껄로 대첩
유튜브에서 <껄로대첩>이라는 제목의 영상을 보았다. 군부 쿠데타에 저항하는 껄로 주민들이 진압하는 경찰들을 밀어내는 장면이 화면을 생생하게 채우고 있었다. 가진 게 돌과 함성뿐인 민간인 시위대가 총과 체계적인 장비를 갖춘 공권력을, 불과 몇십미터 후퇴하도록 한, 아주 예외적인 장면을 '대첩'이라 명명한 저변에는 글을 쓴 사람의 간절하고 안타까운, 한편으로는 억누르기 힘든 심리가 복합적으로 깔려 있다. 나는 거기에 한 가지 더 개인적인 내력을 실어 이 영상을 심상하게 보고 있다. 누군가의 휴대폰에 찍혔을 그 거리를 나는 아주 잘 알고 있다. 거기는 바로 미얀마의 전라도로 불리는 샨스테이트의 작은 도시, 껄로의 메인스트리트다. 화면의 맞은편, 진초록색 차양이 연이은 건물들은 주로 술과 음식을 파는 가게들이다. 낮에도 성업이지만 밤이면 그 차양 아래서 현지 주민들과 외국인 관광객들이 술과 안주를 놓고 늦도록 한담을 나눈다. 나도 거기서 트래킹 가이드인 내 친구 쪼민과 여러 밤을 함께 하며 시원한 밤 바람에 몸을 맡기고 여수(旅愁)를 식히곤 했다. 유럽 축구경기가 열리는 밤이면 많은 주민들이 거기에 앉아 생중계에 빠져들곤 한다. 박지성이 맨유에서 활약하던 시절, 쪼민은 나와 함께 맥주를 마시며 경기를 지켜보면서 박지성을 향하여 ‘sometimes good’이라는 다소 냉정한 평가를 내놓았고 나도 이의 없이 동의했던 기억도 난다. 미얀마에 갈 때마다 들렀더니 어느새 나는 껄로 다운타운 상점 주인들에게 알려진 외국인이었다.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하더니 나중에는 가끔 오는 이웃 사람을 대하는 눈빛들로 바뀌었다. "얘 또 왔네!"
경찰들이 주민들을 밀어내기 위하여 접근했다가 되려 밀려나고 있는 쪽은 미얀마 제 2의 도시, 우리로 따지면 경주나 부여쯤 되는, 일명 문화수도 '만달레이' 방향이다. 주민들 편에서 보면 오르막이라서 지형적으로 시위진압에 유리한 곳이다. 경찰들 뒤쪽로 올라가면 외국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seven sisters 레스토랑이 있고, 근방에는 해장하기 좋게 컬컬한 육수가 일품인 칼국수를 파는, 내 단골 가게도 있다. 반대 편, 시위주민들의 꽁무니를 이어가 보면 아웅반 정션이 나온다. 거기서 곧장 가면 헤호 공항과 쉐냥정션이다. 쉐냥에서 직진하면 샨 스테이트의 주도(州都) 따웅지에 닿고, 우측으로 꺾여 차로 덜커덩거리는 비포장도로를 십오분쯤 달리면 인레 호수의 선착장인 냥쉐다. 쉐냥을 거꾸로 읽으면 냥쉐다. 여기에 착상하면 애써 외울 필요가 없는 지명들이다. 인레 호수의 '인'은 호수라는 뜻이며 '레'는 숫자 4를 가리킨다. 즉 인레란 4개의 호수를 의미한다. 내가 거듭 썼듯이 인레호수라고 하면 역전 앞과 같이 오도된 중의적 표현이 되고 만다. '네호수 호수' 암튼 미국과 캐나다에 걸쳐 오대호가 있듯이 미얀마 중부에는 해발 1700미터 산악지대에 4대호가 있는 것이다. 인레는 존재 자체로 신비로운 호수다. 낭쉐에서 모터보트를 타고 한시간쯤 가다보면 바다처럼 넓은 호수가 펼쳐지고 그 위에 한발로 노를 젓는 어부들, 신화와 전설을 간직한 사원들, 금시조 솟대, 그리고 방울토마토 같은 작물들을 수경재배하는 경작지들이 수상마을 곁에 떠 있다. 한 마디로 형언할 수 없는 비경들이 쉴새 없이 여행자의 눈길을 스쳐지나간다. 모터보트는 마침내 여행자들을 싣고 파고다 유적지인 쉐 인떼인에 정박한다. 미얀마에는 가는 곳마다 '쉐'라는 단어가 붙은 지명과 파고다가 등장한다. '쉐'란 '황금'이라는 뜻이다. 미얀마를 황금빛 미소의 나라 혹은 황금빛 유혹의 나라로 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얀마의 대표사원인 양곤의 쉐다공 파고다나 천불천탑의 도시 바간에서 가장 오래된 쉐지곤 파고다의 이름에도 어김없이 황금, '쉐'가 찬연하게 빛나고 있다. 쉐 인떼인 유적지 입구에는 오일장이 선다. 여러 소수민족들이 오일에 한번씩 주기적으로 만나 정과 안부를 나누고 일용할 양식들을 교환하는 장이다. 이를테면 호숫가 사람들은 생선류를, 농부들은 곡식과 채소를, 수경재배지 마을에서는 과일들을, 그리고 산악지대 사람들은 장작을 가져와 사고판다. 돈이 매개되어 있지만 물물교환 경제의 가장 나중의 흔적들을 여기서 목격한다. 파장 무렵 손에 생선이 들고 검은 옷에 터번을 두른 사람이 있다면 산악지대의 카야족이고 목에 링을 여럿 두른 흰옷 입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용의 후손이라고 믿고 있는 카얀족인 것이다. 아...그만 쓰자.
이제 다시 아웅반으로 물러나서 살펴보자. 껄로로부터 오던 방향에서 좌회전하면 동굴사원으로 유명한 삔따야다. 거기서 펼쳐지는 구릉과 들판의 풍경은 세계 절경 어디에 비교해도 빠지지 않는다. 가끔 영화촬영하는 모습도 볼 수 있는 곳이다. 삔다야에 가기 전에, 우리 말로 ‘그렇게나 멀리?’ 영어로는 ‘so far?’의 의미를 갖는 ‘뿌힐라’마을이 있고 그 맞은 편으로 시골길을 10분쯤 달리면 내 친구 쪼민의 고향마을이다. 거기에는 2015년 시민대학 수필반&소설반 팀이 찾아가 교실 칸막이 봉사활동을 한 초등학교가 있고, 그 학교의 교사인 쪼민의 매형과 그의 가족, 그리고 쪼민의 부모님과 형, 누나 들이 살고 있다. 이렇게 하염없이 지명과 인물들을 떠올리자니, 갑자기 뭔가가 목에 차오른다. 어제 유튜브 영상으로 본 시위군중들 속에 쪼민을 비롯한 그의 부모 형제들, 이웃들이 함께 하고 있었을 것이다. 짧은 영상을 수 십번 반복해서 보며 나의 마음은 수만리 머나먼 내 제 2의 고향, 제 2의 어머니 나라로 달려가고 있었다.
‘껄로’라는 이름은 워낭소리를 음차한 것이다.(쪼민의 설명이다) 껄로의 산과 들에는 많은 소들이 방목되고 있는데, 소 주인은 ‘껄롱껄롱’하는 워낭 소리를 듣고 제 가고 싶은대로 다니며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소의 위치를 알아낸다. 내 귀에는 ‘껄롱껄롱’인데 현지 사람들에게는 유성음 하나가 탈락된 채로 들리는가 보다. 외국관광객들에게 껄로는 트래킹 베이스 캠프로 유명하다. 소에게 걷는 것이 일이라는 생각을 하면 껄로가 인간들에게도 걷기 위한 시작점의 이정표로 새겨졌다는 게 심상하다. 이 지역은 예로부터 소나무 보호구역이기도 했을 정도로 깨끗한 자연자원을 자랑하기도 한다. 지금은 주변의 여러 곳에 군사시설이 들어선 군사도시여서 용기는 가상하나 생각없는 외국인 트래커들이 군시설 침입자로 몰려 곤욕을 치룰 때도 더러 있다. 고독을 여행의 정신적 식량으로 따먹고 다니는 여행자일지라도거기가 만약 껄로라면 쪼민같은 가이드와 함께 하는 게 좋겠다. 거기 어디쯤 2차대전 때 한국인 위안부 수용소가 있었다는 누군가의 전언을 듣고 고령의 현지인에게 사실여부를 물었더니, ‘korean nurse’들이 머물렀다는 얘기를 들었다. 다는 아니지만 반쯤은 맞는 전언인 듯 싶었다. 그러나 거기서 이야기는 진전될 실마리가 없었다. 아무튼 ‘껄로’가 우리의 역사와 아주 무관한 도시는 아닌 건 분명한 것 같다.
내가 껄로를 처음 찾은 건 2010년이다. 아웅산 수치가 가택연금 중이었다가 그 후 두 차례 선거를 치루고, 그녀가 석방되고, 그의의 정당인 NLD가 승리하고 안띠 수(아웅산 수치를 부르는 미얀마인들의 애칭. 어머니 수치라는 뜻)가 마침내 국가 수반이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군부는 역사의 수레를 다시 과거로 회귀시켰다. 여행 중에 나는 미얀마 사람들이 얼마나 수치여사를 사랑하고 민주주의를 열망하는지 피부로 느꼈다. 껄로의 NLD 사무실에도 들러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 사이 쪼민은 그가 일했던 호텔의 스텝과 결혼을 했고 ‘로안‘이라는 예쁜 딸을 낳았다. 마지막 여행 후 5년이 지나고 있으니, ‘로안’도 초등학교에 막 들어갈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미얀마 가는 길을 코로나가 막고 있고 이제는 군부세력들이 코로나보다 더 야만적인 장벽을 치고 있다. 껄로 대첩이 이어지길 기원한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아무리 뒤로 돌려도 ‘로안’과 같은 새로운 세대들이 이어나갈 역사는 끊어지길 거부하는 자연의 시간 위에서 계속될 것이다. 쪼민과 껄로 사람들, 아니 미얀마 국민들 모두의 안전을 빌고 싶은 밤이다. 국경을 초월한 껄로대첩을 위하여!(*)
*껄로대첩 유튜브 url
https://youtu.be/R80hX9ZbBcU
첫댓글 미얀마 사랑 ~♡♡
우리 교수님 !!!
선생님이 마음이 많이 아프시겠어요!!
교수님 사진속에 젊음과 에너지가 넘침니다. 꼭 가고싶습니다.
미얀마 민주화 응원합니다.
사진 속의 쪼민과 부인 아이까지 6년 시간이 지났는데도 또렷합니다.
학교. 그 판자교사 마당에서 뛰어놀던 아이들도 생각납니다.
복음밥과 쌀국수가 지겹던 날에 쪼민 집에서 얻어먹은 음식이 얼마나 맛있던지.
그 때 6학년 이었던 아이들이 지금 고3이겠네요.
그날 운동장에서 뛰어놀던 학생도 민주화 시위에 참가하겠네요.
우리가 뻥 뚤린 교실 한가운데를 막고 칸막이를 해줬듯이
민주화 운동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방법을 모르겠네요.
모금하는 곳을 알면 다만 몇 만원이라도 보냈으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