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로스트 메모리즈>의 장동건, 나카무라 토오루
한국과 일본의 대표선수 둘이 만났다. <2009 로스트 메모리즈>의 투
톱 액션을 책임지는 장동건과 나카무라 토오루는 이 영화에서 서로의
조력자이자 선의의 경쟁자다. 언어와 경험이 다른 두 배우는 한 영화에서 어떤 시너지를 만들어냈을까?
홍대앞 클럽에서 만난 장동건과 나카무라 토오루는 살짝 흥분해 있었다. 이날 나온 <2009 로스트 메모리즈>의 예고편을 보고 썩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다. "예고편 괜찮아요?" 넌지시 장동건에게 물어봤다.
"아직 안 보셨어요? 이제 포스터만 잘 나오면 될 것 같아요." 그답지
않게 은근히 자랑이다. 곁에 있던 나카무라도 한마디 거든다. "영화가
다 나온 건 아니지만 예감이 좋은데요." 동석한 홍보사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예고편을 본 두 사람이 한껏 "업"돼 있다고 했다. 그래서인가,
까다롭고 무뚝뚝하기로 소문난 장동건의 얼굴이 희색 만발이다.
요란한 클럽 장식이 낯설었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나카무라와 후미진 구석에 자리를 잡은 장동건은 수개월간 동고동락한 사람들 치고는 별로 친해 보이지 않았다. 형, 아우뻘 되는 연배에 살갑게 지낼 만도 하건만 두 사람의 쭈삣거림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표지를 위한 첫 촬영은 바에서 두 사람이 건배하는 모습. 개인 촬영을 하는 동안
장동건은 무리가 없었지만 나카무라의경우 일일이 컨셉을 설명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영화이 한장면처럼"이라는 사진 작가의 주문에 골똘히 생각에 잠긴 나카무라는 "어떤 영화?"라고 되묻는다. "로미오와
줄리엣." 일본에서는 멜로 드라마의 남자주인공으로 '한 멜로'했던 그가 로미오라고 못할쏘냐. 촬영을 마치고 인터뷰를 위해 옮긴 카페에서 두 사람은 나란히 한 자리에 앉았다.
서른, 잔치의 시작
장동건은 지난 7월 나카무라가 촬영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간 후 처음 만나는 자리라 좀 서먹하다고 했다. 그는 나카무라가 "의사 소통은
안 되지만 감정이 풍부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다. 나카무라는
한국을 떠날 때 사나이답지 않게 눈물까지 흘렸다. "그때 왜 울었어요"
드라이한 마스크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스탭들과 정이 들어서"라고
그는 말했다. 오늘은 바로 '마음 약해서 잡지 못했던' 한국 스탭들의
손을 부여잡고 일본으로 떠난 나카무라가 장동건과 재회하는 자리다.
장동건이 분한 <2009 로스트 메모리즈>의 사카모토 마사유키는 조선인 레지스탕스를 아버지로 둔 사연많은 일본 경찰. 일본 경찰이지만
조선인의 피가 흐르고 부성 콤플렉스까지 안고 있는 사카모토는 단순
일관형의 연기로는 표현하기 힘든 복합적인 캐릭터다. 촬영 전부터
장동건은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들었다. 드라마가 강한 시나리오에 끌렸으나 "이걸 영화로 찍을 수 있을까'부터 '내가 잘 할 수 있는 역인가'까지 걱정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더구나 이 영화에서 장동건은
'홀로 주인공'이 아니었다. 파트너인 나카무라는 본적도 없는 미지의
일본 배우였다. 말은 통역이 해결할 수 있지만 장동건 자신이 일본어
대사를 연기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나카무라는 장동건의 일본어
대사를 모두 녹음한 테이프를 만들어 그의 일본어 교정사 역할을 했다. 쓰여진 대사를 앵무새처럼 중얼거릴 수는 있지만 억양과 강세를
살린 연기를 하는 데는 나카무라의 공이 컸다.
요즘 장동건을 만나는 사람들은 죄다 <친구> 얘기를 꺼낸다. 대개 연기력이 몰라보게 좋아졌다"는 투의 듣기 좋은 평가 일색이지만 그는
<친구>는 연기나 배역에서 새로움을 찾으려 했던 영화지, 흥행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2009 로스트 메모리즈>는?
그는 "이 영화는 무조건 재미있는 영화가 돼야 한다"고 믿는다. 황당한
가상의 상황이지만 관객들이 몰입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것이다. 그런 영화가 될 것 같냐고 묻자 "예고편을 보라"며 말끝을 흐린다. 연기를 시작할 무렵부터 그는 배우 나이 서른에 대해 생각이 많았다. 멋도 모르고 시작한 초년병 시절 장동건은 "서른에는 뭔가 달라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요즘 그는 서른에 뭔가를 보여 주겠다는 결의는 근거없는(?) 착각이었다고 생각한다. 예전과 달라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그는 과정이 있을 뿐 배우로서
완성에 이르는 첩경은 없다는 믿음을 굳혀가고 있는 중이다. 그가 서른에 내놓은 영화가 <친구>와 <2009 로스트 메모리즈>다. 서른이 완성은 아니지만 그의 연기 인생에 전환점이 된 것은 분명하다.
말이 안 되면 몸으로
지난 겨울 강화도에서 <2009 로스트 메모리즈> 준비를 위한 합숙훈련이 있었다. 두 주연배우 뿐만 아니라 JBI 요원까지 참여한 이 대규모
군사훈련(?)에서 장동건과 나카무라 토오루는 첫 대면을 했다. <친구> 때문에 첫날 훈련에 결석한 장동건은 다음날 가슴이 뜨끔했다. 영화 20도를 오르내리는 맹추위 때문에 꽁꽁 얼어붙은 바다 위를 나카무라가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던 것이다. 장동건은 "아는 이 하나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고생하는 모습이 안스러웠다"고 말했지만
타지에 온 일본 배우의 적극적인 태도가 자극이 됐을 법도 하다. 말이
통하지 않았으니 불평도 하지 못했다. 나카무라는 "의사 소통이 안되는 마당이니 몸으로라도 나의 의지를 보여줘야 했다"고 당시 상황을
술회했다.
나카무라 토오루는 일본 내에서 TV와 영화로 유명한 배우지만 국내에는 홍콩영화 <동경공략>과 <젠 엑스 캅>으로 알려졌고 미국 영화 <뉴욕 캅>과 <블루 타이거>에도 출연한 다국적 배우다. 배우 출신 아내를 만나 아이까지 둔 나카무라의 처지는 <2009 로스트 메모리즈>의 사이고 쇼지로와 유사하다. 아내와 아이를 둔 사이고는 가족을 지킬 것인가, 우정을 지킬 것인가를 두고 고민에 빠진다. 실제 그런 상황이라면 어떤 결정을 할지를 물었다. 난처한 표정으로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난 애초에 그런 갈등을 만들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라며 질문을 피해갔다. 내친김에 난처한 질문 하나 더. "한일간의 대립을 다룬
영화의 내용 때문에 주저하지 않았나?" 이번에는 바로 대답이 나온다.
"그건 허구의 설정입니다. 한국 스텝들과 먹고 자는 동안 나는 한국인들을 아주 좋아하게 됐어요. 사카모토와 사이고의 갈등은 상황이 빚어낸 어쩔 수 없는 것이죠." 한국에서의 작업에 대해 그는 "<2009 로스트 메모리즈>는 지금까지 출연한 어떤 영화보다 오래 찍었을 뿐만 아니라 완벽한 그림 콘티를 가지고 작업한 작품으로 기억에 남을 겁니다"라고 했다. 타향살이가 낮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즐기기까지 했다는 나카무라에게 한국 영화는 도전해 보고 싶은 미개척지였다. 한국
영화에 끌린 것도 한국 사람이 쓴 시나리오로 한국 영화를 찍어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컸기 때문이다. 배우로서 그의 자양분은 미지의 영역에 대한 도전 정신이 아닌가 싶다.
닮은 꼴 배우들이 교감
때가 되면 과열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한일 축구 대결은 아니지만 현장에서 두 배우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경쟁의식이 있었다. 액션 훈련에 열을 올리고 위험한 액션도 직접 하려는 '오버'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도 그 미묘한 긴장 때문이었다. 장동건이 추격 신을 찍을 때는 나카무라가 옆에서 같이 뛰면서 응원을 하는 식이었다. 인디컴 김윤영 프로듀서는 "두 사람의 보이지 않는 경쟁이 영화에는 득이 됐다"고 말했다. 나카무라는 "장동건과 나는 모두 말을 먼저 붙이는 성격이 아니라는 점이 비슷하다"며 "연기를 할 때는 백마디 말을 하지 않아도 제스쳐와 표정으로 통하는 것이 많다"고 말했다. 숙명적인 대결을 하게 되는
사카모토와 사이고마냥 두 배우 역시 동지이자 경쟁자였던 셈이다.
나카무라는 한국에서 영화를 찍는 동안 <친구>를 봤다. 한국영화와
장동건에 대해 알고 싶어 봤다는 <친구>는 그에게 적잖이 충격을 준
듯했다. 남들이 더 칭찬하는 장동건의 부산 사투리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시다바리'는 알아들었을 것이다. <친구>에서 장동건의 연기는 <2009 로스트 메모리즈>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일말의 불안감을
씻어줬다. 그는 "한국영화의 수준과 배우들의 연기가 특히 인상깊었고 부러웠다"는 소감을 밝혔다. 그 말을 듣고 장동건이 일본어로 말한다. "아리가토 고자이마스." 나카무라가 한국어로 받아친다. "천만에요."
장병원 기자 | 사진 김명미
* 출처:필름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