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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느림의 미학 236 젊은이의 배타심 <무주 덕유산 1,614m>
홍진후 추천 0 조회 924 18.05.28 21: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014.  2.  13  05;30

달빛이 흐려 하늘을 올려다보니 달무리가 외롭게 지었다.

올망졸망한 별들이 무리지어 둘러있고, 새 한 마리 겨울밤의 하늘가로 오르다

저 멀리 사라진다.

 

기상예보는 조금 흐리다고만 했는데 눈이 오려나,

"정월 대보름 전날이라 오늘 저녁 나물과 오곡밥으로 식사를 같이 해야 되는데" 아내의

잔소리 아닌 푸념을 귓전으로 흘리며 집을 나선다.

 

10;00

무주리조트에서 리프트를 타려고 젊은 스키어들과 함께 잠시 줄을 선다.

그런데 스키를 짊어진 젊은이들의 묘한 눈초리가 느껴지더니,

"나이 먹은 사람들이 등산배낭을 짊어졌으면 곧장 산으로 올라가지, 뭐하러 리프트를 타?

저 사람들 뭐야?~"하는 소리가 귓가에 들린다.

 

작년 9월 기억하기 싫은 어느 날.

아내가 척추수술을 받은 지 1년이 넘자 몹시 답답하다고 해 대학로의 소극장을 찾는다.

연극제목이 뭐더라?

기억도 나지 않지만, 지하로 된 공연장에 들어가며 아차 후회가 된다.

 

굵은 철통으로 된 등판에 허리를 대며 자리에 앉자마자,

뒤에서 "저 사람들은 뭐야?" 하며 소근 대는 소리를 듣는다.

홀 안에 암묵적으로 흐르는 젊은이들의 배타성에 연극이 시작하기도 전에 등 쪽으로

묘한 시선을 느끼며 뒷머리가 근질거린다.

 

연극을 시작하기 전 출연배우가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고 관객들과 대화를 시작한다.

여기저기 젊은이들에게 질문을 던지며 우스갯소리를 하더니, 나보고 결혼 몇 주년이냐고

묻는다.

 

우물쭈물하다가 35년이 되었다고 하니 한쪽에서는 "와!"하며 박수를 치기도 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노인네들이 왜 왔어? 뭐야?" 하며 못마땅한 분위기를 느낀다.

 

결국은 일 막이 끝나고 허리 통증이 심하다는 핑계로 문을 열어 달라고 사정을 해

소극장에서 빠져 나온다.

밖으로 나와 시원한 해방감을 느끼며, 비로소 뒷머리가 가려웠던 압박감에서 벗어난다. 

 

현역시절 화양리 술집엘 들어가는데 입구에 선 웨이터가 나이가 많아 입장이 안된다며

막아선다.

접대하려고 고객과 같이 갔는데 꼴이 말이 아니다.

억지로 들어갔어도 이질적인 술집문화에 적응 못하고 바로 나올텐데 고집을 부릴 수가 없다.

 

아마도 영등포역 지점장 때 '연흥 카바레'였지.

고객들과 카바레에 들어가니 전라(全裸)의 여인이 알몸으로 흐느적거린다.

사람들의 지저분한 냄새와 질퍽거리는 게 싫어 기본으로 나오는 맥주 세 병을 그대로 

둔 채 나온다.

밖으로 나와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한잔하며 해방감을 느끼던 분위기를 지금도 잊지 못하는데,

왜 여기서 느끼는 걸까?

 

스키부대 출신이 스키를 잘못 타서인가,

고백하지만 난 스키부대 출신이라도 현역시절엔 스키를 한 번도 신어본 적이 없다.

 

당시는 월남병력이 마지막 철수를 할 때라서 나는 월남 스키부대 출신이라고 농담을 하다가

괜히 심술이 나서 40대 초반에 초급을 면하기 직전까지는 배웠는데, 지금은 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속으로 소리를 지른다.

"그래 너희들은 젊다.

독일속담에 젊은이들은 빨리 달릴 수 있지만, 노인(老人)은 빨리 가는 지름길을 안단다."

 

옛말에 '노마지지(老馬之智), 노마식도(老馬識道)'라는 말이 있다.

중국의 춘추 전국시대 군사들이 혹한 속에 길을 잃고 헤맬 때 늙은 말을 앞세워 지름길을

찾았다는 고사(故事)로 나이가 들고 경험이 많은 사람의 지혜를 활용하라는 뜻이다.

 

무주구천동에서 백련사를 거쳐 향적봉에 오르는 3시간 코스나,

안성에서 동엽령을 거쳐 오르는 5시간 코스를 피해서 리프트를 타고 쉽게 정상에 오르는


어색함을 감추려고 고사성어를 내세우는 나 자신이 조금은 민망하다.  

 

리프트 아래로 백색의 향연이 펼쳐지고, 그 설원을 거침없이 내달리는 젊음을 창밖으로

물끄러미 바라본다.

 

은빛깔이 빛나기에 무슨 나무일까 자세히 보니 자작나무(白樺)이다.

백화 옆에는 끝이 누런색인 거제수나무(黃樺)가 벌거벗은 몸으로 순수, 정직, 슬픔을

노래한다.

 

바람에 떨리며 웅웅하는 소리는 누구의 울음인가,

자작나무가 자기는 정직하다고 소리를 지르는 걸까?

백화가 슬픔에는 거짓이 없다고 바람에 스치며 우는 모양이다.

 

타락한 사람들은 껍질 벗겨진 자작나무를 보더라도 아무런 감정이 없겠지.

백화(白樺)는 백설 위에 순수한 알몸을 보여주며 정수리엔 겨우살이를 잔뜩 이고 있다.

 

백두산 '이도백하'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자작나무숲을 보며 탄성을 질렀는데,

하늘로 곱게 뻗어 오른 은빛의 자작나무를 보며 탄성을 지를 만큼 온몸이 떨리며 가슴이

설렌다.

 

 

10;30

2009. 2. 21 덕유산엘 오르고, 오늘 다시 오르니 5년이라는 세월이 덧없이 흘러갔나?

 

내 마음의 카메라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지, 

예전의 추억을 쫓던 내 시선은 허망하게 하늘을 바라본다.



우리나라엔 영험(靈驗)한 산이 많다.

하지만 덕유산 또한 다른 산 못지않다.

설천봉에 서자마자 벌써 꿈틀거리는 산릉의 기운을 받았는지 힘들지도 않고, 추위를 느끼지

못하겠다.

 

산으로 오르며 빼곡히 들어찬 자작나무, 소나무는 속살이 비칠 만큼 얇은 눈옷을 입었다.

고도를 높이면서 눈옷의 두께는 점점 두꺼워지고 1,500미터를 넘자 아예 눈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가지가 축 쳐져있다.

 

 

설천봉(1,470m)에 팔각형 한옥인 상제루(上帝樓)가 침묵을 지키고, 기와를 3층으로 쌓아

올린 독특한 문양이 화려하다.

 

나는 눈에 몸을 묻고 산의 일부가 되기 위해 설국(雪國)을 오르기 시작한다.



며칠 전 축복처럼 적당하게 내린 눈으로

나무에는 설화(雪花)가 피고, 구상나무 군락지에는 상고대(霜花)가 만발하였다.

 

나무와 봉우리와 골짜기, 이 산에 사는 작은 생명, 큰 생명까지도 휴식이 필요한 겨울.

산은 문(門)을 닫고 사람들의 발자국과 사람의 냄새를 지우려 흰 눈이 덥었다.



설천봉, 향적봉, 중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눈의 감옥이다.

산이 문(門)을 닫을 줄 알았는데, 나한테는 문을 열어준다.

 

벼랑을 갖고 있는 거대한 봉우리들이 침묵으로 우리를 압도한다.

나는 그 실체에 다가가기 위해 카메라 렌즈를 당긴다.

벼랑의 고도로 절제된 풍경은 경이로운 눈꽃과 어우러져 탄성을 지르게 한다.



눈 밟는 소리가 사각거린다.

잠시 지난달 다녀온 한라산의 장쾌한 설경을 그리워하다가, 오밀조밀한 아름다움을 지닌 

덕유산의 설경에 감탄을 한다.

 

어느 코스로 정할까?

향적봉~동엽령 4.3km~안성탐방지원센터 4.2km 약 10km의 종주산행으로 정한다.

5시간이면 되겠지.

 

리프트를 타고 올라와 큰 비용과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도 덕유산은 하얗고 멋있는 눈(雪)을

거저 주다니, 눈 속의 거대한 나무들을 보며,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나무 아래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겸허한 눈으로 자연을 바라봐야지,

이 거대한 자연의 돌, 나무 한 그루라도 경외심 없이는 바라볼 수가 없다.

바람이 잠시 멎더니 숨 막힐 듯 고요가 슬그머니 다가온다.

 

설천봉에서 향적봉으로 오르는 길은 힘들지도 지루하지도 않고 단순하지만,

가파르지 않은 능선 길은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풍경이 달라진다. 

 

능선이 사라질만하니 거대한 바위가 나오고,

다듬어지지 않은 봉우리와 능선이 어우러진 신(神)의 세계를 만난다.

 

세상의 시름을 잊고 선경의 세계를 맛보라고 신이 주는 선물인가 보다.

여기는 지혜와 덕을 쌓아야 올라설 수 있는 하늘의 문(門)이다.



바위들이 수억 년의 기억을 오롯이 갖고 날카롭게 날을 세운다.

 

하늘을 찌를 듯 날카롭게 서 있는 암봉은 서울에서 여기까지 오느라 걸렸던 시간을 충분히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풍경이다.

 

 

10;50

이십여 분 후 하늘로 날아 오른 듯 홀연히 나타난 덕유산 정상(1,614m).

정상의 텅 빈 봉우리는 텅 빈 하늘빛과 텅 빈 땅이 백색과 청색으로 뒤엉키더니 금세 사람들과

어우러진다.

서로 스며든 걸까?

 

정상석과 텅 빈 하늘을 보며 가슴 차오르는 감동의 절정을 맛본다.

오르가즘을 느끼는 걸까?

한라산을 다녀온 후 산에 대한 심한 갈증을 느꼈는데, 오늘에서야 산에 대한 갈증이 없어진다.



'덕이 많고 너그러운 산'이라는 이름의 덕유산(德裕山)은 유난히 눈이 많은 산이다.

서해의 습한 대기가 내륙으로 진입하여 덕유연봉을 넘게 되는데,

이때 해발 1000m 가 넘는 덕유산에 부딪친 대기가 강제로 상승하면서 눈구름이 형성돼

눈을 많이 뿌리게 된다.

 

남덕유(南德裕)가 날카로운 암봉으로 이루어져 남성적 골기(骨氣)를 갖춘 산이라면,

지금 내가 딛고 있는 북덕유(北德裕)는 전형적인 부드러운 육산(肉山)이다. 



바위로 이루어진 정상을 향해 눈을 뒤집어 쓴 주변 산들이 정상을 향해 읍례(揖禮)를 하기에

덕유산은 백두대간에서 겨울의 눈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옛날에는 덕유산을 광려산(匡廬山) 또는 여산(廬山)이라 했고, 저 앞에 보이는 남덕유산을

봉황산(鳳凰山) 또는 황산(黃山)이라 했다고 하며,

우리나라 역대 고승들의 전기를 모아 엮은 책인 동사열전(東師列傳)에는 덕이산(德異山)으로

나온다.

 

불가에서 지혜(智慧) 제일의 문수(文殊)를 상징하는 산이 지리산(智異山)이라면, 덕이산

즉 덕유산은 덕행(德行) 보현(普賢)을 상징하는 산이라 한다.


                       [      돌무덤

 

                    그 옛날 고즈넉한 봉우리가 좋아 올랐었지.

                    백발 되어 찾은 정상의

                    말 없는 돌무덤은 예전 그대로인데,

                              나만 초로(初老)의 신세가 되었구나.

                   

                    눈빛 흐린 잔주름으로

                    흐르는 세월 감내 못해

                    아쉬워한다고 말하니

                    외로이 서 있는 돌무덤이 씩 웃는다.                석천   ]

 

꿈틀거리는 산들이 파노라마를 펼친다.


가야산~비계산~황매산으로 이어지고, 중봉 위로 지리산 천왕봉이 솟아오르더니

무룡산, 남덕유산이 장관을 이룬다.

살짝 낀 산안개속으로 대둔산, 계룡산, 서대산이 가물거린다.

 

정상은 뽀족한 봉우리가 아니다.

수백 명 아니 천 명 넘게도 족히 둘러앉을 만큼 넓은 평원이다.

속세에서 흔한 혼돈과 갈등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 어우러진 이곳 정상에는 없다.

 

눈(雪)이 암울한 색의 모든 것을 지우고, 태양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빛나게 해주는 그림은 

내 생애 최고의 그림이다.

눈 쌓인 향적봉은 땅이 아니라 그대로 하늘이고 선경(仙景)이다.

 

11;00

덕유(德裕)는 겨우내 눈으로 길을 묻는다.

대개의 산이 그렇듯이 어디에서 시작하든 모든 길은 이곳 향적봉에서 만난다.

 

나는 가끔 태양의 일출과 일몰을 관장하는 덕유산 향적봉의 꿈을 꾸었지.

구불구불 이어지는 장대한 능선,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남덕유산,

큰 바위가 일품을 이루는 능선의 옆구리, 말갈기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장쾌한 능선은

쭉 달리다 꺾어지기도 하고 봉우리와 부딪치기도 한다.

 

더 이상 높이 오를 데가 없으니 여기는 세상의 끝이다.

세상의 끝에서 또 다시 시작되는 길.

 

저 아래 뒤틀린 길이 보인다.

세상의 끝도 세상의 시작점이 되기에 다시 새 인생을 시작해볼까?

 

어느 광고 카피에서 "겨울 산행은 행복한 외로움"이라고 한다.

달력 지우기가 끝난 연말이 벌써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다 되어간다.

 

비움과 채움, 그리고 인생의 쉼표라!

대다수의 전문가들은 백세인생이 대세라는데, 아직 쉴 때가 되진 않았겠지?


잠시 몰아치는 거대한 바람이 도시의 소음과 먼지에 찌든 나의 몸뚱아리를 사정없이

두드리고, 눈에 묻힌 대피소의 풍경은 또 하나의 수묵화이다.

 

덕유산의 부드러움과 장엄함,

그리고 적막 뒤에 찾아오는 가슴 서늘한 아름다움이 두려움처럼 내 가슴에 밀고 들어온다.


수채화로 그린 것보다 맑은 날씨가 정상을 채웠고,

세상의 중심인양 순백의 부드러운 능선이 이곳에서 퍼져나간다.

 

백두대간의 능선 위로 붉은 태양이 불끈 솟구치고, 붉은 빛이 흰 능선에 닿자 산릉은

새 생명을 얻은 듯 꿈틀거린다.

 

맑은 공기는 멀리까지 시야를 확보해준다.

바람이 잠잠해지더니 세상은 숨죽인 듯 고요하다.


 

잠시 뒤를 돌아보니 엷은 구름이 향적봉을 집어 삼키고 대신 우리를 토해낸다.

 

외로운 주목나무는 기이한 모습과 청색의 푸름을 같이 보여준다.

수백수천의 봉우리, 수천 갈래로 갈라진 골짜기는 흰 눈으로 덮였고, 산봉우리는 하늘을

뚫어 솟구쳤다.

 

장난기를 발동하여 소리를 지르니 메아리가 바로 대답을 한다.

 

갑자기 산의 한쪽이 감춰진다.

구름과 안개가 미운 게 아니라 그쪽으로 가까이 가지 못하는 내 몸이 미운 거다.

햇살이 퍼지면 가까이 가지 않아도 제 모습을 보여 주려나?

 

탐스럽게 주목나무에 켜켜이 달라붙은 눈은 천 년의 눈인가?

이 눈꽃은 하나하나가 다 다르다.


눈꽃이 핀 숲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재미있다.

숲은 수시로 변한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활엽수들은 얇은 눈옷만 입은 채 부들부들 추위에 떨고,

상록수 가지들은 두터운 눈옷을 입고 침묵을 지킨다.

 

저쪽의 주목 한 그루는 하늘에서 떨어지던 눈을 욕심껏 주워 담아 가지가 찢어지려 하고,

바람과 햇살이 빚어낸 광활한 설국은 백색의 향연을 베푼다.

 

가까운 듯 멀리 있는 봉우리.

산 빛에 물든 우리 얼굴은 점점 산이 되어간다.



햇살을 받은 산은 붉은 기운을 띈다.

장엄한 산줄기가 이어지고 급할 거도 없는 일정이니 천천히 능선을 따라 걷는다.

 

눈 덮인 나무 아래에 서니 그냥 마음이 맑아지고 순수해진다.

이래서 이 길은 힐링(Healing)의 길인가.

 

나의 이 시간 욕망도 불안도 없고 아무 것도 필요 없다.

단지 흰 눈 위에 내가 순수(純粹)해질 수 만 있다면 이 자체가 행복이고 열반이다.

순수(純粹)를 느끼면 내 오염되었던 의식도 치유되겠지.

 

이 순백의 눈 위에선 걱정, 근심, 의심, 미움과 원한도 없고 가슴에 맺힌 미련도 없다.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고 지상을 떠나 천상을 훌훌 날고 싶으니, 이게 바로 깨달음인 모양이다.

 

하늘과 맛 닿은 능선 길은 먼 여정이지.

눈길 위에 선 나, 이 길은 나의 길이로구나.


그냥 대자연에 스며들고 싶을 뿐 분주함도 성급함도 도시에 남겨두고 왔으니,

도시의 소음이 멀어진 산길이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진다.

 

멋진 풍경은 감동을 준다.

가보지 못한 미지의 땅에 숨겨진 보석들,

무질서하게 서 있는 나무들은 또 하나의 풍경인데, 이곳에서 질서를 따지는 내가 바보지.

 

산속의 낙원!

이 느낌을 카메라로 표현해야겠다.

고요한 설국(雪國)을 카메라로 맑은 공기까지 찍을까?

백두대간의 줄기가 말의 등걸처럼 퍼져 나가고, 바람이 밀어 올린 눈 처마가 제법 깊다.

 

고사목에도 시간이 있는 걸까?

잠시 시간이 멈춰진 듯 난 진공(眞空)의 세계로 들어간다.

고사목의 설화를 넋을 잃고 바라보며, 난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애환도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으니 내 마음도 이미 진공의 상태로 들어선 모양이다.

 

눈 쌓인 흙길과 너덜 길을 이리저리 걷다보니 토기(土氣), 암기(岩氣)가 몸속에 제대로

들어왔는지 늘어진 얼굴의 볼 살도 탱탱해지고 허벅지에도 힘이 솟는다.

 

눈 덮인 산길은 부드럽다.

바위 길의 까다로움도 너덜 길의 부산스러움도 눈이 부드럽게 지워 나가서인지,

아이젠을 착용한 발바닥이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진다.

잠깐 나온 된비알이 숨결을 거칠게 만들어 주더니, 이젠 가쁜 숨마저 스르르 눈에 묻힌다.

 

눈꽃이 서서히 녹는다.

밝은 햇살의 온기를 받아 견디지 못했나 보다.

 

소나무, 단풍나무, 신갈나무가 빼곡한 평범한 숲에 내린 눈이 예술작품을 만들었다.

나는 오늘 산꾼이 아니고 예술작품을 순례하는 관객(觀客)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숲을 어디에서 보았지?

순백의 세상에 내가 들어섬은 자연의 순결을 빼앗는 죄를 저지르는 건가.

눈꽃 터널을 걸어갈수록 괜히 미안해지고 내 죄의식은 점점 커진다.

 

고요한 숲 속 어디선가 환희의 노래가 들린다.

환청을 듣는 걸까?

바람의 방향에 맞춰 나뭇가지에 붙어있는 눈꽃을 살짝 흔들어본다.


거센 바람 앞에 한껏 키를 낮추고 수백 년 세월을 살아온 관목과 교목들.

구름이 능선을 넘나든다.

바람은 산이 외로울까봐 거세게 흔들어대는 모양이다.

 

천 년 삶을 이어오던 주목나무가 고사목이 되었다.

죽어서도 이곳을 천 년 동안 지키겠지.


무슨 한(恨)이 그리 많아 자연에 스러지지 않고 버틸까,

나를 하염없이 기다렸나 보다.

 

11;30

산에 묻혀, 눈에 묻힌 주목나무의 은빛고요가 맑고 투명하다.

눈꽃이 툭하며 떨어진다.

세상의 소음과 번잡함은 자취 없이 사라지고 흰 눈을 덮어쓴 주목만 외롭다.

 

             [         주목(朱木)나무

 

                  예전에 만났던 주목이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흐르는 세월을 지켰구나.

 

                  내가 홀연히 세상을 떠나도

                  이곳을 지키려니

                  살포시 안아볼까.

 

                  주목의 침묵에 귀를 기울이며

                  말을 하니

                  내가 말하는 것은 순수(順粹)를 잃은

                  소음으로 아는지

                  나보고도 침묵을 지키라 한다.                          석천   ]

 

눈(雪)으로 덮인 멋진 풍경을 눈(眼)으로 본다는 거는 참 행복한 일이다.

사진(寫眞)은 나이를 먹지 않고,

셔터를 누르는 그 순간 그 모습을 간직한다.

 

인생에서 남는 건 사진과 가슴속에 오롯이 있는 추억이지.

세찬바람으로 기온이 급강하해 방풍재킷을 꺼내 입는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황홀하고 장엄한 눈의 능선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지킨다.

예전에 방태산 구룡덕봉에서 산군(山群)의 거대한 파노라마를 보며 '산 중의 산'이라 했는데,

내가 딛고 있는 이곳은 거대한 '산 속의 산'이다.

 

발아래 일망무제 속세가 하늘과 맞닿는다.

오늘은 천지인(天地人)과 눈(雪)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날이라 삼계대권을 쥔 옥황상제도

부럽지 않다.

덕유에서 거대한 자연의 성채를 느끼는 것은 나 혼자 만의 느낌일까?

 

저 아래 뿌연 속세의 세상이 보인다.

속세를 말없이 내려다보는 바위들의 유현한 모습은 한 폭의 진경산수화를 그리며,

맑은 공기는 내 눈과 폐를 말끔하게 씻어줘 시원하게 해준다.


11;30 

앞에 솟구친 백암봉(1503m)이 외롭다.

하늘 아래에서 솟아오른 게 아니라 넓적한 근육질을 가진 산의 품에서 솟아났기 때문인가.

 

산이 있어 하늘은 저리 무한 팽창하는가,

가없는 하늘아래 능선과 계곡들이 꿈틀거리며 몸부림친다.

 

발이 푹푹 빠지는 눈밭을 헤치며 산길을 벗어나자 산은 크기와 깊이를 더하며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중봉(1,594m)을 중심으로 모여든 철쭉과 단풍나무의 눈꽃은 나를

신비 속으로 끌어 들인다.



잠깐 쉴까?

휴식은 낭비하는 시간이 아니다.

쉬지 않고 계속 오르면 금방 지친다. 

 

특히 등산을 할 때 쉬지 않고 계속 오를 수는 없다.

따라서 높고 험한 산의 정상을 밟기 위해서는 힘들다 생각되기 전에 잠깐씩 휴식을 취하는 게

많은 도움이 된다.

쉬지 않고 오르면 많이 오르지 못하고 하산해야 한다.

 

이정표 앞에서 불을 피워 라면을 끓이며 염치없는 행동을 하는 두 사람이 눈에 거슬린다.

염치(廉恥)는 마음의 주인이다.

염치는 사람과 동물과 구별이 되고, 사람이 사람다운 게 근본이라,

아무리 배가 고픈 욕망이 들끓어도 체면을 차리고 삼가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게 아닐까?

 

사람은 사람다워야 존재가치가 있는 게지.

사진을 한 장 찍을까 하다가 내 카메라가 오염이 되는 게 싫어서 참는다.



산길에 직선은 없다.

어쩌다 나오는 직선 길은 매우 가파르다.

산길은 잠시 직선으로 이어지다 곡선으로 바뀐다.

 

산에서나 사회에서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선 길이나 지름길을 택하기 마련이다.

더 빨리 더 쉽게 가기 위해서이겠지.

 

그러나 산행은 올림픽 게임이 아니다.

올림픽에서는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 등등 구호가 있지만, 여긴 산이라는 대자연이라

나는 천천히 걷는다.

 

대자연에서는 곡선(曲線)이 좋다.

이리저리 휘이고 꺾이고, 잘라져 막다른 길만 아니라면 구불구불 돌아가는 길이 좋다.

천천히 곡선으로 된 길을 걷노라면 나도 모르게 여유가 생기고 마음이 편하다.

이렇게 꼬부라지는 길을 걸을 때면 많은 사색을 할 수 있고, 또한 많은 사물을 관찰할 수

있어 좋다.

 

직선(直線) 길은 힘들고 그냥 무념무상(無念無想)이라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을 때가 많기도

하지만, 급해 놓치는 거도 많고 여유를 느끼는 맛도 없어 재미가 덜하다.

 

나는 덕유평전의 눈 쌓인 곡선 길을 걸으며 대자연의 찬가를 부른다.

삶의 의미를 느끼며 되돌아보고, 사색을 하며 통찰을 얻는 거는 곡선(曲線)이라는

시공간(視空間)에서 느림의 미학을 얻으면 되는 거라,

천천히 완행의 보폭으로 저 멀리 무한대로 뻗어 있는 백두대간 길의 세상을 다 가진다.

 

덕유평전은 '아고산대'이다.

아고산대는 해발고도가 1,500~2,500m로 바람과 비가 많으며 맑은 날이 적고 기온이 낮아

키가 큰 나무들이 잘 자랄 수 없는 곳이다.


철쭉, 진달래, 조릿대, 원추리 등 바람과 추위를 잘 견디는 식물들이 사는 생태적 가치가

높은 곳으로 백두산 정상 부근, 지리산 노고단, 세석평전, 소백산 비로봉 등을 대표적인

아고산대로 꼽는다.

 

등산을 하며 가끔 어떤 산이 좋을까 생각을 해본다.

난 겨울 산이 좋다.


살을 에는 눈바람이 온몸에 스며드는 강추위가 어울리는 겨울 산이 산중의 산이지.

겨울 산이 산의 속살을 보여주는 거도 좋지만, 유난히 땀을 많이 흘리는 체질이라

여름산행보다 나는 겨울산행을 으뜸으로 친다.


사상체형(四象體形) 중 나는 무슨 체형일까,

사상체형은 소음인, 소양인, 태음인, 태양인으로 분류한다.

한의학에서는 사상체질(四象體質)로 설명하는데, 독도법(讀圖法)의 전문가인 '박승기 강사'는

몸의 형태인 사상체형에 대해 더 주목을 한다.

 

소음인은 전반적으로 몸이 마른 체형이며, 소양인은 표준형이지만 상체가 발달해 역삼각형의

체형이 많다고 한다.

태음인은 비만형, 태양인은 근육형이라고 하며, 소음인 소양인은 추위를 많이 타는 체형이지만

태음인 태양인은 열이 많은 체형이라 등산복을 입는 방법도 달라야 한다라고 그는 말한다.

 

추위를 많이 타는 소음인, 소양인은 몸에 딱 붙는 울 속옷을 입고, 그 위에 조금 여유있는

울 속옷을 하나 더 입은 후 다시 그 위에 폴라폴리스 재킷을 입어 몸에서 발산되는 열을 최대한 

저장할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반면 몸에 열이 많은 태음인과 태양인은 딱 붙는 속옷을 입고 두 번째 속옷을 입되, 세 번째

겉옷으로는 얇은 바람막이를 입어야 몸에서 열이 과도하게 머무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양말이나 장갑을 착용시에도

소음인과 소양인은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속 양말(속 장갑) 두 개를 껴신어 체온을 보존하고

등산화(겉 장갑)를 신어야 하며,

태양인과 태음인은 첫 번째 양말을 신고 등산화만 신어도 체온을 유지할 수 있다는데,

나는 땀이 너무 나 티셔츠 한 벌만 입고 산행을 하니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체형이 다르면 성격도 다르고 산행 스타일도 다르다.

소음인은 얌전하고 모든 일을 세밀하게 하는 성격이라 대장을 보좌하는 보좌관 역할이

어울리고, 소양인은 솔직담백한 성격에 매사에 열성적이라 분위기 메이커이다.

태음인은 의젓하면서도 인내력과 성취력, 포용력이 있어 팀에서 어머니 역할을 하며,

태양인은 전형적인 대장 스타일이라고 그는 말한다.

 

체형은 등산코스를 선택하는데도 영향을 미치는데,

젊을 때는 크게 상관이 없지만 나이가 들수록 육산(肉山)과 악산(岳山)을 구별해서 가는 게

좋다며, 대체로 덩치가 좋은 태음인과 태양인은 근육과 관절에 무리가 덜 가는 육산이 좋고,

몸이 가벼운 소음인과 소양인은 악산이 맞다고 한다.

또한 하체가 약한 태음, 태양인은 길게 올라가고 짧게 내려오는 코스가 낫고,

하체가 강한 소음 소양인은 짧게 올라가고 길게 내려오는 코스를 선택하는 게 좋다고 한다.

 

덕유산은 전형적인 육산으로 우리 체형에 맞는 걸까?

오늘은 짧게 올라오고 길게 내려가는 코스인데 제대로 선택하였겠지.

느림의 미학으로 동행하는 벗들의 모습을 보며 사상체형에 대해 생각해본다. 


 

황량하고 어둡기만 하던 '중봉(1,594m)'에 하늘빛이 고였다.

조릿대의 초록 위에 순백으로 채색을 해서인지, 한겨울의 독한 추위를 기대했는데 오히려

따뜻하다.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높고 차가운 곳인데도 태양의 손길이 가까이 있어 오래 머물기

때문인가?

순백의 세계는 오직 한 가지 색으로 세상에서 명암(明暗)의 경계가 사라지게 한다.

 

눈 쌓인 덕유평전이 아름다운 이유는 넓은 하늘을 그대로 받아서인가?

지나온 능선 길을 뒤돌아보다 옆을 보니 '가야산'으로 거대한 빛내림이 시작된다.

히말라야의 거대한 연봉을 연상하다가 갑자기 머릿속에서 깨달음이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어느 한순간도 머물지 않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세계인 하늘은 수시로 변한다.

바람의 방향도 수시로 변한다.

여기서 변하지 않는 건 나의 마음과 대자연의 감흥이 매순간 담겨지는 카메라뿐이다.

 

산은 아래에서 보는 것과 정상의 능선에서 보면 또 다르다.

함께 오르고, 기록하고, 사진을 찍고 하는 행동이 내가 나이 먹어서 할 일인가?

느림의 미학이라는 거창한 글제로 졸필이라도 끄적거린 게 벌써 이백 회가 넘었다.

 

봉우리에서는 바람과 눈이 하모니를 이루더니 금방 구름과 하늘까지 하모니에 담는다.

이런 풍경이라면 누구라도 아름다움을 느끼지.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마음으로 보아야 위대한 대자연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걸까?

보다 크고 넓고 아름다운 것은 마음으로 느껴야겠지. 

 

살아있는 자연은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오늘은 무엇이 가슴에 남을까?

가파른 길을 넘어설 때마다 인생의 굴곡을 넘는 거 같다.

 

간간이 몰아치는 삭풍이 나무를 뒤흔들더니 내 몸에 마구잡이로 부딪힌다.

눈의 세상은 밝다.

툭! 하며 허공을 가르며 눈 떨어지는 소리가 정겹다.

 


산은 누구든 내치지 않고 품어준다.

20년 전 강원도 인제 귀둔 마을에서 점봉산 정상에 오른 후 불법 올가미를 치우며 내려

오다가 길을 잃는다.


곡선 길에서 나뭇가지를 꺾어 분명히 표시를 해뒀는데 지나친 모양이다.

천신만고 끝에 길을 찾아 무사히 하산을 한다.

 

산은 내가 욕심을 부리고 잘못된 길을 갈 때는 스스로 길을 잃게 하여 올바른 길로 가도록

가르쳐 준다.

어찌 보면 그게 자연의 섭리이지.

너덜지대를 지나며 가파른 바위길이 나와 힘겹게 오르며 마지막 힘을 쏟는다.

방법은 천천히 걷는 거뿐, 절로 몸이 낮춰지고 겸손해진다.

 

흰 눈을 머리에 인 채 고독에 흔들리지 않는 거대한 바위를 가진 봉우리가 산안개에

가려졌다가 작은 움직임도 없이 침묵 속에 모습을 드러낸다.



13;00 

차고 시린 골짜기에서 골바람이 올라오더니 목덜미를 파고 들어온다.

 

                [       선계(仙界)

 

                   여기는 세상을 건너가는 곳인가,

                   바위에 뿌리를 박고

                   수백 년 세월을 지켜온 소나무는

                   내가 오는 것을 이미 알은 모양인지

                   가까이 다가서니 알몸을 부르르 떤다.

 

                   선계(仙界)에서 서 있는 나무들은 

                   인간들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스치는 바람에 몸을 부르르 떨며

                   몸짓으로 하는 이야기를 들어볼까?

 

                       사람은 사람이고 나무는 나무일뿐인데,

                   오늘은 이야기가 되니

                   나는 산을 닮고

                      나무를 닮고 싶은 모양이다.                               석천   ]



오솔길이 나온다.

이 세상에서 오솔길이야말로 직선과 곡선의 조화를 이룬다.

오솔길은 시간이 머무르니 속도는 없고 오로지 느림만이 숲 속에 존재한다.

 

나무를 껴안는다.

이 나무는 외로웠다고 추위에 떨며 나에게 가슴 떨리는 고백을 한다.

 

                 [         마음의 속도

 

                     나무 밑에 무릎을 꿇으면

                    '노루귀'가 귀를 쫑긋하며

                     살짝 고개를 들고 나올까,

                     아님 복수초가 노란 얼굴로 달려 나올까?

 

                     복수초야 노루귀야

                     지금 나오면 추위에 혼난다.          

                     느리고 천천히 여유롭게 나오너라. 

                    

                     동박새가                     

                     햇살이 따뜻해져

                     눈이 녹을 때 나와도 좋다고 짹짹댄다.

 

                     그것 참

                     나무와 조릿대랑 이야기를 하니

                     내 마음의 속도도 느려지거든.            석천   ]


작고 여린 노루귀와 노란색의 화신인 복수초는 일 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렸는데,

내가 지금 복수초를 기대하는 거는 자연을 잘 모르는 나의 어리석음이다.

 

모든 꽃은 작던 크던 고독이 피우는 미소로 사람을 대한다.

미소 뒤에 암향(暗香)을 낮게 퍼뜨리며 주변을 고독하게 만드는데, 여기보다 더 남쪽에서

들려오는 매화의 난향(蘭香)이 그리워서일까?

 


         [                 복수초

 

                    흰 눈 아래 복수초 새싹은

                 잔뜩 웅쿠리고 있겠지.

                 눈 위에는 지나간 사람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데,

              

                 외로운 숲 길가에

                 복수초 한 그루 보이지 않는다.

 

                 오늘밤엔 어둠 속에 홀로 빛나는 보름달 보고 

                 외롭게 혼자 밤하늘을 지키라 하고.

                 나는 혼자만의 사색을 하며 너를 기다리련다.        석천  ]



잠시 침묵을 지킨다.

묵언정진인가?

산의 침묵 속에 물 흐르는 소리를 듣는다.

 

나는 봄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눈 녹은 계곡물 속에 개구리가 겨울잠을 자고 있을까 슬그머니 물속을 들여다본다.

 

13;25

눈길에서 나 스스로에게 인생길을 물어봐도,

아무리 생각해도 나머지 인생길이 보이질 않는다.

 

이 나이가 되었어도 사물을 볼 때 보고도 알 수 없고, 들었어도 이해를 할 수 없어,

끊임없이 의문이 일어나고 회의를 느끼기도 한다.

산행도 수행(修行)이니 만덕을 쌓아 덕과를 장엄하게 하는 화엄(華嚴) 그 자체일까?

 

지나가는 바람에게 길을 물어야겠다.
눈길에 발자국을 내며 앞서간 이의 발걸음을 쫓지만 인생길에 대한 대답은 없다.

 

 

나는 기다린다.

나무는 봄이 되면 어김없이 새 이파리가 날 거고,

꽃이 피고, 단풍이 되고, 모진 북풍에 알몸이 되면 침묵으로 말 하겠지.

나 또한 나무가 세월이 흘렀다고 말을 할 때까지 침묵으로 기다릴 뿐이다.



14;30 

고도를 700m 이하로 낮추니 조금씩 봄기운이 든다.

추우면 어떤가?

봄이 오고 여름이 오면 땀을 흘리면 되고 추우면 추운대로 그냥 사는 거지.



친구는 세월이 참 빠르다고 한다.

나이는 드는 게 아니라 익는 거고, 세월은 가는 게 아니라 오는 게 아닌가.

 

왜 살아야 하는지 누가 답을 줄까?

책이 줄까? 종교가 답을 줄까?

가끔은 생각해보고 다독(多讀)을 하지만 책에선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책의 글은 대개가 비극적인 죽음, 사랑의 슬픈 운명, 절망과 갈등을 이야기 한다.

 

비록 육체는 고통스럽지 않은 삶이지만, 이 나이가 되어서도 살아가는 이유를 모르는

자체는 정신적인 고통이다.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사실 이 나이가 되도록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다면 부끄러운 일이지. 

 

얼마 전 청운회 소모임에서 가까운 친구가 말한다.

건강도 안 좋고 눈도 치료 중인데, 글을 쓰는 일에 너무 몰입을 하는 거 아니냐고 걱정을 해준다.

 

내가 언제 인생의 무엇에 대해 이토록 몰두할 수가 있었을까?

어쩌면 졸필이라도 끄적거리는 게 이제는 내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즉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가 되는 거지.

 

내가 좋아하는 산, 가보지 않은 새로운 산에 다녀오면 최소한 일주일은 산의 냄새가

내 주변을 어른거리고, 그 산의 향기와 모습이 산행에세이를 끝낼 때까지 떠나질 않는다.

 

국문학을 전공했더라면 조금 더 멋있는 미사여구를 동원해 폼나는 글을 쓸 수가 있을 텐데,

내가 쓰는 거는 고작 고리타분한 졸필이다.

 

그래도 좋다.

폼 나고 향기 나는 글을 못 쓰더라도 쓴 글이 어쩌다 마음에 들면 내 가슴이 괜히 뭉클해지는,

내 영혼이 묻어있는 글을 쓰고 싶은 거다.

 

15;10

4시간 40분 만에 10여 km의 산행종주를 끝낸다.

 

덕유산의 웅장한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장엄하게 귓가에 들려온다.


힘들고 지치면 언제든지 자기 품에 안기라고 침묵으로 말하며, 세월에 지친 내 영혼을

속삭이듯 위로한다.

 

19;00

외로운 봉우리를 보지만 불어오는 바람이 구름을 밀어낸다.

석양에 물들어 황금빛으로 빛나는 산릉 어디선가 범종소리 들려온다.


하늘이 붉게 물들더니 순식간에 어둠이 밀려온다. 

어둠이 밝아지더니 조금 늦게 떠오른 보름달은 해원(解怨)과 소망을 품고,

내 그리움과 함께 따라온다.

이렇게 세월은 새롭게 오고, 인생은 점점 묵어가는 모양이다.


싸락눈이 내리는 밤은 깊어만 가고, 나는 불빛 아래 앉았다.

모두들 잠든 밤.

잠못 이룬 폰에서는 아주 작게 조용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홀로 앉아 사색의 눈물을 흘린다.

 

인공눈물을 눈에 넣어도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린다.

어디선가 툭 하는 소리 들린다.

아마도 처마 밑에 길게 달렸던 고드름이 떨어지는가 보다.


              [     툭

 

                툭 는 소리에

                여지없이 내 사색은 깨지고,

                사위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누군가 흘리는 내 눈물을 보았더라면

                깨알같이 달라붙은 황혼의 나이에

                청승떨까 웃을 거 같아

                그냥 고드름이 되어 녹아 버릴까.

 

                어둠은 내 마음을 홀로 다독여주는데

                이 밤에 춘설은 하얗게 쌓이려나.                      석천  ]



고요가 툭 툭 튀고, 나는 벽을 바라보며 백팔배를 시작한다.

 

        [          거울 속 사람

 

             매화 꽃망울 터지는 소리 들릴까,

             창밖에 귀를 기울이다가

             벽에 걸린 거울을 본다.

 

             긴 겨울잠을 내내 자던 매화소리가 들릴까,

             잔뜩 긴장했는데

             바람만 창문을 두드린다.

 

             너는 누구냐?

             흰 수염이 살짝 보이는 

             거울 속 사람의 휑한 두 눈과 마주친다.

             그는 세월의 황혼 속에 울고 있다.                석천   ]

 

                                             2014.  2.  13.  덕유산을 종주하고

                                                                    석천  흥만  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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