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신1리(豊申1里)
1. 역사적 배경
본래 예천군 현서면(縣西面) 땅이었던 것이 1906년 칙령 49호에 의하여 비안군(比安郡) 현서면으로 이속 되었다가 1914年 총독부령 111호에 의하여 부· 군· 면 폐합때 다시 예천군(醴泉郡)으로 환원되면서 직신동(直申洞) 신풍동(新豊洞) 산성동(山城里) 풍덕리(豊德里)를 병합하여 풍덕의 ‘풍'자와 직신의 ’신'자를 따서 풍양면 직신동으로 개편시켰고 1962년 5월 10일 직신과 풍덕으로 분동되고 1971년 12월 30일 행정리동으로 분동될때 웃마 직신 까치골을 合쳐 풍신1동으로 1988년 5월 10일 동을 리로 변경했다.
2. 마을의 유래
- 직신(直申) (아랫마, 새마) 직신(織申)
풍신1리를 대표하는 마을이고 제일크다. 직신은 까치골 뒷산이 이 마을의 앞산이 되며 마치 산이 비단을 짜는 베틀형국(높이 110m)의 옥녀가 직금(織錦) 한다는 형의 직금산(織錦山)이고 이 마을 터가 그 베틀의 북과 같이 생 겼다고 하여 직신(織申)이라 하였다가 지금은 직신(直申) 으로 쓴다.
- 중간마 직신(直申)인 아랫마와 평마인 웃마와의 중간에 위치해서 불러지는 이름이라 하고 남양홍씨가 공거리(公車里)(풍양면 공처리)에서 1590년경, 이 마을에 이 래, 그 후손이 살고있다. (남양홍씨직신가승)
- 평마(稚洞:치동), 웃마
직신(直申)에서 가장 북쪽에 있고 높은곳에 있는 마을, 진주이씨가 개척한 마을이라고 하나 알길은 없고, 까치골에서 동북쪽이며 뒷산이 직금산(織錦山)내에 있는 푯대산 아래의 마을이다. 직금산(織錦山)에 평이 많이 살고 보리 농사에 피해를 줌으로 불여진 이름이며 산속마을이므로 예로부터 가히 피난할만한 곳이라하여 여러 성씨들이 모여 살고있다. 경주이씨가 다인면 송호동 안동김씨가에 췌거하고 1860년경 송호(松湖)에서 이거 그 후손이 산다.
(4) 까치골(鵲谷), 신풍리(新豊里)
성씨별 출입이 많아 어느 성씨가 개척했는지는 잘알수 없고 다만 옛날 예천군 현서면 신풍동(新豊洞)이었는데 1906년 비안군(比安都) 현서면 신풍동(新豊洞)으로 되었다가 1914年 예천군 풍양면 풍신동(豊申동)에 이속하게 되었다. 1665年頃 함령김씨가 처음 정착할때 유난히 까치가 많이 모여 있어 명당으로 알고 더를 잡았다고 한다.
3. 마을의 자연환경(직신 큰마을 기준)
동쪽 봉화재 넘어 다인면 상광덕이 된다.
서쪽 까치골을 지나 직금산(織錦山)을 경계로 괴당2리와 접하고 효제방향이다.
남쪽 풍신2리인 풍덕리와 접하고 산성쪽이다.
북쪽 웃마쪽, 웃마 뒤의 등을 넘어 봉림서 당촌가는 길이 경계이고 봉림의 부처댕 쪽, 나아가서신흥쪽이다。
4. 산천의 유래
- 비석걸(碑石溪:비석계)
괴당서 까치골과 못안 가는 갈림길의 개천인데 이곳에 옛날에 비가 서 있었다고도 하고 이 곳 계천둑으로 부터 풍덕쪽으로 약 15m 지점의 웅덩이에 어떤비(碑)인지 묻혔다고 해서 불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불탕골 절탕골
봉화산 북쪽 봉화재아래의 골자기에 옛날에 절이 있었는데 여기의 절을 훼철(毁撤)하여 다인 비봉산의 대곡사(大谷寺)<1368년 지공창건(指空創建)>를 지었다는 전설이 있다. 여기에 아직도 약 400평의 절터라고 하는 평지가 있고 여기서 서북쪽으로 불탕골이라고 하는 곳에 이 절의 샘이라고 전하는 샘이 있는데 아무리 가물어도 바위틈에서 솟아 나오는 조그마한 샘이 있으며 이 마을에 대곡사(大谷寺)의 사답(寺畓)이 있었다고 한다.
- 봉화재와 말 무덤
봉화재는 속칭이고 사실은 소이산(所伊山)이며 직신 에서 제일 높은산이다. 옛날에 봉수(烽燧)을 올렸는데 동쪽으로 비안 대암산(大岩山)의 것을 받아서 서쪽으로 룡궁 용비산(龍飛山)으로 보고 임진왜란후 없어 졌다고 한다. 봉수대에서 동북 아래쪽으로 약 200m 지점에 말 무덤 이라고 부하는 큰 무덤이 있는데 도굴된 흔적이 있다.
- 마을의 특징
풍신1리 전체가 온통 옛날의 유적지같은 인상을 풍긴다. 봉화재 원골 절터등, 절터에서는 옛날 기웃장이 나오고 풍신리 469번지 논에서는 작은 청동불상이 논을 갈다 출토 되기도 했다. 이곳이 고대국가(사벌국 등)부터 이후 신라의 접경지 이였고 상주 비안 용궁 예천의 군 접경지로 경계가 불분명하였고 빈번한 관의 소속변경으로 각 지역에 전해지는 자료가 남아있지 않음으로 앞으로 더 많은 노력이 발굴 보전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