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만난 삭개오 / 눅 19:1-10
인생은 만남입니다. 인생은 너와 나의 만남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만남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만남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복잡한 생활에서 많은 만남을 갖지만 그러한 만남들 중에는 유익되지 못한 만남도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군중 속에서도 고독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좋은 만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에 대해 마음 문을 열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 보이면서, 생각하고 느끼는 바를 서로 솔직하게 주고받을 수 있는 만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에게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신경을 쓰고, 상대를 자신의 이익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만남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갖는 만남은 어떻습니까? 그런데 만남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만남을 어떻게 가꾸느냐 입니다. 좋은 만남은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만남을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만남을 가꾸어야 합니다. 만남을 가꾼다는 것은 정원을 가꾸는 것과 같습니다. 가꾸지 않은 정원을 정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건 잡초동산일 뿐입니다. 정원은 가꿀수록 아름답습니다. 정원사의 손이 많이 갈수록 아름답게 가꿔집니다. 좋은 만남을 위해서 축복된 만남을 위해서 정원을 가꾸듯이 정성껏 가꾸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좋은 만남을 추구하세요. 축복된 만남을 갈구하세요. 그렇다고 좋은 만남을 추구하느라, 축복된 만남을 갈구하느라 이미 주어진 만남을 소홀히 여기지 않도록 하세요. 이미 주어진 만남을 좋은 만남으로, 축복된 만남으로 잘 가꾸어 가세요.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의 만남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노사연 씨의 노래처럼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렇습니다. 우연이 아니고 필연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우연을 믿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섭리를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만남, 여러분과 여러분의 만남은 하나님의 섭리적인 만남입니다. 윤건선 씨는 성도간의 만남을 이런 노랫말로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만남은 주님의 은혜라오 우리의 모임은 주님의 축복이라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만남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만남은 주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만남을 축복된 만남으로 행복한 만남으로 가꾸어가기를 바랍니다. 일생에 가장 중요한 만남을 대개 세 가지로 봅니다. 첫째는 인격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게 되는 부모와 만남이고, 둘째는 일생의 행복을 좌우하는 이성과 만남이며, 셋째는 한 개인의 운명을 좌우하는 예수님과 만남입니다. 사실 예수님과 만남이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만남입니다. 비뚤어진 인격자가 그리스도를 만나 치유되어 바른 인격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성을 잘못만나 불행해진 사람이 그리스도를 만나 행복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부모를 만나고, 좋은 이성을 만났다고 해도,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면 그것들이 소용없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불행한 인생에서 행복한 인생으로, 무의미한 인생에서 의미있는 인생으로, 무가치한 인생에서 가치있는 인생으로, 성공처럼 보이나 실패한 인생에서 성공한 인생으로 탈바꿈을 하게 된 한 사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럼 2000년 전 여리고로 가보십시다. 여리고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오래된 성읍입니다. 여호수아 6장에 보면,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이스라엘 백성이 칼 한번 쓰지 않고 함락을 시켰던 성읍입니다. 여리고란 뜻은 ‘향기’입니다. 아마 여리고가 향료 생산지로 유명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 같습니다. 또 여리고는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되었고, 종려나무숲이 울창한 아름다운 성읍이었습니다. 로마 역사에 나오는 안토니우스가 자기 애인인 클레오파트라에게 선물로 준 성읍으로도 유명한 곳입니다. 여리고는 갈릴리와 도로가 연결되었으며 예루살렘의 관문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이르렀다는 것은 죽음이 점점 임박해 오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이르렀을 때 맹인을 치유함으로 사람들이 관심을 잠깐 보이다가, 여리고 도시를 다 지날 때까지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기 살기 바빠서 예수님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것입니다. 사실 맹인이 눈뜬 것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남의 일이라서 그랬는지 크게 사건화 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만 대개는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현대인들은 남의 일에 대해 그렇게 깊이 관여할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한 번 보고 한두 번 말하고 그칩니다. 오래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진짜 의식해야 할 것은 남의 시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입니다. 1절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여기서 “지나가시더라”의 원어 ‘디에르코마이’는 ‘통과하다, 빠져나가다, 지나가다, 뚫고 지나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종려의 성읍인 여리고를 지나, 십자가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사명의 길을 가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굳은 의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명자는 결코 한 눈 팔지 않습니다. 자기의 길을 묵묵히 걸어갑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거기에 일일이 대꾸하지 않습니다. 사명자는 자기가 가야할 길을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예수님을 뒤따르는 사람들은 갖가지 계산을 할지 몰라도, 예수님은 오직 아버지께서 맡기신 사명만 생각하며 가십니다. 남의 말을 많이 하는 사람치고 자기 할 일 제대로 하는 사람 없습니다. 자기 할 일에 온통 정신을 집중하다 보면, 남의 일에 콩나라 팥나라 할 틈이 없습니다. 자기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남의 사명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할 여력이 없습니다. 자기 일에 집중하고 자기 사명에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것은 여리고 사람들에게 대단한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특별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맹인의 고백대로 다윗의 자손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시는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야입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시지만, 그곳의 정치 지도자도 종교지도자도, 아니면 급박한 문제를 가진 사람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도심을 다 지나시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봐주는 이 없는 그들만의 행진을 하게 한 것입니다. 여리고 사람들이 열심히 살다보니, 바쁘게 살다보니, 예수님이 지나시는 것을 보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열심히 사는 것 좋습니다. 바쁘게 사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것 때문에 예수님을 놓쳐버린다면, 그 열심히 산 것이, 그 바쁘게 산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그들만의 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도 다른 사람들에게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살고 바쁘게 사시죠?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열심히 살다가, 바쁘게 살다가, 예수님을 놓쳐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놓쳐버리면 우리에겐 아무것도 남는 게 없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히 남은 것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2절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예수님과 그 일행들이 여리고를 막 빠져나갈 무렵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말씀을 보면 “삭개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삭개오라는 이름 속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삭개오는 전통적 유대인의 이름으로 본래의 뜻은 ‘청결한 사람, 의로운 사람’을 뜻합니다. 그 이름 속에는 이 땅에서 순결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 주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기대가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모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된 걸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부모님이 삶의 본을 못 보였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자식의 이름만 그럴듯하게 지어놓고는, 실제로 자신들의 삶은 순결과 의로움과는 무관하게 살았기에 자식이 그렇게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둘째는 부모님의 삶에 역반응을 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순결하고 의로운 삶을 살았는데, 지지리도 가난하고 궁핍한 삶을 사는 것을 보고, 나는 부모님같이 살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든 저렇든 그는 이름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이름값을 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이름에 어울리지 않은 별명이 붙었습니다. “세리장이요 부자라.” 부자인데 세리장이 아닙니다. 세리장이요 부자입니다. 세리장이라는 직업이 그가 부자로 살아가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세리장으로 부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당시 로마의 조세제도는 오늘날과는 달랐습니다. 각 식민지역에 조세를 거둬들이기 위해서 세금청구업자들을 모집해서, 그들에게 세금을 거둬들이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조세청구업자들은 로마에 ‘내가 맡은 이 지역에서 최소한 얼마의 세금을 거둬서 로마에 바치겠다’는 서약을 하고, 로마로부터 조세 하청을 받았습니다. 세리장은 많은 세리들을 모아서 자기들에게 배당된 세금액을 채우고, 그것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 자기들이 착복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세리장은 하청을 받기 위해 지나치게 고액을 적어내어, 그 지역에서 아무리 세금을 긁어모아도, 로마 제국에 바칠 만큼의 세금을 거두지 못해 아주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또 어떤 세리장은 아주 악랄한 수법으로 백성들의 돈을 갈취해서 로마에 세금을 바치고, 남겨서 자기들의 배를 불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이 백안시했던 부류가 창기와 세리, 이방인과 죄인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세리 중에서도 세리장입니다. 세리 중에서도 가장 악랄한 세리 왕초입니다. 그만하면 민족의 반역자로 불리기에 충분합니다. 가난한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같은 인생입니다. 그는 로마 관리들 앞에서는 철저하게 굽신거리고, 유대 지도자들은 적당히 봐주고 넘어가고, 힘없고 빽없는 동족에게는 인정머리라고는 손톱만큼도 없게 굴었습니다. 돈을 위해서라면 신앙도 믿음도 저버렸습니다. 인격도 품위도 팔아먹습니다. 국적까지도 버릴 수 있었습니다. 오직 돈밖에 모릅니다. 돈에 환장한 삶입니다. 돈만보고 달려온 생입니다. 한 마디로 그는 돈에 돈 사람입니다. 우리나라는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체제이고 경제적으로 시장 경제 곧 자본주의 체제입니다. 자본주의는 자본, 곧 돈이 최고인 사회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우상이 되는 것은 특별히 이상할 게 없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눈만 뜨면 ‘돈, 돈’ 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 눈에 불을 켭니다. 어디 눈먼 돈이 없나, 주인 없는 돈이 없나, 먹어도 괜찮은 돈인가, 돈 생각에 잠못 이룹니다. 어쩌다 빚을 지고 있으면 전화벨 울리는 소리가 두렵습니다. 벨이 울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랍니다. 맘 편할 날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혼자 죽는 게 억울했던지 최근에는 자식들과 함께 죽기도 합니다. ‘오죽 답답하면 죽음을 택했겠나’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죽을 힘으로 살면 어떻게든 살 수 있을텐데’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오면 능력있는 남편으로, 적게 가져오면 무능한 남편으로 취급을 하는 부인네들이 있나 봅니다. 그런 속물근성을 가진 분들을 부끄럽게 하는 기사가 기독교 잡지에 실려 소개하겠습니다. 24년전 ‘낮은울타리’라는 기독교 잡지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당시 서울 성동구 천호동에 사는 최미숙씨가 기고하여 실렸던 기사입니다. “그건 정말로 감동적인 결혼식이었습니다. 사범대 동기인 인희의 결혼식 반주를 맡았던 것은 나에게 너무나 영광스러운 추억입니다. 인희와 그 신랑은 가난했습니다. 결혼식도 시골의 작은 예배당에서 이뤄졌습니다. 그것도 주일 오후에…. 허름한 양복을 입은 신랑이 입장했고 나의 웨딩마치에 맞춰 신부 인희가 입장했습니다. 식전에 신부를 보지 못한 나는 내심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친구의 결혼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어떤 환상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인희가 들어오는 모습을 본 나는 너무 놀라 그만 반주를 틀릴 뻔했습니다. 하얀 웨딩드레스가 아니라 그저 뻣뻣해 보이기만 하는 한복, 화장은 손수 했는지 평상시와 다를 게 없어보였습니다. 게다가 손에 든 부케는 단 한 송이의 장미였습니다. 그것도 교회의 꽃꽂이에서 한 송이를 빼어든 것이었고 앙상한 줄기 채 쥐어져 있을 뿐이었습니다. 아무리 가난하다고 해도 이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너무나 예상 밖이었습니다. 나는 입장을 끝낸 친구의 얼굴을 힐끗 보았습니다. 어쩌면 울고 있을지도 모를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그런데 나는 다시 한 번 놀라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습니다. 평안한 얼굴, 너무나 행복해서 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얼굴로 내 친구는 서 있는게 아닙니까? 그 옆의 신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랑하는 이에게 모든 것을 다 해 준 사람처럼 너무나 당당했습니다. 내가 본 결혼식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결혼식이었습니다. 며칠 후 인희는 반주의 답례라며 손수건 한 장을 건네주었고, 나 또한 두 사람의 행복을 몇 번이고 빌어주었습니다. 나중에 결혼 비용이 얼마나 들었느냐며 물었습니다. 그 때 친구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 3천원. 머리는 할 줄을 몰라서 미용실에 갔었거든….” 친구는 살림살이도 거의 쓰던 것과 중고를 사서 신혼을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모아 둔 결혼 자금은 어느 단체에 기증을 했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결혼의 기쁨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서…. 3천원으로 치른 친구의 결혼식은 요즘 같은 때 내 가슴을 울리는 종소리입니다.” 누구나 결혼식을 이렇게 해야 한단 말이 아닙니다. 돈과 행복이 정비례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고 돈과 행복을 바꿀 수 없단 말입니다. 돌고 도니까 돈입니다. 지금 나한테 있는 돈이 언제까지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돌고 돌아 누구의 손에 가 있을지 모릅니다. 지금은 가진 게 없지만 몇 년 후에 많이 갖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돈 때문에 신앙 잃으면 안되고, 돈 때문에 사람 잃으면 안됩니다. 돈은 꼭 필요한 것이고, 돈이 없으면 살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돈이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혹시 돈을 목표로 삼고 달려왔다면 잘못 달려온 것입니다. 돈 버는 것과 인생의 성공을 같은 것으로 알고 살아왔다면, 크게 오해하고 살아온 것입니다. 삭개오의 삶이 그걸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돈으로 치면 삭개오는 갑부입니다. 여리고가 부자 동네인데 그 중에서도 부자로 알려진 사람입니다. 돈과 행복이 일치한다면 그는 누구보다도 행복해야 옳습니다. 아주 주체할 수 없는 행복자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에겐 고민이 있었고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는 점차 돈과 행복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돈=행복이라는 공식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집에 돈이 쌓일수록 영혼의 공백은 커져만 가는 걸 느꼈습니다. 돈이 금고에 채워질수록 심령의 허기는 깊어만 가는 게 느껴졌습니다. 자기 삶의 공허를 돈으로는 메꿀 수 없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언제부터인가 예수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을 만나면 행복하게 사는 길을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3절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단순히 예수님에 대한 호기심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유명인사에 대한 궁금심리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정보통입니다. 정보에 관한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래전부터 예수님의 소식을 들어왔습니다. 세리 마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날 결단을 하지 못해서 그렇지 오래전부터 예수님을 만나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고자 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부자였기에 물질적인 축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는 건강했기에 병 고침을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는 가질 만큼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소유할 만큼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문제는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밥 먹고 살만하니까 느끼는 고급스런 문제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꼭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의 문제는 소유형 인간으로 사느냐, 존재형 인간으로 사느냐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존재형 인간으로 살아야지 소유형 인간을 살면 불행해집니다. 삭개오는 정보는 빨랐지만 결단은 늦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여리고를 막 지나가려는 때에야 부리나케 달려왔습니다. 많이 망설이다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습니다. 그의 가슴에 타오르는 소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에 마지막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예수님을 이대로 지나시게 할 수 없다.’는 불타는 소원이 그를 예수님께 달려가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주님을 만나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께 불타는 소원을 갖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시기 바랍니다. 삭개오는 헐레벌떡 뛰어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커다란 장애물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희망을 걸고 세리장직을 내려놓고 달려왔건만, 예수님을 만나는 건 고사하고 예수님을 볼 수도 없었습니다. 키가 작다는 것은 내 안에 있는 문제를 말합니다. 그는 유독 키가 작았습니다. 키높이 구두가 그때도 있었다면 아무리 비싸도 가장 먼저 사 신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키 작은 것이 콤플렉스였는데 예수님을 만나는데도 이게 걸렸습니다. 사람이 많다는 것은 환경적인 제약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어서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틈이 없었습니다. 자기 안에 문제도 극복하기 어렵지만 환경적인 문제도 극복하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몸부림을 해도 주위 환경이 받쳐주지 않으면 힘듭니다. 발버둥을 쳐서 조금 올라갔는데 내 발목을 잡고 늘어지면 미끄러집니다. 부부가 함께 신앙이 자라가야 할 이유가 그겁니다. 교회도 부부가 함께 다니는 것이 좋습니다. 둘 중에 하나만 제대로 되어 있으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둘 다 안되니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때 삭개오가 어떻게 했습니까? 포기했습니까? 아니죠?
4절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돌무화과나무는 그 가지가 넓게 퍼지고 아래로 늘어져 있어, 그리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키는 작고 얼굴엔 기름기가 흐르고, 운동량은 모자라 배가 나온 삭개오가 나무 위에 달려있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삭개오는 부끄러움을 무릅썼습니다. 비난의 손가락질에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현백림이란 분이 재미있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제목이 이렇습니다. ‘이승의 감투는 저승 갈 때 짐이 된다’ 일리 있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만나는 데 짐 되는 것은 뭐든지 벗어던질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사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런 성도가 은혜를 받습니다. 삭개오는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삶을 되돌리기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한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습니까? 5-6절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이라도 보겠다며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15살 때 미국으로 이민 간 한 한국인 청년이 있었습니다. 청년은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낮에는 잡지사의 판매원으로, 밤에는 나이트클럽의 도어맨으로 근무했습니다. 그는 절망적 상황에서도 결코 아메리칸 드림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매일 절망을 포기하고 매일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었습니다. 청년은 성장하며 인터넷 채팅에 몰입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업에 시장성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는 노트북 컴퓨터 2대와 현금 80달러로 웹 비즈니스사를 설립해 하루에 17시간씩 일했습니다. 그 결과 미국과 유럽의 80여개 기업이 그에게 웹 비즈니스의 관리를 요청해 오는 등 일약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천’지가 40세 이하의 세계적인 거부 40명을 선정했습니다. 그 중 이 한국인을 지목했습니다. 그 화제의 주인공은 미국 에이전시 다트컴사의 서찬원 회장입니다. 누구든지 절망을 포기하고 희망을 부여잡은 자에게는 이런 보상이 주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꿈을 절대로 절대로 포기하지 마세요. 토마스 카알라일은 말했습니다. “인간은 희망에 기초를 둔 존재다.” 이어서 그는 말했습니다. “내 소유를 다 빼앗긴다 해도 오직 이 한 가지 희망만은 갖기를 원한다.” 끝까지 희망을 붙잡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계 2차 대전 때 영국과 미국의 포로 2만 명이 수용되어 있던 일본군 포로수용소에서 8,000명의 포로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대다수가 죽은 이유가 무엇인줄 아세요? 영양실조가 아닙니다. 급성 전염병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과로도 아닙니다. 절망입니다. 희망이 끊어진 것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을 잃지 않았던 삭개오를 만나주셨습니다. 돌무화과나무 아래로 친히 오셔서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삭개오는 매우 놀랐을 것입니다. 생면부지의 예수님이 자기 이름을 알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 분은 내 고독을 알고 계실 거다.’ ‘나의 외로움을 알고 계실 거다.’ ‘내가 인생의 어떤 문제로 갈등하는지를 알고 계실 거다.’ ‘내가 잘못된 지난날을 얼마나 후회하고 있는지를 알고 계실 거다.’ ‘내가 지금이라도 새롭게 살고자하는 뜨거운 열망을 알고 계실 거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가 무섭게 급히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그걸 좋지 않은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7절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예수님을 만나 새로워지는 것은 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면 끊임없이 방해하는 이가 있습니다. 변화된 삶을 살지 못하도록 붙들고 늘어지는 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를 가리켜 마귀라고 합니다. 특히 마귀는 자기의 하수인들을 시켜서 그렇게 합니다. 대개 그 하수인은 가장 가까운 사람입니다. 가족일 수 있습니다.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 직장 동료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변화되면 절교하겠다며 위협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말을 들으셨을 것입니다. ‘저 끔찍한 죄인의 집에 들어가시다니’ ‘로마의 앞잡이, 민족의 반역자 동족의 배신자의 집에 가시더니’ ‘예수님도 부자를 좋아 하시나봐. 예수님이라고 돈을 싫어하실까봐?’ 별의 별 소리가 다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비난을 감수하셨습니다. 8절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주님을 만난 것만 해도 감격스러운데,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시는 영광을 얻은 삭개오는 누가 뭐라하지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겠다고 합니다. 이건 단순히 재산의 절반을 떼어 구제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이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그 고백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얻고 물질을 버렸습니다. 그는 구원을 얻고 재물을 포기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물질은 그에게 전부였습니다. 물질은 그를 지탱해주는 백그라운드였습니다. 구원을 모를 때에는 돈이면 단 줄 알았습니다. 돈이 전부인줄 알았습니다. 그런 그가 재물을 포기하겠다고 합니다. 신앙이란 결단입니다. 예수님을 일순위에 놓는 결단입니다. 예수님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결단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기꺼이 예수님을 선택하겠다는 결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미 그 결단을 하신 줄 믿습니다. 혹 아직도 결단하지 못한 분이 있다면 이 시간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겠다고요. 9-1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무리들의 비난을 감수하실 수 있었던 이유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깊은 뜻을 뭇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신 예수님에 대해 수군거렸습니다. ‘혹시 예수님도 돈 많은 사람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는 오해를 무릅쓰고 삭개오의 집을 방문하셨던 이유는 삭개오를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는 것이 자신의 본질적인 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교회는 오직 본질적인 사명에 충실하셨던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구원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잃어버린 영혼하면 대개 교회 다니다가 쉬는 사람들을 말하는 줄 압니다. 그러나 이런 분도 있지만 삭개오를 생각해 보세요. 직업 때문에 유대인 가운데서 왕따를 당하잖아요? 왕다를 회복시켜 주는 것도 잃어버린 자를 찾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소외된 자를 찾아 함께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살리는 일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살리는’ 사역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보내는 선교사로서 계속해서 기도와 물질로 후원해주시기 바랍니다. 잃어버린 자를 위해 투자하는 시간과 물질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 쏟는 열정과 땀은 주께 보상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왜요?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다른 게 좀 부족해도 예수님 때문에 행복합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은 예수님을 일순위에 둡니다. 예수님을 참으로 만난 사람은 예수님을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모든 삶의 영역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의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 보기 원합니다.’ 예수님을만난 기쁨 속에서 예수님을 일순위에 두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자기를 잃어버린 삭개오를 도로 찾아주신 주님께서, 이제 자신을 잃어버리고 지금 쓸데없는 것만 손에 움켜지고 있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여 주옵소서. 가졌느냐 못 가졌느냐, 얻었느냐 잃었느냐에 신경을 쓰던 우리들로 하여금, 이제 시선을 돌려서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게 하시고, 주를 보면서 자기를 볼 수 있게 하옵소서. 간절히 소원하기는, 삭개오와 같이 주님을 만남을 사모하고 기뻐하며, 주님이 주인이 되시는 삶을 살아감으로, 복음의 능력이 삶의 변화로 나타나고,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끄는 좋은 길잡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똑같이 한 므나를 받은 인생 / 눅 19:11-27 어느 외국 잡지에 실린 실화입니다. 어떤 청년이 사랑하는 처녀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결혼식 날, 주례 목사님이 가운을 입고 강단에 섰고, 신랑은 잘 다듬은 머리와 멋진 턱시도 양복을 입고, 왼쪽 가슴에는 생화를 달고 잰틀한 모습으로 먼저 입장해서 신부를 맞았습니다. 이어서 순백의 드레스와 베일로 얼굴을 살짝 가린 채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입장하는 신부의 모습은 정말 우아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입장이 끝난 후, 결혼예배가 막 시작되려는데, 갑자기 소방차 싸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습니다. 어디에 불이 난 모양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신랑이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고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예식은 엉망이 되었고 하객들은 술렁거렸습니다. 주례 목사님은 너무나 어이가 없고 또 어찌할 줄을 몰라 그냥 서 있었고, 신부는 무안하여 머리를 숙이고 있었으며, 양가 가족들도 미안해서 어찌할 줄을 몰라 했습니다. 그러고 얼마 후 신랑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얼굴에는 거무스레 때가 묻었고, 턱시도는 찢어진 듯 보였으며, 구두에는 물이 차 철벅철벅 소리를 내면서 들어왔습니다. 그러고는 그대로 신부 옆에 서는 것 아닙니까? 알고 보니 신랑은 소방대원이었습니다. 소방차 사이렌이 울리자마자 화재진압의 골든타임을 동료들과 함께 하기 위하여 그렇게 달려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예식장은 금방 축하와 격려의 잔치자리로 변했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만나는 순간, 신랑 되신 우리 주님 다시 오시는 날, 여러분의 모습이 이렇게 감동적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에 대한 파격적인 구원 선언에 이어 모인 사람들에게 한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그 이야기의 내용은 마태복음 25:14절 이하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와 비슷합니다. 하나님나라와 재림을 주제로 하고, 충성을 촉구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는 3사람에게 차등을 두어 5달란트와 2달란트와 1달란트씩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10사람에게 균등하게 1므나씩 맡겨졌습니다. 달란트를 은사와 재능이라고 보는 데에 이견이 없습니다. 실제로 각자의 재능이 다릅니다. 각 사람의 은사가 다릅니다. 갈고 닦은 재능도 있지만 타고난 재능이 있습니다. 개발한 은사가 있지만 선천적인 은사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1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불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1달란트는 결코 적은 양이 아닙니다. 그리고 많은 달란트를 받아야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왜요?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각 사람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각자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재능과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무조건 많다고 복이 아닙니다.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복이 아닙니다. 감당할 수 있을 때만이 복이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재능이 많다고 자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큰 은사를 받았다고 부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만큼 많이 봉사해야 합니다. 그만큼 크게 충성해야 합니다. 재능은 주의 일에 봉사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은사는 주의 몸된 교회에 충성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선 모든 사람에게 한 가지 이상의 재능과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교회에서 한 가지 이상의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모든 교인이 사역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역을 회피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재능과 은사를 주시듯, 또한 각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사역을 주십니다. 우리는 이걸 믿어야 합니다. 달란트가 재능이라면 므나는 뭐겠습니까? 므나는 균등하게 주어진 것입니다. 모든 인생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것을 말합니다. 어떤 것이 있을까요? 첫째, 시간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루가 24시간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24시간을 똑같이 보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간을 무가치하게 흘려보냅니다. 시간 때우기 식으로 삽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시간을 가치있게 사용합니다. 일분일초를 아끼며 알차게 씁니다. 또 어떤 사람은 시간에 쫓기며 삽니다. 그런 사람은 항상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그러면서도 일의 성취도는 높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시간을 다스리며 삽니다. 그런 사람은 시간에 떠밀려 살지 않습니다. 시간을 조절해가며 삽니다. 일의 성취도도 높습니다. 시간을 헛되게 보내는 것은 죄악입니다. 시간 때우기 식 인생을 사는 것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시간의 청지기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선용해야 합니다. 무의미하게 흘려보내지 않아야 합니다. 시간을 아껴 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엡 5:16절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골 4:5절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우리는 그 날, 시간을 만드신 주님 앞에 우리의 시간사용 내역에 대해 결산해야 할 것입니다. 꼭 바쁘게 살았다고 칭찬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무슨 일로 바빴는지가 중요합니다. 주의 일로 바빴는지, 자기 일로 바빴는지를 확인하실 겁니다. 또 시간계획을 세워 규모있게 살았는지, 그저 바쁘게만 살았는지를 체크하실 겁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하루 24시간 1,440분 86,400초를 잘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시간을 맡기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주의 나라를 위하여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선용하시기 바랍니다. 자기 생업을 위하여, 영육간의 자기개발을 위하여 적절히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생명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생명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6:26절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천하보다 귀한 생명입니다. 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합니까? 하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두개 갖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이 귀한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는 이유만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생명이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생명이 아닙니다. 사명입니다. 사명(使命)을 한자로 풀어보면 심부름할 사(使)에 목숨 명(命)입니다. 심부름을 받은 목숨이란 말입니다. 우린 하나님께 심부름을 받은 목숨입니다. 하나님의 심부름을 받고 태어난 존재입니다. 명을 국어사전에서는 ‘맡겨진 임무’라고 뜻풀이를 했습니다. ‘맡은’ 것이 아니고 ‘맡겨진’ 것입니다. 사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맡겨진 임무입니다. 하나님이 내 생애에 맡기신 임무가 바로 사명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 사명자입니다. 위대한 인물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생애의 어느 시기에 자기사명을 깨달았다는 점입니다. 세상에서 대업을 성취한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인생의 어떤 계기에 자기 사명을 자각했고,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땀과 눈물을 쏟았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명에 대한 깨달음 없이 큰 인물이 될 수 없습니다. 사명에 대한 자각 없이 대업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스위스의 사상가 칼 히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 생애의 최고의 날은 자기의 사명을 자각하는 날이다.” 사명이 우리를 위대하게 만들고, 사명이 우리를 성실하게 만들고, 사명이 우리를 엄숙하게 만듭니다. 인생은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고, 무엇인가를 위해서 죽도록 지어진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고, 무엇을 위해서 죽으려고 하는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분명한 답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아프리카의 위대한 탐험가로 알려진 선교사 리빙스턴이 아프리카 밀림에서 중병에 걸렸을 때, 사람들은 그가 대업을 완수하지 못하고 죽는 줄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리빙스턴이 어떤 말을 했는지 아시죠? “사명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완수할 때까지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실제는 그는 중병을 이기고 다시 일어났고, 자기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사실 인간의 생명만 놓고 보면 약하고 보잘 것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사명으로 여길 때 위대한 생애를 살 수 있습니다. 사명에 살고 사명에 죽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사명에 따라 사셨습니다. 또한 사명에 따라 죽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셨습니다. 예루살렘을 가기 위해서는 여리고를 거치셔야 했고, 여리고에 이르렀을 때에 맹인을 만나 고치셨으며, 여리고를 빠져나갈 즈음에 삭개오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리워질 때 제자들의 가슴은 흥분되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곧 메시야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맹인이 눈을 뜨게 된 것을 지켜보며, 환호하는 무리를 보면서 예수님에 의해서 전혀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한 삭개오 같은 버려진 인생이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 새로운 사람으로, 섬김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맹인이 눈뜬 것도 대단하지만 삭개오가 변화된 것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사실 기적 중의 기적은 불신자가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지옥 갈 인생이 천국의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곧 사람이 변화되는 것이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삭개오의 변화는 여리고 성에 화제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을 겁니다. 이런 일련의 일들은 예루살렘을 가까이 둔 제자들에게 메시야 왕국의 환상을 갖기에 충분했습니다. 11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주시려고 한 비유를 드셨습니다. 예수님의 때와 제자들의 때에 차이가 남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 알고 흥분했으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며 흥분을 가라앉히셨습니다.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다가도 때로는 낙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생각하는 때와 하나님이 정하신 때의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약간의 차이는 견뎌냅니다. 어느 정도의 차이는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차이가 많이 나면 사명감이 흔들립니다. 자신이 사명자라는 사실 자체에 혼란을 겪습니다. ‘내가 정말 사명자가 맞는가’라고 질문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명을 발견하는 것은 나의 일입니다. 사명을 이루기 위해 수고하는 것은 나의 일입니다. 그러나 사명이 완수되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명이 완수되는 때는 내가 정한 때가 아닙니다. 나는 단지 사명을 이루기 위해 땀과 눈물을 흘릴 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우리의 사명이 완수되어집니다. 12-13절 ‘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예수님은 제자들과 모인 무리에게 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한 귀인이 있었습니다. 왕위를 받기위해서 먼 나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주인은 10명의 종들을 불러 은 10므나를 주었습니다. 각각 1므나씩 받게 된 것입니다. 1달란트의 1/60에 지나지 않는 작은 돈을 주면서 용돈으로 준 게 아닙니다. 그럼 왜 줬습니까?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예, 장사하라고 줬습니다. 장사의 기본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그건 이윤추구입니다. 이문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인이 종들을 이용해서 돈을 모으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지금 있는 것만 해도 충분합니다. 종들을 시험하기 위해섭니다. 특히 작은 돈을 준 것을 보면 지극히 작은 것에 대한 충성을 시험하기 위해섭니다. 지금까지 잘 충성해왔는데 왜 또 시험하느냐고 불만을 터뜨린다면, 주인의 뜻을 모르는 종입니다. 주인에겐 깊은 뜻이 있었습니다. 주인이 열명의 종들에게 1므나씩 주어 장사를 하게 한 것은, 착하고 충성된 종을 가려내 더 많은 권리와 자격을 주려는 것입니다. 더 큰 것을 맡길 수 있는 지에 대한 자격 테스트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테스트하곤 하십니다. 신명기 10:12-13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주신 목적은 우리를 시험하신 후에 행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으로 사는 것이 목사를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 교회를 위한 것도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목회자가 여러분에게 믿음으로 살아야 된다는 충고를 했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위해서 한 말입니다. 구역장이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권했다면, 여러분을 위해서 한 말입니다. 결코 기분 나빠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감사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덕 볼 사람은 바로 말씀대로 산 사람 본인이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1므나씩 주면서 장사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무한정의 기간을 준 것이 아닙니다. 기한을 정해주었습니다. 언제까지입니까?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입니다.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가 장사의 정해진 기한입니다. 이 정해진 기간을 유효기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유효기간이 있습니다. 유효기간이 지나 버리고 나면 더 이상 쓸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人生)이란 말을 쓰는데 인생이란 말이 무슨 뜻입니까? 모르면 국어사전을 찾는 게 제일 좋습니다. 3가지로 뜻풀이가 되어있습니다. ‘목숨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이 세상에서의 인간 생활, 사람의 살아 있는 동안’ 일반적으로 첫 번째 의미로 사용합니다. 이 시간에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의미로 살펴보겠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인간 생활’과 ‘사람의 살아 있는 동안’이란 뜻풀이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기한이 정해져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 년, 만 년 살 것 같지만, 오늘이라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저와 여러분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야합니다. 유한한 삶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단순히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 지혜입니다. 자신이 살 수 있는 기간을 계산하여 영원한 삶에 투자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자신의 남은 생을 사명을 위해 사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입니다. 우리 옆에 있는 분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장로, 권사 집사, 성도)님은 유효기간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평균수명으로 계산할 때 여러분들 중에는 이미 유효기간이 지난 분들이 있습니다. 몇 년 남지 않은 분들도 있습니다. 3,40대의 젊은 분들이라고 안심할 단계는 아니죠? 언제 어느 때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지 모릅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유효기간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을 주님은 ‘어리석은 자’라고 칭하셨습니다. 14-15절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 주인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종들이 어떻게 장사했는지를 알고자 그들을 부르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은 그날 하나님의 계산대 앞에 불려갑니다. 누구도 그날을 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재림하실 예수님을 믿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믿습니다. 주의 재림이 늦춰지면 우리가 죽어 예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맡기신 시간에 대해 결산하십니다. 그 때 우리는 시간사용 내역을 떳떳하게 밝힐 수 있어야 합니다. 주어진 시간을 어떤 일에 사용했는지에 대해 소상하게 밝힐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주님이 맡기신 생명에 대해서도 결산하십니다. 그 때 우리가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는 그리 중요시 되지 않을 것입니다. 생명을 사명으로 여기며 살았느냐, 그 사명에 따라 살았느냐가 판가름의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그럼 어떤 사명입니까?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받게 된 사명이 무엇입니까? 복음의 사명입니다. 복음의 사람이 되는 사명입니다. 복음의 증인이 되는 사명입니다. 먼저 자신이 복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대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인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보다 순서적으로 앞섭니다. 사실 비복음인이 복음의 증인이 될 수는 없거든요. 복음과 무관하게 사는 사람이 복음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논리적인 모순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복음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먼저 복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복음의 증인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복음 전도인의 사명을 감당하시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의 열매가 많이 맺히기를 바랍니다. 복음증거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기본적인 사명이지만, 실제로 전도하는 사람은 10%가 채 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실생활에 있어 전도를 하는 것과 안하는 것의 차이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전도 한 사람 할 때마다 백만 원씩 받게 된다면, 전도를 강조하지 않아도 잘 할 겁니다. 전도를 하면 하늘나라에 가서 상받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게 피부에 와 닿지 않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실제적인 이익이 없기 때문에 안하는 것입니다. 전도 안 해도 신앙생활 하는데 별지장이 없거든요. 전도 설교를 매번 듣는 것도 아니고, 모처럼 한 번 들으면 또 들을만 합니다. 전도 안한다고 해서 교회 나오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전도 하지 않아도 때 되면 다 직분 받습니다. 전도 안했다고 장로, 권사, 집사 되는데 제한받지도 않습니다. 한 명도 전도하지 않아도 천국을 못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굳이 전도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전도에 목숨 걸 필요성을 못 느낍니다. 전도를 위해 물질을 쓰고 시간을 들이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전도하는 사람과 새벽기도하는 사람은 광신자 취급을 당합니다. 예수를 믿어도 적당히 믿어야지 그건 도를 넘게 믿는 것이란 말을 듣습니다. 그럼 여러분은 그날 주님을 어떻게 맞이하시렵니까? 그 날,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 주님 앞에 내놓을 것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생각하며 참았던 일, 복음을 위하여 흘렸던 눈물, 복음을 위하여 포기했던 것, 복음을 위하여 아파했던 일, 복음을 전하다 지친 발걸음, 전도를 위해 쓴 물질들, 전도 때문에 보낸 시간들이 있습니까? 16절 ‘그 첫째가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우리는 남긴 게 있어야 합니다. 첫 번째 사람처럼 얼마를 남겼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 번째 종은 1므나를 가지고 10므나를 남겼습니다. 10배의 이문을 남겼습니다. 그 만큼 부지런히 장사했다는 말입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그 만큼 최선을 다해 장사했다는 말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자기가 받은 므나가 자기에게 준 것이 아닌 자기에게 맡긴 것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한 므나로” 당신의 므나라고 분명히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은 명백하게 따져보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 생명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로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께로부터 잠시 위탁받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17절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자, 주인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주님이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상급을 약속하셨습니다. 칭찬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1므나로 10므나를 남겼다는 사실입니까? 아니죠? 충성한 내용입니다. 충성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한 것입니다. 상급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와 비슷합니다. 마태복음 25:21절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칭찬의 내용이 같습니다. 작은 일에 충성한 것입니다. 상급의 내용은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많은 것으로 맡기겠다고만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구체적으로 열 고을을 맡기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1므나와 10고을을 비교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1므나는 지극히 작은 것입니다. 10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는 엄청난 것입니다. 1므나와 10고을은 비교의 대상이 못됩니다. 그렇습니다. 장차 우리가 하나님나라에서 누리게 될 축복은, 우리가 이 땅에서 충성하고 수고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로마서 8:16-18절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상속받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그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1므나와 10고을이 비교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작은 일 큰 일 따지지 마세요. ‘나는 왜 저 사람보다 작은 일을 하라고 하느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일단 충성하세요. 시시한 일, 대단한 일 가리지 마세요. ‘내가 저 사람보다 못해서 시시한 일을 시키느냐?’고 분내지 마세요. 일단 충성하고 보세요. 주님은 큰 일을 했느냐, 작은 일을 했느냐에 차등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할 때, 크게 칭찬했고 큰 상급을 약속하셨습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 곧 작은 일을 기꺼이 시작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18-19절 ‘그 둘째가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두 번째 사람이 주인에게 나아왔습니다. 첫 번째 사람에게는 못미쳤습니다. 그래도 그는 1므나로 5므나를 만들었습니다. 5배의 이문을 남긴 것입니다. 그랬더니 주인이 상급을 약속합니다. 5고을을 차지하라고 했습니다. 달란트 비유에서는 5달란트 남긴 종이나 2달란트를 남긴 종이나 칭찬의 내용이 똑같았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주인의 칭찬이 빠져있습니다. 그러나 “너도”라는 말에 칭찬이 함축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10므나를 남긴 사람에게는 10고을을, 5므나를 남긴 사람에게는 5고을을 차지하게 한 것에서, 주인이 이문과 비례하여 보상을 베풀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지만, 상급은 심은대로 거두게 된다는 진리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천국잔치에 참석하게 되는 사람 중에는 후한 상급을 받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불 가운데서 구원받는 것 같은 부끄러운 구원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15절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상급과 관련하여 특히 눈여겨 볼 점이 있습니다. 그들이 1므나씩을 받을 당시의 신분은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충성에 따른 상급은 고을을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종에서 권세자로 신분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께서 맡기신 일을 할 때는 종처럼 충성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해 놓고도 무익한 종일 뿐이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보상이 주어집니다. 요한계시록 22:5절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우리가 천국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세세토록 왕노릇하는 권세를 누린다는 말씀입니다. 20-21절 ‘또 한 사람이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이제 세 번째 사람도 주인 앞에 섰습니다. 이 사람은 주인이 맡긴 므나로 장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어떻게 했습니까? 수건으로 싸 두었습니다. 보관만 했습니다. 돈을 보관하는 방법 중에 가장 흔한 것은 땅에 묻어두는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에는 땅에 묻는 방법이 나옵니다. 돈을 수건에 싸서 보관하는 방법도 랍비 문서에 나오는 것을 볼 때, 세 번째 사람은 주인이 장사하라고 맡긴 므나를 보관만 한 것입니다. 수건이라는 단어로 사용된 ‘수다리움〈sudarium)’은 라틴어의 ‘땀’을 가리키는 ‘수도르(shu-dor)’란 말에서 유래된 ‘손수건’이라는 뜻입니다. 싸두었다는 말은 주인이 돈을 맡기고 떠난 날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손수건으로 싸두었다는 시제의 표현입니다. 땀을 닦아야할 그 손수건으로 돈을 싸두었다는 말은 암시적인 데가 있습니다. 땀을 홀리며 일하면서 사용해야 할 손수건을 돈을 싸두는 일에 사용을 했다는 말입니다. 땀을 흘리지 ㅇ낳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변명을 합니다. 그 역시 므나가 주인 것임을 알았습니다. “당신의 한 므나”라고 합니다. 자신이 청지기인 것은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주인의 말에 불순종했습니다. 변명거리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변명은 불순종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변명이 오히려 주인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습니다. 차라리 잘못했다고 회개했으면 나을 뻔했습니다.
그럼 세 번째 사람이 왜 그렇게 했을까요? 우선 그가 한 므나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장사를 하게 하려면 좀 두둑히 주지 아니 1므나가 뭐야?’ 하는 마음이 있었던 거죠. 1므나가 장사 밑천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1므나를 가지고 장사할 바에는 차라리 수건에 싸두는 것이 낫다는 계산을 한 것입니다. 다음은 모험이나 희생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것 가지고 장사했다가 본전마저 까먹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인의 말에 대한 불신앙 때문입니다. 주인이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고 했지만 반신반의한 것입니다. 주인이 왕되는 것을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이유가 혹시 복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아닙니까? 복음을 전하기 전에 미리 복음을 거부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 아닙니까?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는 주의 말씀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세 번째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22-26절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주님이 세 번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세요. 그 사람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셨습니까? 한마디로 악한 종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뭐라고 변명해도 주님이 보시기에 악한 종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그가 주인에 대해 한 말로 판단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실제로 그는 주인에 대해 잘못 판단했습니다. 주인에 대해 왜곡된 지식과 정보를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으로 보느냐로 영생과 영벌이 결정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내 모든 죄와 허물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죽어 제 3일에 부활하신 구세주로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재림주요 심판주로 믿습니다. 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지고, 모든 죄가 사해지며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되고, 예수님이 그 안에 영원히 계시게 됨을 믿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모든 걸 잃고 말았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사명으로 여기지 않고, 사명을 따라 살지 않고, 게으르고 나태하게 산 결과 그는 주인에게 버림받게 된 것입니다. 27절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마지막으로 원수에 대한 응징이 나옵니다. 여기서 원수들은 주인의 왕됨을 반대하여 밀사를 보냈던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에 대해 주인은 매우 단호하고 분노에 찬 감정을 표시합니다.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예수님의 왕되심을 싫어하는 자들의 최후가 어떻게 될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던 사람들과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대적했던 사람들은 마귀와 그의 사자들과 함께 불못에 던져지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0:10절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15절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주인으로부터 한 므나씩 맡은 종들과 같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시간을 맡기셨습니다. 생명을 맡기셨습니다. 시간은 우리 곁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길지 않습니다. 유한합니다. 유효기간이 정해진 인생에서 몇 므나를 남길 수 있습니까? 생명을 사명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심부름을 받은 목숨입니다. 복음의 심부름을 맡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의 사람이 되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동시에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주님이 인정하시는 복음의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불신 이웃들에게 복음의 증인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시대에 우리 모두가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육적으로 다 병이 들었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겸손과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살게 하옵소서. 모두가 어떤 어려움이라도 잘 참고 이겨내며 살게 하옵소서. 감사하므로 주의 재림을 기다리게 하시고, 다시 오실 주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신 예수 / 눅 19:28-40
하버드 대학교 전 총장이었던 네이탄 퓨지(Pusey)는 “지금 우리는 4가지가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면서 그것은 ‘불러야 할 노래, 흔들어야 할 깃발, 따를만한 지도자, 목숨을 바쳐 지켜야 할 신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중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따를만한 지도자가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도자란 어떤 사람을 말합니까? 지도자란 전적으로 믿고 따를만한 사람, 필요하면 자신의 전부를 바칠 수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까? 우선 그의 말이 신뢰감을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곧 누군가에게 존경심과 복종심을 갖게 되는 것은 먼저 그의 말이 주는 신뢰감에서 비롯된다는 것이죠. 그러나 그의 말로 인해서 존경과 복종을 일으키는 정도는 5%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95%는 그의 행동과 삶이 주는 신뢰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진심으로 따르고 싶은 마음은 그의 말로 시작해서, 그의 인격과 행동이 결정적이고, 그리고 그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 등이 합쳐져서 생기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네이탄 퓨지 박사의 말처럼 이런 지도자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여러분이 진심으로 존경할 사람, 닮고 싶은 사람이 있었습니까? 여러분에게 감동을 준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그가 선생님이든, 선배든, 상사 또는 상관이든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성도된 우리에게는 참 지도자, 진정한 왕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감동시키신 분, 우리가 사랑하는 분, 우리가 믿고 따를 분이 있다는 것이죠. 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에 이 땅에 오시기 전에도,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도 우리 모두의 왕이셨습니다. 그런데도 죄를 범하여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제물이 되셨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목하게 하는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곧 죽으심으로서 예수님은 그 어떤 지도자 또는 왕이 해결할 수 없었던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진정한 왕인데도 낮아지시고, 진짜 주인인데도 종이 되시고, 죽을 수 없는 분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죽으심으로서 우리의 진정한 왕이 되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왕이신 예수님께서 옛날부터 왕의 성읍으로 여겨진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생애 마지막 유월절을 예루살렘에서 보내기 위해 오셨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이유를 세 가지로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 십자가를 지시고 별세하기 위해서입니다. 눅 9:30~31절을 보면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셨습니다.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날 때 문득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의 대표자인 모세와 선지자의 대표자인 엘리야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별세를 예고한 것입니다. 깊이 졸고 있던 베드로와 제자들은 여기 나타난 두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어야 하고, 예수님이 그 죽음의 별세 장소가 예루살렘이라는 것을 주목하지 못했습니다. 깊이 조는 사람들은 들어야 할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영혼이 잠든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고, 심지어 설교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조는 사람은 본질이 아닌 것만 듣고 봅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둘째, 부활하여 승천한 날짜를 맞추기 위해서입니다. 눅 9:51절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여기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란 말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실 것을 전제로 하는 말씀입니다. 죽고 부활을 하시면 승천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셨음을 믿습니까?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부활하셨음을 믿습니까? 그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그 예수님이 내 삶에 새 생명을 부어 주시기 위해 부활하셨음을 믿습니까? 그 예수님이 승천하십니다.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배운대로 요한계시록의 최고 주인공이 되신 분, 어린양으로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 예수님께서는 죽어야 함을 알았고, 고통을 짊어질 때 부활이 면류관임을 알았습니다. 그 예수님은 다시 승천하심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승천할 날짜를 맞추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신 것입니다. 셋째, 말씀에 기록된 것을 응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눅 18:31절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성경 말씀은 오실 예수님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 예수님에 대한 기록들이 희미하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에 대한 기록들이 응하게 하려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됩니다. 사실 구약은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모세 오경은 모세 오경대로, 시편은 시편대로, 선지서는 선지서대로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우리를 위해 예루살렘에서 죽게 하시고, 별세하게 하시는데 예고 없이, 준비 없이 보내겠습니까? 구약성경 속에는 보내실 예수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그래서 기록된 말씀대로 예수가 살고 죽고 부활하실 때, 세상 사람들이 이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고 믿지 않겠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는 연한 순 같다.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 같다.’라고 이사야 53장에서 예언했을 때, 예수님이 정말 그렇게 꺾이시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채찍에 맞고 징계를 받고 처형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고난 받으신 분이 성경에 보내시리라는 예수님인줄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록된 말씀대로 된 사건이기에 예수님인 줄 알아보고 믿고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는 것은 말씀이 예언이 된 것이며, 그것을 응하게 하기 위한 걸음인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 가르쳐 주는 예루살렘행은 이렇게 세 가지 이유에서 예수님이 걸어가신 것입니다. 28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신다는 이 이야기가 우리의 가슴에 불, 열정, 용기와 설렘을 줍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죽기 위해, 살아서 승천한 기약을 맞추기 위해, 그리고 말씀이 성취된다는 것을 이루기 위해 고난으로 걸어 나가셨으니, 그 분의 순종은 놀랍습니다. 채찍과 징계, 형별로 걸어 나가셨으니 그 분의 내려놓음은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걸어 나가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걷고 있습니까? 우리는 기다리는 일들이 아무리 영광스럽다 하더라도, 고난의 가시밭 길을 지난다 할 때 앞장 서서 갈 수 있을까요? 뒤로 빠지고 숨어 있다가 달아나는 비겁쟁이가 아닙니까? 예수님은 앞서 가셨습니다. 내가 사모하고 내 삶에 영원한 주인되신 예수님은 이루어야 할 아버지의 맡기신 사명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일에 순종함으로써 두려움을 모르는 이처럼 앞장 서서 가셨습니다. 우리들도 사실 이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맡기신 사명을 위해 책임을 짊어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구원받은 자로서 영혼을 돌보는 기도의 짐을 거부하며 이불 속에서만 지내는 안일함을 버리고 나아가야 합니다.
29-36절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예수님은 생애 마지막 유월절을 예루살렘에서 보내기 위해 오셨습니다. 안식일을 예루살렘에서 3km 떨어진 베다니(가난한 자의 집)에서 보내신 후, 안식일 후 첫날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다가 감람산 벳바게(무화과의 집)에 이르렀을 때 제자 두 사람을 맞은편 마을로 보내어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본문에 나오는 동물이 ‘나귀’인데요. 나귀는 대체적으로 어깨까지의 키가 1m 40~50 정도 되는 ‘대형’과 1m 조금 넘는 ‘소형’ 두 가지 종류라고 합니다. 이 나귀를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주로 짐을 싣고 이동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법 흔하게 키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막 입성하시려던 예수님께서 밑도 끝도 없이 제자들에게 “맞은 편 마을로” 가서 나귀, 그것도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심으로서 우리의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여 제자들이 가서 매여 있는 나귀새끼를 풀려고 하자 그 임자들이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고 물었고, 제자들이 “주께서 쓰시겠다”라고 말하자, 그 말을 들은 주인들은 마치 사전에 약속이라도 되어있었던 것처럼 허락함으로 끌고 왔습니다.
어느 분이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예수님도 렌터카를 이용하셨다’고 했습니다. ‘자가 나귀’나 ‘자가 말’이 없었던 예수님이 남의 나귀를 렌트해서 타셨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해석입니다만, 예수님은 자가 말이나 자가 나귀가 없었을 뿐 아니라 사실은 공생애 기간 동안 한 번도 나귀나 말을 타신 적이 없었습니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를 때에도, 중심잡기 힘든 내리막길을 내려갈 때도, 그리고 산길이나 돌길을 끊임없이 다니실 때에도 예수님은 오로지 걸어서만 사역했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돌연 나귀를 타신 것이죠.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구약 이사야 62:11절과 스가랴 9:9절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 곧 예수님께서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시는 진정한 ‘메시야’이심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이 예수님의 임의적인 행동이 아니라, 구약의 예언에 근거하여 그대로 행하시는 것임을 보여주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의도까지는 몰랐지만, 그래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나귀를 타기 전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나귀 등에 얹어 안장으로 삼게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이동하시자 그것을 본 무리들은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폄으로서, 왕이나 개선장군이 입성할 때 까는 양탄자를 대신했고, 종려나무가지를 베어 흔듦으로서 왕을 환호하는 깃발을 대신했습니다.
여러분, 매여 있는 나귀가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들에 뛰노는 야생마를 잡아서 타고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길들여지지 않고, 매여 있지 않는 동물은 쓸 수 없는 것입니다. 마 21장에 보면 이 나귀새끼는 어미와 함께 있었습니다. 보통 어미와 함께 있는 새끼들은 놓아 길렀습니다. 그런데 이 나귀새끼는 어미와 함께 있었음에도 자의든 타의든 매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쓰임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유롭기를 원합니다. "자유는 빵보다 더 귀하고 죽음보다 더 소중하다"고 말합니다. 인류의 역사의 주제는 자유입니다. 역사책은 자유의 쟁취와 해방이 그 주제입니다. 그만큼 자유는 소중한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모든 책임과 의무를 벗어나는 자유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참 자유란, 사실 "매일 것에 매이는 자유"입니다. 뭐든지 다 내 마음대로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고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진리에 매일 때에만 진정으로 자유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절대적인 자유인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그의 유명한 "노예 의지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인간을 "말"에 비유했습니다. "인간이라는 말 위에는 하나님이 아니면 마귀가 올라타 있으며, 아무도 올라타 있지 않은 그런 말은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엄격히 말해서 "인간은 스스로의 자유 의지가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숙명적으로 더 높은 주인에게 속해 있고, 그의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주인을 모실 때에만 참으로 자유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자유 속에서 나를 새롭게 하는 해방을 원한다면,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오신 주님께 매여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예수님을 모신 나귀의 모습이 우리에게 이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 소중하게 쓰임을 받으려면, 주님에게 꼭 매여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먼저 생각하고, 내 주장보다 주님의 말씀에 먼저 귀를 기울여 듣고, 주님의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보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매이는 겸손입니다. 이럴 때 영광의 기쁨을 주님과 함께 누리는 삶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날 때부터 곱추인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17세가 되기까지 집밖에 나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곱추라 창피하기도 했고, 부모님이 학교에 보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17세가 되던 해에 그 집에 목사님이 찾아오셔서 그 목사님 때문에 이 여자아이는 난생 처음 집을 벗어나 부흥 사경회에 참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강사 목사님 스타일이 찬송을 크게 부르지 않고, 말씀을 강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조용조용하게 하는 세미나 비슷하게 사경회를 하는데 하루는 이렇게 말씀하는 겁니다. "여러분, 이제 조용히 밖으로 나가서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의 음성이 어떻게 들려오나 각각 감동을 받으십시오. 과연 나는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쓰시기를 원하시는가? 감동을 받고 다시 모입시다." 사경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저마다 하나 둘씩 밖으로 나갔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은 밖에 나가서 좋은 잔디밭과 벤치에 앉아서 깊은 명상에 잠겼습니다. 그러나 곱추소녀는 더딘 걸음으로 나갔기 때문에 좋은 자리가 없어서 아무도 없는 쓰레기통 옆 벤치에 앉았습니다. 그러면서 "아, 나는 어디를 가나 쓰레기구나"하고 한숨을 쉬는데, 그때 한 소년이 오더니 쓰레기통을 뒤지며서 열심히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겁니다. 곱추 소녀가 용기를 내서 난생 처음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쓰레기통은 왜 뒤지세요?" "캔이나 종이를 찾고 있어요." "그걸 찾아서 무엇하려구요?" "이걸 가지고 가면 돈이 되거든요. 팔아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편찮으신데 약 사 드리려고 그래요." 그 순간 곱추 소녀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 쓰레기도 쓸모가 있구나! 나 같은 쓰레기 인생도 쓸모가 있구나! 저 쓰레기를 팔아서 노인들의 약 값을 할 수 있다면 나처럼 쓰레기 같은 곱추도 병들어 누워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약이 될 수 있겠구나!" 그런 감동을 받고 들어가 목사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나 같은 곱추 쓰레기도 주님께서 쓰신다고 하시니, 저를 병들고 나약한 사람들이 있는 양로원으로 보내주세요. 나로 하여금 주님께서 쓰시게 해 주세요" 그날밤 뜨거운 기도 속에 이 곱추 소녀는 드디어 "내가 너를 쓰겠노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양로원에 들어가 굽은 허리로 수많은 노인들의 병수발을 들었습니다. 오히려 건강한 사람보다 키 큰 사람들보다, 곱추가 노인들을 섬기기에는 더 좋았습니다. 곱추 소녀가 노인들을 섬긴 이후 이 소녀가 들어가면 병든 할아버지 할머니의 마음에는 감동이 일었습니다. 예수님 보는 것 같았습니다. 곱추소녀는 이미 곱추가 아니었습니다. 하늘이 보낸 천사요, 그를 통해 나타나는 주님의 사랑이 땅을 진동시키는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주님께서는 나귀새끼와 같이 미천한 우리를 영광의 개선잔치에 옮겨 놓고 싶어 하십니다. 이 놀라운 역사를 맛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을 모시기 위해 낮아지는 헌신입니다. 그리고 진리에 매이는 겸손입니다. 언제든지 주님께서 쓰시겠다 하실 때에 쓰실 수 있도록, 나를 진리의 자리에 매어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르실 때에 가장 나를 낮춘 모습으로 헌신할 수 있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37절 ‘이미 감람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찬양의 동기는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한 것이다. 무리들은 예수님의 행하신 일들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하신 일들을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수 많은 표적을 보았고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얼마 전에는 여리고에서 소경 바디매오를 고치셨던 일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더욱 열광시켰던 것은 바로 베다니 사람 나사로 부활의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백성들의 마음 속에 메시야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 일으킨 동기가 되었습니다. ‘저 분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 그리스도 곧 메시야시구나!’ 기독교 신앙은 다분히 체험적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신앙의 체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었든지, 아니면 주님의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목격했든지, 그들을 흥분시키고 찬송하게 한 것은, 그들이 주님의 능한 일을 본 경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만난 경험이 있는 사람이 주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찬양했습니까? “기뻐하며 큰 소리로” 했습니다. 주님을 만난 경험이 있는 사람, 주님을 깊이 만난 사람들은 특징이 나타나는데, 찬양할 때 기쁨으로 한다는 것과 큰 소리로 찬송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벙어리 목석 같이 앉아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님을 만난 경험이 없거나 오래되어서 감동과 감격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엡 1:3-6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찬송해야 할 이유가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창세 전에 우리가 택하심을 받은 것, 둘째는 죄 사함의 은혜를 받은 것, 셋째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그의 기업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기억하므로 찬송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38절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고 찬송합니다. 마 21:9절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호산나”란 용어의 의미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란 뜻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란 말의 의미는 다윗의 왕통을 이어받은 자, 곧 메시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자주 불리우는 예수님에 대한 호칭이 무엇입니까? “다윗의 자손 예수여!” 예수님을 부를 때 그들은 그렇게 불렀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고, 우리의 왕이 되심을 노래한 것입니다. 그들이 만난 예수, 그들이 목격한 예수는 왕이시고 구원자, 곧 메시야 되심을 노래한 것입니다.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라고 찬송합니다. 눅 2:13-14절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천사들의 노래의 내용과 거의 같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예수님을 통하여 인류를 평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엡 2:14-15절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구속함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기쁨으로 큰 소리로 우리의 구원자, 우리의 왕되신 예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9절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바리새인들은 왜 무리들의 찬양을 제지시키려 했습니까? 두 가지 이유를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되심을 인정하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끈질긴 의혹인 “당신은 누구인가?”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들은 돌로 치려 했습니다. 요 10:37-38절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제자들과 은혜를 입은 사람들의 공통된 고백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메시야로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대적 관계로 생각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선지자 정도였다면 그들은 환영하였고 추종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메시야로 칭송을 듣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습니다. 다음으로 무리들의 찬송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것이므로 속히 금지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불경죄 짓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신앙의 입장에서는 정당한 조치라고 생각되지만, 자신들의 불신앙과 무지로 인해 찬송의 기쁨을 빼앗기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 속에서 바리새적인 모습들이 발견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습니다. 예배도 형식과 습관에 매여 감동과 감격이 사라졌습니다. 신앙생활에 활력이 사라지고, 의무감으로 직분 때문이라면 바리새파 바리러스에 감염된 것입니다. 이것에 감염되면 예배의 자리에 나와 있으면서도 기쁨 없이 무거운 입으로 찬송하게 됩니다. 40절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요청을 한 마디로 일축하셨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먼저 찬송의 당연성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씀입니다. 메시야의 도래는 너무나 기쁜 일이었으므로 백성들은 잠잠하게 보고만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다음으로 찬송의 필연성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표현은 격언과 같습니다. 격언은 진리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므로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메시야의 나타나심은 너무나 중대한 사건이므로 어떤 방식으로든 마땅히 찬양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백성들이 큰 기쁨으로 찬송하고 환호하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며, 그것을 저지하는 것이 오히려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셨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교도소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설교를 마치고 나오는데 배포하는 소식지를 받았습니다. 거기에는 간증 편지가 실려 있었습니다. 주인공은 김현양, 엽기적 살인 행각으로 온 국민에게 큰 충격을 일으켰던 지존파 살인범입니다. 그는 사형 언도를 받고 형 집행을 기다리는 중, 어느 집사님의 전도를 받고 회심하였는데, 그 집사님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용입니다. “집사님, 생각하면 제가 왜 그렇게 바보 같은 인생을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와 생각하니 제 눈이 무엇인가에 가려져 있었던 것이 틀림 없습니다. 저는 죄에 대한 대가로 죽지만, 세상에서는 죽음으로도 용서 받을 수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제가 여기서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을 생각하니,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여 눈물만 흐릅니다. 저는 요즘 늘 이 찬송을 부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은혜 받은 성도들의 마음 속에는 이처럼 영혼에 울려퍼지는 노래가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굳어져 있습니다. 감사와 감격이 사라졌습니다. 입술이 굳어져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본문 속에 두 부류의 사람들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구주로, 왕으로 만난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심령 속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적인 모습 곧 경건의 모양만 남았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찬송의 신앙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전도하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차꼬에 채워진 상태에서 찬송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행 16:25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찬양에는 어떤 유익이 있습니까? 찬양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선언하며, 사탄의 공격에 대항하는 믿음의 방패를 들게 되며, 주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게 할 수 있습니다. 찬양은 우리의 삶 가운데서 성령의 인도하심과 감동을 경험하게 해줍니다. 찬양은 모든 진실한 성도의 연합에 크게 기여 합니다. 찬양은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로 고정하고, 귀를 주님의 말씀에 집중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찬양은 하늘나라의 언어이므로 찬양을 통해 하늘 나라를 미리 맛보게 됩니다. 찬양은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 기쁨으로 큰 소리로 불러야 한다. 찬양은 성도들의 특권이다. 만약 우리가 찬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돌들이 소리 지르게 하실 것이다.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으로, 주님이 나의 주가 되시며 왕이 되심을 인하여, 우리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찬양을 회복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향하여 가신 사순절 셋째 주일에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늘의 평화 자체이시며, 가장 높은 곳의 영광 자체입니다. 따라서 그에게 임한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은 더 이상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저주와 불행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궁극적인 평화이며 영광입니다. 그 사실이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증명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알기에 우리는 2천 년 전 제자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찬양할 이유가 있습니다.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입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다가 부활하신 주님,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게 하심으로써 참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 모두의 참 왕이시며 주이시고, 구원자이심을 확증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힘껏 널리 전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이 사람들이 찬양을 안 하면 돌들이라도 사용하셔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러니 오늘 내가 주님께 헌신하는 자리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줄 깨닫게 하옵소서. 헌신의 축복을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뺏기지 않게 하옵소서.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인 하나님만을 찬양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쏟으신 십자가의 사랑에 흠뻑 젖는 사순절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예수, 예루살렘 성에서 / 눅 9:41-48
1941년 6월 22일, 20세기 최대 신학자인 칼 바르트의 스무살 된 아들 로베르트 바르트가 알프스 산맥 등반 중 추락사했습니다. 아들을 묻고 돌아와 바르트는 회중들과 고린도전서 13:12절 말씀을 봤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 본문으로 바르트는 “성도는 ‘지금의 삶’과 ‘그때의 삶’을 동시에 사는 존재인데 제 아들은 변화된 채로 예수님 안에서 지금 ‘그때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라고 설교했습니다.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점은 죽음의 두려움을 이용해 영혼을 미신의 노예로 삼지 않고, 죽음을 극복하게 해서 대 자유를 준 것입니다. 미신적인 사람은 죽음과 관련된 얘기만 나와도 재수 없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숫자 4자도 ‘죽을 사(死)’자를 연상시키는 재수 없는 숫자라고 피합니다. 죽음을 꿈과 희망의 멸절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죽음을 재수 없게 보지 않고, 꿈과 희망의 멸절이 아닌 희망의 서곡으로 봅니다. 죽음에 대해 어떤 개념을 가졌느냐가 중요합니다. 원망과 불평과 한을 품은 채 “죽겠어요.”라고 하면, 그때 죽음은 가장 재수 없는 말로서 진짜 죽습니다. 그러나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면, 그때 죽음은 가장 복된 말로서 더 잘 살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 안에서는 숫자 4자가 재수 없는 숫자란 미신은 더 이상 통하지 않고, 오히려 가장 복된 숫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반전의 매력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로마의 반역자 처형 도구였던 십자가는 가장 재수 없는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상한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분이 메시야라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그들을 보니까 얼굴에 기쁨이 넘쳤고, 이웃에게 사랑의 손길을 넘치게 베풀었고, 늘 긍정적인 말을 했습니다. 그들과 같이 있으면 자신들도 기쁨과 평화가 넘쳤습니다. 그때부터 십자가는 가장 재수 없는 도구에서 가장 능력 있는 도구란 인식이 점점 사람들 사이에 생겼습니다. 그것도 기독교의 반전의 매력입니다. 기독교가 죽음 자체를 칭송하지는 않습니다. 바른 믿음과 개념이 없는 죽음은 가장 불행한 것이라는 점은 기독교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바른 믿음과 개념을 가진 죽음은 결코 불행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은 가장 복된 길로 여깁니다. 예수님은 마 16:24절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를 귀신 퇴치 도구로 압니다. 그래서 십자가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자동차 백미러에도 작은 나무 십자가를 겁니다. 그러나 자동차 사고를 막아주는 것은 십자가가 아니라 교통 법규를 잘 지키고 과속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십자가는 부적이나 영광의 장식이 아니라 자기 등에 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는 남도 살리지만 자신도 살립니다. 십자가가 불신자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의 원천입니다. 남에게 십자가를 지우려고 하면 평화는 없습니다. 십자가를 남에게 미루는 것은 분리의 담장을 쌓고, 소통의 다리를 끊는 것이기에 결국 불행해지고 비참해집니다. 반면에 십자가를 자기가 지는 것은, 담을 허물고 소통의 다리를 이어주는 것이기에 결국 사람의 사랑도 받고 하나님의 사랑도 받습니다. 결국 십자가가 오늘의 행복과 내일의 축복으로 연결됩니다. 요새 지식이 많아져도 갈등과 상처와 전쟁은 끊이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지식과 능력은 세상을 새롭게 하지 못합니다. 세상을 새롭게 하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어리석게 보이는 십자가가 결국은 살 길입니다. 마음에 감동을 주고 사람됨을 일깨워주는 사람들은 돈과 권력과 명예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하면서, 손해도 감수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둔 세상에 한 줄기 빛이 됩니다. 세상은 십자가를 지는 것을 어리석게 보지만 그 어리석음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치유합니다. 사실 십자가 설교를 하면 저도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십자가는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안 할 수 없기에 이 시간에 도전의 말씀을 드립니다. 먼저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용서해주고, 이해해주고 높여주고 손해도 감수하십시오. 그러면 눈물을 흘리셨던 예수님이 그 십자가의 눈물을 반드시 기억해주실 것입니다.
41절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며칠 전의 얘기를 담고 있기에 분위기가 어둡습니다. 본문에는 예수님이 우시는 장면도 나오고 분노하며 성전을 청소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주님 마음을 그만큼 아프게 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모습을 반면교사로 삼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나서야 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본문 41절에서 ‘우시며(에클라우센)은 ‘통곡하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고, 소리 내어 엉엉 우는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 큰 고통 중에서도 울지 않으시던 주님이,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통곡하듯이 엉엉 우신 것을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 보다 더 아프게 만든 것’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주님이 십자가 보다 더 아파하셨던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무엇이 예수님을 그렇게 통곡하듯이 울게 만들고 슬프게 만들었을까요? 우리는 주님이 십자가보다 더 아파 하셨던 그것을 찾아봄으로, 우리도 주님을 아프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곧 닥치게 될 이스라엘 민족의 멸망을 바라보시면서 우셨습니다. 그러니까 40년 후 주후 70년에 있을 이스라엘 민족의 멸망과 예루살렘 성전이 훼파당할 것을 아시고, 예수님이 그렇게 가슴 아파하시며 통곡하여 우셨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오셔서 성을 보시고 우셨다는 말씀은 복음서에서 누가복음에만 있습니다. 성경에는 모두 예수님이 3번 우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1:35절에는 나사로의 죽음으로 예수님이 우셨다는 말씀이 나오고 히브리서 5:7절에는 예수님이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인성을 잘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특히 군중들이 열광적인 환호와 찬양 후에 그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예수님이 우신 것은 의미심장한 교훈을 줍니다. 예수님은 그때 이미 예루살렘의 미래와 유대인들의 미래를 보고 안타까운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그 눈물은 사랑의 눈물입니다. 성도는 눈물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눈물을 품을 줄 알아야 희망도 품을 수 있습니다.
웃음도 좋은 것이지만 눈물도 좋은 것입니다. 웃음도 치유의 능력을 주지만 눈물도 치유의 능력을 줍니다. 눈물은 마음과 감정을 녹여주고 문제를 풀어주는 용해제입니다. 눈물은 영혼을 맑게 해주는 거룩한 세제고 병을 치료해주는 거룩한 약제입니다. 눈물에는 10분 안에 약 90% 이상의 박테리아를 죽이는 라이소자임(Lysozyme)이란 성분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감사의 제사도 기쁘게 받지만 눈물의 제사도 기쁘게 받습니다. 눈물로 마음의 창을 닦으면 더 멀리 그리고 더 깊이 볼 수 있습니다. 비누는 몸의 때를 씻어내지만 눈물은 마음의 때를 씻어냅니다. 또한 눈물은 영혼의 메마름도 막아주고 노화도 막아줍니다. 어릴수록 눈물이 많습니다. 그 말은 눈물을 많이 흘릴수록 젊어진다는 뜻도 됩니다. 사람만이 뚜렷한 언어를 하기에 언어는 인간 최대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최대 선물입니다. 그처럼 사람만이 뚜렷한 눈물을 흘리기에, 눈물도 인간 최대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최대 선물입니다. 눈물을 부끄럽게 여기지 마십시오. 눈물은 약자의 표시가 아니라 오히려 맑은 영성의 표시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눈물을 눈물 병에 담아 기억하고 계십니다. 의로운 눈물은 은혜의 빗물로 변합니다. 눈물을 흘리면 마음의 평안도 얻습니다. 그처럼 눈물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눈물을 흘린 후에 눈물을 닦고 찬란한 비전을 향해 나가면 눈물을 흘리셨던 주님이 웃으시며 기뻐하실 것입니다.
42-44절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그분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주신 것은,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해하고 평화를 맺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화목제물의 어린양’이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의 제사규례를 보면 죄인이 하나님께 죄 용서 받고, 하나님과 화해하는 ‘화목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어린양의 피를 하나님의 지성소 휘장에 7번 뿌리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어린양의 피 뿌림으로 백성들의 죄가 다 용서가 되고,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지면서 하나님과 평화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이 바로 이 어린양의 화목제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영문 밖으로 끌고 가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하나님께 무서운 배반의 죄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그 무서운 죄의 심판이 그로부터 40년 후에 이루어지게 될 것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통곡하고 우셨던 것입니다. 43절의 “날이 이를지라”는 말은 종말의 날이 이른다는 말도 되지만 주후 70년에 로마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폐허가 된다는 뜻도 있습니다. 실제로 주후 70년에 로마 군인들은 예루살렘 성을 점령하려고 공격용 토둔을 쌓고 성을 포위했습니다. 44절의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은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완전히 파괴된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게 파괴됩니까?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곧 평화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외면했기 때문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A.D 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15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예루살렘 성을 포위했습니다. 5개월 동안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토둔(토성)을 쌓았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 안에는 전국에서 유월절을 지키러 올라온 유대인들을 포함해서 100만 명이 넘는 유대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성문을 굳게 잠그고 로마군에 대항하였습니다. 그러자 로마군은 예루살렘 성 주위에 토둔을 쌓고 예루살렘을 공격하였습니다. 공격이 오랫동안 계속되자 성 안에 있는 유대인들은 먹을 것이 떨어지고, 마실 물이 부족해지면서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당시 이 재앙에 목격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 당시의 참상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기근이 널리 확대되어 모든 집과 식구들에게 덮쳤다. 다락에는 먹을 것이 없어 죽어 가는 여자들과 어린아이들로 가득 찼고, 거리는 늙은이들의 시체들로 가득 채워져 버렸으며, 살아있는 아이들과 젊은이들은 모두 먹지 못해서 퉁퉁 부어 무서운 망령처럼 거리를 배회하다가 쓰러져 버렸다. 이들을 매장하려 해도 병자에게는 힘이 없었고, 튼튼한 사람일지라도 시체가 너무 많아 대책이 없었다. 자기 자신도 언제 죽을 는 지 알 수 없는 죽음의 그늘 아래 있었기 때문에 죽은 사람의 시체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체를 처리하다가, 자신이 시체 앞에 쓰러져 버렸고, 또 다른 남은 사람들은 자기에게 죽음이 오기 전에 스스로 관에 들어가 누워 버렸다." 요세푸스는 계속해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로마군인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뒤 약탈할 것을 얻기 위하여 집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전 가족이 다 죽어 있는 것을 보았고, 다락에 시체들만 가득한 것을 보았을 뿐이다. 로마군인들은 이 무서운 광경을 보고 어떤 물건 하나 손대지 못하고 뛰쳐나오고 말았다. 예루살렘 거리는 로마군인들에게 찔려 죽임을 당한 유대인들의 피로 작은 시내를 이룰 정도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은 로마 군인의 불공격을 당하게 되었고, 금으로 된 성구들이 녹아 벽돌 사이에 끼이게 되자, 그 벽돌 사이에 끼인 금을 얻기 위해서 로마 군인들이 벽을 다 허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유일하게남아 있는 예루살렘 성전의 벽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지로 생각하는 “통곡의 벽”입니다. 요세푸스는 당시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97,000명의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혀갔고, 1,100,000명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끔찍한 재앙이요 참상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그러한 끔찍한 재앙과 참상의 날을 내다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 많으신 예수님께서 어찌 울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냥 슬퍼하시면서 통곡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끔찍한 멸망이 예루살렘 성에 불어 닥친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루살렘 성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라고 외친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이유가 죄악 때문이라는 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 사람들에게 죄악을 버리라고 외친 것입니다. 죄악을 버리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회개하면 살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으면 앞으로 멸망의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끔찍한 멸망의 날은 다가오고 있는데, 예루살렘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모른다기 보다는 믿지 않는 것입니다. 당장에 눈앞에 실감나지 않으니까 믿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담배 피는 사람들이 담배가 나쁜 줄은 알지만, 담배의 피해가 당장 눈앞에 실감나지 않으니까 계속해서 담배를 피우듯이, 하나님을 떠나 죄악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도, 죄의 결과가 당장에 눈앞에 나타나지 않으니까, 계속해서 죄악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돌이킬 수 없는 날을 당하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 사람들이 그렇게 말을 하고, 경고를 해도, 죄를 버리고 회개하지 않아도, 우리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도 그러니까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그리고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은 하나님을 반역한 자가 받아야 할 심판과 지옥의 비참한 형벌을 경고하시는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경고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짓는 죄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죄 중에서도 가장 큰 죄는 하나님과 화평을 위해 보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믿지 아니하는 불신앙의 죄입니다. 하나님이 죄 용서를 위하여 아들을 대신 십자가에 죽게 하셨는데도, 인간들이 그런 하나님의 은혜와 호의를 거절하고, 구원을 거절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얼마나 불행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영영히 꺼지지 아니하는 지옥 불에 던져 넣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 지옥불이 얼마나 뜨거운지 숯불 위에 소금치듯하며, 거기는 구더기 한 마리도 죽지 않는 곳이라고 하시면서, 그 지옥의 고통은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곳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옥 불에서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한다면, 그 사람은 절대로 지옥의 형벌을 면할 수없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아픔보다 더 큰 아픔으로, 회개할 줄 모르는, 오늘의 무디고 어리석은 죄인들을 향하여 통곡하며 우십니다.
45-46절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하시니라.”
예수님은 심판에 관한 말씀을 하신 후 성전에 들어가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았습니다. 당시 성전 이방인의 뜰에서는 상인들이 제사에 필요한 제물들을 팔았습니다. 또한 당시 유대인 남자는 1년에 반 세겔의 성전세를 유월절에 납부했는데 헬라, 로마, 애굽 등지에서 온 순례자들이 성전세를 내려면 그들의 돈을 유대 돈으로 바꿔야 했기에 환전상도 많았습니다. 그들의 성전 내 영업을 허락해주면서 종교 지도자들은 뒷돈을 챙겼습니다. 결국 성전은 장사꾼들의 장터가 되고 뇌물 수수의 본산이 되었습니다. 그런 현실에 분노해서 예수님은 장사꾼들을 성전에서 내쫓고 이사야 56:7절하 말씀을 인용해 말했습니다.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예수님을 우시게 하고 분노하시게 한 근본 원인은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이 성전답게 되기를 원하고 교회가 교회답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특히 교회를 장사꾼들의 장터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가장 복된 모습은 복과 상관없이 무조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복을 더 받습니다. 반면에 가장 복이 없는 모습은 하나님을 이용해 돈을 벌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복을 더 받지 못합니다. 부당하게 돈 버는 것이 다 나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나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고 교회를 이용해 돈을 벌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분노하신 이유는 장사꾼들이 하나님의 이름과 제사를 내세워 폭리를 취하고 그 뒷돈을 제사장들이 받았던 종교적인 부정부패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과 교회를 이용해 돈을 벌려는 것을 아주 싫어하십니다. 예를 들어, 교회 앞에 있는 식당이 돈을 벌려는 목적으로 진실한 믿음도 없이 그 교회에 등록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또한 같은 교회 성도들에게 물건을 강매하거나, 돈을 꾸거나 담보 제공을 요청하거나, 부정한 인사 청탁을 해도 안 되고, 특히 다단계 피라미드 조직에서 자기 하위에 두려고 교인들을 포섭하고, 처음 등록한 교인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척 하면서 다단계의 검은 마수를 뻗치는 것은 신천지 이단만큼 나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교회를 이용해 돈을 벌려고 하지 말고, 정당하게 땀을 흘리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십시오. 직업전선과 사업전선과 기술전선에서 뒤떨어지지 않는 재능과 지혜를 구하고, 온유한 성격과 자기 관리능력과 인복과 일복도 구하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누려는 소명의식을 가진 성도의 정당한 물질추구를 외면하지 않고, 정당하게 물질을 얻을 수 있는 재능과 재주와 창조성과 인맥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 복된 성도들이 많아질 때 교회는 더욱 교회답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성과 속의 구별이 분명해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들은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하나님이 세상 가운데서 특별하게 구별하여 성스럽게 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은 품성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도 마땅히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거룩하게 구별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고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도 거룩해야 되고 성도들도 거룩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세운 교회와 성도들이 거룩성을 잃어버리고, 다시 죄로 더러워진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허사로 끝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헛된 것으로 만드는 교회와 성도들의 세속화는, 주님 입장에서 보면 십자가 보다 더 아픈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십자가의 계절에 주님이 십자가의 아픔보다 더 아파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주님을 통곡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감사하므로 받는, 십자가의 절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7-48절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이렇게 당시 힘을 가진 사람들이 예수님이 미워서 죽이려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예수님은 계속해서 예루살렘 성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회개하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구원하려고 힘썼던 것에 대해 암탉의 비유를 들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37-38절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집이 황폐하여 버려진바 되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암탉이 병아리를 물어가려는 매가 뜬 것을 보고, 소리를 지르고 날개를 퍼덕이면서 병아리들을 날개 아래에 모으듯이, 예수님께서는 장차 예루살렘에 닥쳐올 멸망을 보면서, 예루살렘 성을 하나님의 넓은 품으로 품으려고 힘쓰고 노력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목숨을 건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본인이 싫다고 하여도 자꾸만 붙잡는 것입니다. 결과를 뻔히 아는 데 어떻게 내버려 둘 수 있습니까? 사랑한다면 멸망을 향해 가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목숨을 걸고 예루살렘 성 사람들을 향해 외치고 또 외친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을 안 들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 사람들은 말을 안듣고, 멸망의 날은 점점 다가오고, 그러니까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들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기로 작정하셨고, 그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모든 죄에서 용서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인도의 복음전도자 썬다 싱은 여행 중에 히말라야 산에서 경험한 처참한 산불에 대해 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을 끄려고 애쓰는 동안,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은 불길에 가지가 타 올라가는 한 나무를 올려다 보며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 어미 새가 나무 위를 돌며 미친 듯이 날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 새는 둥우리에 가득한 이제 막 털이 난 새끼들에게 위험을 알리며 짹짹 울어대었습니다. 마침내 둥우리가 타기 시작하는데도 그 어미새는 날아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어미새는 내려와서 자기의 날개로 새끼들을 덮어주었습니다. 순식간에 어미새와 새끼들은 불에 타 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썬다 싱은 놀라운 감동속에서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놀라운 것을 목격했습니다.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자기의 생명을 바친 저 위대한 사랑과 헌신의 새를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바로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내려와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죽음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예화입니다. 지금도 이러한 주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럼,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보실 때는 어떤 마음으로 보실 것 같습니까? 여전히 죄악된 삶을 살아가는 자는 언젠가는 멸망의 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이 언제 일지 예루살렘 성 사람들처럼 40년 뒤가 될지, 아니면 10년 뒤가 될지, 아니면 한달 뒤가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말씀을 통해서, 그날이 오늘 밤이 될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회개는 지금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일로 미루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오늘 이 시간 죄악된 삶을 버리고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작은 결단 하나 제대로 순종하지 못해도 끔찍한 재앙의 날을 맞이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절대로 소홀히 여기지 말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면서 하나님과 동행하십시오. 무심코 어긴 말씀 하나가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불행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게 될 것 같으면, 하나님은 그것을 깨닫게 해주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극복하여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하나님은 슬퍼 우신답니다. 하나님을 울게 하지 마세요. 혹 지금 하나님을 울게 하는 성도가 있다면, 더 이상 하나님을 울게 하지 마시고, 속히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불행을 물리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려면, 제일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게 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며, 배운 말씀을 실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르게 신앙생활을 하려면, 먼저 교회가 바른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교회가 바르게 되어야지 교회가 잘못되면,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생활도 잘못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셔서 맨 처음 하신 일이 성전을 정화하고, 성전을 바르게 세우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희망이십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성의 멸망을 예견하시면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이 성전 정화, 성전 바로 세우기였던 것입니다. 고전 3:16-17절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 직접 그 사람을 멸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소중히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교회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야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를 위하여 생각만 하지 마시고, 실제적으로 무릎을 끓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걱정, 염려를 말로만 하는 성도는 나쁜 사람입니다. 걱정되는 만큼, 염려되는 만큼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그림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가운데, 빨간 셔츠를 입고, 짧은 곱슬머리의 어떤 젊은이가 배의 키를 꽉 잡고 있고, 예수님께서 그 젊은이의 어깨를 붙잡고는 등 뒤에서 어디로 갈지를 손가락으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키를 잡고 있는 것은 임남수 목사이고, 그 등 뒤에 방향을 가르쳐 주시는 분은 우리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여러분, 키를 잡고 있는 사람만 키를 움직인다고 배가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 저기 구석구석에서 땀 흘려 주는 사람이 있어야 갈 수 있습니다. 우리 '전주갈보리교회'라는 배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방주가 되고, 여러분 모두 이 구원의 방주에서 일하고 땀흘리고 애쓰는 선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승객은 배에 대해 불평하고, 이곳저곳에 대해 지적합니다. 그러나 선원은 지적 받으면 얼른 감추고 수리하고 고쳐서, 잘 움직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전주갈보리교회 모든 성도들이, 승객의 자세가 아니라 선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교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성도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신앙생활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시각으로 교회를 사랑하게 하옵소서. 갈보리교회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게 하옵소서. 이 치욕스러운 시대 속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나타나게 하옵소서. 이 민족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완악한 이 불신의 시대, 강철같이 굳어버린 이 백성들의 뺨에도 십자가의 구속으로 말미암는 감격의 눈물이 흐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