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의 힘》 장석주
오늘 날 시인이란 헤아릴 수 없는 먼 과거의 기억들을 갖고 돌아오는 자들, 인류가 잃어버린 그 무엇, 즉 물의 신성함과 태초의 낙원을 꿈꾸는 자들일 테다. 시인이란 기억 속에서 울리는 시계, 도끼로 처형된 왕, 덴마크에서 들려오는 나이팅게일 새의 목소리, 거울에 비친 자살자의 얼굴에 지나지 않는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시, 「원인(原因)」의 시구를 차용)
“(내 자식이 )좋은 시인이 되려 한다면 좋은 시집들을 구해 죽을 만큼만 읽어라, 라고 조언할 테다. 김소월, 백석, 이상, 김종삼, 박용래도 좋다. 부족 언어의 족장이나 모국어의 달인으로 불리는 서정주나 섬약한 환상가인 김춘수도 좋다. 근대성을 뚫으며 시대의 표상들을 시적 그물로 포획하는 김수영도 좋고 퇴폐와 허무의 추상성을 뚫고 나와 ‘만인보’라는 민족민중의 세계로 나아간 고은도 좋다 정현종, 황동규, 오규원같이 수사학적 기교에서 더 높은 성취를 일군 문체주의자들의 시도 좋다. ‘악마적 부성 신화’를 깨며 탈근대 시인으로 길을 뚫은 이성복도 좋고, 해체를 양식화한 황지우도 좋다. 여성 시인으로 독보적인 길을 가는 김혜순이나 황인숙은 어떤가? 송재학이나 박정대와 같이 감출 수 없이 뾰족하게 나타나는 검은 개성들은 어떤가? 개성의 개별화라는 맥락에서 송찬호, 유홍준, 김경주, 심보선, 이장욱, 김행숙, 이근화는 어떤가? 변화무쌍한 세계의 날씨들과 싸우는 황인찬이나 송승헌 시인도 우리 시의 신성(新星)들이다.
시인이 되려면 저보다 앞선 시인들의 시를 과식하고 폭식을 일삼더라도 너끈히 소화해낼 수 있는 튼튼한 위장을 가져야 한다. 시를 조금 읽고 취한다면, 애초 시인이 되겠다는 것은 꿈도 꾸지 말라! 시는 눈먼 부엉이의 노래, 바람과 파도의 외침, 늑대들의 울부짖음, 땅이 내쉬는 깊은 한숨이다. 시인은 이 모든 소리를 듣고 시로 빚어낸다. 시는 단지 의미의 수사학적인 응고물이 아니다. 시는 말의 춤, 사유의 무늬, 생명의 약동이다. 시는 수천 밤의 고독과 술병을 집약하고, 세계를 향해 뻗치는 감각의 촉수들은 천지만물의 생리와 섭리를 더듬는다. 시들이 은유로 가득 찬 보석상자가 아니라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시인에게는 시가 지락(至樂)의 방편이며, 각의(刻意)의 수단이다. “시는 전쟁이다!”라는 제목으로 산문을 쓴 적이 있다. 전쟁의 각오가 서지 않는다면 그 문턱조차 들어설 생각을 말라. 철학 공부를 하라. 철학은 왜 시를 써야 하는가, 하는 근본을 담은 물음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게 한다. 철학 기반이 없으면 시인으로 멀리 갈 수 없다. 횔들린이나 휘트먼이 그렇듯이 가장 좋은 시인들은 자기 분열과 싸우고, 제 안에 숨은 샤먼과 의사를 숨긴 심연의 철학자들이다. 좋은 시인들은 시대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철학자들이다. 거꾸로 훌륭한 철학자들은 영감(靈感)의 노를 저어 심연에로 가지 않고 의미와 분석의 길로 들어선 시인들이다. (pp. 14~15)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서 시가 품은 애초의 빛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시는 불행으로 빚은 빛이고 진리가 언어로 화육(化育)하는 기적의 물건이다. 시는 감각의 착란 속에서 떠오른 언어거나 세계의 이미지를 조형하는 것. 이름 없이 가뭇없이 사라지는 것들에게 이름을 붙여 불러 주는 행위, 그도 아니면 거의 모든 존재의 역사를 꿰뚫어 보고 존재 현상을 살펴 헤아리는 새로운 '관점의 창'이 될 수도 있을 테다. 시는 언어 놀음이고 항상 놀음 그 이상이다. 시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말함이고, 이름 붙일 수 없는 불행에 이름을 부여하고 그걸 호명한다. 시는 있음과 없음에 사이에서 울려나오는 메아리고, 뇌의 전두엽에 내리꽂히는 우뢰며, 모든 물질에 작용하는 메타 과학이고, 형이하학의 형이상학이다. 시의 본질은 우연성이고, 이것은 무상성에서 확고한 지지를 이끌어 낸다. 그런 맥락에서 시는 만듦이고 낳음이며, 위함이고 이룸이다. 인간 내부의 구멍이고 그 구멍 속에 사는 신이다. 시는 항상 외부 세계, 멀리 있는 다른 우주의 신과 소통한다. 그래서 신은 때때로 낯선 신의 알아듣기 힘든 방언이기도 하다.(pp. 17~18)
그래서 폭식, 과식을 위해 시인들의 시집 12권을 주문하였다. 집에 읽지 않은 시집 120여 권은 남겨둔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