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제국 우주함대 부사령관 키르히아이스 상급대장은 기함 발바로사의 사령실에서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스크린 위에 보이는 은빛 구체를 한참동안 바라보던 그는 이윽고 고개를 돌렸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참모장 베르겐그륜을 부른 키르히아이스는 자기 휘하에 있는 두 장군, 아우구스트 잠웰 와렌 대장과 코넬리어스 루츠 대장을 호출하도록 지시했다. 그들이 도착하자 붉은 머리칼의 젊은이는 침착하게 명령을 내렸다.
“요새에 대한 강공은 포기합니다. 요새포의 사정거리 밖에 함대 주력을 주둔시키고 견제공격만 실시하세요. 소병력으로 요새 근처에 접근, 적의 주의를 흩트리는 것은 좋지만 그 숫자는 한번에 200척으로 제한합니다. 어차피 이젤론이 전술적으로 난공불락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 함대가 4만 척 아니라 40만 척이라도 정면공격으로는 함락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사령관….”
잠시 머뭇거리던 루츠가 입을 열었다.
“로엔그람 공작께서는 분명 이젤론을 공략하라고, 적어도 공략하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곳에서의 전투가 충분히 치열하지 않다면 동맹군이 공작 각하의 의도를 의심할지도 모릅니다.”
“상관없어요.”
키르히아이스는 냉정하게 딱 잘라 대답했다.
“이젤론 방면의 전황이 어찌 되건 공작각하께서는 페잔으로 진군하십니다. 그런데 굳이 우리가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있을까요? 어차피 함락되지도 않을 요새 때문에 애꿎은 병사들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시간만 끌고 있으면 얀 웬리는 요새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아십시오.”
“하지만 명령이…”
“사령관은 접니다.”
뭐라고 더 말하려는 듯, 루츠가 다시 입을 열었지만 키르히아이스는 루츠가 입을 열기도 전에 딱 잘라 말했다.
“수도에서 어떤 명령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현지 사령관에게는 이를 번복할 권한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귀관들의 상관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아시겠습니까? 그럼 각자 기함으로 돌아가서 명령을 기다리십시오.”
두 대장은 어안이 벙벙해서 기함을 나서면서 투덜거렸다.
“키르히아이스 상급대장은 사람이 변했어.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아무리 부상의 충격이라지만….”
와렌은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그들이 모시고 있는 키르히아이스의 모습은 과거 립슈타트 전쟁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웠던 그때와는 전혀 달랐던 것이다.
분명 그 명석한 판단력이나 과감한 결단, 침착한 대응 등은 변함없이 똑같았다. 하지만 지성이 아닌 인성은 너무도 바뀌어 있었다. 마치 양의 탈을 쓰고 있던 늑대가 그 껍질을 벗어던진 듯 변화하고 말았던 것이다. 봄날의 솜뭉치처럼 따스하고 부드럽던 청년이, 서릿발 같이 차갑고 날카로운 칼날로 변해있는 모습에 두 장군은 입을 다물지 못했었다. 그리고 라인하르트의 명령도 태연히 무시하는 오늘의 모습은 두 장군의 가슴에 무시할 수 없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두 장군은 약속이나 한 듯 한꺼번에 한숨을 쉬었다.
키르히아이스는 두 장군들을 내보내고 나자 팔짱을 끼고 브리지에 서서 이젤론 요새를 바라보았다. 잠시 긴장을 풀고 있으려니 무의식적으로 오른손이 왼편 뺨을 쓰다듬었다. 길게 한 줄로 난 흉터가 손가락 끝에 닿았다. 그날 라인하르트를 향한 암살자의 공격을 대신 맞았을 때 생긴 상처였다. 그 흉터를 만지고 있으려니 그 길고긴 병상에서의 생활이 떠올랐다.
정말 지독한 투병생활이었다. 안스바하가 쏜 레이저빔은 그의 경동맥과 척추 사이를 관통했었다. 그 광선이 조금만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빗나갔다면, 그는 경동맥이 끊겨 출혈과다로 즉사했거나 척추가 끊어져 전신불수의 불구자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몇 밀리미터의 차이 때문에 레이저는 폐와 혈관을 뚫었을 뿐 뼈와 경동맥은 건드리지 않았고, 그는 19시간에 걸친 수술을 받고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첫댓글 아 짧네~ 담편이 궁금
저도.궁금..^ ^;
오오..흥미진진..키르히아이스의 이런 모습도 색다르지만 좋네요..어떤 반전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다음편 올렸습니다. 어떠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