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병이 증언하는 오색 전투 – 6·25 참전용사 홍현달 옹
2020년 9월 30일
노병이 증언하는
오색 전투
6·25 참전용사 홍현달 옹

홍현달 옹(89세·예비역 중사)은 ‘오색 전투’ 참전용사다. 「오색 여호와이레 수양관」 현관에 걸린 <유엔군의 북진(5.23~6.15)> 지도의 현장에 있었다. “1951년 5월 말 18연대 3대대 10중대 소속으로 한계령에서 전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89세의 나이에도 주요 사건의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전쟁 중에도 메모를 남긴 덕분이다. 그는 오색 전투에 앞서 ‘현리 전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련의 과정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직후부터 이뤄진 북진(北進)과 중공군의 개입, 흥남 철수, 1951년 1.4후퇴, 이후 재북진과 접전 과정을 순차적으로 보면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인터뷰는 이 시간의 흐름으로 재구성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낙동강 전선부터 일제히 밀고 올라갔잖아. 우리 18연대는 동부전선 산악지대를 타고 올라갔지. 우린 수도사단 예하였고, 옆으로는(동해안 쪽) 3사단이 있었어. 10월 1일(공식적으로) 38선을 넘었잖아? 10월 6일에는 트럭 타고 양구 시내를 기습하고, 다시 트럭으로 이동해서 또 공격하고. 10월 8일 금강산 내금강 거쳐서 10일 원산으로 진입했지. 시가전이 벌어졌는데 ‘명사십리’ 좌측으로 포를 뚫고 산 쪽으로 돌아 들어갔어. 10월 17일 함흥을 점령했는데, 주민들이 크게 환영해 주더라고.
우린 정말 빨랐어. 미군보다 먼저 장진호로 들어갔지. 장진호를 지나서 더 올라가니 눈이 내리더라고. 그 일대에서 우리 부대가 중공군을 하나 잡았는데, 그때 중공군이 개입한 걸 알아챘어. 동북쪽으로 빠져서 11월 30일 (함경북도) 청진까지 들어갔고 거기서도 시가전을 했지. 12월 1일 (두만강변 회령시와 청진 사이에 있는) 함경북도 부령을 바라보면서 공격하려는데 부대 배치도 하지 않은 채 후퇴 명령이 떨어지더라고. 그날 걸어서 성진항으로 나와서 전차상륙함(LST)을 탔지. 승선 때 적의 기습에 대비해야 하니까 1개 중대를 남기고 무거운 마음으로 배를 탔는데, 나중에 보니 유격대를 조직해서 중공군 포위망을 뚫고 살아나왔더라고.
당시 우리 배가 흥남에 들어가려 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흥남 앞바다에서 며칠을 바다에 떠 있다가 그대로 남하했어. 작전상 뭐가 안됐나 봐. 결국 성진항에서 바로 빠진 셈이지. 배에 있을 때 우리 18연대가 수도사단에서 3사단으로 편입됐다는 얘기를 들었어.(기록상 12월 15일)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부대를 보충하고 기차역으로 나갔어. 무장도 미군 것으로 완전히 새로 교체 받았지. 기차로 원주에 도착해서 (강원도 인제군) 신남에 12월 20일 투입됐어. 중공군의 대공세로 거기서 1.4 후퇴를 맞았는데, 평창까지 밀려났어. 그리고 5월까지 들락날락, 오르락내리락, 밀고 밀리는 전투가 이어졌어.
51년 5월 17일 (인제군 기린면) 현리가 무너지고 국군 3군단이 후퇴하는데, 바로 아래 오마치(현 오미재)에 매복해 있던 중공군과 맞닥뜨린 거야. 비행기로 실탄을 보급 받고 야포를 직사(直射)로 쏠 정도로 치열하게 붙었는데, 워낙 어쩔 수가 없었어.
오미재를 돌파할 부대로 18연대와 함께 선정된 9사단 30연대가 돌연 붕괴됐고, 군단 지휘체계가 무너지면서 피해가 더욱 극심해졌다. 대다수 병력은 뿔뿔이 흩어진 채 방태산 방향으로 향했다.
그래도 우리는, 특히 18연대는 인력 손실이 거의 없었어. 영리하게 오대산을 우회해 빠져나왔거든. (사단장 지시에 따라) 박격포, 야포, 차량은 전부 땅을 파서 묻었어. 전쟁사는 3사단 패전을 기록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아. 절대로.
그는 무패의 18연대, 백골부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포위망을 뚫고 나와 5월 22일 (강원도 정선군) 임계에서 미 공군이 갖다 준 포를 갖고, 27일 한계령에 도달했더니 중공군 군단 병력이 진치고 있더라고. 이번에는 우리가 중공군을 포위한 거지. 우리는 한계령 일대를 지키고 막아섰고, 미군 비행기가 날아와 대대적으로 폭격을 시작했지. 비가 오는 날이었는데….
오색 일대 주민들은 당시 이 폭격이 어마어마한 규모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전투가 바로 청년 박윤식이 중대장으로 참전했고, 국군이 대승을 거둔 ‘오색전투’다.
중공군을 무찌르고 양양으로 나갔더니 더 이상 적이 없더라고. 화진포로 가서 전망대에 29일 주(主) 저항선을 만들었어. 이후로 한동안 적이 대결해오지 못했어. 전초부대는 내금강, 고성(북한 지역)까지 나아갔어. 고성에서는 시가전도 했지. 그때 더 밀고 올라갔어야 해. (6월 23일 휴전회담이 공식 제안된) 이후로는 더 나아가지 못하게 하더라고.
홍현달 옹은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웅진리 태생으로, 38선 북쪽 출생이다. 광복 후 38선으로 남북이 갈리자 1946년 봄 월남해 38선 남쪽 춘천으로 이사했고, 1949년 7월 15일 원주의 6사단 8연대로 입대했다.
원주, 홍천을 지키던 8연대는 6·25전쟁 한 달 전 서울에 있던 19연대와 임무를 교대했고, 6월 24일에는 휴가를 받아 춘천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전쟁이 터진 6월 25일 아침 부대 복귀를 위해 춘천역으로 달려갔더니 서울행 열차가 운행 중지됐다. 가까운 부대(6사단 7연대)를 찾아갔는데 ‘소속부대로 가라’며 받아주지 않았다. 이에 가평까지는 기차로 이동하고 이후 무작정 서울을 향해 걸었는데, 서울 함락 소식을 듣고는 수원으로 방향을 틀었고, 걷기 시작한 지 5일 만에 수원에서 부대에 합류했다. 6월 30일 무기를 지급받고 수원 북문에 배치됐다.
남하하면서는 포위-전투-돌파-포위-전투-돌파가 끊임없이 반복됐다. 청주서는 탱크가 비행기 직사포를 받고도 터지지 않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진천 전투에도 참여했다. 7월 24일 경북 상주에서 부대가 재편성됐다. 18연대, 3연대, 8연대 등 3개 연대가 18연대 1개 연대로 통합 편성된 것이다. (6사단에서 수도사단으로 소속 변경) 8연대 잔존 병력은 18연대의 3대대가 됐다.
상주, 예천, 안동, 약산으로 후퇴하며 전투하다 27일 파편이 복숭아뼈를 관통하는 부상을 입었다. 포위를 뚫고 나가 29일 의성까지 후퇴해서야 부산으로 호송돼 제5육군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한 달 만에 낙동강 전선으로 다시 부대를 찾아온다. 이후 안강, 기계 등을 다시 점령하고 인천상륙작전 성공과 함께 북진을 시작했다.
전쟁 터지고 부대에 합류하기 위해 5일을 걷고, 부상 뒤 한 달 만에 전사자가 속출하는 낙동강 전선으로 복귀했는데, 왜 굳이 그러셨나요.
(처음에는 답변이 없다가 몇 차례 더 물으니) 전우들이 그곳에 있잖아. 부상당한 뒤 계속 후방에 남으라 했는데, 그래도 전우들이 있으니 다시 갔지.
시작부터 끝까지 내내 전투하다 휴전을 맞는 일도 굉장히 드문 일 같습니다.
1953년 7월 27일 강원도 화천의 최전방 고지에서 휴전을 맞았지. 18연대 10중대 동료 160여 명 중 전쟁이 끝날 무렵 10명도 남지 않았어. 고지전을 한 번 하고 나면 1개 중대 150~200명에서 20~30명만 남아. 살아남는 건 거의 분대장 이상이야. 우리 중대장이 “분대장 죽을 때가 제일 억울하다”고 했어. “분대장 기르려면 10개월 걸리는데, 소위는 3개월, 졸병은 무전만 치면 온다”는 거야.”
왜 분대장 이상만 살아남을까요?
고지전은 ‘납작 엎드려 돌격 앞으로’ 해야 살아남아. 뒤에 처져 어영부영하면 쉽게 타깃이 되고 말거든. 신병들은 교육을 받아도 그게 잘 안돼. 신병(新兵)들은 걸을 때도 ‘배고프다. 먹고 싶다’는 생각만 해. 고병(古兵)들은 걸으면서 사방을 주시하지. ‘저기에 매복이 있을 것 같은데 총격을 해오면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는 거야. 그러면 어김없이 매복들이 있어.
그는 전투를 통해, 자신의 손으로 ‘고향을 되찾은’ 군인이다.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양구는 38도선 이북 땅인지라, 해방되고 바로 공산 치하에 들어갔다. 월남해 춘천을 제2의 고향 삼아 살아가다가 전쟁을 맞았고, 1951년 6월 이후 휴전 때까지 본격적으로 전개된 고지전을 통해 자신의 고향을 되찾았다. 가칠봉 전투, 김일성·모택동·스탈린 고지 전투, 금성지구 전투 등을 거치며 충무무공훈장 등 2개의 무공훈장도 받았다. 그는 지금 자신이 태어난 그 집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그는 과거 국방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군인은 싸워 이기겠다는 투혼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신도 살고 조국도 살 수 있습니다. 제가 겪은 6·25전쟁이 그랬습니다.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반드시 싸워 이겨야 합니다. 국군이 존재하는 이유가 그것이고, 장병 여러분에게 제가 꼭 전하고 싶은 바람입니다.”
☆☆☆☆☆☆☆☆☆☆☆☆☆☆☆☆
백골전우회에서는 "백골부대오색지구전투승전비" 건립을위한 첫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전우여러분께서는 한마음이되어 오색지구전투와 관련된 자료수집에 총력을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백골!!
백골!
백골!!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