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이의 세상(1)
(전형진 시인 자서전)
1. 일제 식민지
1938년 9월 12일 경상북도 경산군 압량면 갑제동 648번지에서 태어난 전형진(全亨瑨)은 옥산(玉山) 전(全) 씨 부사공파 24세 손(孫이)다. 증조부(曾祖父) 이우(利雨)께서 이곳에 이주하시어 지금 대풍지(大豊池)라고도 하고 주치못이라고 하는 저수지 아래 진등산(긴 등이라는 뜻) 기슭에 집을 지어 5남1여를 나으셨다. 그 중 맏이가 내 조부 경식(慶植) 어른이시다. 대풍지를 조성하면서 못 뚝 아래 있던 집을 헐어 밭을 일구고 뚝 위로 옮겨 집을 지었다. 이곳에서 조부 슬하에 3남2여가 나셨다. 그 중 맏이가 내 부친 병욱(炳郁) 어른이시다. 못을 확장하게 되고, 수위가 높아지자 집을 더 높은 곳으로 옮겨 짖게 되었다. 이곳에서 형 동진(東瑨)과 나 형진(亨瑨)이 태어났다. 7대 종손인 형은 나보다 2년 먼저 났다. 나를 돌보던 증조모가 노쇠하여지면서 큰고모 손순(孫順)이 나를 업어주며 돌보았다. 나보다 8년 위인 고모는 나 때문에 학교를 3년이나 늦게 입학했다. 아버지가 경기도 안성 군청 공무원으로 취직하면서 식구들이 분가하여 이사하고 어린 나만 할아버지 댁에 두었었다. 내가 3살 때 증조모께서 나를 데리고 안성으로 갔다.
2. 어머니 29세로 별세
안성 셋방에서 어머니 김복조(金福祚)께서 여동생 경자(慶子)를 나았다. 명륜동(향교골) 집을 사서 이사했다. 대지가 넓어 집채 앞과 뒤에 밭이 있었고 복숭아, 감, 살구, 대추 등 과일 나무가 있었다. 사발감 나무는 고목이어서 벼락을 맞아 두 조각으로 갈라져 있었다. 대접감 나무는 싱싱하고 젊어보였다. 1945년 나는 8살 때 학교에 입학하고 며칠 후에 이 집에서 어머니가 별세했다. 동생을 낳고 늘 어머니는 냉병이라는 병을 앓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 시신을 화장하여 뿌리고 근처 절에 혼을 달래게 하고 100일 기도를 의탁했다.
3. 새어머니
할머니가 잠시 살림을 도우시다가 곧 양승숙(梁承淑) 새어머니가 들어오셨다. 나는 학교에 적응을 잘 하지 못했다. 일본 강점기에는 귀신 이야기가 유행했었다. 나는 학교에서 변소 가는 것이 무서웠다. 선배들이 학교 변소에는 도깨비가 나온다고 겁을 주었다. 혼자 갇혀있으면 도깨비가 “흰 보자기 줄까? 붉은 보자기 줄까?” 묻을 때 붉은 것이라 하면 붉은 보자기로 덮어씌우고, 흰 것이라 하면 흰 보자기로 씌워 잡아간다는 것이었다. 때로는 나는 대변을 그냥 싸서 집에 오면 새어머니는 마을 가운데 흐르는 개울에서 나를 씻겨주었다. 밤중에 잠자리에서 나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보고 싶어 베개가 젖도록 흐느껴 울었다.
우리나라가 그해 8월 일제로부터 해방되었다. 2학년 올라가면서 형과 나는 아버지 신혼생활 계기로 안성초등학교에서 압량초등학교로 전학하였다. 화랑로가 우리 집을 지나가는데 이 길을 넓혀서 신작로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이렇게 넓은 길을 치도(治道)라고 했다. 이 길로 나는 6킬로미터나 되는 학교 길을 매일 다녔다. 신발은 게다 달리기를 하면 게다 끈이 끊어져서 맨발로 먼 길을 걸어야 했다. 비포장도로에는 자갈이 깔려 있어서 발에 부딪히면 피가 나기 일쑤였다.
그해 여름에 장질부사가 이 지역을 휩쓸었다. 어른들은 멀쩡했으나 젊은 식구들은 거의 다 병을 앓았다. 나는 거의 죽음까지 갔다가 겨우 살아났다. 3학년 올라가면서 다시 나는 안성초등학교로 전학하였다. 나는 새어머니가 낳은 여동생 선희를 업어주면서 돌보았다.
4. 6.25 한국전쟁
6학년 때 피난 가면서도 동생을 업고 안성천 물에 떠내려가다가 갈대숲에 걸려서 겨우 살아났다. 차령산맥을 넘었다. 저물어 산골 집 주인에게 하룻밤 재워달라고 했더니 물건 훔쳐갈까 보아 재워줄 수 없다고 했다. 착한 집에 들어가 자기는 했지만 시골 동네는 아직 전쟁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 난리가 나서 안성 읍내에 대포소리가 요란하고 전투기가 날아다닌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집 주인은 아들이 국방경비대에 있다며 걱정했다.
산길을 사흘 걸어서 어렵사리 조치원역에 도착했다. 바닥만 있는 화물열차에 피란민들을 태워주었다. 멀리 걸어와서 다리가 아팠다. 비를 맞아도 바닥에 앉아 가는 것이 어린 마음에 정말 좋았다. 밤에 대전역에 내렸다. 공무원들이 피난민들을 여관에 배치해주었다. 다음날 일반열차를 타고 경산역에 내려 할아버지 사시는 고향으로 갔다.
다시 압량초등학교로 전학해서 책도 없이 학교를 다녔다. 학교는 미군이 주둔해버려서 강변 자갈밭에서 공부하고 겨울에는 동사무소에서 공부했다. 체육시간에는 군사훈련을 하면서 군가를 불렀다.
1951년 7월에 66점을 받고 졸업했다. 인가가 나지 않은 경산중학교에 입학했다. 정식학교로 인가를 받으면서 전교생이 편입시험을 치렀다. 면접관이 장래 희망을 물었다. 미래에 대하여 생각해본 적이 없는 터이라, 즉흥적으로 정치인이 되겠다고 나는 대답했다. 1953년 아이젠하워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어 한국을 방문했다. 이승만 대통령 명령에 따라 학생들이 휴전반대 데모를 했다.
중학교 3학년 겨울 방학에 사과밭을 크게 경영하는 김승균 친구 집에 가서 고등학교 입학시험 준비 공부를 하였다. 친구는 집이 넓고 독방을 사용하기 때문에 같이 공부하자고 해서 나로서는 행운이었다. 참고서가 없는 나는 친구의 참고서를 빌려서 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겨울 추위에 산길을 걸어가야 하는 불편을 덜기 위해서 얼마 후에 조심스럽게 부탁을 했다. 모든 과목을 한데 담은 책이라 너무 두꺼우니까 과목별로 쪼개서 책을 묶으면 자네가 보지 않는 것을 내가 가져가서 보고 돌려주면 고맙겠다. 친구가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나는 며칠 만에 한 번씩 들러서 책을 바꾸어 갔다. 덕분에 나는 1954년 대구공업고등학교 기계과에 합격했다. 처음으로 나도 운이 좋 놈이라는 것을 경험했다. 우리 두 사람은 학교는 다르지만 대구에서 자취를 같이 하기도 하고 기차통학을 하기도 했다. 처음 자취할 때 밥을 태우기도 하고 밥이 설어서 생쌀을 먹기도 했다. 반찬이 떨어져서 소금 가게 주인에게 소금을 얻어 반찬 대신 먹기도 했다.
5. 예수를 만나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 방학 때 새각단에 사시는 넷째 작은 할아버지 댁에 놀러갔다가 보따리 장사 김둘레 여사가 전도하여 할아버지 부부와 내가 함께 부적교회에 다녔다. 처음부터 새벽기도를 다녔다. 눈이 많이 쌓여서 발목까지 푹푹 빠지면서 왕복 이십 리를 걸었다. 종이쪽지에 적은 가사를 보고 찬송가를 부르며 걸었다. 성경도 없고 찬송가도 없어서 맨몸으로 교회를 다녔다. 새벽에 아무도 없는 허허 벌판에 목청껏 부르는 찬송은 은혜가 충만했고 기쁨이 넘쳤다.
두식 할아버지 황순이 할머니 부부는 자식이 없어서 나를 무척 사랑해주었고 용돈도 가끔 주었다. 이 마을에는 친구들이 많이 살기 때문에 방학 때마다 가서 장기를 두면서 어울리고 눈이 많이 오면 할아버지 눈 치우실 때 나도 거들어주기도 하고, 신문도 없고 라디오도 없는 시골에 사시는 분들이라서 나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려드리곤 했다. 일하시는 방법을 내 나름으로 생각하여 개선하도록 여쭙기도 했다. 여러모로 나는 어른들에게 살갑게 굴었다. 두 분이 갑제교회를 설립하고 재산 절반을 교회에 기증했다. 황순이 권사님은 신유의 은사를 받아 불치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이 건넌방에 거처하면서 매일 세 번씩 기도해주고 낫게 해주었다. 명절에는 은혜 입은 사람들이 인사하러 선물을 가지고 왔다.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범어동에서 다른 학교 친구들과 자취를 하며 대학 진학을 목표로 나는 열심히 공부했다. 1956년 가을 등굣길에 지나다니다가 우리 고장에서 사과밭을 경영하다가 옆 동네 신천동으로 이사 온 정 씨 댁을 알게 되었고, 초등학교 6학년 생 이집 외동아들 정용보에게 숙제를 도와주는 조건으로 방을 하나 내어주었다. 학교가 가까운 동네에서 독방을 차지하고 공부하니까 시간 손실이 적어 무척 효과적이었다. (주: 나중에 이 학생은 나를 우상으로 여기면서 열심히 공부해서 대구공고 기계과를 졸업하고 경북대학교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포항제철에 입사하여 중요한 기술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본교 건물을 미군이 차지하고 있어서 우리는 가교사에서 꼬박 3년을 공부하고 1957년 봄에 대구공고 기계과를 졸업했다. 나는 당시로서는 한국에서는 첨단 공업인 자동차 부속을 만드는 대본제작소에 입사했다. 나는 성적이 좋았고 입시 준비를 열심히 했지만 아버지가 극구 반대하여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승균 친구는 서울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학원에 다니며 재수를 하고 있었기에 나와 한방에 하숙을 했다. 어느 주말에 장기를 두다가 언쟁이 벌어졌다. 아래 시는 그 사건을 소재로 노년에 시로 지은 것이다.
강한 자여! 그대 이름은 약자니라
갓 스물에 힘센 친구 P와
장군이야 멍군이야 하며 놀다가
내 귀상에게 P의 차가 잡혀버렸다
물러 달라 안 된다 실랑이 벌이다가
느닷없이
P가 장기판을 번쩍 들더니 내 얼굴에 엎어버렸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중에
성령님이 내 입을 열고 내 혀를 운전하셨다
“친구야! 내가 잘못했다”
P는 고개를 꺾고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꿀었다
그때부터 승균은 나를 무척 존중했다. 비오는 날엔 내가 퇴근 할 때 우산을 가지고 와서 비를 맞지 않게 도와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