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JOY YOUR ESSAYLIFE
언양에세이포럼
22기-18차시
일시: 2024년 7월 2일(화) 3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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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 제 목 | 작 가 | 편수 | 합평 담당 |
1 | 내려놓기 | 민창현 | 9 | |
2 | 하늘로 보내는 메시지 | 김순향 | 7 | |
3 | 가시 | 김인옥 | 7 | |
4 | 자격증 | 김선애 | 6 | |
5 |
합평순서/권춘애 김순향 김선애 김연희 김인옥 민창현
박동조 박희자 배정순 예수백 이경자 이혜경
1. 내려놓기 - 민창현 9
1. 내 책장에는 '무소유'를 설파하고 평생 실천하신 법정 스님의 글이 많다. 한 권 두 권 사 모으다 보니 어느새 책장에 가득하다. 나도 한때는 무소유에 대한 나름의 뜻을 품고 있었나 보다. 내 것보다 함께 나누고 배려하는 모습을 좇으려 노력했었다.
2. 얼마 전 서재 방이 복잡해서 정리를 했다. 책도 그렇거니와 서랍 깊은 곳에는 몇십 년도 더 된 옛날 잡동사니들이 군데군데 숨어있었다. 몇 년 만에 보는 것들이고 어떤 것들은 왜 여기 있는지 기억조차 없었다.
3. 법정은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라고 했다. 작은 물건 하나도 그 애착을 버리지 못하니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이고, 지고 살아왔을까. 구석구석에 그 욕심이 켜켜이 들앉았다.
4. 아내와의 관계도 그중 하나다. 총각 때 안개 자욱한 지리산에서 다정하게 손잡고 걸어가는 노부부의 모습이 내 머릿속에 강하게 각인되었다. 훗날 환갑이 되면 아내와 두 손 잡고 나도 여기에 오리라 다짐했다.
5. 아내와 모든 것을 함께 할 것을 꿈꾸었다. 하지만, 취미부터 삶의 방식까지 현실은 너무 달랐다. 다른 두 사람을 하나로 묶기 위해 같이 할 수 있는 온갖 취미를 공유하고 가르쳤지만 수 십 년이 지나도 해결이 되지 않았다.
6. 환갑에 두 손 잡고 지리산 가는 꿈도 불가능해졌다. 결혼 전 꿈꾸었던 것이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이 슬펐다. 좌절했다. 부부는 무엇이든 함께 해야 한다는 집착이 너무 컸던 탓이다. 평생 동안 나를 휘감고 내려놓지 못한 한 생각 때문에 얼마나 괴로웠던가.
7 해외 생활 수십 년 만에 고국으로 귀국한 친구가 있다. 나이 사십에 물 건너가서 삼십 년 넘게 터전을 일구었다. 얼마 전에야 전 재산을 털어 자신의 집을 짓게 된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 일어 나이 더 들면 귀국할 계획이었는데 그전에 몇 년이라도 내 집에서 살아 보려고 했던 것이다.
9. 많은 시간을 들이고 돈이 생길 때마다 한 칸씩 집을 지었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홈 스위트홈을 마음껏 누리게 되나 그것도 삼 개월의 짧은 기간으로 막을 내렸다.
10. 그 나라의 내전 상황이 최근 더 복잡해진 탓이었다. 살던 곳까지 전쟁의 영향 아래 들어가게 되고 스위트홈과 농장이 전쟁터가 되어버렸다. 친구네의 생활 터전이 모두 망가졌다.
11. 집은 군데군데 총알 자국으로 곰보가 되었다. 재산 목록 1호인 발전기와 차는 군인들이 몰수해 갔다. 엔간한 살림살이들도 뒤이어 들이닥친 사람들이 모두 가져가 집안은 휑하게 비었다.
12. 살던 곳은 전쟁 지역으로 출입이 통제되게 되었고 다른 지방에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이런 상황이 언제 끝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고 그에 따라 거의 빈손으로 귀국을 결심하게 되었다.
13. 처음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당혹스러웠다. 살면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내가 해줄 수 있는 위로도 한계가 있었다. 더욱이 위로를 받아야 할 친구가 너무 무덤덤한 것이 나를 더 놀라게 했다.
14. 거꾸로 물었다. 평생 동안 살아온 삶을 송두리째 잃었는데 슬프거나 괴롭거나 원망스러운 마음이 없는지. 어떻게 그렇게 담담할 수 있느냐고.
15. 친구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어차피 몇 년 후면 귀국하기로 하느님과 약속을 했는데 자신의 건강을 고려해서 힘이 더 부치기 전에 앞당겨서 고국 살이를 하는 게 낫겠다는 계시라고 말했다. 다리 힘 남아 있을 때 고국에서 여생을 보내는 것이 맞겠다는 것이었다. 없어진 살림살이들도 누군가에게 요긴하게 쓰인다면 굳이 내가 아니드라도 괜찮다는 생각이었다.
16. 그 이야기를 듣고 자기도 사람인데 마음 한구석에는 원망의 감정이 조금은 남아있겠지. 그렇지만 말은 그렇게 하겠지 하고 생각했다. 내 눈에는 남은 돈으로 마련한 작은 전셋집이 더없이 초라하고 막막해 보였다.
17. 친구 집 근처에 수국꽃이 좋은 데가 있다 해서 보러 갔다. 돌아와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정갈하게 차려진 음식에 정성이 가득했다. 국에서 향긋한 냄새가 났다. 쑥국이었다. 태어나서 쑥을 한 번도 캐어 보지 못했다는 친구 아내가 직접 캔 쑥으로 끓인 국이었다.
18. 귀국해서 그동안 해외에서 맛보지 못한 갖가지 우리의 음식 재료들로 한 가지 한 가지씩 만들어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자랑했다.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고국에서의 사소한 생활 하나하나에 행복을 느끼며 감사하고 있었다.
19. 마음을 다 내려놓으니 사는 게 이렇게 가볍고 여유로울 수가 없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둘 다 그러냐고 물으니 똑같은 대답이었다. 물질적인 것은 타의에 의해 버려진 상태지만 마음속에는 남아있는데 이것을 내려놓으니 이런 행복을 받는 모양이라고 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혼자 중얼거렸다.
20. "그래 맞다. 세상에는 안 좋기만 한 것은 없다지. 네가 진정한 행복을 찾았다면 결과적으로는 잘 된 건지도 모를 일이지."
평생의 삶과 맞바꾼 이 행복이 오래오래 가길 마음속으로 빌어주었다.
2. 하늘로 보내는 메시지 /김순향 7
1. 명경수에 손 담근 굽은 소나무는 한 폭의 수채화다. 너럭바위에 누워 나를 말리며 바람과 자연이 빚어놓은 술잔들에게 말을 건다. " 내가 이래도 되는 겨?" 그러다가 문득 이런 시간 한 번 가져보지 못하고 습한 삶만 살다 간 친구 생각에 울컥해진다.
2. 친구는 서부 경남에서 멀리 동부 경남으로 시집을 왔다. 시댁은 선대에는 제법 부잣집이었으나 결혼 당시에는 겨우 허기를 면하는 집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딸 많은 집의 고명 아들이었고, 정을 받기만 하여 누구를 배려하는 데는 인색했다. 동거하는 연인이 있었으나 홀시어머니와 드센 네 명의 시누이, 잦은 남편의 폭행을 견디기 어려워 야반도주를 하고 말았다고 한다. 신랑의 행실을 아는 사람들은 측은지심으로 신부를 맞이하였고 예견된 불행이 조금이라도 지연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3. 겉보기에는 연한 배처럼 사근사근한 남편이어서 아내에게도 잘해 주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가 시퍼런 멍을 자주 달고 출근하는 것을 보면서 겉과 속이 다른 것은 아닐까하고 의구심은 가졌지만, 그녀가 원체 속내를 털어놓지 않았기에 그 사정을 속속들이 알지를 못했다. 그러다가 나와 같은 부서에서 내리 삼 년을 일하면서 집안 사정을 환히 알게 되었고, 묵은지 같은 친구가 되었다.
4. 그녀의 남편은 직장을 여러 번 옮겼으나 끝내는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변명을 끝으로 백수건달이 되었다. 세전 또한 금방 끼니 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궁색해졌고 심지어 아내의 결혼 패물까지도 몰래 팔아서 다 써 버렸다.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은 아들의 비뚤어진 행동을 며느리 탓으로 돌리고 며느리를 닦달하였다. 손찌금은 물론, 친구가 새옷 하나 입는 것을 봐주지 못하는 그녀들이었다. 금전적인 요구와 함께 며느리에게 섭섭한 마음이 생기면 두 살배기 아이를 기저귀도 채우지 않은 채 사무실 앞에 데려다 놓아 우리를 질색하게 했다.
5. 친구는 질경이었다. 길섶에 지천으로 깔려서 달구지와 무수한 사람들에게 밟혀 잎도 줄기도 너덜너덜한, 그러나 다음 날 아침이면 다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일어서는 질경이였다. 그녀의 월급은 고스란히 남편이 써버렸다. 당장 가족들의 호구가 걱정이어서 토요일 오후면 큰 시장에서 버선이며 양말을 도매로 떼어 왔다. 부끄럼을 무릅쓰고 동료에게 팔았다. 공무원, 특히 교사로서 품위 손상이라며 더러는 투덜거렸으나 나는 호구 수단임을 알기에 그를 두둔하기에 바빴다. 그리고 소용되는 물건이 아니지만, 사서 재어두기도 했다
6. 그녀는 서부경남에서 꽤 이름 있는 집의 맏딸이었다. 삼촌의 친구와 사랑을 했지만, 옛날 집에서 부리던 종의 아들이라고 맺어지지 못했다. 딸의 행복보다 체면이 앞섰던 친정아버지는 허우대만 멀쩡한 사윗감에게 부랴부랴 딸을 시집보내버렸다. 그런 친정이기에 속사정을 얘기도 못하고 혼자서 감내하며 점점 심신이 피폐해져 갔다.
7. 스산한 저녁때였다. 시장을 보러 가는 내 눈앞에 믿지 못할 광경이 벌어졌다. 시장 통에서 그녀가 남편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질질 끌려 다니고 있었다. 아이들 옷값을 월급에서 떼어 썼다고 상점마다 끌고 다니면서 확인을 하는 중이었다. 구경꾼 속에 있던 나는 두려움과 민망함으로 눈물범벅이 되어있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피가 거꾸로 솟았다. 순간 바닥에 있던 작은 돌멩이를 집어 들었고, 그 돌멩이는 남자의 등을 명중시켰다. “어이쿠” 소리와 함께 잠시 머리채를 놓는 사이 나는 잽싸게 그녀 손을 쥐고 달렸다. 돌을 던진 사람이 나라는 사실에 그는 더 따라오지 못했다.
8. 그날 친구들이 모였다. 그녀가 앞으로 받을 고통을 생각하니 그냥 집으로 보낼 수가 없었다. 우리들은 이혼을 강력하게 종용하였고, 그를 보호하자고 마음들을 모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들 때문이라며 집으로 돌아갔다. 자식들을 위해 한 순간도 쉴 수 없는 집으로 보내며 마음이 아렸다. 다음 날, 퉁퉁 부은 그녀 얼굴을 보면서 부부가 악연 중의 악연이라는 생각을 하였으나 도울 수 있는 묘수를 찾지 못했다.
9. 내가 다른 도시로 전근 온 지 두 해가 되었을때다. 2차 건강검진을 받으러 온 그녀는 하룻밤을 내 곁에서 자고 갔다. 푸석푸석한 얼굴이어서 ‘중병이 아닐까!’ 걱정되었다. 편안한 날이 하룬들 있었겠는가. 스트레스와 밤낮으로 고된 일을 했던 그녀는 간암 판정을 받았다. 이미 황달을 넘어 흑달로 가는 과정인데도 휴직을 하지 못했다. 남편은 옛 여인을 다시 만나 딴살림을 차렸지만. 여전히 그녀의 월급을 핥아먹는 찰거머리였다. 또한 병든 어미는 어미가 아니었는지 자녀들에 대한 섭섭한 마음을 토할 때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
10. 삭막한 그녀의 삶에도 한 줄기 빛이 지나가는 순간이 있었다. 나와 그녀는 일주일간 함께 연수를 간 적이 있었다. 연수가 중반에 들어 설 무렵, 하루 저녁 그녀는 숙소로 돌아오지 않았다. 전화기 저쪽의 목소리는 달떠 있었고 찾아 온 옛사람과 회포를 풀고 있다고 했다. 이미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간의 소식을 들었던 옛 남자는 병들고 쇠해진 그녀를 보고 원통해했다. 그가 너덜너덜 찢긴 심신을 다독여 주었음을 이튿날 그녀의 밝은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생기를 불어넣어준 그 남자가 무척 고마웠다.
11. 옛 연인의 생활도 원만치는 못했던 모양이었다. 한 사람을 반쪽 가슴에 품고 반쪽으로 결혼 했으니 첫정처럼 살뜰한 남편이 되지 못했다고 한다. 옛 연인의 아내는 늘 불평을 하던 중에 큰방 도배를 하다가 천정에서 쏟아지는 편지 세례를 받게 되었다. 남자는 보석처럼 소중한 옛 애인의 연서를 천정을 뜯고 보관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어떤 것도 아내와의 사이에 생긴 틈을 메우지 못했다.
12. 그날 이후 친구는 시들어 가는 화초에 물을 준 듯 힘이 솟았다. 나는 꺼져가는 생명에 잠깐이나마 삶의 의욕을 불어넣어 준 그를 지금도 고마워한다. 윤리라는 테두리로 이들을 폄하하기엔 두 사람의 처지가 너무도 딱하고 절절했다. 자신의 죽음이 목전임을 알면서도 앓아눕지 못한 채, 직장을 다녀 남편의 주머니를 채워야 했던 그녀를 누가 나무랄 수 있을까!
13. 가랑잎이 바스락거리는 오밤중이다. 곁에서 보았던 친구의 아픈 추억을 반추하는 것만으로도 울컥해진다. 나는 오랜만에 낡은 사진첩을 펴보며 하늘에 있는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친구야! 인연이 아니다 싶으면 빨리 끝을 냈어야지,”
3. 가시/김인옥7
1. 어린이 날이다. 30여 년간 교직에 있으면서 보석 같은 아이들을 참 많이 만났다. 초임지의 혜숙, 호윤을 비롯해서 석준, 광민, 태연, 자연, 초은, 세연, 정훈, 귀순, 정재, 기동, 명립, 은애, 한주……. 잠시만 생각해도 생각나는 이름이 끝이 없다.
2. 퇴직하고 가장 후회되었던 것은 너무 가르치는 일에 목을 맸다는 점이었다. 그보다는 사랑을 주는 일에 더 많이 마음을 써야 했다는 뒤늦은 자각이 들었다. ‘나는 귀하고 사랑받는 존재’라는 걸 깨닫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그 때는 미처 몰랐다. ‘지금 아는 것을 그 때도 알았더라면’ 살아갈수록 절감하는 말이다
3. 또 하나는 융통성이 없었다는 점이다. 눈만 부릅떠도 무서워서 떠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매를 들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아이도 있다. 벌의 효과가 개개인에 따라 다르므로 같은 잘못이라도 동일한 벌을 적용하기는 상당히 곤란하다. 그러나 아이들 눈에 공정한 교사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한결같은 잣대로만 대했다. 상도 마찬가지였다.
4. 어느 해 5학년을 담임했는데 태오라는 아이가 있었다. 말 수가 적고 의젓한 아이였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태오는 새까맣게 타서 왔다. 방학 내내 아버지와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왔다고 했다. 태오는 나를 세 번이나 놀라게 했다.
5. 급식시간에 밥을 많이 먹어서 놀랐다. 웬일이냐고 물어보니 햄버거를 너무 먹어서 김치와 밥이 엄청 먹고 싶었다며 씨익 웃었다. 간단히 한 끼를 때우기 좋은 음식이 햄버거다. 결코 많은 돈을 들여서 한 여행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들의 견문을 넓혀주기 위해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한 달을 꼬박 유럽을 돌았을 아버지의 부성애가 진하게 느껴졌다.
6. 태오가 내미는 방학숙제를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전지 크기의 마분지에는 서유럽의 역사적인 장소를 찍은 사진이 설명을 곁들여 나라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자세히 관찰하고, 정성들여 만든 흔적이 역력했다. 학습 교재로 쓰기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7. 세 번째 놀란 것은 태오를 교탁 앞으로 불러내어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을 말해보라고 했을 때였다.
“시골길을 걷고 있을 때였어요. 한 아저씨가 길 한가운데 앉아 계시더라고요. 무얼 하시나 들여다봤더니, 작은 벌레 한 마리를 나뭇잎 위에 올리고 계셨어요. 그 벌레를 길섶으로 데려다 주던 모습이 제일 기억에 남아요.”
8. 전혀 예상 밖의 대답이었다. 웅장하고 화려한 것에 마음을 빼앗길 나이인지라 에펠탑이나 독일의 고성, 영국의 국회의사당 같은 걸 얘기할 줄 알았다. 그런데 태오는 어떤 위대한 문화유산보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아저씨의 태도에서 가장 깊은 감명을 받았다. 삶을 돌아보고 인생을 성찰하면서 깨닫는 것이 생명에 대한 경외가 아닌가. 어린 나이에 참 귀한 걸 배우고 온 태오가 기특하고 예뻤다.
9. 당시엔 방학숙제라는 것이 있었다. 방학책 풀기, 곤충 채집, 책 읽고 독후감 쓰기, 그림 그리기, 글짓기, 일기쓰기 등이었다. 개학을 하면 숙제를 성실하게 한 아이들에게 학교장상을 주었다.
10. 나는 뜨거운 태양에 새까맣게 그을려가며 여러 나라를 견학하고, 귀한 교훈까지 얻고 온 태오에게 상을 주어 칭찬하고 싶었다. 그 결과물도 방학숙제 못지않게 훌륭하지 않은가. 그러나 기준이 학교에서 내어준 방학숙제에 있으니, 줄 방도가 없었다. 혹시 태오가 부러운 아이에게는 상대적 박탈감을 안겨주지 않을까 염려도 되었다.
11. 그러나 그 일이 오래오래 내 마음에 가시가 되어 걸렸다. 담임 이름으로 상장을 주거나, 작은 선물로 격려해 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융통성이라곤 없었음을 자책하며 때늦은 후회를 한다. 태오는 지금 어디서 무엇이 되어있을까. 생명을 사랑할 줄 아는 마음 따뜻한 어른으로 자라, 그의 아버지처럼 가족을 사랑하며 평화로이 살고 있지 않을까. 오늘따라 태오가 몹시 보고 싶다.
4. 자격증/김선애6
1. 며칠 전에 유효기간이 다 되어가니 보수교육을 받으라는 문자를 받았다. 벌써 3년이 지났다고 생각하니 세월이 정말 빠름을 느꼈다. 귀찮지만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서 교육을 신청하고 여러 가지 필요한 서류를 챙겼다.
2. 요즘은 자격증이 너무 많다고 생각된다. 바야흐로 자격증 양산시대인 것 같다. 무슨 일이든지 해보려고 하면 자격증이 필요하다. 대부분 양성교육과정을 거쳐서 시험을 통과해야지만 자격증을 받아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 사용하지 못하고 장롱 속에 고이 간직하는 경우가 더 많다. 나의 경우도 잠자고 있는 자격증이 많이 있다.
3. 약 15년 전, 우연히 식물을 탐사하는 동아리에 가입을 하게 되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 종류가 궁금했지만 알 길이 없어 답답해 하다가 동아리를 알게 된 것이다. 매주 금요일마다 탐사를 하는 시간은 궁금했던 것을 알아간다는 기쁨에 늘 기다려지는 시간이 되었다. 2년 정도 활동을 하다 보니 어느 정도 구분을 할 수 있었다.
4. 그 시기에 전국적으로 ‘숲으로 가자’는 붐이 일고 있었다. 현대인들은 많은 스트레스를 안고 살아가지만 해소할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숲에서의 체험으로 스트레스도 풀고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희뿌연 도시에서 찌들어 생활하다가 녹색의 숲으로 들어와서 체험을 하고나면 모두들 밝은 표정으로 돌아가게 된다.
5. 그때 산림청이 위탁하여 실시하는 숲해설가 양성과정에 등록하여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동안 동아리에서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교육과정이 재미가 있었다. 필기시험과 실기시험을 거쳐 숲해설가 자격증을 취득하게 되었다. 마침, 구청에서 숲해설가를 뽑는다는 공고가 떠서 응시를 했는데 합격이 되었다. 처음으로 자격증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이후에도 자격증의 힘과 경력으로 손쉽게 취업이 되었다. 여러 곡절이 있었지만 해마다 계약직으로 일을 할 수 있어서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6. 담당 공무원이 일과 관련해서 앞으로 자격증 한 개로는 취업하기가 힘들 것이라며 환경부에서 만든 자연환경해설사 자격증을 취득하라고 권유를 했다. 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실시하는 양성과정을 이수하고 필기와 실기시험을 치르고 자격증을 따게 되었다. 교육을 듣기위해 경주까지 가야 했지만, 세 명이 팀을 이루어 가니까 즐거운 여행을 다녀온다는 기분이어서 다행이었다. 숲해설가 과정과 중복되는 과목도 있었지만 우리가 사는 생태 환경에 대해 이해의 폭을 넓히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아는 계기가 되었다.
7. 점차 숲체험이 인기를 끌게 되자 유치원과 어린이집의 유아들이 주로 체험을 하게 되었다. 전국에 유아숲체험원이 많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유아숲지도사 자격증이 신설되어 취득하지 않으면 취업하기 어렵게 되었다. 면접을 볼 때 유아숲지도사 자격증이 있는지 물어보곤 했다. 어쩔 수 없이 양성과정에 등록하여 필기와 실기시험을 치른 후 자격증을 따야만 했다. 물론 중복되는 교육이 있었으나 나름대로 도움이 되는 과목이 많아서 즐겁게 교육을 받았다.
8. 이번에는 산림청에서 사람들의 일생을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슬로건을 걸고 연령별, 대상별로 산림치유프로그램을 추진했다. 언론에도 숲에서의 활동이 많이 소개되자 산림치유지도사 자격증을 신설하게 되었다. 김해까지 가야만 하는 양성과정이었지만 세 명이 팀을 이루어 다니게 되었다. 평일에 근무하고 주말에 받아야 하는 교육이었지만 알아간다는 재미에 푹 빠져 피곤하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수해야 하는 과목이 숲 관련뿐만 아니라 의료 보건 과목도 있어서 힘들었다. 합격률도 30% 내외여서 교육기간 내내 갈등이 있었지만 열심히 공부를 해서 바로 합격할 수 있었다. 근무하면서 산림치유 프로그램을 접목하니 사람들의 만족도가 높게 나와서 배우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9. 얼마 후 환경부에서 환경교육사 자격증을 만들었다. 환경의 중요성이 점차 부각되는 시점이 온 것이다. 탄소중립이라는 말이 나오고 예전 같지 않은 기후로 사람들이 고통을 받게 되자, 사람들에게 환경에 대한 이해와 행동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 자격증은 우선 양성과정 교육기관에 신청을 해서 선정이 되어야 했다. 상반기에는 떨어지고 하반기에 선정이 되어 교육을 받게 되었다. 알고 보니 내가 제일 나이가 많았다. 역시 필기와 실기시험을 거쳐 합격을 했다. 바로 관련 교육기관에서 잠깐이지만 강사로 활동할 수 있었다.
10. 짧지 않은 세월이지만 숲과 관련된 여러 자격증을 취득하여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았고, 많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활동을 해서 보람도 있었다. 자주 보는 풀과 나무, 곤충과 새 등을 비롯한 많은 생물을 알게 되어 좋았다. 비록 예전에 취득한 다른 자격증들은 장롱에서 잠자고 있지만 일하면서 필요에 의해 취득한 자격증은 살이 되고 피가 되는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