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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945)년 | 일제에 의해 교화단 조직 금지 | |
9월 4일 이리역전(13개월반), 9월 10일 서울역전(6개월 반)[귀환 전재 동포 구호소]를 설치 | 구호소- 4개 지구 구호 받은 동포수- 80 여만명, 구호에 동원된 교도 수- 5백 여명, 교도 동원 연 일수(延日數) - 1만 3천 여일, 동원 대신 노임 제공과, 동원에 따른 제반 비용- 약 1백2십만원 (당년도 사업보고) 송도성 수위중앙단원 전염병으로 순직 | |
10월 정산종사 건국론 지으심 | 시국에 대한 소감 밝히심 요지- 정신으로써 근본을 삼고, 정치와 교육으로써 줄기를 삼고, 국방 건설 경제로써 가지와 잎을 삼고, 진화의 도로써 그 결과를 얻어서, 영원한 세상에 뿌리 깊은 국력을 잘 배양하자. | |
종전 총부 야학원 개방하여 구내 아동 한글 교육 | 원기31(1946) 1월, 교무 강습회에 한글 학회 강사를 초청하여 교육을 받아, 전국 교당에서 일제히 문맹 퇴치 운동을 전개한 바, 수강생이 도합 4천여명에 달하였다. | |
정각사에 총부 출장소(초대소장金大擧)를 병설- 대외 교섭, 방송 교화, 서울 교구의 지도 서울 용산의 용광사(龍光寺), 부산 서정(釜山西町)의 신사, 이리 동산동의 신사 터 등 귀속 재산을 불하 받아, 서울 지부·경남 지부·이리 지부로 각각 발전시켰다. |
3. 유일학림의 개설
25년 설립시도 | 일정의 방해 | |
31년 5월 1일 개설 (경륜편 4장) | 학장 朴將植 , 학감 朴光田 | 중등부(3년), 전문부(3년) 2부 편제 발족 교학(敎學), 불교학, 교양 과목 학습 제 1기 학생 수- 중등부 남녀 46명, 전문부 남녀 34명(교단 공비생 31명) |
중등부 -> 원광 남녀 중고등 학교, 전문부 -> 원광 대학교 |
* 원불교 대사전
개요> 원광대학교의 전신인 교육기관. 일제강점기 때인 1940년 소태산대종사 당대에 설립을 청원했으나 허가를 얻지 못한 유일학원의 이름을 승계한 것으로, 1946년(원기31) 개설되어 1951년(원기36) 원광대학이 설치되도록까지 운영되었다.
역사> 유일학림은 해방 후 교단의 인재양성을 위한 교육기관 설립의 필요성에 의해 1946년 5월 1일에 중앙총부의 공회당에 개설되었다.(학림장 박장식, 학감 박광전) 중등부와 전문부의 2부 편제로 수업연한은 각 3년이었으며, 교과목은 《정전》을 비롯한 교학과목과 불교학을 비롯한 교양과목들을 아울러 학습하게 했다. 제1기생으로는 중등부 남녀 46명, 전문부 남녀 34명이었으며, 그중 교단 공비생이 31명이었다. 이 유일학림이 모체가 되어 후일 중등부는 원광중ㆍ고등학교 및 원광여중ㆍ고등학교로, 전문부는 원광대학교로 각각 발전했다.
의의> 정산종사는 개학식 훈사에서 “유일학림은 대종사께서 재세 당시에 직접 뜻을 두시고 유일(唯一)이라는 교명까지 정하셨으나, 시국 관계로 그 뜻을 다 펴지 못하셨던 바를 해방을 맞아 이제 개학하게 된 것이니, 그대들은 먼저 유일의 참뜻을 알아 유일한 목적과 유일한 행동과 유일한 성과를 얻으라. 유일한 목적이란 곧 제생의세요, 유일한 행동이란 곧 무아봉공이요, 유일한 성과란 곧 일원세계건설이니, 지금은 비록 좁은 교실에 학인의 수효도 많지 못하나 장차 수 없는 도인들이 여기에서 쏟아져 나와 넉넉히 세계를 제도하게 되리라”(《정산종사법어》 경륜편4) 했다.
1949년(원기34) 제1회 졸업식 훈사에서는 “종교의 생명은 신심이요 사업의 동력은 공심이라, 그대들에게 이 두 가지만 갖추어 있다면 학식이 부족하여도 전도가 양양하리니, 다른 것에 부족을 느끼지 말고 오직 여기에 부족을 느끼며, 다른 것을 갖추려 애쓰지 말고 오직 여기에 애를 쓰라. 이제 그대들은 학림의 학과는 마쳤지마는 정말로 큰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나니 그 큰 공부란 곧 일하면서 공부하고 공부하며 일하는 사상(事上)공부라, 그대들의 일언일동이 앞으로 학림과 교단의 사업에 중대한 영향을 가져올 것을 한때라도 잊지 말고 신성과 공심에 근원하여 이 사상공부에 부지런히 잘 힘써서 부처의 공부와 부처의 사업을 원만히 성취하기 바라노라”(《정산종사법어》 경륜편6)고 했다.
유일학림은 정규교육기관을 통한 교단의 인재양성의 요람이 되었고, 소태산이 만년에 부촉한 교화ㆍ교육ㆍ자선의 교단삼대사업목표의 한 분야를 담당했다. 〈梁賢秀〉
* 朴將植 (박장식 1911~2011)
주요약력 >
본명은 천식(天植). 법호는 상산(常山). 법훈은 종사. 1911년 1월 9일에 전북 남원군 수지면 호곡리에서 부친 해창(海昌)과 모친 정형섭(鄭亨燮)의 2남 2녀 중 2남으로 출생.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3년에 경성법학전문학교(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전신)를 졸업했다. 1934년(원기19)에 모친의 연원으로 입교하여 장식이라는 법명을 받았으며, 1941년(원기26)에 전무출신했다. 1946년(원기31)에 수위단원에 피선되었고, 동년 유일학림 초대 학림장을 맡았으며, 이후 총무부장ㆍ공익부장ㆍ원광중고등학교 초대 교장ㆍ교정원장 등을 역임했고, 종교협의회 부회장ㆍ서울출장소장ㆍ미주교구 교령ㆍ소태산대종사탄생100주년성업봉찬회장 등 교단과 한국 종교계에서 중요한 직책을 수행했다.
생애와 활동>
어려서부터 총명 민첩하고 침착했던 박장식은 효성(孝誠)ㆍ경애(敬愛)ㆍ근검(勤儉)이라는 가훈을 마음에 새기며 바른 인생길을 찾으려 노력했다. 한문서당에서 천자문과 사서(四書)를 배웠으며, 틈틈이 일어를 공부했다. 부친의 열반으로 일본 유학을 포기하고 귀향하여 한때 인쇄업과 운수업을 경영했다. 1938년(원기23) 소태산대종사를 뵙고 영생의 스승임을 깨달았으며, 바로 남원교당을 창설하여 초대 교도회장이 되었다. 1940년(원기25) 소태산으로부터 학원 설립 준비를 하명받아 이듬해 불교전수학원 허가신청서를 제출했으나 인가받지 못했다.
1941년(원기26)에 전무출신했으며, 바로 ‘불법연구회 회규’ 정비, 《정전》 편수 업무를 주관했다. 이후 교단의 여러 가지 요직을 수행했는데, 주요 직책은 다음과 같다. 유일학림 초대 학림장(1946), 원광중학교 초대 교장(1951), 원광고등학교 초대 교장(1953), 교정원장(1962), 원불교청년회 총재(1964), 원광학원 이사장(1967), 원불교신보사 회장(1969), 종교협의회 부회장(1970), 미주교구 교령(1975), 소태산대종사탄생100주년기념성업회 회장(1991) 등. 박장식은 법학을 전공한 지성인으로 원불교 교단에서는 주로 교서 편찬ㆍ법규 정비ㆍ교육기관의 설립과 운영ㆍ교단행정ㆍ언론기관의 설립ㆍ해외 교화 개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대외적으로는 1970년 세계불교지도자회의를 비롯하여 한일종교협의회ㆍ한국7대종교협의회ㆍ한일문화교류협의회ㆍUN 세계종교정상회의 등에 교단 대표 또는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발제 강연과 발표를 하는 등의 활동으로 교단의 위상을 드러내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1970년(원기55)에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했으며, 교육계에 끼친 공로로 원광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1978)를 수여했고, 교단에서는 1988(원기73)에 2대말 성업을 결산하면서 종사위 법훈을 수훈했다.
특히 1994년(원기79) 좌산종사가 종법사로 선출되자 박장식이 교단의 최고 원로로서 새 종법사에게 땅에 엎드려 예를 올린 일이 교단과 종교계에 큰 감동을 주었다. 박장식은 1992년(원기77)에 정년 퇴임한 후 원로원에서 수양하다가 2011년(원기96) 5월 4일에 열반했다. 장녀 제현과 장남 제중, 차남 제인이 전무출신했다. 세수는 101세, 법랍 70년, 공부성적 대각여래위, 사업성적 정특등에 해당한다. 박장식의 생애와 활동 및 법문을 모은 《평화의 염원》이라는 문집이 있다.
사상>
박장식은 경성법학전문학교 졸업식전에서 교사들이 하나같이 황국신민이 되라고 했는데 유독 한 사람이 “인생을 그저 까닭없이 지내지 말고, 누가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서슴없이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다’는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평화의 염원》)고 당부한 말을 잊지 않고 자주 독립의 정신을 간직했다. 소태산을 만나 그 인격과 경륜에 감복한 그는 자력갱생으로 힘을 길러 강자가 되는 것이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깨닫고 공도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평소 진실과 공심을 강조했다.
진실이 본체가 되었을 때 움직일 수 없는 힘으로 서는 것이요, 거짓이 근거가 되면 모래성처럼 무너진다. 또한 공심은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얻게 되는 것이며, 공심을 가지면 무한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현대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에 대해 그는 내 종교만 주장하는 국집에서 벗어날 것을 강조하고 실천했다. 사상과 종교의 울을 트고 넘나들면서 세계사적 방향과 연관성을 잃지 않고 하나의 세계라는 공통인자를 찾아야할 책임이 종교인에게 있다고 했다. 그 공통점은 양심을 불러일으켜서 사랑과 봉사로 자기 구원과 사회정화를 이룩하자는 것이다.
그것만이 사회정의를 바로 세우고 사랑과 협동과 봉사의 실적을 낳아 국가와 민족, 나아가 전 인류가 공존 공영할 것이며, 전 세계가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의 평화사상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구적인 평화를 지향한다. 일시적인 평화협정과 같은 미봉책이 아니라 미래사회까지 이어질 참다운 평화를 추구하자는 것이다. 그는 단지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한 군사적 긴장 해소를 넘어서서 현대문명이 안고 있는 공해문제ㆍ인구문제ㆍ인종분쟁ㆍ빈곤과 질병문제 등 전 인류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참다운 평화로 나아가는 길임을 역설했다.
또한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 인간의 삼독심이라고 보아 삼독을 극복하는 고도의 정신적 기반을 구축하는데 최대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삼독심을 풀어서 인간의 네 가지 기본 욕망으로 정리했다. 첫째 본능적 욕망으로 생리에서 오는 배고픔ㆍ추위ㆍ갈증ㆍ편안함과 같은 신체적 단순 욕망이다. 둘째 남에게 인정받고 싶고 자기를 과시하고 싶은 사회적 욕망이다. 셋째 생활이나 정신에 안정을 얻고 남보다 더 이루고자 하는 정신적 욕망이다. 넷째 가장 차원 높은 욕망으로 부모ㆍ진리ㆍ하느님 등으로부터 도움을 얻고자 하는 욕망이다. 이러한 욕망을 조절하여 자유자재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보았으며, 이는 소태산이 주창한 정신개벽과 상통한다.
* 朴光田(박광전 1915~1986)
주요약력>
본명은 길진(吉眞). 법호는 숭산(崇山). 법훈은 종사. 전남 영광에서 출생. 소태산대종사의 장남으로 원불교 창립기에 활동한 교육자ㆍ행정가ㆍ철학사상가. 일찍이 일본에 유학하여 철학을 공부하고, 1941년(원기26) 4월 1일 출가했다. 교정원장ㆍ원광대학교 총장ㆍ수위단원을 역임하면서 일원상 연구를 통해 원불교학의 효시를 이루고, 국내외의 종교계ㆍ문화계ㆍ교육계 등에 교단대표로 활동하면서 원불교의 세계화에 선봉이 되었다.
생애와 활동>
박광전은 1915년 8월 15일 전남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에서 부친 소태산과 모친 양하운(十陀圓梁夏雲)의 4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어릴 때부터 온순 정직하고 침착 근엄한 성품으로 탐구의 정신이 풍부했다. 7세시에 한문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보통학교 3학년 때 익산으로 이사했다. 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할 무렵에는 앞으로 종교인이 되어야겠다는 목표가 확고했기 때문에 여러 종교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는 강한 의욕에서 그리스도교 재단에서 설립한 배재고등보통학교를 택하여 진학했다.
예배시간에는 저명인사들의 강연과 찬송ㆍ기도를 통해 종교적 정서를 함양시켜, 졸업할 무렵 인생의 본질문제와 우주의 궁극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철학서적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1937년(원기22) 일본 동경의 동양대학 예과에 입학했는데, 이는 철학을 전공하기 위해서였다. 학창시절 허리를 다치게 되었는데, 그 치료 방법은 단전에 기운을 주하는 것이었다. 그때 시작한 단전주(丹田住)는 만년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고, 좌선의 기틀을 다지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가 유학하는 동안 소태산은 많은 하서(下書)를 주었는데, 모두가 친필이었다.
또한 대학에 있을 때 저명한 그리스도교인인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를 만났다. 신학대학을 나온 문인인 그에게 신(神)이 어디에 있는가를 묻자, 그는 정원수의 나뭇잎 하나를 따서 주면서 ‘이게 신이다’고 대답했다. 이것은 일종의 선어(禪語)로 신이 만물에 내재한다는 신학적 입장이었다. 1942년(원기27)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여 이듬해 4월에 교정원 교무부장직을 맡았으나, 같은해 6월 1일에 부친이 열반하는 큰 아픔을 겪었다. 1946년(원기31) 3월부터 박광전은 교단 최초의 교육기관인 유일학림 학감(學監)을 맡아 인재양성을 시작했으며, 1948년(원기33)부터 교정원장을 겸임했다.
1951년(원기36) 유일학림이 원광초급대학으로 승격되자 초대학장에 취임했다. 5ㆍ16이후 대학정비령으로 당시 여러 가지 요건이 미비했던 원광대학은 원광대학림으로 강등되어 인가가 취소될 위기에 처하는 아픔이 있었으나, 심혈을 다한 노력 끝에 위상을 회복시켰다. 1971년(원기56) 종합대학교로 승격되자 1972년(원기57) 3월에 그는 원광대학교 초대 총장에 취임했다. 종합대학으로의 승격은 대학의 발전뿐만이 아니라 원불교의 입지를 튼튼히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원불교학과를 교학대학으로 승격시킴으로써 원불교학 연구와 교역자의 인재교육 및 수급에 역할했다.
그는 1953년(원기38) 4월에 수위단원으로 피선되었으며, 1962년(원기47)에는 수위단회 중앙단원의 중책을 맡아 수행했다. 1964(원기49) 4월 개교반백년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아 대외적으로 원불교의 이해와 참 모습을 알리며, 안으로 결속과 실력향상을 도모했다. 또한 세계불교도우의회에 참가하여 원불교지부를 설치하여 지부장이 되고, 대산종사가 주창한 종교연합운동(UR)과 세계평화의 증진을 위해 아시아종교자평화회의(ACRP), 세계종교자평화회의(WCRP) 등 많은 국제회의에 교단 대표로 참가했다.
1962년(원기46) 원광대학교에 설립한 해외포교연구소는 해외교화를 개척하는 선구자적 공헌을 쌓았고, 1974년(원기59) 개설하여 초대 원장을 역임한 원불교사상연구원은 원불교학의 산실이었다. 1984년(원기69)에는 한국대학총장협의회 회장을 역임하며 한국 지성의 대표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과묵한 중에 지극히 평범한 수행의 실천자로, 격무 속에서도 평상심(平常心)을 지키면서 세속을 초탈한 기품을 유지했다.
일생을 정확한 시간생활로 먹고 입고 말하며 걷는 모든 것까지 한 가지도 허술함이 없는 가운데 무위자연의 대인다움을 잃지 않았다. 원광대학교 총장으로서 소태산대종사탄생100주년성업회 회장 재임 중이던 1986년(원기71) 12월 3일 열반했다. 세수 72세, 법랍 45년이며, 공부성적 정식출가위로 사정되었다.
종교와 철학사상>
박광전은 특히 쇼펜하우어의 저서를 비롯한 철학서를 탐독하면서 인간의 심성에 관한 문제와 삶에 대한 문제를 탐구했다. 그리고 죽음의 문제, 마음과 영(靈)의 문제 등을 골똘히 연구했다. 또한 틈이 생기면 각 종교를 순방했고, 유명한 사찰을 돌아보면서 제도와 교리의 짜임새, 그리고 일상수행의 모습을 눈여겨보았다. 그 과정에서 일본의 불교가 어떻게 뿌리내리게 되었는지 관찰하고, 창립초기에 있던 교단에 참고될 자료들을 수집하여 소태산에게 보고했다.
그는 현대사회의 종교는 옛날처럼 정(靜)적으로만 나가서는 안되며, 동과 정이 병진되어야 하고 과학 분야까지도 포용 섭렵해야 한다고 보고, “선(禪)이라고 하면 정(靜)할 때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그렇지 않다. 선이란 정신차리는 것이다. 외경으로 인한 욕심, 내부의 사심잡념을 제거하고 참 본성을 나타내게 하는 것이 정신 차리는 법이라”고 말했다. 조석으로 올리는 심고도 법신불 사은의 도움을 비는 행위가 되어서는 안되며, 선악 간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고백하는 시간이 되어야 하고 앞으로의 다짐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교단은 절대적으로 정의로워야 하고, 눈앞의 이익에 초연할 줄 알아야 하며, 종교인들이 교단을 무대로 출세하려고 한다거나 명예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교단은 부패하고 마는 것이라고 하면서 전무출신제도가 여러 각도에서 검토되어야 하고, 소신껏 일할 수 있도록 생활을 보장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일원상’을 연구하여 우주의 근본이 되는 원리는 완전하여 영원한 전체이고 또한 그 전체를 지배하는 어떠한 존재에 의해서 우주는 성립되는 것이며, 그 근본이 되는 원리가 일원상의 진리라고 밝혔다.
그는 법신불 개념의 생성과 전개에 대하여 각 전적을 참고하며 대승불교로서의 법신관을 우주에 편만하는 진리신으로 해석하여 만유의 본체요, 근원적 진리의 의미로 규정하고 있다. 인간이 절대적 진리를 하나의 일원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소의를 다섯 가지 원리로 파악하여, 첫째 진리는 돌고 도는 것, 둘째 진리는 무시무종한 것, 셋째 진리는 자족원만한 것, 넷째 진리는 일체가 공한 성격, 다섯째 우주의 근본적 진리는 한 기운이 뭉쳐있는 것이라 보았다.
일원상진리에 관심 가진 박광전은 소태산에게 질문하여 일원상과 인간과의 관계(《대종경》 교의품3), 일원상의 신앙(《대종경》 교의품4), 일원상의 수행(《대종경》 교의품5), 일원상 상징(《대종경》 교의품6) 등 원불교 종지에 관한 귀중한 법문을 받들고 있다. 원광대학교에서는 1988년(원기73) 5월 25일 교정에 그의 동상을 세웠는데, 그 명문은 다음과 같다. “빛나고 숭고하도다, 숭산의 행적이여! 성종(聖種)의 기틀을 숙겁에 닦으사 기연(機緣)따라 출세하니 명은 길진, 법명은 광전, 숭산은 법호이시다.
반백년 육영의 길에 성심을 다하셨고, 풍부한 식견과 덕망을 겸비한 원광대학교 창립총장으로서 지덕겸수(知德兼修)의 학풍과 덕화구현(德化具現)의 일가를 이루셨네. 원만한 지도력과 공명정대한 심법은 후학의 우러른 바이셨고, 백년대계의 인륜교육에 무량대도(無量大道)인 원리(圓理)를 담아 양재육영(養材育英)에 노심초사하신 각고는 원광을 휘감으니, 정신개벽(精神開闢)의 메아리 사해에 넘쳐나고 그 초석 굳건하여 만대에 탄탄할 사 그 유업계승에 어찌 소홀함이 있으랴. 지덕을 겸수하고 도의를 실천하라.”〈韓正釋〉
4. [원불교] 선포와 교헌 반포
32년 1월 16일 | [재단법인 원불교](이사장柳虛一)의 등록 인가 | |
33년 4월 | 26일 총대회(總代會) [원불교 교헌]의 정식 통과, 27일 총부 대각전 교명 선포식, | 새 회상은 [원불교]라는 정식 교명을 천하에 공시 (경륜편 1장) |
[원불교 교헌] | 2편 24장 225조 새 회상이 정식 교명과 함께 교단의 새 체제를 정립하여, 명(名)과 실(實)이 함께 하나의 새 종교로 거듭 출발하게 된 획기적인 사실 | |
제 1편 교정(敎政) - 총 15장 138조
| 교명: 원불교, 본존: 일원상, 본경: 불교정전, 대표: 종법사 중앙 교의회(교단 최고 결의 기관) 중앙 총부(최고 집행 기관)- 교정원(교무·서무·산업·재무 4부)& 감찰원(감사·사서 2부) 수위단회(종법사의 최고 자문 기관) | |
제2편 교제(敎制) -전무출신·거진출진·희사위·공부 등위·사업 등급·법계·연원·은족·부칙(9개 장) |
[교조 소태산 대종사로 위시하여 법계를 계산한다] [법계는 연수로써 계산하되 매대수를 36년으로 한다] [영모전을 건설한다] [영모전 향례는 연중 2차씩 거행한다] |
* 원불교 명칭 변화
2년 8월 | 저축조합창설 |
3년 12월 | 구간도실 준공 대명국영성소 좌우통달 만물건판양생소(大明局靈性巢左右通達萬物建判養生所) |
4년 10월 | 불법연구회 기성조합 으로 개칭 |
33년 4월 | 원불교 정식교명 반포 |
5. 수위단회의 기능화
수위단회: [종법사의 최고 자문에 응하는 기관] 5개 항의 의결 사항을 규정하여 법적으로 수위단회의 기능을 확대하여 이단치교의 중심 |
39년 4월 정산 종법사는 수위단회와 교무 연합회에 내리신 유시로 [수위단회의 위신과 직능을 더욱 강화하여 교단 통치의 핵심체를 삼으라] 하시었고, 이 뜻은 44년 교헌 개정에 충분히 반영 |
54년 5월 수위단회 사무처를 독립 발족(초대처장金允中): 분과제와 전문위원제를 실시 -> 교단 최고의 의결 통치 기관 |
6. [원광] 창간과 6·25 경난
34년 4월 | 원광사 발족(월간 [회보]가 휴간 된지 9년만) |
7월 | 월간 [원광](주간李恩錫 편집李空田) 창간 (경륜편 7장) |
37년 4월 | 보화당(이사宋慧煥)과 이리 고등선원(교감李雲捲)이 합력하여 복간 (원광 5호를 내고 6·25 동란으로 중단) |
40년 3월 | 다시 총부로 옮김 |
42년 2월 | 교도(부산金白蓮)의 후원으로 자영(自營) 인쇄 시설을 갖추고, 교단 출판 업무의 일부까지 담당 |
(원불교대사전) 교단의 역사
① 불법연구회 시대: 생장지인 영광에서 교화활동을 시작한 소태산은 대각을 이룬 그해 7월경,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 10인의 표준제자를 얻어 십인일단의 수위단을 구성함으로써 교단의 최초 모습을 갖춘다. 교단의 건설에 착수한 소태산은 1917년(원기2) 8월, 표준제자들을 중심으로 저축조합을 창설하여, 금주단연ㆍ허례폐지ㆍ공동출역 등으로 자본금을 모으고 근검저축ㆍ이소성대(以小成大)의 정신으로 공부와 사업할 토대를 마련했다.
1918년(원기3) 3월, 조수가 내왕하는 영광 해면을 막아 간석지를 만드는 방언공사에 착수하여 영육쌍전(靈肉雙全)ㆍ일심합력(一心合力)의 정신으로 추진했다. 그해 10월에 그 착수 당시 1회를 12년으로 하고 3회 36년을 1대로 하는 창립한도를 발표하여 중장기 발전계획에 의한 교단 창립을 분명히 하며, 같은 달 첫 모임터인 구간도실(九間道室) 건축을 착수하여 12월에 준공했는데, 이에 ‘대명국영성소 좌우통달 만물건판양생소(大明局靈性巢左右通達萬物建判養生所)’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이듬해인 1919년(원기4) 3월 방언공사를 완공함으로써 근대 한국 개척사의 한 전형을 이룬다. 당시 사회적으로 3ㆍ1독립운동이 일어나는 상황 아래서 소태산은 생민의 고통이 한이 없을 것을 내다보면서 세상을 구하고 천의(天意)를 감동시키기 위해 구인제자들과 특별기도를 행하기로 하고, 3월 26일부터 재계(齋戒)하고 삼육일(음력 6일, 16일, 26일)로 산상기도를 시작했다. 마침내 8월 21일(음7. 26) 구인제자가 자결을 결심하고 ‘사무여한(死無餘恨)’이라 쓴 증서에 백지장(白指章)을 찍자 혈인(血印)의 이적(異蹟)이 나타났다.
소태산은 “그대들의 마음은 천지신명(天地神明)이 이미 감응했고 음부공사(陰府公事)가 이제 판결이 났으니, 우리의 성공은 이로부터 비롯했다” 하고, 기도를 마치게 한 다음 “그대들의 전날 이름은 곧 세속의 이름이요 개인의 사사 이름이었던 바,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은 이미 죽었고, 이제 세계공명(世界公名)인 새 이름을 주어 다시 살리는 바이니, 삼가 받들어 가져서 많은 창생을 제도하라”(《원불교교사》 제1편 제4장)하고, 법호(法號)와 법명(法名)을 주었다. 이를 법인성사(法認聖事)라 하며, 이에서 보인 무아봉공(無我奉公)ㆍ사무여한의 정신은 후일 전무출신의 기본정신으로 삼게 된다.
이해 10월 6일, 소태산은 ‘저축조합’의 이름을 ‘불법연구회 기성조합(佛法硏究會 旣成組合)’이라고 바꾸었다. 한편, 삼엄한 시국의 주목을 피하여 소태산은 8월경 주석처를 전북 부안 봉래산으로 옮겼으며, 12월에 실상사 근처에 초당을 마련한 다음, 교법(敎法)을 초안하고 인연을 규합하여 훈련을 시키는 등 교단 공개를 준비했다. 이때 《조선불교혁신론》과 《수양연구요론》 등의 초안이 이루어졌다.
1924년(원기9) 4월 29일, 전북 익산의 보광사(普光寺)에서 불법연구회창립총회(총재 소태산, 회장 서중안)를 개최하여 교단을 공개했으며, 8월 익산시 신룡동 344-2번지에 6만여평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중앙총부를 건설했다. 이 해에 소태산 일행은 전북 진안을 방문하여 수선회(修禪會)를 열며, 중앙총부의 전무출신 공동생활의 터전에서 이듬해인 1925년(원기10) 3월 정기훈련법(定期訓練法)과 상시훈련법(常時訓練法)을 제정하여 실시함으로써 인재 육성에 착수하고, 8월에는 공부ㆍ사업고시법과 유공인 대우법을 제정했다.
전답을 빌려 경작하고 엿장사를 하는 등 어려운 생활 속에서 주경야독(晝耕夜讀)의 공부 분위기를 조성해 나가며, 1926년(원기11) 2월에는 신정의례(新定儀禮)를 발표하여 생활의식에 변화를 도모하고, 7월에는 서울 창신동에 서울출장소를 마련하여 수도권 교화에 나섰다.
1927년(원기12) 교단 최초의 교재 《수양연구요론》ㆍ《불법연구회 규약》 등을 발간하고, 1928년(원기13)에는 창립 제1회의 기념총회를 개최하며, 행ㆍ재정의 각종 제도를 마련하는 가운데 농업부 기성연합단과 인재양성소 기성연합단을 창립했다. 이해 5월에 월간 기관지 《월말통신》을 발행했는데 이는 이후 《월보》ㆍ《회보》로 이어졌으며, 이에 소태산의 법문과 고경(古經)의 해석, 행ㆍ재정제도, 교화와 훈련, 설교와 의견안 등 교단 창업관련 기사를 다양하게 싣고 있다.
1932년(원기17) 4월 《보경육대요령》의 발간을 시작으로, 1934년(원기19) 12월 《삼대요령》, 1935년(원기20) 4월 《조선불교혁신론》ㆍ《예전》을 발간하여 교리를 정비하고, 유사종교 소탕령이 내려진 1936년(원기21)에는 《회원수지》ㆍ《불법연구회약보》 등을 발간하여 시국에 대처했다. 1934년 3월에는 회규(會規)를 고쳐 종법사ㆍ회장 아래 교정원(敎政院)ㆍ서정원(庶政院)의 2원체제를 확립하고, 1935년에는 중앙총부에 대각전을 세우고 법신불일원상을 봉안하여 일원상 신앙체계를 확립해나간다.
이 해 익산에 산업기관으로서 약업사 보화당을 개설하고 교역자가 직접 이를 운영하게 함으로써 생산성 있는 종교, 종교의 자립 경제책을 강구하고, 1940년(원기25) 2월에는 완주군 삼례에 수계농원을 개설하여 산업종교의 면모를 갖추었다. 교당교화가 확장됨에 따라 1938년(원기23) 11월에 처음으로 교무강습회를 개최하고, 1940년에는 제1대 2회를 맞이했으나 일제의 불허로 기념대회를 갖지 못했다. 같은 해에 교역자 양성을 위한 전수학원으로 유일학원(唯一學院) 설립을 신청하고 1942년(원기27) 탁아소 겸 보육원으로 자육원(慈育院)을 신청했으나 일정 당국의 불허로 좌절되었다.
당시 소태산은 교단이 사회에 유익을 주면서 발전하는 방향으로 교화ㆍ교육ㆍ자선(사회복지)을 교단3대사업목표로 설정했다. 소태산은 교세가 신장되고 각종 체제가 정립되면서 소의경전의 필요성이 증대됨에 따라 1940년 9월부터 교리에 정통한 몇 제자들에게 명하여 그간의 초기교서들을 통일 수정하여 《정전(正典)》을 편수하도록 했다.
1941년(원기26) 1월 28일에는 전법게송(傳法偈頌)으로 ‘일원상게송’을 공포(公布)하며, 이 해에 종법사와 수위단의 임기를 6년으로 하는 ‘회규’를 정비하는 등의 행정조직을 강화하고, 이해 12월에 아시아태평양전쟁이 일어난 급박한 시국 아래 1942년(원기27)에는 개인 명의로 등기되어 있던 교산(敎産)들을 공증(公證)했다. 소태산은 이 해에 최후로 지방을 순회하며 교도들의 신성과 결속을 다지는 한편, 교서를 친감하여 출판을 신청했으나 일제는 ‘황도선양(皇道宣揚)의 정신이 결여되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불허했다.
그해 중앙총부를 방문하여 소태산과 교단상황에 대해 감복한 불교시보사장 김태흡(金泰洽)의 주선에 의해 이듬해인 1943년(원기28) 3월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얻어 《불교정전(佛敎正典)》으로 발행에 회부하여 8월에 보급되었고, 연원경전인 부처와 조사(祖師)의 전적을 《불교정전》 2권과 3권으로 각각 편집 발간했다. 소태산은 5월 16일 ‘생사(生死) 법문’을 설하고 득병하여 치료하다가 6월 1일 열반에 들어 개법(開法) 28년의 제도사업을 마감했다.
② 원불교 선포 시대: 소태산의 뒤를 이어 정산이 법통을 계승하여 종법사 위에 올라, 교단해체를 획책하는 일제말기의 난국을 헤쳐 나가다가 1945년(원기30) 민족해방을 맞이했다. 교단에서는 해방 후 만주와 일본 등에서 들어오는 전재동포를 구제하기 위해 서울ㆍ부산ㆍ익산 등에 ‘귀환 전재동포 구호소’를 설치하고 식사ㆍ의복ㆍ숙소ㆍ응급치료 등의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중앙총부 등에 야학원을 개설하여 한글을 교육하고, 전국 교당에 하달하여 일제히 문맹퇴지운동을 전개했다. 이해 10월 정산은 《건국론》을 저술하여 건국의 강령을 밝히고 국력을 배양하는 등의 방법을 제시했다.
1946년(원기31) 5월 전문적 교역자양성 기관으로 중앙총부 경내에 유일학림을 개설하고, 1948년(원기33) 1월 16일 ‘재단법인 원불교’의 등록인가를 받으며, 그해 4월 26일 〈원불교교헌〉을 통과시킨 다음, 27일 ‘원불교’라는 정식 교명을 선포했다. 교명의 선포와 관련하여 정산은 “원(圓)은 곧 만법의 근원인 동시에 또한 만법의 실재인지라, 모든 교법이 원 외에는 다시 한 법도 없는 것이며, 불(佛)은 곧 깨닫는다는 말이요 마음이라는 뜻이니, 원의 진리가 아무리 원만하여 만법을 다 포함했다 할지라도 깨닫는 마음이 없으면 이는 다만 빈 이치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원(圓) 불(佛) 두 글자는 원래 둘이 아닌 진리로서 서로 떠나지 못할 관계가 있는 것이라”(《원불교교사》 제2편 제5장)고 그 뜻을 밝혔다.
그해 11월에는 서울 한남동에 서울보화원을 설립했다. 1949년(원기34) 4월 25일 중앙총부 영모원 송림 안에 ‘대종사성탑(大宗師聖塔)’을 조성하여 열반당시 일제의 압력에 의하여 익산 금강리 공동묘역에 간이탑을 조성하여 안치했던 소태산의 유해를 옮겨 봉안하고, 26일 중앙교의회에서 ‘대종사주성업봉찬회’를 조직했다. 같은 달에 원광사를 발족하고 7월에 기관지 《원광》을 발행했다.
한국전쟁으로 모든 사업을 연기했다가 1953년(원38) 4월 26일에 ‘제1대성업봉찬대회’를 개최하고, 제1대 전체교도의 공부ㆍ사업ㆍ원성적 내역을 발표했는데 전체신도 32만여 명, 전무출신 260여 명, 전국 교당 50여개소, 기관 18개소의 규모였다. 이날 ‘대종사성비(大宗師聖碑)’를 건립했는데, 정산이 찬술한 비문은 원불교를 새 주세회상(主世會上), 소태산을 ‘백억화신(百億化身)의 여래시요 집군성이대성(集群聖而大成)’이라는 주세성자(主世聖者)임을 분명히 하며, 그 성업(聖業)의 계승을 다짐하는 요지를 담고 있다.
1951년(원기36) 6월 유일학림 중등부를 개편하여 익산에 원광중학교의 설립인가를 받고, 9월 전문부를 분리하여 원광대학 설립을 인가받아 이듬해인 1952년(원기47)에 개교하여 원불교 개교정신에 의한 교육 사업을 전개하게 되었으며, 이들이 원광학원ㆍ원창학원 등의 교육기관으로 발전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같은 해 중앙총부에 신룡양로원을 개설하고, 1953년(원기38) 5월 고아 수용시설인 익산보화원을 설립 운영하고, 전주양로원ㆍ동래수양원 등을 개설하여 사회복지시설의 터전을 마련했다.
1955년(원기40) 8월 ‘정관평 재방언 추진위원회’를 조직하고 이듬해인 1956년(원기41) 4월 공사에 착수하여 1960년(원기45)에 완공하여 2만7천여평의 새 농토를 마련했으며, 소태산 탄생지ㆍ대각터 등을 매입하여 영산성지의 개발에 착수했다. 1955년 1월에는 교무연합회에서 중앙총부의 중앙선원ㆍ익산의 동산선원ㆍ영산의 영산선원의 3대선원 설립이 공고되었고, 같은 해 5월 북일진료소를 설립했다. 1957년(원기42) 10월에는 익산에 동화병원을 개설하며, 1961년(원기46)에는 예비교무를 양성하기 위한 은산육영재단과 전무출신의 치료와 요양을 위한 법은재단을 설립했다.
1956년(원기41) 5월에는 수위단회 의결로 ‘대종경편수위원회’를 발족, 1958년(원기43) 5월에는 교서편수기관으로 중앙총부에 정화사를 발족시켜, 각종 교서편수에 총력을 기울였다. 1961년 4월 26일 정산은 회갑경축식에서 하나의 세계를 이룩할 기본강령이 되는 ‘삼동윤리(三同倫理: 同源道理ㆍ同氣連契ㆍ同拓事業)’를 발표했는데, 이는 ‘한울안 한이치에 한집안 한권속이 한 일터 한 일꾼으로 일원세계건설하자’로 풀이된다. 같은 해 12월 정산은 4대경륜인 ‘교재정비(敎材整備)ㆍ기관확립(機關確立)ㆍ정교동심(政敎同心)ㆍ달본명근(達本明根)’을 강조하고, 이듬해인 1962년(원기47) 삼동윤리를 전법게송으로 발표하고 1월 24일 열반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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