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농민 운동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동학 농민 운동(東學農民運動)은 1894년에 일어난 민중의 무장 봉기를 가리키며, 크게 1894년 3월의 고부 봉기(제1차)와 9월의 전주·광주 궐기(제2차)로 나뉜다.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편집] 배경1860년 경주 지방 출신 잔반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하였다. 동학(東學)은 ‘동양의 학문’ 혹은 ‘조선의 학문’이라는 뜻으로, 가톨릭을 비롯해 당시 들어 오던 서학(西學)에 반대한다는 의미이다. 최제우가 창시한 이 동학은 제폭구민과 보국안민에 뜻을 두어 일부 지식인과 일반 농민들에게 큰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동학의 교세가 날이 갈수록 커지자, 정부는 혹세무민의 이유를 들어 교주 최제우를 처형하였다. 이에 동학의 교세 확장은 잠시 주춤하였으나 제2대 교주 최시형을 중심으로 교단을 정비하였다. 이후 동학 교도들은 1892년과 1893년에 두 차례의 집회를 열어 처형된 초대 교주 최제우의 누명을 벗기고, 동학 교도에 대한 탄압을 중지해 줄 것을 요구했다. [편집] 반외세 운동으로의 확대동학의 지도자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졌는데, 하나는 교단의 지도자들이고, 하나는 농민 지도자들이다. 교단 지도자의 대표적인 인물은 최시형과 손병희 등으로 포교의 자유 쟁취를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농민 지도자의 대표는 전봉준, 황하일 등으로 교단 지도자와는 달리 사회 변혁에 뜻을 두었다. 이들 중 농민 지도자였던 전봉준, 황하일 등은 전라도 금구에 동학 교도 및 농민 1만 여명을 모아 서울로 진격하려 하였다. 또 보은에 모여있던 동학 교도들 역시 금구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아 전국적 봉기를 꾀하였다. 특히 보은의 동학 교도들은 지도부에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왜와 양이를 처부수고자 의병을 일으킴)’, ‘보국안민’의 명분을 내세워 그들을 설득하려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정부의 탄압과 교단 지도부의 반대로 인해 무산되었으나 전봉준 등은 이에 굴하지 하고 기회를 노려 동학 농민 운동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고부 봉기를 일으켰다. [편집] 1차 봉기전라도는 예로부터 한국의 대표적인 곡창 지대로 물산이 풍부하여, 농민들은 항상 가혹한 수취의 대상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고부는 전라도에서도 으뜸가는 곡창 지대였다. 이 고부에서 군수 조병갑(1844-1911)의 폭정이 심해지자 1894년 1월에 전봉준(1854년-1895년)과 수백 명의 농민들은 고부 관아로 나섰다. 이에 놀란 군수 조병갑은 줄행랑을 놓았고, 농민들은 수탈에 앞장섰던 아전들을 처단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은 사후의 계획을 세워놓지 않아 곧 신임 군수 박원명의 온건한 무마책에 해산(3월 11일 ~ 12일)하였다. 그러나 머지 않아 안핵사로 내려온 이용태는 위 사건을 민란으로 규정하고 민란 관련자들을 역적죄로 몰아 혹독히 탄압하였다. 이에 고부의 상황은 바뀌게 된다. 이용태의 탄압에 분개한 전봉준과 농민들은 무장을 갖추고, 김개남, 손화중과 함께 봉기하였다. 이것이 고부 봉기라고도 불리는 제1차 동학 농민 운동이다. 농민군은 1894년 3월에 백산에 모여 다음과 같은 농민군의 4대 강령과 봉기를 알리는 격문을 발표하였다.
이후 농민군은 전주성 함락을 목표로 4월 초 금구 원평에 진을 쳤다. 실제로는 농민군의 구성원은 대부분 일반 농민들이었고 동학 교도는 비교적 적었다. 농민군은 탐관 오리의 제거와 조세 수탈 시정을 주장하였으며, 균전사의 폐지를 촉구하였다. 고부의 황토현에서 감영 군대를 물리쳐 황토현 전투를 승리로 이끈 농민군은, 중앙에서 파견된 정부군을 유인하기 위해 남쪽으로 향하였다. 여기에 자극을 받은 조정에서는 당시 전라병사 홍계훈(洪啓薰)을 초토사로 임명하여 봉기를 진압하도록 하였다. 정읍, 흥덕, 고창, 무장 등을 점령한 농민군은 4월 23일, 장성 황룡촌 전부에서 홍계훈이 이끄는 정부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이 기세를 몰아 농민군은 전주성으로 입성하였다. 그러나 정부군은 완산에 머물면서 포격을 시작했고, 동학군은 여기에 대항할 만한 병기가 없어 500명의 전사자를 내는 참패를 당했다. 홍계훈은 이미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던 고부군수, 전라감사, 안핵사 등이 징계를 당했으며 앞으로도 관리의 수탈을 감시하여 징계하겠다는 것을 밝혔고 한편으로는 청나라 군대가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도착하였으며 일본의 군대도 자국민 보호를 위해 출병하기로 했다. 동학군은 이런 상황에 따라 폐정개혁 12개조를 요구하고 전주성에서 철병했으나 이미 청군과 일본군은 조선 내에 진입한 상태였다. [편집] 2차 봉기조선 조정은 농민군이 밀고 들어오자 일본과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에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손병희 등이 다시 2차 봉기를 일으켰다. 일본은 1894년 6월에 경복궁 쿠데타를 일으켜 친일 정권을 세우고 이노우에 가오루를 새 공사로 임명했다. 그해 9월에 전봉준이 4,000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삼례에서 일본군을 몰아낸 뒤 남접과 북접의 연합을 시작했다. 전봉준은 공주-수원-서울 북상로를 선택하고 남원에 주둔한 김개남과 합류할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김개남 대신 10월에 북접의 손병희가 논산에서 합류하여 2만 명의 군세가 되었고 남접 10만 명, 북접 10만 명 등 총 2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공주를 총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조선 조정과 일본군은 신정희, 허진, 이규태, 이두황 등에게 3,200명의 관군과 일본군은 미나미가 이끄는 2,000명의 일본군을 이끌고 맞섰다. 농민군과 조일 연합군은 10월 23일부터 10월 26일까지 공주 이인과 포효 등지에서 제1차 접전을 벌였고, 농민군은 크게 패배해 후퇴했다. 전봉준은 김개남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김개남은 청주 전투에서 크게 패한 뒤에 도움을 주지 않았다. 농민군은 곰티와 검상 마을, 곰내, 하고개, 주미산 방면을 공격했다. 금강 건너 유구 쪽에서 맞섰으나 홍성 농민군은 세성산 전투에서 패배해 후퇴했다. 농민군은 다시 진열을 정비하고, 11월 9일 남접과 북접 연합군 20만 명이 공주 우금치를 향해 돌진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편집] 우금치 전투
농민군은 무너미 고개와 이인 쪽에서 맞서 관군을 밀어붙치고 조일 연합군은 모리오 미사이치 대위가 지휘하는 관군을 우금치 옆 뱁새울 앞산에 주둔하고 우금치, 금학동, 곰티, 효포 봉수대에 관군을 배치했다. 농민군은 이 곳을 집중 공격했으나 고갯마루 150m 앞까지 조일 연합군의 우세한 무기의 포탄과 총탄이 비오듯 쏟아져 내려 더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기동과 조병완이 농민군의 좌측과 우측을 공격해 농민군은 큰 사상자를 내고 공주 동남쪽 봉우리로 후퇴했다. 농민군 1대가 봉황산으로 진격해 공주감영을 공격하려 했으나 하고개와 금학골 골짜기에서 관군의 공격으로 실패했다. 이로서 농민군은 4일 간의 제2차 접전에서도 패배했고 전봉준은 군인, 이서, 상인들에게 지지를 크게 얻지 못했다. 조일 연합군은 11월 14일에 노성 주둔 농민군을 공격해 농민군은 대촌 뒷산과 소토산으로 계속 후퇴해 사기까지 떨어져 12월에 전봉준은 체포되고, 이후 조일 연합군의 호남 일대의 농민군 대학살전이 일어났다. [편집] 평가동학 농민 운동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민중항쟁이라고 할 수 있다. 동학은 신분제의 타파를 외치고 있었기 때문에 혼란한 조선말 상황에 가난한 농민들이 의지할 수 있는 종교였기 때문이다. 동학농민운동의 성격은 간단하게 "반봉건적, 반외세적 농민항쟁" 이다. 농민이 주축이 되는 운동으로 지배계층에 대한 조선 시대의 최대의 항쟁이다.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으로 결국 실패했으나 후에 3.1운동으로 계승되었다. [편집] 동학 농민 운동에서 활동한 김구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김구는 동학군을 지휘했다. 지도자 최시형의 지시를 받고 황해도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습격하였으나 끝내는 관군에게 패퇴하고 몸을 숨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