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600·개항130 인천을 본다·3]>16<축구 | ||||||||||||||||||||||||
시민과 선수의 '하이파이브' 한국축구와 호흡해 온 인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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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협 공식기록보다 보급연도 5년이상 앞서 1930년대 인천 조일양조 첫 실업팀 창단 한국전 이후 첩보부대 축구단이 계보 이어 웃터골 → 숭의운동장 → 문학월드컵 → 전용경기장 100년에 걸쳐 구장도 진화 부평고-운봉공고 양대산맥… 수도권 연고 '유공' 이후 2003년 인천Utd 창단 축국(蹴鞠)은 동양의 고대 축구다. 중국 고대의 황제(黃帝)라는 임금이 병정들을 훈련시키는 놀이로 축국을 했다는 전설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당나라 때 전해졌다. 축국은 신라·고구려·백제에 전해졌으며, 일본까지 퍼졌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김춘추와 김유신이 축국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가죽주머니 속에 동물의 털을 넣어 둥글게 하거나, 돼지 또는 소의 오줌통에 바람을 넣어 공을 만들었다. 규칙은 오늘날의 제기차기와 비슷했다고 한다. 축국의 기원과 옛 문헌의 기록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선조들은 예로 부터 둥근 물체를 발로 차는 놀이를 즐겼다. 말 그대로 민속 놀이였다. 일정한 규칙과 기술을 바탕으로 공을 차는 놀이, 즉 공을 차는 축구는 1882년 제물포(인천)를 통해 도입됐다.
임오군란 직후 영국 군함 '플라잉 피시(Flying Fish)'호는 동맹 관계에 있는 일본을 지원하고자 제물포항에 주둔했다. 플라잉 피시호에는 수병들이 있었고, 그들은 무기·식료품과 함께 축구공도 싣고 왔다. 수병들은 항구에 내려 쉬는 시간에는 공을 찼다. 제물포 사람들은 영국 수병들과 환담을 나누고, 담배를 나누어 피우고, 공차기도 배웠다. 야구와 마찬가지로 축구도 신식 교육의 수업 과정으로 받아들여지면서 국내에서 점점 기틀을 잡아갔다. 대한축구협회의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1904년 서울의 관립 외국어학교에서 체육 과목의 하나로 축구가 채택됐다. 국내 공식 첫 경기는 1905년 6월 서울 훈련원(옛 동대문운동장 터)에서 열린 대한체육구락부와 황성기독청년회 간의 경기라고 한다. 하지만, 실제 한국 근대 축구의 보급 연도는 좀 더 당겨질 가능성이 있다. 2007년 인천 강화문화원이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당시 강화문화원은 강화군청 의뢰로 한국 근대 해군 창설과 관련한 조사를 했다. 강화문화원은 1893년 강화에 설립된 최초 해군사관학교 '통제영학당' 자료를 찾기 위해 문헌·현지조사를 벌이다가 성공회대학교에서 '모닝컴(Morning Calm)'이란 잡지의 마이크로필름을 발견했다. 필름의 내용물 중 8줄 가량의 영문 문서와 사진 1장이 축구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이는 시드니 J 파커라는 사람이 영국 성공회가 발행하는 '모닝컴' 편집자에게 보내기 위해 1901년 3월21일 제물포에서 작성한 글(편지)과 사진이다. 파커는 편지에 "G.A. 브라이들 목사에게 수년간 훈련을 받은 강화학당 축구팀이 존재한다. 선수들은 좋은 경기력을 선보이고 있으며, 보다 체계적인 훈련을 받는다면 잉글랜드 리그 진출도 가능하다"고 썼다. 특히 선수들이 몇 년간 훈련을 받았다는 내용이 글에 담겨 있어, 이 축구팀이 1890년대 후반부터 존재했음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이 때문에 강화학당 축구팀의 존재는 한국 근대 축구의 보급 연도를 5년 이상 앞당긴다. 그럼에도, 강화학당 축구팀에 대한 세밀한 연구가 이뤄지지 못한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축구는 영국에서 근대 스포츠로 발전했다. 그 기본 동력은 '근대적인 교육 시스템'과 '시민·노동자에 의한 현대 도시문화' 등이다. 이 같은 조건이 갖춰진 곳이라면 축구가 확산될 여지가 크다. 1883년 인천항 개항 이후 인천은 항만·정미·목재·제분·철강·주류산업 등이 발달했다. 인천은 축구가 발전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1920년대 인천에는 인배회, 율목리팀, 한용단, 대성단 등의 자생적 '클럽'이 있었다. 이들 팀들이 참여한 가운데 현 제물포고교 자리인 웃터골 운동장에서 '전인천 축구대회'가 열렸다. 1919년 10월 인천 중구 선화동에 설립된 조일양조(우리나라 최초의 기계식 소주공장)는 1930년대 들어 국내 최초의 축구 실업팀을 창단했다. '조양', '인천 조양' 등으로 불린 팀은 각종 대회를 휩쓸었다. '조양'은 1939년 전국도시대항축구대회, 1946년과 1947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1948년 런던올림픽을 앞두고 열린 한국 축구대표팀 최종 엔트리에 이유형, 이시동, 배종호, 정국진, 오경환 등 조양 선수 5명이 이름을 올린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조일양조가 문을 닫으면서 축구팀도 없어지게 된다. 한국전쟁 이후 인천에 육군 첩보부대(HID) 축구단이 탄생했다. 이 축구단은 대통령배 축구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1960년대까지 존재하면서 인천 축구팀의 계보를 이어갔다. 김윤식 전 인천문인협회장은 "(인천은) 개항 이후 국내 여타 지역보다 자본도 많이 있었고, 일제 치하 당시 항일의 방법으로 교육열과 함께 스포츠에 대한 응원과 열의도 컸다"면서 "이 같은 시대적 상황이 지역 스포츠 발전에도 기여한 것으로 풀이된다"고 말했다.
1900년대 초반 인천의 축구와 야구경기는 웃터골 운동장에서 펼쳐졌다. 이곳은 널찍한 평지 주변으로 야트막한 구릉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 언덕이 관중석 기능을 했다. 전인천 축구대회도 이곳에서 열렸으며, 국내 최초의 실업팀 조양도 창단 초기 웃터골 운동장을 홈 경기장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지역사학자들은 예측한다. 1934년 인천공설운동장(현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이 문을 열었다. 이 운동장은 1964년 대대적인 보수작업을 거치면서 숭의종합운동장으로 명칭이 바뀐다. 숭의종합운동장은 인접한 도원야구장과 함께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 전까지 인천 체육의 산실 역할을 했다. 2002년 6월 15일 외신들은 "인천에서 세계 축구사가 바뀌었다"고 썼다. 한국 축구팀이 조 1위를 차지하며 사상 첫 월드컵 16강 진출에 성공한 소식을 긴급 뉴스로 타전한 것이다. 문학월드컵경기장이 한국 축구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문학월드컵경기장은 2003년 창단한 인천의 프로축구팀인 '인천 유나이티드'의 홈 경기장으로 사용됐다. 숭의종합운동장과 도원야구장을 헌 자리에 약 2만석 규모의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이 들어섰다. 이 경기장은 선수와 관중이 하이파이브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경기장과 관람석이 가깝다. 인천 유나이티드는 지난해 인천축구전용경기장으로 홈 경기장을 옮겼다. 문학월드컵경기장은 현재 실업축구 내셔널리그 한국코레일의 홈 경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 인천 프로팀의 변화 부평고는 운봉공고(현재 하이텍고)와 인천 축구의 양대 산맥을 형성했다. 이 중 부평고는 1982년 창단 이래 배출한 청소년·국가대표 선수만 60여명에 이르고, 전국대회 우승 기록만 20여차례나 된다. 노정윤과 이임생,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인 김봉길부터 최태욱, 김남일, 이천수, 이근호 등이 부평고 출신이다. 1983년 동북아 최초의 프로리그 '슈퍼리그'가 출범했다. 당시 인천 연고팀은 수도권 전체를 연고지로 뒀던 유공 코끼리 축구단이었다. 이듬해 슈퍼리그에 럭키금성과 한일은행, 현대가 합류하면서 연고지가 조정됐다. 인천 연고팀은 현대 호랑이 축구단으로 변경됐다. 사실상 '홈 엔드 어웨이' 경기제가 정착되는 1987년에 연고지 재조정이 있었다. 유공이 인천과 경기도 지역의 연고팀으로 정해졌으며, 현대는 강원도를 배정받았다. 하지만 유공은 인천시의 비협조적 행정에 불만이 많았다. 이 때문에 1991년 서울로 연고지를 옮겼다. 2002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인천시가 프로팀 유치를 추진했지만 '불발'로 끝난다. 이후 2003년 6월 시민프로축구단인 인천 유나이티드가 창단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시석 인천시축구협회 전무이사는 "인천은 한국 축구의 발상지다. 인천 축구의 역사는 현재진행형이며, 시민과 함께 더욱 발전하는 축구 문화를 만들어 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글 = 김영준기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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