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열도의 기마족- 백제, 가야(인용글-편집)
존 코벨이 <한국문화 탐구>에서 일본열도 문화의 근원으로 한(韓)민족의 문화라고 하며 부여족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간단하게 요약해서 소개합니다
존 코벨은 일본열도역사를 연구하던 중에 일본열도의 원류가 한반도라는 것을 확신하고 한국에 8년동안 거주하면서 연구를 했다고 합니다.
그가 말하는 부여기마족은 가야세력과 백제를 말하는 것으로 가야에 대한 포스트와 비교해서 보십시오.
부여 기마족의 자취
일본역사의 시작지역에 이즈모신사, 이세신사, 그리고 이소노가미신사가 있는데 이곳은 일본 신도(神道)의 성소로 이세신사는 아마데라스를 모신곳이고 이즈모신사는 2000년전 한반도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정착했던 곳으로 스사노오노를 모시고 있다.
*아마데라스(해의 여신)- 일본 천황가의 원조
*스사노오노(바람의 신)- 아마데라스의 오빠
그리고 이소노가미신사는 일본 아스카에 있는데 부여족의 왕녀 신공(神功)이 건너온 곳으로 칠지도라는 칼이 있으며 이 칠지도는 바로 일본정벌을 입증해 주는 유물로 369년에 해당하는 연대와 한문 금글자가 새겨져 있다.
참고- 칠지도
http://blog.naver.com/casahoo/20001707548
369년 일본에는 한문을 읽는자는 없었으며 백제에서도 최고의 지식인만이 읽고 썼는데 칠지도는 신공의 기마족이 369년 한반도에서 건너와 일본을 정벌했음을 확증시키는 자료다.
오늘날 일본인 중에는 이소노가미신사에 있는 칠지도가 부여지배자들의 성물중의 성물로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일본문화의 근원 부여, 가야 그리고 백제
일본역사를 보면 일본은 한반도에서 BC.330년 석기시대에 논농사법을 전래 받았고 4세기에는 부여기마족의 지배층 유입과 대형고분의 전래가 있었고 7세기 후반에는 백제유민들이 일본에 진입한다.
일본은 6세기 중엽까지도 한국혈통의 무속왕이 다스렸고 부여족들은 한반도의 가야왕족과 혼사를 맺으며 유대관계를 지켰는데 부여족이 일본에 전파한 문화는 대형봉분 매장제도를 지닌 것이었다.
오사까-나라지역의 대형고분은 부여족의 무덤이고 가장 큰 고분은 인덕(仁德)천왕능으로 알려져 있는데 720년에 쓰여진 <일본서기>에도 인덕왕에 대한 기록이 있다.
부여족은 기마족으로서 월등한 전투력으로 일본을 정벌하고 통합해서 중앙집권체제 국가를 수립하게 되었다.
규슈에는 한반도에서 일본에 상륙한 부여족을 묘사한 벽화가 있는데 규슈는 발굴이 가능했지만 일본 나라의 고분은 발굴이 금지되어 있다.
사진- 다케하라고분 벽화(일본 큐슈)
다케하라벽화는 5세기경 이주자들이 배에서 말을 부리는 모습이 있고 공중에도 커다란 말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한반도에서 건너 온 부여족과 말이고 동시에 천마(天馬)의 개념도 따라 온 것이다.
그리고 일본 나라(奈良)에 '후루'라는 지명이 있는데 레저드에 따르면 '후루'란 말은 '부루' 또는 '부여'를 이르는 것이고 부여족이 일본을 정벌한 연대를 369년으로 제시하고 있다.
<일본서기>기록자들은 부여족이 일본을 정벌하여 생긴 왕권교체기에 일본왕들을 몇백년씩을 살았다고 조작해놓고 신공이 한반도를 정복했다고 날조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은 부여기마족이 일본의 규슈와 혼슈를 점령하고 지금의 오사까-나라지역에 수도를 건설한 것이다.
일본이 만세일계 혈통의 첫왕으로 받드는 신무왕(神武王)이 규슈에서 나라를 정벌했다는 기록도 사실은 부여족의 일본정벌을 나타내는 것인데 <일본서기>사가들은 신무왕의 기록을 BC.660년의 일로 올려놓았다.
7세기말 일본이 실시한 호구조사에서 귀족층의 30%가 외국인 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들은 한(韓)인으로 특히 660년 패망한 백제의 유민이 조국을 떠나온 부여족 후예들이었다.
*백제의 유능한 전문가그룹이 일본으로 피신해온 것
부여기마족과 고고학
오늘날까지도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BC.660년 이래 만세일계라는 일왕혈통이 사실은 수차례 끊겼을 뿐 아니라 100년이상 완전한 한(韓)인의 혈통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생각지 않는다.
참고- 일본열도의 가야
http://blog.naver.com/casahoo/20001690585
그리고 일본의 신도가 한국무속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아는 일본인도 드문데 한국무속은 일본에서 천황숭배사상과 결합되지만 한국에서는 유교와 기독교에 의해 격하되었다.
사진- 가야 유물(말토기)
일본정부가 고분발굴을 허용한다면 일본의 고고학은 천황가의 기원과 성장과정를 제대로 밝혀낼 수 있는 도구가 될 것이다.
나라평원 일본왕 고분은 발굴이 금지되어 있지만 만약에 부여족의 정복자 응신왕(應神王)과 인덕왕능이 발굴된다면 가야의 금관이 나올 것이다.
부여족출신 응신왕 이전의 일본은 부족사회로 야마토 혹은 나라평원을 다스렸는데 일본에 처음으로 중앙집권체제가 등장한 것은 한반도에서 건너온 부여족의 통치때문이다.
*부여족은 말과 창, 칼같은 무기로 원주민을 제압하며 규슈에서 나라로 전진함
그런데 8세기초 일본의 어용사가들은 자신들이 ‘규슈로부터 나라평원으로 이동한 정벌자’ 로 호칭하는 신무천왕의 행적을 BC.600년에 일어났던 것으로 각색해 버렸다.
그러나 BC.600년의 일본은 석기시대였고 BC.300년대에 한(韓)인의 도래로 논농사와 청동기시대로 진입할 수 있었을 뿐이다. 한반도는 4세기 이전에 이러한 문명을 갖고 있었다.
240년 중국사서의 기록은 소규모의 부족장들이 강력한 비미호여왕과 더불어 나라지역의 비옥한 땅을 통치하고 있다고 했다.
당시 한반도의 남부지방과 일본 규슈 및 서부 혼슈는 혈통으로나 언어에 연관이 있었던 것 같다.
BC.3세기의 일본은 석기시대를 벗어난 야요이시대로 한반도로부터 철기와 청동기및 도자기의 물레사용법을 배워 익혔고 한반도의 김해는 이때 철광이 있어 한반도 북부와 중국, 일본으로 철을 선적해 보내는 요지였다.
부여족과 말
야요이시대 일본에 온 한(韓)인들은 문화적 침입자로 볼 수 있지만 369년 일본에 온 부여족은 군대집단으로 신천지를 구해 일본에 온 것이므로 말을 대동해갈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부여족은 기마전사와 철기에 힘입어 369년에 일본을 침입했는데 일본의 보병들이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일본에는 초기에 말이 없었음
사서에는 바다에 폭풍이 일었는데 까마귀가 나타나 선두의 배를 본토로 인도해갔다는 전설이 있는데 규슈의 고분벽화에는 배에 새가 앉아있는 그림이 있다.
*일본으로 간 부여족의 항해를 입증하는 기록
369년 한반도 김해에서 신공왕후가 8세기 일본 역사서의 기록에는 신들로부터 한국에서[바다 건너 땅을 정복하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되어 있다.
사진- 하니와토기 병사와 말(도쿄박물관)
일본 규슈의 4~6세기의 유물을 보면 일본은 한반도를 근원지로 하고 있는데 5세기 이전 일본고분의 부장품에는 한국의 청동거울이 주류였는데 400년 이후 고분에서 갑작스럽게 마구가 출토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부여족의 일본 정벌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중국의 사서 <위지>에[3세기 왜국에는 말이 없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다가 4세기 부여족이 일본에 들어온 뒤 갑자기 말은 무덤의 부장품이 되고 벽화에 말그림이 그려지거나 토기말이 일본예술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4세기 고분벽화에는 말과 함께 배가 그려져 있는데 사람이 배를 젓거나 노가 있는 단순한 그림이지만 후기의 그림에는 말이 배에 실려있거나 내리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것은 부여족의 침입을 말해주는 것이다.
5세기 일본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은 현재 경북대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대구지역의 출토품들과 완전히 똑같다.
*유물- 말굴레, 손잡이 달린 칼
당시 일본에서 그 같은 무덤을 만들 수 있었던 지배계층은 단연코 새로운 철기술과 기병술을 도입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또한 400년~ 500년에 걸치는 시기 일본천황이 된 기마족의 무덤에서 나오는 부장품은 대구에서 낙동강을 따라 부산까지 뻗쳤던 가야지역 출토품과 흡사한 게 많다.
그러한 사실은 당대 기마족 침입자의 우두머리들 무덤을 지키는 수많은 말모양 토우 하니와를 보면 명확해지는데 일본 도쿄의 출토품은 부여-가야기마족들의 행동반경과 힘을 증명해 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이렇게 일본 고분출토품인 하니와 말토기는 일찍이 일본을 정복한 세력은 분명히 369년 금의 바다 김해를 떠나온 집단이었다.
쓰루가의 한국인 자취, 신공황후와 '용감한 큰 곰'
그 옛날 부산 김해를 떠난 한(韓)인들은 우선 북규슈를 거친 뒤에 일본내지로 들어가 야마토지역에 정착하는데 쓰루가는 위도상 부산의 동쪽에 마주한 항구다.
참고- 가야의 일본개척
http://blog.naver.com/casahoo/20001719420
이곳에 신공왕후와 다케우치노(무내숙니)를 받드는 신도신사가 있는데 신공왕후는 왕족이고 다케우치노는 전투지휘관으로 그들 사이에 낳은 아들이 바로 일본의 15대 왕이자 부여족의 일본통치 초대 임금인 응신천황이다.
*무내숙니- 용감한 큰곰
4세기에 일본으로 떠난 한(韓)인들은 농부가 아닌 상류계층의 인물들이었다. 쓰루가에는 지금도 농부와 그보다 앞서 이주해온 어민, 뱃사람간의 싸움을 되살린 신도무속 축제가 있다.
*매년 정월 대보름날 열리는 행사로 흡사 전투와도 같은 양상을 한다
신공왕후와 다케우치노가 일본을 정벌하러 올 때 전사들만이 아니라 도공들도 왔는데 전쟁이 나면 통치자들은 전쟁에 임하기 전 하늘에 제사 지내기 위한 제기용 토기를 빚었다.
일본에서 출토되는 토기유물에 그 자취가 남아있는데 BC.200~ 250년에 만들어진 야요이토기를 보면 한반도에서 쓰던 물레와 회전판이 수입되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한국 부산근처 고분에서 출토되는 김해토기와 같은 경질토기의 제작기법도 들어왔다.
일본에서 출토되는 쓰에끼토기는 대구 고령지역에서 출토되는 한국 가야토기의 완전한 복제품으로 가야토기는 부산대 박물관과 김해박물관에 소장품들이 많다.
사진- 한국의 가야토기(하버드대 박물관)
사진- 일본의 쓰에끼토기(교토박물관)
부여족-인덕천황, 바위공주 '이와노 히메'
일본건국시조 신무천황의 이름은 '이와레'인데 일본어로 '이와'는 바위이고 '레'는 족속이란 뜻으로 신무는 바위배(天岩舟)를 타고 일본에 도착한다.
*이와레(磐餘)의 레는 부여의 여(餘)와 같은 한자.
레저드는 <삼국유사>에 나오는[동부여가 동해의 가섭원으로 갔다]는 구절을 [부여족의 한 일파가 왜국의 가시와라 평원으로 갔다]라고 해석한다.
*가시와라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가섭원
부여족이 일본에서 왕권을 잡은 이후 100년간 그들의 배필은 가야혈통의 가쓰라기(葛城)가문 여성들이었는데 부여족 2대 왕인 인덕천황은 가장 거대한 능묘를 남긴 임금으로 가야의 왕족인 이와노 히메(磐之媛-바위공주)에게 장가들었다.
바위공주의 집안 가쓰라기는 가야의 왕족이면서 동시에 일본의 화족들과도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