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反戰) 과학소설의 대표작
군사과학소설 (6)
2014.05.26. 14:11
고장원 SF 칼럼니스트
반전주의 패러다임에 입각해 과학소설을 쓰는 이들은 한둘이 아닐 터이다. 적어도 휴머니즘을 중시하는 작가라면 소소한 차이를 떠나 적어도 국가 이익을 위해 무리하게 벌이는 전쟁과 외세로부터의 침공에 맞서 적극 나서지 않으면 조국이 백척간두에 놓일 상황을 판별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이러한 작가들 가운데 특히 두 작가 오슨 스캇 카드(Orson Scott Card)와 존 스칼지(John Scalzi)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둘 다 대중적으로 폭넓은 인기를 얻고 있는 작가인 동시에 전쟁을 소재로 자신의 견해를 진솔하게 전달한 대표작들을 발표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두 작가 사이에는 차이도 존재한다. 독실한 몰론교도답게 오스 스캇 카드가 외계인과의 전쟁의 원인을 우리의 이기적이고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과 욕망에서 찾은 반면에, 존 스칼지는 전쟁에 악당이나 선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에 전쟁으로 몰고 갈 수밖에 없는 부조리한 상황에서 양자가 파국을 면할 수 있는 타협점을 찾으려 한다.
미국 작가 오슨 스캇 카드의 [엔더의 게임]은 조 홀드먼의 [영원한 전쟁]과 마찬가지로 반전과학소설에 속하지만 성인 병사의 시점에서 전쟁의 부조리함을 고발하는 대신 어린 소년병사들을 등장시켜 그러한 부조리를 훨씬 더 극대화 하는 내러티브로 짜여져 있다. 위 표지는 초판 소설본으로, SF 회화 분야에서 이름난 화가인 존 해리스(John Harris)가 일러스트를 그렸다.
두 작가의 이러한 시각 차이 탓에 해결책으로 내놓는 대안에서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카드가 호모 사피엔스인 주인공을 내세워 말살된 외계종족의 씨를 살려냄으로서 인류의 죄악을 용서받고자 한다면, 스칼지는 1980년대에 유행했던 할리웃의 반전영화들과는 달리 더 이상 트마우마나 강박관념에 시달리지 않으며 외계인과 인류 양쪽 모두에게 실용적으로 도움이 되는 해결책을 모색한다. 이러한 간극은 두 작가가 이와 관련한 대표작을 발표한 시기가 근 이십여 년 차이 난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21세기의 작가라 할 스칼지는 더 이상 선배 세대인 홀드먼과 카드처럼 악몽과 속죄(또는 죄책감) 사이에서 번민하지 않아도 될 만큼 베트남 전쟁의 상처가 아문 세대에 속한다. (강대국이 약소국에 진 전쟁이기 때문에) 불쾌하고 (정복군으로서 베트남 사람들에게 저지른 온갖 패악 때문에) 부끄러운 제국주의 전쟁의 기억은 역사의 과거 속으로 넘어가고 미국이 꼭 세계경찰국가 노릇을 해야 한다는 집착에서 벗어난 시대의 패기만만한 작가에게는 전쟁을 비판적으로 보되 그에 대한 해석은 실용적인 선을 넘어설 필요가 없게 되었는지 모른다.
반전사상을 명확히 드러낸 오스 스캇 카드의 대표작은 ‘엔더 위긴 시리즈(Ender Wiggin, 1977~2005년)’다. 이것은 인류와 외계인 간의 우주전쟁이라는 상투적인 클리세에다 인본주의적인 입장에서 원죄와 용서 그리고 구원이라는 성서의 핵심 메시지를 녹여 넣은 미래판 메시아의 이야기다. 시리즈의 첫 권 ‘엔더의 게임’에서 어린 소년이지만 전쟁 전략게임에 탁월한 능력을 보유한 군사천재 엔더 위긴은 다른 아이들과 함께 호전적인 외계종족을 상대로 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짜릿한 승리를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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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양대 만화출판사 중 하나인 마블코믹스에서 펴낸 월간만화 [엔더의 게임]의 표지 중 하나.
2008년 경 발행되었으며 대본은 Christopher Yost와 Mike Carey, Jake Blac, Aaron Johnston 등이 맡고 그림은 Pasqual Ferry, Sebastian Fiumara, Timothy Green, Pasqual Ferry, Pop Mahn 등이 그렸다. (copyright: Marvel Comics)
그러나 기껏 시뮬레이션에 불과한 승리에 군복 입은 어른들의 입이 활짝 벌어진다. 엔더가 승리한 게임이 실제로는 인류와 버거(외계종족)의 명운을 건 아마게돈이었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엔더가 마지막 게임이 실전인줄 알았더라면 바짝 긴장한 나머지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할까봐 게임의 연장선인 것처럼 속였던 것이다.
그제야 엔더는 게임판에서 불꽃을 일으키며 산화해간 지구 쪽 함선들에 실제 승무원들이 타고 있었고 그들은 묵묵히 그가 시키는 대로 자리를 지키며 죽어갔음을 깨닫는다. 더구나 버거 종족은 우주 전역에서 거의 씨가 말라버릴 만큼 궤멸을 당했다는 사실은 아직 어린 엔더에게 실감할 수 없는 충격과 죄의식으로 다가온다.
“나는 수억이 넘는 버거들을 죽인 장본인이야. 인간만큼 아니 인간보다 훨씬 진화된 새영들을 몰살시켰는데 아무도 그 사실을 범죄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가 뭘까?”
(종전 후 그라프 대령을 피고인으로 기소되자) 다른 일들은 모두 법정에서 언급되었지만 정작 이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도 따지지 않았다. 먼저 지구를 공격하지도 않았으면서 무참히 죽어간 버거들에 대해, 그들을 몰살시킨 엔더의 행위에 대해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오슨 스캇 카드, ‘엔더의 게임’, 국내번역판, 1992년, 396쪽)
누가 그에게 그런 권능을 주었단 말인가! 우주에서 하나의 지적인 종을 말끔히 말살시킬 만큼… 설상가상으로 전쟁을 시작한 쪽은 버거들이 아니었다. 인류였다. 버거 여왕과 텔레파시로 대화를 나눈 엔더는 진상을 알게 된다.
“우리는 지구를 멸망시킬 생각이 없었어요…(중략)… 우리는 다만 당신들과 평화롭게 공존하기를 원했어요.” (같은 책, 409쪽)
두 종족의 첫 만남에서 상호 간에 오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지구 당국이 자신들이 은하계 사방으로 퍼져나가는데 버거들이 걸림돌이라 지레짐작하고 상대와 제대로 된 협의 한 번 시도해보지 않고 낯설고 흉측하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말살해야 할 적으로 규정했다는 점이다. 전쟁이 끝났지만 지구 당국의 여론조작과 기만극은 탄로 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지배 권력은 식민지 확장을 위한 본격적인 행보에 나선다.
정치적 협잡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일찌감치 어린 나이에 허무를 절감한 엔더는 대중의 바람과는 달리 전쟁영웅으로 지구에 귀환하는 대신 우주 곳곳으로 퍼져나갈 식민선단에 몸을 싣기로 한다. 엔더는 버거 여왕에게서 버거 종족의 유일한 생존자인 실크 공 모양의 고치를 넘겨받는다. 새로운 버거 여왕이 이 번데기에서 나와 종족을 다시 퍼뜨릴 수 있는 안전한 곳을 찾아주는 것이 그의 새로운 사명이 된다. 그럼으로써 엔더는 고의는 아니었으나 자신이 저지른 대학살의 과오를 일부나마 속죄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의 속편들은 엔더가 버거들의 새로운 둥지를 찾아주는 한편으로 별들의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여정을 따라간다. 이른바‘죽은 자들을 위한 대변인’이 된 엔더 위긴의 행보는 이제 예수나 메시아에 바짝 다가서 있다.
“내가 가기로 결정한 건 누나 때문이 아니야. 식민지 총사령관 자리를 보고 결정한 것도 아니고, 여기 있는 일이 무료해서도 아니야. 내가 가는 이유는 딱 한 가지야. 다른 누구들보다 버거들을 잘 알고 이해하기 때문이야. 나는 그들의 미래를 빼앗았어. 내 잘못을 보상하는 방법은 그들의 과거에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우는 거야.” (중략)
엔더는 손을 뻗어 실크 공을 집어 들었다. 무게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 작고 가벼운 버거 고치 속에는 버거들의 미래가 숨쉬고 있었다.
“당신이 깨어나기에 안전한 장소를 찾아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서) 전세계에 알리겠습니다. 당신이 나를 용서한 것처럼 언젠가 우리도 당신을 용서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같은 책, 402~4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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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개봉된 영화판 [엔더의 게임]의 클라이맥스 장면. 외계인 군대와 진짜 전쟁하는 줄 모르고 모의전투의 지도자로서 아이들을 데리고 열심히 진두지휘하는 엔더의 모습이다. 그러나 [엔더의 게임]은 속편이 나오기 쉽지 않아 보인다. (copyright: Chartoff Productions 외)
‘엔더의 게임’은 영화로도 만들어져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아쉽게도 속편 제작은 쉽지 않아 보인다. 무엇보다 2편부터는 화려한 스페이스오페라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엔더의 게임’은 ‘엔더 위긴 시리즈’라는 대하장편 서사드라마의 서막에 불과하지만 정작 할리웃이 보기에 흥행성을 담보할 수 것은 1편뿐인 까닭이다. 당장 2편인 ‘사자의 대변인’에서는 엔더가 전쟁과는 무관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상처입거나 죽은 이들을 위한 대변인으로 나선다. (이러한 변신은 영화의 말미에서도 암시되어 있다.)
더 이상 우주전쟁 따위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엔더가 찾아간 행성의 토착 외계인과 지구에서 온 정착민 간에는 서로 오해할 수밖에 없는 문화장벽이 크게 가로막고 있다. 그로 말미암아 선의에도 불구하고 비극이 속출하는 바람에, 결국 양자의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엔더가 나선다. 다른 한편으로 엔더는 1편에서 자신이 괴멸시킨 버거종족의 아기 여왕이 새로 정착한 외계행성에서 새끼들을 낳고 번식하도록 돕는다. 결과적으로 한 행성에 전혀 공통점이 없는 세 종족이 공존하는 사회가 열린다.
바로 이것이 바로 작가가 독자대중에게 전하려는 바였다. 인종과 성별 그리고 국적을 떠나 누구나 인간다운 대우를 받으며 공존하는 열린 사회… 따라서 박진감 넘치는 ‘엔더의 게임’은 이런 거창한(그리고 이상적인) 비전에 관심 없는 세속적인 독자들의 눈길을 일단 붙잡아두기 위한 눈요기꺼리에 불과하다.
그러니 할리웃이 보기에 2부인 ‘사자의 대변인’를 영화로 제작해서 전편의 성공을 넘어서는 흥행성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다음 회에는 존 스칼지의 반전과학소설을 살펴보기로 한다.)
고장원 SF 칼럼니스트
sfko@naver.com 2014.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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