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씩 ‘수맥이 흐르는 위치에 말뚝을 박아 표시를 해 달라’ 는 부탁을 받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참으로 난감하다. 정확하게 표시를 해 주어도 굴삭기로 터를 닦는 과정에서 표시해 둔 장소를 정확하게 찾아 낼 수가 없게 된다. 이장 대행업자는 수년간 나와 함께 산역 일을 해 왔기에 표시만 해 주면 간단할 것으로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그가 이장을 맞춘 날, 나는 충북 영동에 선약이 돼 있었기에 이장 3일 전에 미리 그와 함께 L모씨(55세)네 선영을 갔다. 말뚝을 박아 표시를 해 주며 "이대로 터를 닦아서 잘 안장토록 하라" 고 신신당부를 했다.
영동에서 묘지 감정을 일찍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이장현장이 궁금하여 충북 음성군 oo읍 oo리를 찾아갔다. 벌써 세 기의 묘는 봉분을 마무리 지어 놓은 상태였고 한 기는 한창 봉분을 짓고 있었다. 예감이 이상하다 싶어 수맥을 살펴보니 상하로 흐르는 수맥은 모두 잘 피했는데 네 기의 묘 봉분 중심에 횡으로 흐르는 수맥이 모두 걸쳐 있었다. 지켜보던 가족들은 아연실색(啞然失色)하며 “수맥 때문에 집안이 이 꼴이 되었는데 또 다시 수맥에 묘를 쓸 수는 없지 않느냐? 뜯어내고 다시 묘를 써 달라" 했다.
땀과 흙으로 얼룩진 이들 모두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한숨만 내 쉬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계절을 잊은 4월 중순의 따가운 햇살 속에 온 몸은 땀으로 범벅되어 지친 상태이고 그림자는 길게 드리워 졌으니... 수 년 전, 증조부모의 누런 황골을 十자 수맥으로 이장하고 나서 그 많던 재산 다 날리고 젊은 부인과 사별하고, 동생도 이혼을 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자식들까지 둘 다 이혼을 하는 등, 불과 수 년 사이에 가정이 파탄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7~8년 전 이었던가? 그 당시 배나무를 심고 있던 두 형제에게 "조상님들 묘를 이장하는 것이 좋겠다" 고 귀띔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장남과 가족들은 곁눈으로 나를 흘겨보며 오히려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아무런 걱정 없이 형제들이 다 잘 지내며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었으니까. 장손은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해 내며 "자네 말을 안 들어서 우리 집안이 이렇게 됐네" 하며 지난날 자신의 무지를 탓하고 있었으나 이미 엎질러 진 물을 어찌하리.
이 가정뿐 아니라 현재 우리가정에 별 탈 없이 무해무덕하다 싶으면 묘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인간의 심리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례를 치른 뒤 3년 안에 무해 무탈하면 묘지는 잘 쓴 것이다’라 여긴다. 거기에 한 술 더 나아가 “이 자리에 묘를 쓰면 3~5대 아니, 더 나아가 아득히 먼 후손들 중에 어떠어떠한 인물이 나올 자리이다” 라 하는 등 나와 내 자식들 모두 죽고 나서 확인할 길 없는 아득하고 아리송한 풍수가들의 뜬구름 손에 쥐어주는 말에 만족해 왔다.
그러나 수맥이 흐르는 묘는 이장할 때 보면 확연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묘를 감정해 보면 그 속에 묻혀있는 유골의 상태가 예측가능하며 자손들의 미래가 들여다보인다.
거의 다 완성된 묘를 다시 허물고 옮겼던 묘를 또 옮기는 등, 하루에 두 번을 이장하다 보니 다음 날까지 하게 되었다는 이장대행업자의 불만은 컸지만 이장을 하던 날 밤, L모씨(57세)는 기막힌 꿈을 꾸게 된다. 큰 구렁이 두 마리와 뭉쳐있던 떼 뱀이 집 밖으로 몰려 나가는 꿈을 꾸었다고 했다. 모쪼록 이 가정과 이틀간에 걸쳐 이장작업을 하랴 수고했던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충만하시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