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 탐험 오늘은 잘 할 수 있다 글 이영준 기자·사진 양계탁 기자 “‘오늘은 잘 할 수 있다’ 이게 좌우명이에요. 그래서 수첩에도 적어놓고, 긴 원정기간에도 매일 이 말을 떠올리며 지냈어요. 앞으로의 계획보다 그저 오늘을 잘 사는 것이 지금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형모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이 저려왔다. 언젠가 그가 10여년째 다리와 손목에 차고 다녔다는 납주머니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오늘을 잘 살기 위해서, 온몸에 느껴지는 뻐근함이 그에겐 하루의 보람이라고 했다. 이형모 > 1979 강원 원주 출생 > 1997 관동대학교 산악부 입회 > 2003 특전사 제대 > 2004 한국청소년오지탐사대 중국 서부지역 탐사 등반·백두대간 종주 > 2005 쓰촨성 슈에바오딩 등정·카자흐스탄 칸텡그리 등정 > 2006 에베레스트 북릉~북동릉 등정·마나슬루 등반 > 2007 베링해 도보횡단 시도·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 > 2008 중국 쓰촨성 희조피크 등정·가셔브룸 1·2봉 등반·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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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모는 작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 중 사고로 사망한 오희준·이현조씨가 말하던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그리고 늘 겸손하라’는 말을 늘 가슴에 새기며 살고있다.
또 약속시간에 늦어 허겁지겁 택시를 잡아타고 우이동에 다다랐더니, 이형모는 진작부터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날렵한 로드바이크를 옆에 세워두곤. 바이크용 쫄 슈트를 입고 등반용 블랙다이아몬드 헬멧을 쓴 그의 모습이 다소 우스꽝스럽기도 했지만, 먼저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그에게 나도 손을 내밀었다. 에베레스트 남서벽에서 돌아온 지 채 보름밖에 되지 않은 구릿빛 얼굴에서는 8000m 위에서 불던 세찬 제트기류의 흔적들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도선사까지 왕복하는 택시에 난 다시 오르고, 이형모는 페달에 발을 얹었다. 1500원의 차비를 지불하고 도선사 광장에 내려 담배 한 대를 문 사이, 10분도 되지 않아 거친 숨소리를 내며 그가 나타났다.
산악부 입회와 군 생활이 인생 두 번의 기회였다 “고소에서 오래 있으면 근육이 흐물흐물 해진다는데, 쌩쌩하네요.” “이 자전거가 90만원 주고 산건데, 계산해보니 이제 본전은 했고 앞으로 탈수록 돈 버는 거잖아요. 꼭 차비 아끼려는 건 아니고 운동도 되고 해서 웬만한 데는 자전거 타고 다녀요.” 그의 거친 숨소리는 한동안 잦아들지 않았다. 강원도 원주시 석남리. 치악산 자락이 이형모의 고향이다. 그곳이 얼마나 깡촌인지 나는 가보지 않아 알지 못하나, 적어도 그의 투명한 눈동자에서 풍겨 나오는 아우라와 언제나 말수가 적은 품성에서, 그가 유년시절을 보낸 무대가 여느 북적거리는 읍내가 아니라 아침에 눈을 뜨면 산안개가 짙고 새소리가 먼저 들려오는 산골이라는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다닐 적부터 치악산에 자주 올라갔어요. 동네 주민은 국립공원 입장료를 안냈거든요. 휴일에 집에서 빈둥거리는 것보다 땀 흘려 산에 올랐다 내려오면 온 몸이 조금 뻐근해지면서, 아 오늘도 뭔가 보람된 일을 했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서요. 처음 보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먹을 것을 권하는 산에서 만난 새로운 모습이었어요.” 강릉에 있는 관동대학교 사회체육과에 진학해 객지생활을 시작하며 그가 먼저 찾아간 곳이 산악부였던 건 당연한 배경에 따른 결과였다. 몸 움직이는 걸 좋아하던 그가 정신없는 1, 2학년을 보내고 검은 베레 특전사에 입대하게 된 건 지금까지 살아오며 가장 뿌듯했던 순간 중 하나였다. “체력장 실기를 모두 100점 맞았어요. 입대 일주일 전 합격했다는 전화를 받고 너무 기뻤습니다. 4년여 군 생활이었지만 하나도 힘든 게 없었어요. 제대 말년 최고참일 때도 훈련을 받고 싶어서 천리행군에 자원하기도 했었으니까요.” “서울에서 근무했지만 전국을 돌아다니며 훈련할 때가 많았어요. 그런 게 제일 좋았어요. 한라산에도 가보고, 특히 새벽에 행군하고 이동하곤 했는데, 경기도 외곽의 어느 공단을 지나며 여명이 깔린 가운데 공장에서 새어나오던 불빛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해요. 정말 신선했거든요.” 스무 살, 오히려 육체적 힘듦에서 살아있음을 느끼는 나이. 제대를 앞두고 연장복무 권유에 이형모는 잠시 갈등했지만 그 길로 가지는 않았다. “2년여 먼저 인연을 맺었던 산악부 선후배들이 너무 보고 싶고, 또 산에도 가고 싶더라고요.” 제대 후 그는 안동대산악부 동기 강기석씨와 함께 백두대간 종주를 한다. 강씨와는 그전 설악산 하계등반에서 안면을 트고 지내던 사이였고, 곧 서로의 산에 대한 열정을 알아 의기투합하게 된 것이다. 24일 만에 전 구간을 모두 걸어낸 둘은 그해 대한산악연맹에서 파견하는 청소년오지탐사대에 나란히 지원해 대원에 선발된다. “첫 고산등반이라 초보나 다름없었지만, 당시 대장이었던 김환구 선배나 왕청식 선배로부터 고소적응 등 여러 가지 노하우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짜릿한 경험이었을까. 4학년때 산악부 주장을 맡게 된 그는 학교 선후배들과 꾸린 동계 중국 슈에바오딩 원정에서도 보름 여라는 짧은 등반기간 동안 이 산의 동계초등을 해낸다. 첫 번째 등정 시도에서 밤새 불어 닥친 거센 계절풍에 모든 장비를 날려버렸던 그는 원정기에서 이렇게 당시를 회상했다. ‘이제 죽었구나. 찰나의 순간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정말 죽는구나 포기할 즈음… 우리는 살기 위해 재빠른 동작으로 기어 나와 몸을 끌어 올렸다. 하지만 더욱 거센 바람은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텐트를 찢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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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잘 할수 있다’는 이형모의 좌우명이다. 그래서 그는 별다른 원대한 계획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그저 오늘과 오늘이 모여 삶이라는 큰 산을 쌓아갈 뿐 이립의 나이는 아직 한참이나 젊은 것이다.
그는 손목을 다치고도 정상에 가기 위해 말을 하지 않았던 후배에게 “그래, 형이랑 꼭 정상에 가자. 그렇게 될 거야”라며 다독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평소 설악산 등반을 가서도 다른 학교 산악부원들이 곤한 잠을 자고 있는 사이 후배들을 깨워 구보를 시켰던 그였다. 2005년 여름 이형모는 카자흐스탄 칸텡그리에서 열린 아시아 산악인 합동등반에 선배 2명과 함께 참가했다. 하지만 다들 컨디션이 좋지 않아 혼자서 등반에 나서게 된다. “베이스에서 러시아 팀하고 친해져서 고소캠프를 빌려 쓸 수 있었어요. 그래서 등반을 하게 됐는데, 3캠프에 올라간 날 도착하자마자 배가 엄청 고픈 거예요. 그래서 과식을 했더니 다음날 고소증이 오더라고요. 혼자뿐이니 판단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고민하다가 욕심이 생겨 정상으로 향하게 됐어요. 오후 4시쯤 정상에 섰다가 내려오는데 8시쯤부터 화이트아웃이 생기더니 마지막 캠프까지 30여분을 남겨놓곤 꼼짝도 할 수 없는 거예요. 다행이 그 자리에서 기다린 끝에 달빛에 비친 길을 찾아서 내려올 수 있었는데, 나중에 캠프로 돌아왔을때 너무 힘들었는지 먹은걸 전부 토했어요. 경험이 없었던 거죠.” 이형모는 매번 원정 때마다 극한의 체험을 통해 소중한 경험들을 쌓아갔다. 4학년 2학기가 되자 친구들은 취업 준비로 바빠졌지만 이형모는 남다른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강릉에 사는 선배 최기순씨가 “내년 박영석이 에베레스트에 가는데 함께 갈 생각이 있으면 추천해주겠다”고 제안해 온 것이다. 이형모는 학창시절의 마지막을 “그저 졸업만 하면 에베레스트에 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보냈다”고 털어놨다. “박영석 대장과 첫 대면 겸 산행을 하자고 해 설악산 천화대 리지를 가기로 했는데, 첫인상을 어떻게 남겨야 좋을까 고민하다가 그냥 평소 하던 대로 하자고 생각하고 타이즈에 군화 차림으로 나갔어요. 군화가 생각보다 바위에 잘 붙어서 리지등반 할땐 대부분 그걸 신고 다녔거든요. 그런데 박 대장님이 저를 이상하게 쳐다봤어요. 그리곤 한동안 ‘쫄 워커’라는 별명으로 불렸죠.”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그리고 늘 겸손하라 ‘쫄 워커’는 2006년 에베레스트 정상에 섰다.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부끄러움이 앞선다고 털어놨다. “등반 중에 셰르파들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떳떳하려면 셰르파 만큼 나도 짐을 지고 올라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남의 힘을 빌린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아요. 그렇게 많은 인원이 등반한 적은 처음이라 대규모 팀에 적응하는 데에도 조금 시간이 걸렸죠. 그전엔 나만 잘 챙기면 된다고 생각했었거든요. 형들한테 혼난 적도 많아요.” 이어 마나슬루, 베링해 횡단, 에베레스트 남서벽으로 이어진, 바빴던 그의 등반일정은 짧은 시간에 이형모가 산을 바라보는 시각을 넓혀놓았다. “(오)희준 형과 함께 간 마나슬루는 시간이 촉박해 퍼미션 없이 갔어요. 현지에서 그게 적발돼 등반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오히려 그 경험이 제겐 더 약이 된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았다면 산을 쉽게 보고 조금 거만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당시 남벽을 등반하던 프랑스대를 보면서 그들의 등반방식에 대해서도 배운 게 많았죠.” “베링해 횡단 때는 목적지를 30km 남겨두고 밤사이 강풍이 불어 90km나 떠내려갔어요. 결국 미국 국경수비대에 구조될 수밖에 없었는데, 영하 30도를 밑도는 추위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하던 희준 형의 모습에서 나를 돌아보게 되었어요.” 이형모는 작년 남서벽 사고가 나기 전까지 박영석씨의 아파트에서 함께 살았던 고 오희준씨와 이현조씨의 모습에서 자신이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작년 봄 사고가 나기 전날 이형모는 4캠프 자리를 찾지 못해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2캠프로 내려오던 하산길,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대신 하기 위해 산으로 올라오던 오희준·이현조씨와 마주쳤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베이스에서 자고 있는데 새벽에 대장님이 대원들을 전부 깨웠어요. 상황이 안 좋은 것 같다고. 그런데 저는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믿고 싶지도 않았지만, 구조를 하려면 쉬어 두어야한다고 하곤 다시 텐트로 돌아갔어요. 냉정했던 거죠.” 이형모는 시신을 찾아 내려오는 이틀째 아이스폴에서 쌍무지개를 봤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고인들이 자신에게 바통을 물려주었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형들은 네가 산에 다닐 수 있는 것은 누군가에게 빚을 지는 것이다. 그 빚을 선배에게 값지 말고 후배에서 갚아야 한다. 판단은 머리로 냉철하게, 행동은 가슴으로 따뜻하게, 그리고 늘 겸손하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어요. 형들이 ‘형모 잘 한다’ 칭찬할 때 그렇게 좋을 수 없었어요.” “살면서 세 번의 기회 중 제겐 대학산악부를 통해 산을 접한 것이 첫 번째였고, 군 생활이 두 번째였던 것 같아요. 세 번째는 좋은 여자 만나기를 내심 기대하고 있는데 으흐흐.” “부모님들만 고향에 살고 계신데, 얼마 전 아버님이 암 수술을 받고 교통사고까지 당해서 전에 좋아하시던 술을 전혀 못하세요. 어머니는 낮에 농사일을 하고 저녁엔 식당일을 나가시구요. 전에 집에 가서 아버지와 술 한잔씩 하곤 할 때 항상 가득 넘치게 따라주시던 그 잔을 다시 받고 싶어요.” “아르바이트 같은 거 별로 안 해요. 가끔 박 대장님이 용돈도 줘요. 밥은 집과 가까운 월곡동 영원프라자 구내식당에서 먹어요. 원정등반은 산에 다니는 누구나 가보고 싶어 하는 것이지만, 사실 지금은 힘들어요. 나이나 돈 때문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떨어져 있고 또 그 시간에 그들이 힘들어 하는 모습때문에.” 8000m 위에서 세찬바람을 맞으며 내는 거친 포효가 이형모의 전부는 아니었다. 전부 다 말하지 못할 삶의 부산물들이 여전히 청춘의 주위를 맴돌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번듯한 직장을 잡고 가정을 일구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필부의 삶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저 오늘 땀을 흘릴 뿐이다. 4년 전 오지탐사대 대원으로 선발돼 첫 해외등반을 떠날 때 인터뷰에서 “산이 당신에게 어떤 존재인가?”하는 질문에 이형모는 “지금도 그렇듯이 앞으로도 늘 친구같이 떨어질 수 없는 존재로 남을 것 같다”며 “전문산악인이 되겠다거나 그런 생각은 아직 해보지 않았고, 단지 산이 좋아 늘 항상 같이 하고 싶다”고 대답했었다. 우리 산악계에 통념처럼 인식되어온 전문산악인과 산악인, 그리고 일반인(?)이라는 구분은 다소 모호하다. 히말라야의 고산을 오르면 전문산악인이고 그렇지 않으면 일반인이라는 건 다분히 자본에 물든 흑백논리로서의 접근일 뿐이다. ‘독짓는 늙은이’가 독을 짓지 않으면 남는 것은 ‘늙은이’일 뿐, 우리가 독짓는 늙은이에게서 감동을 받는 까닭은 그가 독을 짓고 있는 행위 때문이 아니라 늙은이라는 필부로만 존재할 때에도 그 영혼이 뿜어내는 고고한 정신 때문이 아닐까. 바꿔 말하면 산악인에게서 고산과 바위를 오르는 기술을 빼고 나면 남는 것은 인(人)일뿐, 희박한 공기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며 ‘오늘은 잘 할 수 있다’고 되뇌는 이형모에게서 나는 현재를 온몸으로 밀고 나아가는 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이었는지는 오늘이 쌓이고 쌓인 50년쯤 후에야 다시 묻고 싶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emountain.sbclub.com%2Fphoto%2F081224_03.jpg) 손톱의 봉숭아물은 뭔가 어색한 듯 하면서도 나름 노력한 흔적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
첫댓글 이형모 씨 생긴 모습이 딱 덕용이 형님 판박이네...ㅎ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