 전환했습니다. 세상의 부귀공명을 헛된 것으로 알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을 알고 주님을 전하는 일에 삶을 드리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안디옥 교회가 설립된 후에 이곳에서 성령이 주신 귀중한 은사와 직무를 맡아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에 헌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의 결단이 참으로 복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젖형제였던 헤롯 안디바는 그의 조카 아그립바 1세와의 권력투쟁에서 밀려 로마 황제에게 왕의 자리가 박탈되고 저 멀리 프랑스 남부 도시 리용으로 귀양가 버렸습니다. 그것이 불과 5년 전 일이었습니다. 헤롯 안디바와 헤로디아는 자기네 권력이 영원할 줄 알았고 더 큰 영토와 더많은 권력을 탐하였다가 스스로 무너져내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젖동생 마나헨이 성령의 은혜를 받고서 세상의 부귀 공명은 아침 안개처럼 쉬이 사라지는 것임을 깨닫고서 모든 것 내려놓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전력을 기울임으로 주의 종까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세대 사람들이 세상 부귀와 세상 명예와 세상 인기를 향하여 몰두하고 있지만 그 세상 영광도 잠깐임을 우리도 항상 인식하며 살아갑시다. 마나헨처럼 영원하신 주님과 영원한 하나님 말씀을 의지하고 주님과 함께 살며 주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하여 살아갑시다. 그것이 쇠하지 않고 변함이 없는 참된 생명과 영광을 위한 삶인 줄 믿습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 소개되는 안디옥 교회 지도자가 사울입니다. 사울은 우리가 아는 바대로 길리기아 다소 출신의 바리새인 사울입니다. 그는 전형적인 유대인으로서 베냐민 지파의 혈통에서 태어났는데, 그 아버지가 이미 로마 시민권을 가진 것을 보면 매우 유력한 집안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찍이 자기 아들 사울을 예루살렘에 보내어 최고의 명문 랍비 학교에서 율법 교육을 받게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3장에 보면, 예루살렘에 사울의 생질 조카가 있는 것을 보면 사울의 누님이나 형제가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처럼 한편은 당시 최고로 번성하던 이방 도시 다소에서 어린 시절 자라서 이방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헬라 문화에 대한 지식도 많은데 동시에 유대인으로서 최고의 율법 교육을 받은 최고의 지성인이었는데, 그가 약 7~8년 전에 주님의 교회를 박해하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고 완전히 변화된 바 되었으니 아라비아 지역 곧 호렙산 지역에 가서 깊이 기도하여 복음에 대하여 주님께 직접 깊은 계시적 가르침을 받은 바 있었습니다. 그곳 아라비아 사람들도 전도하고 다메섹에 돌아와서도 복음을 전하다가 예루살렘에 들렀다가 고향 다소로 낙향하여 몇 년을 은둔하다가 이렇게 바나바의 초대를 받아 안디옥 교회에서 일년 넘게 성도들을 가르쳐온 것입니다.
이렇게 안디옥 교회 다섯 명의 영적 지도자만 살펴보아도, 그 신분이나 출신이나 혈통이나 살아온 경험들이 매우 다양합니다. 이방 지역에 대한 경험들이 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민의 구주시며 죄인들의 모든 죄를 사해주시어 살리신 만왕의 왕이시라는 확실한 신앙 하나만으로 하나가 되어 뜨겁게 예배하며 섬기는 하나 된 교회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은혜가 충만할 때 사람들 사이의 차이점은 사라집니다. 그리하여 경험과 출신과 신분적 다양성은 성령의 다양한 다양한 봉사의 풍성함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함께가는교회 성도님들도 자신과 많이 다른 배경과 경험을 가진 성도님들을 뵙게 될 때에 성령 안에서 연합하여 주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하여 효과적인 열매를 맺도록 함께 부름받았음을 깨닫고 서로를 더욱 귀중히 여기고 서로 힘써 돕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안디옥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은 전적으로 성령께 순종하였습니다.
그들은 금식과 기도 중에 성령으로부터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는 명령을 받고 파송하게 됩니다. 2절에 보면, 그들이 주를 섬겨 금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회 전체가 기도했는지, 아니면 다섯 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따로 기도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그들은 금식하면서 기도하였는데, 그 목적은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도와 금식 자체가 주님을 섬기는 귀한 봉사의 일환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하여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기 위하여 금식하며 기도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우리도 주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하여 시간을 드려 기도하며 마음에 주시는 바 소원이 있을진대 금식하시기도 바랍니다. 그들은 그렇게 아마 며칠 작정하고 금식하고 기도하는 중이었는데, 어느 날 그들에게 성령께서 이렇게 일러주시는 말씀이 임했습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아마도 그 다섯 명의 지도자들 중 선지자 중 한 사람에게 성령께서 말씀을 베푸셨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입으로 발설하여 이르셨는지, 아니면 속으로 말씀하시는 형태로 이루어졌는지, 아니면 회중 전체의 금식 기도 중에 선지자에게 성령이 임하여 일어나서 공개적으로 말씀하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성령께서 친히 이 말씀을 그 금식과 기도 중에 있는 그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문에 보면,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라고 한 말씀에서 ‘내가 이미 불렀던 일’이라는 말의 동사 시제는 완료형입니다. 즉 ‘내가 이미 불러서 시키도록 정한 일’ ‘내가 이미 하도록 부른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하기 전에 이미 성령께서는 그 두 사람에게 특히 사도 바울에게 이미 해야 할 일을 정하셨고 그들을 이번에 교회 앞에서 공식적으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성령께서는 그 이방 선교의 일을 미리 맡겨주셨을까요? 사도행전 2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고 삼년 후에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기도할 때 이미 말씀해주셨노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가 성전에서 기도하는 중인데 황홀한 중에 보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사도행전 22:21)
고 하였습니다. 당시 사도 바울은 다른 사도들에게 인정도 받고 교제하기 시작했으니 본격적으로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려고 열심을 내는 중이었는데, 주님은 사도에게 나타나 그들이 바울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면서 나중에 멀리 이방인들에게 보낼 것이니 어서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순종하여 고향 다소로 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에 안디옥교회에서 성령께서 일러주신 말씀은 이미 몇 년 전에 사도 바울에게 말씀하신 사역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안디옥 교회에서 교회의 지도자들과 온 성도들이 금식하며 기도할 때에 성령께서 말씀하신 것은 교회 전체로 하여금 성령의 작정하신 이 일에 함께 기도하며 함께 동참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이 말씀을 듣고 다시 금식하고 기도하기 시작했고 순종하여 그 두 사람을 파송합니다. 3절에 이르기를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고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당시 안디옥 교회는 매우 부흥하는 교회로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교회 내에서도 할 일이 많이 있었고 가르치는 일도 한창 필요한 시기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 너머 수많은 이방인들이 아직 한 모금의 복음의 생수를 맛보지 못하였고 여전히 영적인 흑암 속에 헤매고 있는 상황이기에 성령께서 그 교회의 가장 훌륭한 두 분을 내어달라고 청하였을 때 담임 목회자 격인 바나바와 가장 훌륭한 성경 교사인 바울을 성령의 시키시는 일에 기꺼이 내어주었으니 참으로 그들은 순종하는 교회, 순종하는 성도들임을 온전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안디옥교회와 그 성도들이 보여준 성령님에 대한 전적인 순종의 자세를 보인 것을 기억합시다. 그래서 앞으로 교회를 지도함이나 성도 개인을 향하여 성령께서 주권적인 뜻을 분명히 보여주실 때에, 모든 인간적인 계산을 내려놓고 오직 성령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합시다. 그것이 우리의 영혼과 삶에 가장 복되고 잘되는 길입니다. 할렐루야.
셋째로, 주님의 이름으로 영적 싸워 승리하는 교회와 주의 종들이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구브로 섬에서 전도하여 총독 서기오 바울을 구원의 길로 이끄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4절 이하를 보면 그 두 사람이 성령의 파송을 받아서 마가 요한을 수행원을 삼아 안디옥 교회를 출발하여 서쪽에 있는 실루기아 항구로 내려가 배를 탔습니다. 배를 타고 구브로 섬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는데, 구브로 곧 키프로스 섬은 오늘날 지중해의 큰 섬 사르디니아, 크레타 다음으로 가장 큰 섬입니다. 바나바의 고향이기도 한 구브로 섬의 동쪽 항구인 살라미에 도착한 바나바와 사울은 섬 가운데를 통과하여 서쪽으로 가면서 유대인 회당마다 들러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섬의 가장 번성한 서쪽 항구 도시 바보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구브로 섬의 중심 도시였던 이 파보스 항구에는 구브로 섬의 로마 총독 관저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총독은 서기오 바울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에 서기오 바울 총독을 두고서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를 사도행전 저자 누가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매우 똑똑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측근에 자기를 돕는 자로 바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마술사를 두고서 정치적 조언을 듣는 상태였습니다.
이렇듯 세상적으로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일지라도 주님을 모르면 이렇듯 점을 치고 마술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리 저리 끌려다니면서 지내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보면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돈을 많이 싸 가지고 무당에게 찾아가 빌고 토정 비결이나 운세를 열심히 살펴보고 우상 앞에 수없이 절하기를 반복하는 정성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 총독은 무엇인가 영적인 갈급함이 있었기에 마침 그 섬에 전도하러 찾아온 바나바와 사울을 가까이 불러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했으니 참으로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곁에 있던 바예수라는 마술사는 바나바와 사울이 총독 곁에 와서 진리와 구원의 말씀을 전하자 견디지를 못하고 계속 방해하였습니다. 이는 진리의 말씀을 들을 때 거짓 영이 견딜 수 없는 까닭이요 만약 총독이 예수님을 영접하면 자기가 더 이상 총독에 대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방해하는 마술사를 향하여 선교사 사울은 성령이 충만해져서 그를 똑바로 보고서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굳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이전에 사도 바울 자신도 불신앙 속에 있으면서 복음을 대적하고 교회를 핍박하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에 삼일 동안이나 눈이 멀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의 찬란한 광채 앞에서 그의 육신의 눈이 멀어버려 쓰러졌던 것처럼, 이 바예수 마술사에게도 사도 바울은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그 육신의 눈이 어두워지는 경험을 하게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자 그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자기를 인도할 사람을 두루 찾아 비틀거리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와 같이 즉각적으로 성령의 큰 권능이 나타나니까 총독 서기오 바울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이 표적이 따르는 주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믿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로써 바나바와 사울의 첫 번째 전도 여행에서 외적인 표적이 처음으로 강력하게 나타났고 전도의 첫 열매가 맺히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분명한 것은 악한 영들도 영적인 힘이 있어 나름대로 표적과 기적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성령과 복음 앞에서 결국은 그 한계가 드러나게 되고 물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도 점치는 무당 뒤에서, 혹은 도를 닦은 도사의 심령 속에 악령들이 활동하며 나름대로 그 존재감을 발휘한다 해도, 그것들은 감히 주님의 권능에 도전할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사 모든 천사들의 머리가 되시고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자가 되었으므로 우리 주님의 이름 앞에 그 어떤 영도 감히 맞설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주님 승천 후에 이천년 역사 동안에 수많은 선교사님들이 주님의 존귀하신 이름을 힘입고 담대하게 악한 무당들이 점령하고 있던 민족과 나라와 섬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할 때마다 그 모든 악령들과 그 수하의 모든 무당이나 주술사들이 복음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악령들은 사람들을 속이기도 하고 두려움을 주고 주의 진리에 대하여 늘 대적하며 저항하지만, 그것들의 운명은 결국 악한 마귀와 함께 마지막 때에 저 영원한 심판의 장소인 불못에 던져지는 저주받은 운명의 영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주님의 이름을 힘입어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고 늘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며, 영적인 대적자 악령들의 존재에 대하여 겁먹지 말고 주님의 이름으로 힘있게 대적하여 계속하여 물리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넷째로, 이들은 자기를 작은 자로 여기는 겸손한 분들이었다는 점입니다.
9절에 보면, 처음으로 사울을 바울이라는 이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그 동안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복음 전도자이자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을 가리킬 때에 사울이라고 불렀으나 여기서부터는 사울이라는 이름을 한번도 쓰지 않고 오직 바울이라는 이름만 사용합니다. 그렇게 이름을 바꿔 부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공교롭게도 이방인 선교 여행의 첫 열매로 볼 수 있는 구브로 총독의 이름이 서기오 바울이기에 바울이라는 동일한 이름을 사용한 것과 관련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생각해보면 당시 유대인들은 두 가지 이름 이상을 사용하곤 했습니다. 히브리식 이름과 헬라식 이름을 따로 갖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마가 요한은 로마식 헬라식 이름이요 요한은 히브리식 이름입니다. 베드로는 시몬이라는 히브리식 이름이 있고 페트로스 곧 반석이라는 헬라식 이름이 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에게는 사울이라는 히브리 이름이 있는 것이요 헬라식 이름으로는 바울이라는 이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 이제 그 헬라식 이름 바울을 처음으로 쓴 까닭은 사도 바울이 그 때부터는 이 바울이라는 이름만을 사용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 ‘바울’ 곧 헬라어 ‘파울로스’의 이름은 ‘작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은 자기의 헬라어 이름인 ‘파울로스’의 이름에 담긴 의미인 ‘작은 자’라는 뜻을 기억하면서 살기로 작정한 듯합니다. 항상 주님 앞에서 작은 자임을 기억하고 자기가 전도하는 이방 지역에서 자기는 작은 자로 살겠노라고 각오하는 마음으로 이름을 그렇게 바울이라고 작정해서 쓰기로 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실제로 바울은 키가 작은 자였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또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8 말씀에서 자기를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자’라고 소개한 것처럼 팔삭동이, 칠삭둥이처럼 몸이 많이 왜소하고 약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와 같다는 표현은 자기의 부족함을 겸손하게 표현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즉 영적으로 겸손함이 자기를 작은 자라는 뜻을 가진 바울로 부르게 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 후에 주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가장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자기에 대하여 말할 때마다 자기를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고백했으며(고전 15:9),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고백했고(에베소서 3:8), 심지어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디모데전서 1:15). 그가 이렇게 자기를 작은 자라고 고백하는 겸손한 자기 인식은 자기의 이름에 담긴 뜻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렇듯 한평생 자기를 작은 자로 인식했던 바울은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가장 큰 일을 했지 않습니까? 주님의 나라를 세우고 주님의 이름을 지극히 높이는 일에 온전히 헌신하며 살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야말로 가장 위대한 자, 가장 큰 자의 삶을 살았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지상 사역을 하실 때에 자기의 제자들과 자기를 믿는 신자들을 부를 때에 종종 ‘작은 자들아’라고 부르곤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33 말씀 한 절만 보면,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과 자기를 믿는 자들에 대한 주님의 이 애칭 속에는 결코 작지 않은 영적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모신 자들은 모두 자기를 작은 자로 여기는 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진정 자기를 작은 자로 알고 주님과 교회를 섬기는 자들이 주님과 교회와 복음을 위하여 크고 놀라운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평생에 자신을 작은 자로 여기고 주님을 지극히 존귀하게 높이고 모든 사람들을 자기보다 더 큰 자로 여기고 겸손하게 섬기는 자로 살아갑시다. 그리하여 주님 앞에 갔을 때 주님께서 예비하신 영광의 면류관들을 다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처럼 안디옥 교회와 주의 종들은 이처럼 다양성을 인정하되 주 안에서 하나 되었습니다. 성령의 주권성을 인식하고 항상 순종하였스비다. 성령 충만하여 영적 싸움을 싸워 마귀의 진을 깨뜨려가며 영혼들을 건져내었습니다. 자신을 작은 자로 여기고 늘 섬기는 교회와 성도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귀하게 이방 선교의 중심 교회가 되고 주의 종들이 되어 쓰임받았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참으로 안디옥 교회에서 이방 선교를 시작한 이 장면은 우리에게 다시 한번 주님의 원대한 세계 복음화의 비전을 일깨워줍니다. 교회 밖의 어두운 세상 속에서 아직도 잠깐 있다 사라질 헛된 영광과 소유와 쾌락과 명예를 쫓아 달려가고 있는 길을 잃은 수많은 영혼들을 품고 찾으시는 주님의 애타는 마음을 교회와 우리 각 사람이 함께 가져야 할 것을 일깨워줍니다. 성령께서는 지금도 이 신성하고 가장 복스러운 일을 위하여 그의 일꾼들을 찾으시고 지명하시고 부르시고 성별하시어 파송하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처럼 저 멀리 가야 하는 선교사도 있고, 뒤에서 기도하며 물질도 돕는 후원하는 교회와 성도들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 생명의 복음에 빚진 자들입니다. 이천년 전 주후 45년 경에 저 멀리 안디옥 교회에서 성령의 말씀에 순종했던 안디옥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님들의 헌신으로 이천년 후 우리가 지금 구원을 받았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의 빚을 우리도 조금이라도 갚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충만하게 하사 주님의 구원의 그 고귀한 십자가 구원과 부활의 영광의 이 복음을 가까운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증거하고 이 고귀한 일 때문에 핍박을 받는 영광을 얻게 하시기를 구합니다. 선교사님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계속하십시오. 다시 한번 성령께서 맡겨주신 이 근본적인 복음 전도의 사명에 남은 생애를 다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