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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1. '티끌 먼지를 털어버려라'
師因見僧掃地次 問 與麽掃還得淨潔也無 云 轉掃轉多 師云 豈無撥塵者也 云 誰是撥塵者 師云 會麽 云 不會麽 師云 問取雲居去 其僧乃去 問雲居 如何是撥塵者 雲居 云 者瞎漢
조주선사가 언젠가는 한 스님이 마당을 쓸고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그렇게 쓸어낸다고 깨끗해지느냐?"
"쓸면 쓸수록 많아집니다."
"어찌 먼지를 털어버린 자가 없겠느냐?"
"먼지를 털어버린 자가 누구입니까?"
"알겠느냐?"
"모르겠습니다."
"운거스님에게 가서 물어봐라."
그 스님이 운거선사에게 가서 물었다.
"누가 먼지를 털어버린 자입니까?"
운거선사는 "이 눈먼 놈아(者瞎漢)!" 하였다.
오늘은 마당에서 빗자루로 먼지를 쓸어내는 것을 소재로 선(禪)을 이야기하고 있다. 마당을 쓰는 한 스님을 보자 조주가 그 스님의 수행경지를 점검해 본다. "그렇게 쓸어낸다고 깨끗해지느냐?" 마음을 콕 찔러 보는 것이다. 그냥 마당을 그렇게 쓱싹쓱싹 쓰느냐고 묻는 게 아니라 그대 마음의 티끌 번뇌를 깨끗하게 쓸어내었느냐고 넌지시 묻는 말이다.
"쓸면 쓸수록 많아집니다." 이 스님은 거꾸로 말을 한다. 티끌 번뇌를 쓸어내어 마음이 차츰 차츰 말끔해져야 하는데, 마당의 먼지, 티끌을 쓸고 쓰는데도 다시 날아와 계속 모이고 쌓인다고 말하는 것이다.
조주는 다시 한 번 그 수행자의 가슴에 구멍을 하나 뚫어본다. "어찌 먼지를 털어버린 자가 없겠느냐?" 그냥 죽은 송장처럼 마당을 쓸고 있는 그 사람, 허깨비 같은 육신과 마음이 나(我)라고 집착하는 그대가 아니라 참으로 진실한 그대는 온 몸에 쌓이고 쌓인 온갖 망상번뇌를 털어버려야 할 사람이야! 과거 생에서부터 현재까지 저지른 못된 죄악과 나쁜 언행의 업(karma)을 깨끗하게 녹여버려야 수행의 결실을 맺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 스님은 멍청하게 눈만 끔벅거린다. "먼지를 털어버린 자가 누구입니까?" 자기 자신이 지금 먼지, 티끌을 털고 있는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다. '먼지를 터는 사람이란 제 자신 말고 혹시 다른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까?' 라는 듯이.
조주는 이미 글러먹었음을, 아직도 매실이 잘 익지 않았음을 알고도 마지막 기회를 준다. "알겠느냐?" 아직은 꿈엔들 깨달음이 무엇인지 맛보지 못했으니 어떻게 그것을 경험한 느낌을 알겠는가. "모르겠습니다." 조주는 혹시나 다른 큰스님과 인연이 닿을까 싶어 이 수행자를 멀리 떨어진 운거선사에게 보내 본다. "운거스님에게 가서 물어봐라." 이 말은 운거가 있는 곳에 도착할 때까지라도 '먼지를 터는 이 자가 누구인지' 계속 의심하면서 가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운거선사는 선종 5가 가운데 조동종의 문을 연 동산 양개선사의 제자로서 우리나라 신라시대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가지산문의 형미, 성주산문의 여염, 수미산문의 이엄선사 등에게 선법(禪法)을 전해준 유명한 선사이다.
이제 운거를 만나서 조주선사와 나누었던 대화에 대해 묻는다. "먼지를 털어버린 자가 누구입니까?" 운거는 벼락같이 "이 눈먼 놈아(者瞎漢)!" 하고 그 스님을 꾸짖는다. '자할한(者瞎漢)'의 할(瞎)은 애꾸눈 또는 눈멀 할(瞎) 자, 놈 한(漢) 자이다. 조주가 너를 위하여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여러 번 가르침을 주었는데도 아직도 먼지를 털어내는 그 자를 찾느냐 이 멍충아! 이 한 마디는 사람을 죽이는 칼인가, 살리는 칼인가?
운거선사가 호통을 냅다 지르며 마음을 송곳으로 콱 찔렀는데 그 스님이 눈을 떴는지, 아직도 눈만 끔벅끔벅 거렸는지는 모를 일이다. 만약에 여기서 눈을 떴다면 활인검(活人劍)의 효과를 바로 본 것이다. 여러분도 이 먼지를 털어내는 자를 바로 알아야 한다. 이렇게 쉽게 풀어 말해도 찾지 못한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라. 알기만 해서는 안 되고 먼지, 티끌을 다 털어내도록 하자.
472. '조주를 꼴 속에서 본다'
師問 僧你在此間多所時也 僧云 七八年 師云 還見老僧麽 云 見 師云 我作一頭驢你作麽生見 云 入法界見 師云 我將爲你有此一著 枉喫了如許多飯 僧云 請和尙道 師云 因什麽不道 向草料裏見
조주선사가 한 스님에게 물었다.
"여기에 있은 지 얼마나 되느냐?"
"칠팔년 됩니다."
"노승을 보았느냐?"
"보았습니다."
"내가 한 마리 나귀가 된다면 어떻게 보겠느냐?"
"법계(法界)에 들어가서 뵙겠습니다."
"나는 그대가 한 가지는 갖춘 줄 알았더니 숱하게 공밥만 퍼먹었구나."
"큰스님께서 알려 주십시오."
"어찌 꼴(草料) 속에서 봅니다 라고 말하지 못하느냐?"
조주가 계속 수행자들의 마음 공부한 경지(境地)를 점검해 보고 있다. 이것은 깨달은 선지식의 일상적인 의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혼자만 깨달아서 열반, 해탈, 구경각(究竟覺)의 경지를 맛보면 무엇 하겠는가. 물론 스스로는 영원히 독립된 존재로 남아 있을 수 있겠지만 깨달음의 의미는 모든 중생들과의 나눔, 구원함에 있다.
지금까지와 같이 이 세상에 가끔씩 성자가 나타났다 사라졌다간 해서는 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종교를 뛰어 넘어 사람을 구원할, 세상을 완전히 변화시킬, 온갖 지혜를 다 갖춘 깨친 자들이 많아져야 한다.
"그대는 여기에 있은 지 얼마나 되느냐?"
조주가 그냥 괜히 몇 년이나 수행했냐고 묻지는 않을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 한 마디로 그 수행자의 참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7~8년 정도 됩니다." 처음부터 글러먹었다. 왜 내가 벌써 틀렸다고 하는지 이해가 되어야 한다.
조주도 이미 틀려 버린 것을 알고 있다. 그럴수록 친절하게 가르침을 주는 게 선사의 도리이다. "이 노승을 보았느냐?" 머리 깎고 승복 입은 겉모습의 조주를 보았느냐고 묻는 게 아니다. 진짜 조주의 참모습을 아느냐 이 뜻이다. "보았습니다." 이 스님은 그래도 조주를 보았다고 고집한다만 조주의 곁에 7~8년이나 있었으면서도 아직도 그의 뜻은 꿈엔들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렇게 오랫동안 조주와 함께 생활했는데도 이러니 이해하기 어렵다.
자기를 보았다고 하니까 조주는 다시 시험해 본다. "내가 한 마리 나귀가 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보겠느냐?" 조주와 같은 부처가 왜 한 마리 나귀가 되겠다고 하는가? 조주는 실제로 죽어서 나귀가 되었을까? 그건 부처가 아니면 모를 일이다. "법계(法界)에 들어가서 뵙겠습니다." 법(法)의 세계, 즉 진리의 세계에서 조주선사를 만나겠다고 한다만 이 스님이 그 말의 참된 뜻을 제대로 알고서나 이렇게 말했을까?
진리의 세계가 어디에 있는가. 깨달은 사람은 법계는 없는 곳이 없다고 한다. 살아 있든 죽었든지 간에 우리 주변, 아래, 위, 오른쪽, 왼쪽이든 진리가 아닌 곳이 없다. 이것을 법의 참된 모습(實相)이라고 한다.
조주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7-8년이나 여기에 있었다 하니 이제 좀 알아챌 만한가 생각했는데 전혀 감감무소식이니 한탄하듯이 말한다. "그대가 마음 하나 정도는 알 줄 알았는데 여기서 숱하게 밥만 축냈구나!" 조주가 밥 먹인 게 아까워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그 스님은 이제 어찌 할 줄 모르고 주눅이 들어서 모기 소리만 하게 말한다. "제발 큰스님께서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조주의 한 마디, "왜 나귀에게 먹일 꼴 속에서 봅니다 라고 말하지 못하느냐?" 라고 충격적인 말을 한다. 아니, 나귀가 된다고 한 말씀도 송구스러운데 나귀에게 먹일 풀 속에서 스님을 본다고 말하라고? 그 스님의 눈이 휘둥그레지다가 갑자기 하하! 웃거나, 아이고! 아이고! 통곡이나 했으면 좋겠다. 쇠망치로 머리통을 맞으니까 피가 갑자기 툭 터져버린 것처럼 말이다. 옛날에는 이런 장면이 많았다. 충격을 세게 받을수록 반작용은 더욱 세어진다.
473. '채소 한 줄기를 들다'
師問菜頭 今日喫生菜熟菜 菜頭 提起一莖菜 師云 知恩者少 負恩者多
조주선사가 하루는 채두(菜頭)에게 물었다.
"오늘은 생채를 먹느냐, 익힌 것을 먹느냐?"
채두가 손으로 채소 한 줄기를 들어 올리자 선사가 말했다.
"은혜를 아는 자는 적고, 은혜를 저버리는 자는 많다."
채두(菜頭)는 절에서 수행자들이 섭취할 채소, 나물 등 반찬을 장만하는 일을 맡은 스님이다. 오늘은 조주가 그 채두스님을 점검해 보고 있다. "오늘 먹을 야채는 날 채소냐, 익힌 것이냐?"
밭에서 야채를 뜯어서 불에 익히든, 생으로 무쳐 반찬으로 준비하든 이것은 채두가 할 몫이다. 그런데 조주는 왜 채두에게 야채를 익혀서 낼 것이냐, 날 것으로 먹을 것이냐고 묻고 있는가. 이것도 실제로는 채소를 대상으로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그대 마음속의 채소는 어떠하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마음속의 채소라니, 뭔 소리인가?
채두가 손으로 무엇인지 모르지만 야채 한 줄기를 들어보였다. '이것을 먹을 뿐입니다.' 날 것인지, 즉 텅 빈 것인지, 익힌 것인지, 즉 인공미를 가한 것인지, 달리 말하면 유위(有爲)인지 무위(無爲)인지 구별하지 않고 그저 허공, 우주를 들 뿐이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그냥 모르면 된다. 아무 것에도 걸림 없이 자유자재하게 행동할 뿐이다.
조주의 뒷말씀이 여운을 남긴다. "은혜를 아는 자는 적고, 은혜를 저버리는 자는 많구나." 조주의 이 말은 이 채두를 긍정한 것인가, 긍정하지 않은 것인가? 보통 이렇게 묻지만 나는 오늘 다만 '연못에 개구리가 날뛰니 뱀은 침묵을 지킨다'고 말하겠다. 뱀은 개구리를 잡아먹는 게 자기 할 일인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개구리에게 꼼짝 못하고 입맛만 다신다는 소식이다.
474. '어느 쪽에서 생겨났나?'
有俗行者到院 燒香 師問僧 伊在那裏燒香禮拜 我又其你在者裏語話 正與麽是生在那頭 僧云 和尙是什麽 師云 與麽卽在那頭也 云 與麽已是先也 師笑之
어느 속인 행자(行者)가 관음원에 와서 향을 사루는데 조주선사가 한 스님에게 물었다.
"그는 저기서 향을 사루며 예불하고, 나는 또 그대와 여기서 이야기한다. 바로 이런 때 생겨남(生)은 어느 쪽에 있느냐?"
"큰스님은 어느 쪽입니까?"
"그렇다면 저 쪽에 있지."
"그렇다면 이미 먼저입니다."
선사는 웃었다.
행자(行者)는 세간이든 출세간이든 불도(佛道)를 닦는 수행자이다. 오늘은 세속의 한 행자(거사)가 절에 와서 향을 피우며 부처에게 공양을 올리는 모양이다. 그러자 조주는 곁에 있는 한 스님을 시험해 본다. "저 행자는 저기서 예불을 올리고, 나는 너와 함께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바로 이럴 때 생겨남(生)은 어느 쪽에 있는가(正與麽時 生在那頭)?"
여기서 생(生)은 생겨남만이 아니라 없어지는 것을 포함한 생멸(生滅)이라고 해석해보자. 나는 것(生)과 없어지는 것(滅)은 두 가지 별개가 아니라 항상 따라 다닌다. 삶이 죽음이고, 죽음이 삶이다, 또는 삶과 죽음이 찰나 사이라 숨 한번 들이쉬고 내쉬는 사이에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조주가 여기서 말한 생겨남(生)은 사실 이런 뜻이 아니다. 이 스님이 무생(無生)의 도리를 제대로 알고 있는지,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지 시험해 보고 있는 것이다. 본래 생겨남이 없는데 이쪽 저쪽 어디를 따질 것인가?
모든 법(法)은 불생불멸이다. 생겨남이 없고(무생 또는 불생), 나지 않으니 없어질 리도 없는 것이다. 조금 어려운 설명이지만, 행자가 저쪽에서 향을 사루는 것도 생멸법(生滅法)이고, 조주가 이쪽에서 이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생멸의 업을 짓고 있는 것이지만 모두 인연이 화합한 것이라 그 자체는 성품이 없어 무생(無生)이다. 곧 생겨나도 생겨난 것이 아니고 없어져도 없어진 것이 아니다. 앞에서도 한번 설명했지만 이 무생(無生)의 도리는 거의 도(道)의 생명이다. 그 이치를 철저히 꿰뚫어야 한다.
조주가 시험삼아 저쪽 이쪽 가운데 생겨남은 어느 쪽에 있느냐고 물었는데, 이 수행자는 "큰스님은 어느 쪽입니까?" 하고 한 번 되받아친다. 보통 이런 질문에 수행자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묵묵부답이거나 엉뚱한 소리를 하는데 이 스님은 그래도 조주의 말에 마냥 끌려가지는 않았다.
'큰스님부터 어느 쪽인지 먼저 자리를 잡으시죠.' 라는 어투로 묻는 것 같다. 조주는 이에 넌지시, "그렇게 물으면 (생겨남은) 저쪽에 있다."고 대답한다. 저쪽은 그 행자가 향을 사루며 예불하는 쪽이니 현상적으로 봐서 그 행자는 지금 생멸의 업(業)을 짓고 있다는 말씀이다. 설명은 했지만 깨닫지 못했으면 매우 어려운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이미 먼저입니다." 이 스님은 조주가 생겨남은 저쪽에 있다고 하니까 그러면 이미 먼저라고 대답했다. 무엇이 이미 먼저라는 뜻인가. 현상적인 생겨남은 행자가 예불하는 저쪽에 있으니 그 현상(생겨남)이 먼저이고, 절대적인 남이 없는 무생(無生)의 이치는 나중이라는 이야기인가?
이건 참으로 이해하기 대단히 어렵다만 현상과 절대는 절대로 서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현상 따로, 절대 진리 따로 있지 않다는 말씀이다. 현상이 절대요, 절대가 현상이다. 먼저와 나중이 따로 없고 먼저가 나중이요, 나중이 먼저라는 말씀이다. 주객, 생사, 선악이 하나임을 깨쳐야 한다. 먼저와 나중이 서로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조주는 이 스님의 말에 그냥 웃어 넘겼지만 더욱 더 추궁하여 그 스님의 정체를 밝혔어야 했다. 이 스님이 그냥 조주선사의 말에 따라가지 않기 위해서 툭 튀어 나온 말인지, 제대로 깨쳐서 하는 소리인지 판가름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심문해 볼까. '이미 먼저인 것은 무엇인데?' 이것에 대해 그 스님이 어떻게 대답하는지 살펴봐야 한다.
실제로 이미 먼저인 것은 무엇일까? 위음왕불 이전으로 건너 뛰어야 한다.
475. '호떡내기'
師與小事文遠論義 不得占勝 占勝者 輪餬餠 師云 我是一頭驢 遠云 我是驢胃 師云 我是驢糞 遠云 我是糞中虫 師云 你在彼中作麽 遠云 我在彼中過夏 師云 把將餬餠來
조주선사가 문원(文遠)사미와 입씨름을 했는데 이기면 안 되고, 그러면서 이긴 쪽이 호떡을 내기로 했다. 선사가 말했다.
"나는 한 마리 나귀다."
"저는 나귀 새끼입니다."
"나는 나귀 똥이다."
"저는 똥 속의 벌레입니다."
"너는 그 속에서 무얼 하느냐?"
"저는 그 속에서 여름을 지냅니다."
조주선사는 "호떡을 가져오너라." 했다.
이 문답은 조주선사가 어린 사미(沙彌)인 문원(文遠)에게 마음공부를 시키려는 차에 재미있는 호떡 내기를 하는 내용이다. 내기는 말 이어나가기인데 그 규칙은 좋은 것만 계속 말하면 이기지 못하는, 즉 지는 게임인데 그래도 이긴 사람이 호떡 한 턱을 내는 방식이다. 말만 따라가면 헷갈리기 십상이다.
조주부터 시작한다. "나는 한 마리 나귀이다." "저는 나귀새끼입니다." "나는 나귀 똥이다." "저는 똥 속의 벌레입니다." 여기까지는 두 사람이 좋지 않은, 더 하찮다고 생각되는 말을 계속 이어서 대고 있다.
조주가 여기서 말을 돌린다. "너(벌레)는 그 (똥)속에서 무엇을 하느냐?" 그러자 문원은 "저는 그 속에서 여름 안거를 보내고 있습니다." 땡! 끝나는 종이 쳤다. 좋지 않은 것을 연이어야 하는데, 할 말이 궁했는지 여름 안거를 보낸다니 문원이 졌다고 할 것이다. 분명히 똥 속에서 무엇을 하느냐는 질문에 더 더러운(?) 대답을 해야 이기는데 여름 한 철을 보낸다는 말은 그렇게 볼 수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조금 극적인 반전(反轉)이 일어난다. 조주의 선문답이 너무 쉽게 결론이 나면 독자의 흥미를 떨어뜨린다.
조주는 이제 '(문원 네가 이겼으니까) 호떡을 가져오너라'고 말한다. 이긴 쪽이 한 턱 내기로 했고 진 것 같이 이긴 문원에게 호떡을 가져오라고 시킨 것이다. 참으로 이상한 결론이기도 하다. 문원은 앞의 말 보다 더 좋은 쪽의 말을 했으니 실제로는 진 것이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조주는 문원이 이겼다고 호떡을 가져오라고 하는가? 이것이 본 공안의 함정이요, 큰 의문점이다.
그냥 재미삼아 풀어놓은 이야기가 아니다. 힌트는 여름 안거 한철을 앉아서 보내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인가 하는 점이다. 조주는 이것을 똥 보다 못한 것으로 보고 있다. 왜 그런지 의심해 보라. 어린 사미와의 재미있는 대화가 어찌 보면 참으로 아리송한 문답이었다. 이것을 거꾸로 해석해 놓은 글도 봤다.
476. '떨어진 깃발'
師因入內 廻路上 見一幢子無截 僧問 云 幢子一截 上天去也 入地去也 師云 也不上天也 不入地 云 向什麽處去 師云 撲落也
조주선사가 궁중에 들어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깃대에 깃발 한 조각이 없어진 것을 보고 한 스님이 물었다.
"깃발 한 조각은 하늘로 날아갔습니까? 땅으로 들어갔습니까?"
"하늘로 올라가지도 않았고, 땅으로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럼 어디로 갔습니까?"
"떨어졌다(撲落也)."
오늘은 길가에 왕의 기(旗)인지 군대의 기인지 모르지만 깃대가 하나 서 있는데, 깃발(양쪽에 달린 태극기를 연상하면 쉬울 듯 하다) 한 조각이 끊어져 없어진 것을 보고 동행하던 한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시비를 걸어 본다. "깃발 한 조각이 하늘로 날아갔습니까? 땅으로 들어갔습니까?"
겊으로 만든 깃발이 도대체 하늘로 솟구쳐 오르고, 땅속으로 들어갈 리가 있는가.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묻고 있을까? 보통 사람이 이런 말을 들으면 '이 미친놈아! 무슨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느냐?' 하고 뺨이라도 한대 내리쳤을 것이다.
조주는 친절하게 대답한다. "하늘로 올라가지도 않았고 땅으로 들어가지도 않았다." 이 스님은 ‘그럼 어디로 갔습니까? 하고 시비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런데 선(禪)에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어야 조주선사와 맞상대를 할 텐데 이 스님이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저라면 당장에 그 스님을 깃대 쪽으로 밀어 붙여 '여기 쓰러졌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주는 점잖게 "떨어졌다"고 대답한다. 깃발이 거센 바람에 날아가더라도 결국에는 땅에 떨어질 것이니 그냥 일어날 수 있는 사실 그대로 말한 것이다. 그러나 과연 조주의 뜻이 이것일까? 아리송하다만 그 스님의 마음 상태를 지적한 말이다. 이미 조주선사의 말에만 끌려 다니는, 자기 본심을 벗어나 화살 맞은 새처럼 떨어진 수행자로 판명이 났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477. '또 그러다니'
師坐次 一僧纔出禮拜 師云 珍重 僧伸問次 師云 又是也
조주선사가 앉아 있는데 한 스님이 나와서 절을 하자마자 선사는 "몸조심하거라(珍重)." 하였다. 그 스님이 무엇인가 물어보려 하는데 선사가 말했다.
"또 그러는군(又是也)."
이 문답은 짧은 문장이지만 정말로 깨달은 사람 중에서도 금방 알아채는 사람이 몇 명 없을 것이다. 아마도 이전에 만난 적이 있는 한 스님이 조주에게 절을 하자, 조주는 '진중(珍重), 즉, 몸조심하거라.' 라고 말했다. '진중(珍重)'이란 중국 사람이 헤어질 때 하는 인사라고 하는데, 조주는 어째서 그 스님을 만나자마자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인가. 그러자 그 스님은 조주에게 무엇인가 질문하려 하는데, "또 그러는군." 이라니, 이건 또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원래 선문답이란 정답이란 것도 없고, 해설한다는 것이 가당치도 않은 일이긴 하지만 이 자리는 더욱 사람을 난감하게 만드는 장면이다. 조주의 철저한 선승(禪僧)의 모습을 그대로 보이는 것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보자마자 마음을 바로 콕 찌르고, 그것도 모자라서 아예 몸에다 송곳을 콱 박아놓고 그 반응을 기다리는 모습이다.
곧바로 '헛된 놀음 하지 말고 네 마음을 즉시 깨달아라! 머뭇거리다간 단칼에 날아간다. 또 그러지 마라. 도(道)란 오직 지금 당장이다. 당장에 네 자신을 드러내 놓아라!' 늙은 부처의 간절한 바람이 의뭉스러운듯한 말 속에 피를 뚝뚝 흘리듯이 담겨져 있다. 오 조주여!
478. '아름다운 노래가 다른 곡조에 섞이다'
師人在簷前立見燕子語 師云 者燕子喃喃地招人言語 僧云 未審他還甘也無 師云 依稀似曲纔堪聽 又被風吹別調中
조주선사가 하루는 처마 앞에 서서 제비가 지저귀는 것을 보고 말했다.
"이 제비의 재잘거림이 사람을 부르는 말 같구나."
한 스님이 말했다.
"그 말이 달콤하십니까?"
"아름다운 곡조가 들리는가 하더니 다시 바람에 실려 다른 곡조에 섞이는구나."
조주가 오늘은 처마 밑의 제비와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귀여운 제비들이 저 위에서 지지배배 서로 지저귀는 모습을 보고 곁에 있는 스님들에게 법을 설하고 있다. "제비의 재잘대는 것이 마치 사람을 부르는 말 같구나." 제비가 사람들에게 길고 줄기차게 법을 잘 설명한다는 말이다. 장광설(長廣舌)이라고 한다.
선(禪)에서는 모든 감각이 있는 중생뿐만 아니라 감각이라곤 없는 나무, 바위 같은 무정물(無情物)도 법을 설한다고 한다. 실제로 무정물이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지만, 사물과 내가 한 몸이 되는 경지에 이르면 나무가 나에게 말하지 않아도 말을 들은 것과 같다. 이전에 우리나라 종정이었던 동산스님이 태국의 불교 종정에게 돌로 만든 사자의 울부짖음(獅子吼)을 귀국 선물로 드린 것을 모르는가? 그들은 이 경지에 들어서지 못해도 선(禪)은 통하지 않으려야 통하지 않을 수가 없다.
조주는 이 새의 지저귐을 법어로 받아들이고 있다. 주변의 수행자들도 그렇게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만, 한 스님이 "그 말이 달콤하게 들리십니까?" 라며 판을 깨어 버린다. 제비의 지저귀는 소리가 그렇게 귀엽고 예쁘게 들리느냐고 물으니 이들에게 법(法)은 이미 물 건너갔다. "아름다운 곡조가 들리는가 하더니 다시 바람에 실려 다른 곡조에 섞이는구나." 제비들의 줄기찬 법문이 사람들에게 깨달음의 소식을 널리 알려주고 있는데, 저 엉터리 수행승의 말 한마디에 산통이 다 깨지는구나! '제비 소리 듣는 성품이 그대이다.'
479. '전쟁을 피해야 한다.'
有僧辭去 師云 什麽處去 云 閩中去 師云 閩中大有兵馬 你須廻避 云 向甚處回避 師云 恰好
한 스님이 하직인사를 하러 가니 조주선사가 말했다.
"어디로 가겠느냐?"
"민(閩)족의 땅으로 가겠습니다."
"민(閩) 땅에는 큰 전쟁이 있으니 피해야 할 것이다."
"어디로 피합니까?"
"그럼 됐다(恰好)."
한 스님과 작별을 하게 되니 조주가 도(道) 닦으러 어딜 가려고 하느냐고 묻는다. '그대가 여기서 깨치지 못하면 어디에 간들 깨달을 리가 있겠느냐?' "민(閩)족이 사는 땅으로 가겠습니다." 중국의 소수민족 가운데 '민족(閩族)'이 많이 몰려 사는 곳을 민(閩) 땅이라고 하는데, 지금 중국 남동부의 대만과 마주보고 있는 복건성(福建省)이다. 밀암함걸(密菴咸傑:1118-1186)선사도 민땅 출신인데, 예로부터 도인(道人)이 많이 나온 지역인 것 같다. 우리와 한 핏줄인 조선족은 연변 등의 흑룡강성에 많이 살고 있다.
"민(閩) 땅에는 큰 전쟁이 일어났으니 모름지기 피해야 한다."
민(閩) 땅은 지금 전쟁 중이다. 그곳에 가면 안 된다고 조주는 말했다만, 이 말은 바로 마음을 직접 가리키고 있다. 무슨 뜻인지 금방 잡아채야 한다. 실지로 민 땅에 전쟁이 났는지 아닌지는 조주도 모를 것이다. 전쟁이 난 곳은 민 땅이 아니다. 그럼 어느 곳인가. 바로 여러분의 마음 속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이다. 마음 속의 전쟁을 모름지기 물리치라고 명령한다.
"어디로 피하면 좋겠습니까?"
민 땅에 전쟁이 났다고 하니 그럼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 그것에만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이미 제주 가는 카페리호는 저 멀리 바다를 가르고 있다. "그럼 됐다(恰好)." '흡호(恰好)'란 좋다, 그만 가도 된다 이 뜻이다. 민 땅에 전쟁이 나서 피해야 된다 하고서는 다시 됐다, 그만 가거라니 누굴 놀리십니까? 하고 투덜거릴 만하다. 그랬다간 하늘이 두 쪽이 나더라도 이 길에선 숟가락 하나 못 올릴 것이다. '여기 누구 사람이 있는가?'
480. '옷을 뒤집어 쓰다'
有僧 上叅次見 師衲衣蓋頭坐次僧便退 師云 闍黎莫道老僧不祗對
한 스님이 올라가 법을 물으려는데 조주선사가 머리에 가사를 뒤집어쓰고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냥 물러나니 조주선사가 말했다. "그대는 내가 대답하지 않았다고 말해서는 안 되네."
짧은 문장 속에 입으로 담지 못할 만큼 무궁무진한 뜻을 담고 있다.
어느 날 조주는 옷을 머리에 이고 앉아 있다. 그때 마침 한 스님이 절에 와서 조주선사에게 질문을 하려고 했는데, 머리에 옷을 뒤집어 쓰고 있는 것을 보고는 바로 물러 나왔다. 그러자 조주가 말하길, "내가 대답하지 않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달마대사는 소림굴에서 9년 동안 벽만 바라보고 앉아 있었고, 노조산(魯祖山)의 보운(寶雲) 선사는 평상시에 승려가 찾아오기만 하면 얼른 벽을 향해 돌아앉았다고 한다. 취미선사는 한 스님이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 물으니 "아무도 없을 때 말해 줄께." 라고 했다가,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 그 스님을 데리고 대나무밭으로 들어갔다. 다시 "아무도 없으니 말씀해 주십시오." 하니 대나무를 가리키며, "이 한포기는 이렇게 길고 저 한포기는 저렇게 짧다." 하자 그 스님이 확실히 깨달았다고 한다.
위 조주의 법문에 대해 아무 설명도 없이, 달마, 노조보운, 취미선사가 가르쳤던 사례를 여기에 열거했는데, 조주가 옷을 뒤집어 쓴 것과 함께 이들의 공통점을 찾아보기 바란다. 하나를 알면 백, 천을 알게 된다. 이것을 보면 도(道)는 정말로 멀리 있지 않고 바로 우리 곁에, 코앞 가까이에 있음을 안다. 더 이상 이 글을 읽지도 말고 여기서 결판을 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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