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별된 믿음
성경본문 : 에스라 4:1-6
1.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전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2.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로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 같이 너희 하나님을 구하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3.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하신대로 우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4.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5.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의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경영을 저희하였으며
6. 또 아하수에로가 즉위할 때에 저희가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을 고소하니라
=====================================================
1.성전을 잃게 된 이유-구별된 믿음을 버렸기 때문
이스라엘의 여호와를 섬기는 신앙은 성전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 성전이 거기 이스라엘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함께 계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의 멸망과 함께 이 성전이 허물어지게 되었습니다.
철저히 구별된 삶을 원하셨던 하나님 앞에서 그들은 여호수아가 그 백성에게 다짐케 했던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일(수24:15-25)을 떠나 성전에 이방신들의 단을 쌓고 아세라 목상들을 세워(대하33:1-9) 성전을 더럽혔습니다. 그 때문에 성전은 허물어지고 그들은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그를 파멸시키시리니, 이는 하나님의 성전이 거룩하며 너희가 그 성전이기 때문이라』(고전3:16,17)
이 성전이 허물어지게 된 역사적 사건은 오늘날 주님의 성령을 모시고 살아가는 성전된 우리들에게 거울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가 구별된 삶을 살지 않고 세상의 것으로 뒤범벅이 될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만한 기회마저 잃어질 수 있다는 경고의 말씀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2.성전재건의 의미
유다인들은 성전을 잃은 채 약 70여 년간을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해야했습니다. 이 바벨론 포로생활은 하나님께서 구별된 무리를 추리고 추리시기 위한 기간이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은 식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님께서 회복하시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날만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다니엘이 예루살렘 쪽을 향해 하루 세 번 기도 드렸다든지, 그의 세 친구들이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았다든지, 모르드개나 에스더 같은 인물이 하나님 앞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살았든지 하는 그 시절의 이야기들은 그들의 신앙이 성전을 잃고서 힘들었지만 하나님의 회복하심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마침내 하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페르시아의 왕 코레스(스1:1-4)를 통하여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하라는 영을 내리셨던 것입니다. 포로로 끌려갔던 많은 유다인들은 성전을 짓고자 하는 기쁨으로 귀향했습니다. 수룹바벨, 예수아, 제사장과 레위인이 중심이 되어서(스3:8) 성전의 기초를 놓았을 때, 이전 솔로몬의 성전을 보았던 연장자들은 기쁨과 눈물이 뒤섞인 감회를 느껴야만 했습니다(스3:12-13).
이 성전재건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건물을 짓는 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런 말씀들을 예배당을 마련하기 위해 이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의 영이 계신 사람이 성전이라고 했던 복음의 가르침을 깊이 생각합시다(고전3:16).
하나님께서 오늘날 재건하려는 것은 건물이 아닙니다. 무너진 영혼입니다. 세상 것으로 뒤범벅이 된 영혼, 하나님을 잃은 마음으로 곤고해 하는 영혼들에게 주님의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성전건축을 이루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려고 하는 성전 건축은 영혼구원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구원된 혼들이 늘어가는 것이야말로 성전건축인 것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3.그럴듯한 제안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다인들의 성전 건축하는 움직임을 보고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본래, 먼 이방나라의 민족이었으나 앗수르 왕 에살핫돈 때, 북쪽 이스라엘로 거주지를 옮겨와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중 대부분이 남아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과 섞이면서 서로 결혼을 하게 되었고 그들과 섞였던 이스라엘의 무리는 후에 <사마리아 인>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제안했습니다.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와서 말하기를 우리로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이는 우리도 너희가 하는 것처럼 너희 하나님을 찾으며 또 우리도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온 앗수르의 에살핫돈 왕의 이래로 그에게 희생제사를 드렸음이라 하더라』(스 4:2)
첫째, 성전을 함께 건축하자고 했습니다.
이 말은 돕겠다는 뜻입니다. 적어도 손을 잡자는 의미이기 때문에 그렇게 나쁜 제안은 아니라고 생각이 됩니다.
둘째, 유다인들이 하나님을 찾듯이 그들 역시 하나님을 찾으며 산다고 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께 묻고 구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하나님께 기도한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들은 강조했습니다. 우리도 너희와 다르지 않고 같다는 것을 부각시키려 했습니다.
셋째, 하나님께 희생을 드려왔다는 것까지도 덧붙였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왔다는 뜻입니다.
4.확실한 거절
그러나 유다인들은 너무도 분명하고 확실하게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나머지 이스라엘 족장들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하나님께 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가 우리와 더불어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도다. 다만 우리는 페르시아 왕 코레스 왕이 우리에게 명한 대로 우리끼리 함께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께 건축할 것이라 하였더니』(스 4:3)
스룹바벨을 비롯한 유다의 지도자들은 구별을 선포하였습니다. 섞여질 수 없음을, 이 일에 그 혼합된 무리들이 가담시킬 수 없음을 명백히 했습니다. 뒤섞임으로 인해 지난 시절 솔로몬 성전이 무너졌습니다. 그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구별하심에 대해 더 깊이 연단되었던 그들은 조금도 손을 잡지 않았던 것입니다.
5.구별된 신앙에 대한 결과
유다인들이 그들의 동참을 거절했을 때, 그들의 본색이 드러났습니다.
『그 땅의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고 건축하는 그들을 방해하며 그들을 반대할 모사꾼들을 고용하여 그들의 목적을 좌절시키려 하였으니, 페르시아의 코레스 왕의 모든 날과 페르시아의 다리오 왕의 집권 때까지 그리하였더라. 아하수에로의 치리 때, 곧 초기에 그들이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을 걸어 왕에게 고소장을 썼더라』(스 4:4-6)
첫째, 그들은 방해를 했습니다.
둘째, 그들은 뇌물 등의 방법을 써서 그 일을 좌절시키려고 했습니다.
셋째, 그들은 고소까지 하면서 유다인들의 성전건축을 막았습니다.
구별은 이러한 결과를 낳습니다. 2000년 기독교 역사가운데, 어떤 무리들을 향해 [분리주의자들]이라는 꼬리표가 붙여졌습니다. 그들은 개신교가 로마 카톨릭의 잘못을 알아차리기 이전에 이미, 로마 카톨릭의 신앙이 종교적이고 미신적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벗어난 것에 대해 알고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취급되었습니다. 그들에 대한 평가는 역사 속에서 왜곡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어떤 신자들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려고 했으나, 교권화된 교회들은 그들을 방해했고, 모사꾼들을 이용해 그들에 대한 부적절한 소문을 유포시켰으며 종교재판석에 불러내어 불 속에 던져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구별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반대를 안고 있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 시대에 구별되겠다는 선포는 많은 반대들을 직면하여 흔들림없이 나아가겠다는 뜻입니다. 우리들 개인이 하나님 앞에 구별된 삶을 살겠다는 뜻은 우리를 방해는 많은 악한 세력들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싸우겠다는 뜻입니다.
6.왜 이러한 구별된 믿음의 길을 가야했는가?
그들과 손을 잡고 일을 했더라면 좀더 수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수적으로도 두 배가 되었을 것이며 자원도 더 많이 활용할 수 있었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이며 이미 오랫동안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왔다는데, 또 그들 스스로가 전혀 유다인들과 다르지 않고 같다는 표현을 하려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가 있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오히려 그 거절은 성전재건을 더 어렵게 한 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은 구별의 길을 택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교훈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성전건축은 오늘날로 말하면 [영혼구원]이라 하였습니다.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겠다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슨 수단을 써도 된다는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보여줍니다. 목적만 선하다면 그것을 이루어가는 방법이야 어떻든 상관없지 않느냐는 식의 간증이 분명하게 틀렸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단과 목적, 모두가 하나님의 진리에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7.구별됨의 예
성경은 우리에게 구별됨의 많은 예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아시대에 물로서 세상을 심판하시려 했던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뒤섞임에서 온 결과였습니다(창6:1-2). 이 뒤섞임이 하나님을 후회하시게 하였습니다(창6:6). 우리 교회나 우리 개인의 구별되지 않은 모습은 종국에 하나님으로 하여금 후회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율법에서는 "섞어 뿌리지 말라. 겨리하여 갈지 말라, 섞어 짠 것을 입지 말라"(신22:9-11)는 등의 구별됨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구별을 원하셨습니까? 그것은 더럽혀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신22:9, KJV)
같이 살면 안됩니까?
왜 굳이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약속의 땅에 들여보내시면서 가나안 일곱 족속을 멸하시라고 했습니까?
그것도 구별됨을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족속들의 세속적이고 가증한 풍속에 빠지게 될까봐 염려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왜 꼭 삼일 길을 가야합니까?
이집트 땅에서 제사 드리면 안 되는 것입니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삼일 길을 나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셨고, 파라오의 끈질긴 제안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마침내 이집트 땅을 벗어났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구별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거기 그대로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광야로 나간 무리를 광야교회라고 합니다(행7:38).
그것처럼 교회란 말은 구별된 무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피로 구별하신 무리를 세우셨습니다.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들은 주님에 의해 구별되어진 무리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까? 그것은 우리들을 구별시키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구별됨에 관심이 없다면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헛되게 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세상은 이것저것으로 뒤섞이고 있습니다. 에큐메니칼 운동이 일어나서 하나님만 부르면 다 하나라고 손잡고 야단들입니다. 인류의 평화를 위해 각 종교와 종파의 지도자들이 한 데 모여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카톨릭을 비롯해서 일부 기독교계의 어떤 지도자들도 섞였습니다. 신문이나 언론은 퍽이나 이 평화스러운 친교를 호평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개를 흔드실 게 뻔합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겠습니까? 죄가 하나님과 그 사이에 담이 된 사람들의 소리를 들으시겠습니까?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59:1-2)
죄의 담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서만 허물어지는데 그분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그들에게도 죄의 용서가 주어진단 말입니까? 그들은 기도하기 전에 먼저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모든 교회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이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세속적인 방법을 도입하려 야단들입니다. 교회가 커지는 게 목적이 되었습니다. 수가 많아지고, 근사한 예배당을 갖추고....물론 그들 중에 어떤 교회는 오직 영혼을 구하자는 데만 목적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목적을 이룬다는 명목으로 사람의 입맛을 돋구어 줄 수 있는 세상적인 철학이나, 세속적인 기복신앙, 미신, 절기, 각종 방법들을 동원한다면, 그것은 뒤섞인 것이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8.구별된 믿음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서 돌아설 것을 원하십니다(엡5:11). 순수한 복음을 전하려는 성도 여러분의 삶이 구별되지 않고는 세상사람들이 죄를 알지 못할 것이며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관심도 갖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를 구별시키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구별되고 거룩한 생활로 주님께 영광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너희가 믿지 않는 자들과 불공평하게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의가 무슨 사귐을 갖겠으며 빛과 어두움이 무슨 친교를 나누겠으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일치하겠으며 혹은 믿는 자가 불신자와 무슨 몫을 나누겠으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들이 무슨 합의를 하겠느냐? 너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고 그들 가운데 걸으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분리되라. 주가 말하노라. 또한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맞아들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아들들과 딸들이 되리라. 전능하신 주가 말하노라. 하셨느니라』(고후6:14-17)
출처 한서노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