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룡,김성일은 이황의 제자로 이상주의적 성리학자였다.
정도전이 이상주의적 유교국가를 세우려 하였다가 실패하였기 때문에,
이상국가를 실현하기 위하여 정도전의 학풍을 주리철학으로 이어갔다.
그렇기 때문에 서경덕, 기대승, 이이, 이항, 성혼, 박순, 김인후, 윤증[소론학파 영수]으로 이어지는
주기철학파에게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철학이었고,
영남의 남명 조식학파가 신봉한 노자의 도교 장자철학, 백이숙제의 제가백가철학은
성리학의 이단파철학이었다. (대북파 정권)
주리철학파가 이상주의적 성리학국가를 세우려 하였다면,
주기철학파는 이성주의, 경험주의, 현실주의, 합리주의적 성리학국가를 세우려하였다.
주기철학은 윤증의 양명학으로 이어지고 실학사상으로 이어지며
서양의 근대이성철학과 합치되는 학문이며, 현대이성철학,
과학, 공학적 사고체계로 그대로 이어지는 합리주의철학이었다.
이상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은 동인 주리학파 정권에게
상식과 이성적사고, 합리적판단을 기대한다는 자체가 넌센스다.
성리학은
맹자의 심성론에서 시작한다.
맹자의 천성설은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단계의 책이다.
천성설에서 성선설의 모태가 된다.
이 이론을 바탕으로 정이학, 정주학, 주자학이 태동하게 된다.
한유가 처음으로 사회성이 결여된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며 유학의 필요성을 대두시켰다.
이고가 처음으로 인간의 이성을 찾아낸다.
정이, 주자는 이성이 "리[사단/물질,육체,자본,하느님(종교)]에서 나와 생각과 사고를 결정한다는
주리론을 펼친다.
주리론을 뒤집어버린 성리학 반란사건을 서경덕이 최초로 일으킨 것이 주기설이다.
기대승은 사회이성철학적으로 접근하여 주정설로 설명하면서
기대승vs이황의 8년답신논쟁[사단칠정논쟁]을 통해 "이성의 상호통제론"을 제시하며
주정설을 이론적으로 확립시킨다.
그러면서 리(사단/인,의,예,지=심)vs기(칠정/희노애락애오욕)가 서로 상호 통제하면서도
기(주기론)에 약간더 치우쳐서 이성이 통제한다는 "이성의 상호통제론"을 이론적으로 확립시켰다.
기대승과 이황의 8년 사단칠정 논쟁을 지켜보던 승려출신의 이이는
기대승 이론에 힘을 실어주며 이기이원론적 일원론을 내놓게 된다.
즉, 이성은 리(물질,육체,하느님(종교)vs기(정신,넋,혼백,에테르,영혼)를 서로 상호통제하면서도
정신, 넋, 혼백, 에테르, 영혼쪽에 약간 더 치우쳐서 통제한다는 기대승의 상호통제론을
종교철학적으로 정립시킨다.
주기철학은 서양의 근대이성철학으로 이어져 루소의 성선설, 사회계약설, 근대민주주의,
근대이성철학으로 그대로 학맥을 같이하며 현대이성철학, 과학, 공학적 사고체계로 이어진다.
그래서 주기철학을 정통(개혁)성리학이라고 한다.
주리철학은 고전성리학이며 유교 원리주의철학이라고 한다.
남명 조식학파철학은 성리학의 이단파철학이라고 한다.
노자의 도교철학, 장자철학, 제자백가철학은 순자의 성악설로 이어지며, 한비자의 법가사상,
신라의 풍류도로 이어지며 고려말 신진사대부 이규보, 이색 등을 거쳐
정도전의 이상주의 유교철학으로 이어진다.
그후 양광도 동인, 영남 사림파를 거쳐 이황(동인의 정신적지주), 조식,(대북의 정신적 지주),
윤휴학파(남인영수)>허목학파로 이어졌으나,
이황이 기대승과 8년 답신논쟁[사단칠정논쟁]으로 완패당한후,
도학을 버리지만 미련이 남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정이학, 정주학, 주자학 틀내에서만
학풍을 이어가려 하였다.(공자가 노자에게 "예"를 배워 성리학안에 넣은 최악의 학문이 "예학"임)
이황은 정이학신봉자였다.
조식학파는 이황으로부터도 성리학의 이단파로 매도되었다.
문묘종사때 합천의 조식을 빼자 그의 제자인 합천의 정인홍이 문묘에 넣어달라고 요구하였다가
거절당하고 청금록(유적)에서 삭제당하는시비에 휘말리게 된다.
그이후 광해군때 소극적 의병활동을 하던 정인홍 등이 정권을 장악하고 무서운 정치보복을 가한다.
동인은 대북파 이산해, 정인홍, 이이첨, 홍여순, 허균, 김개시 등이 정권을 장악하고
진릉군 역모사건, 영창대군 사사, 인목대비, 정명공주 서궁유폐사건, 임해군 암살사건,
인조동생 능창군을 목메달아 자결시킨 사건, 인목대비 부친 김제남과 세아들 사사사건,
김제남 부관참시사건, 낙동강 동안지방의 소북파 영수 유영경 사사사건(계축옥사)등을 일으킨다.
정도전이 펼치려했던 신권정치를 제대로 펼친것이었다.
정도전은 왕권과 신권을 분리하여 신하가 통치하는 나라를 세우려 하였다.
왕권이 약화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케이스였다.
대북정권의 무서운 정치보복으로 태인 이항의 호남 주기학파제자 40여명이
대북파정권에 일시 협력하였다가 인조반정으로 무너지고 대북파 200여명이 유배갈때
동반유배로 사라지자, 서인이 분열하여 충북 옥천의 송시열을 영수로 하는 노론학파와
충남 논산 노성의 윤증을 영수로 하는 소론학파로 분열한다.
노론의 송시열은 윤증의 소론학파를 탄압하여 양명학을 펼칠 기회가 적었다.
노론의 송시열[양광도 서인정권]은 서인에서 갈라져 나갔으나,
송시열은 주자학 원리원칙을 고수하는 신봉자로 서경덕, 기대승, 이이, 이항, 박순, 김인후, 성혼 등으로
이어지는 주기철학과 윤증으로 이어지는 양명학을 인정하지 아니하였다.
노론정권은 주자학 원리주의를 이어가며 주자학 틀내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였다.
이는 조선의 근대화, 실학사상, 개화가 늦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노론정권[양광도 동인정권]은 세도정치를 거치며 흥선대원군 마저 탄압하였다.
성리학을 고대로 회귀시킨 성리학 원리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은 것이
일제 식민지배체제로 들어서는 주요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송시열은 고전성리학자였으며 유교원리주의자였다.
성리학이 나오게 된 원래 배경은 고려말 불교폐단으로부터 시작된다.
무신시대와 몽골침략으로 말세기적 현상이 일어나자,
모두 점, 굿, 시주, 무당푸닥거리, 자연신숭배, 정한수 띄워놓고 소원빌기 등의 샤머니즘,
곰, 호랑이 숭배사상의 토테미즘,
주역/역술, 풍수지리, 예언, 예언서, 주술, 도술[도참설], 사술[사주,관상], 토정비결, 저주의식 등의
도교적인 학문에서 나온 풍습, 불교사찰에 가서 시주하기 등 기복불교 신앙등으로 고려의 모든 돈이
사이비종교와 사찰로 집결하여 고려경제가 돌지않아 피폐해져 갔기 때문이었다.
돈(자본)을 시주로 받은 승려들과 파계승, 사이비교주, 상인들은 금고에 쌓아놓기만 할뿐 재투자를 하여
고려경제를 돌릴만한 능력이 되지 못하였다.
국민들에게 이성적인 삶을 제시하고 이성주의, 현실주의, 경험주의를 바탕으로
합리주의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하여 등장한 것이 성리학이다.
모든 국민이 신에 의존하지 않고 이성의 주권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성리학적 삶을 살아가게 하기 위하여 성리학[주기철학]이 등장하게 된것이다.
고려말 시중에 돈이 메말라 고려는 멸망할 수밖에 없었고,
이성적이고, 현실적이며,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강력한 존재가 나와주기만을 바랬기 때문에,
이성계같은 인물이 쉽게 조선을 창업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이런 어수선한 상황에서 정도전이 주장한 이상주의적 성리학국가 실현은
한마디로 꿈같은 몽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상주의적 성리학은 전시에 아주 위험한 철학이다.
이런 이상주의적 성리학적 사고체계는 전시에 그어떤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사고체계이다.
그래서 주기철학을 제대로 하였던
호남지방에서만 왜군 침공을 막아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치, 웅치, 슬치전투, 진주제2차전투, 행주대첩, 금산전투,무주 무풍전투, 진안 죽산성전투,성주봉 성주성전투,
성산리 성산전투, 성주군 성주성전투, 상주전투, 거창지레 사랑암전투, 영덕, 영해전투, 함안전투,
울산전투 등은 모두 호남 관의병들이 치룬 전투이다.
정유재란때 진주성재 함락, 남원성, 구례석주관, 전주성이 점령당하였으나 조총과 대포로 무장한
왜군을 상대로 호남 관의병들은 선전하였다.
기호학파중 주기철학은
서경덕>기대승>이이>이항>박순>성혼>김인후>윤증의 양명학으로 이어지며
실학파>개화사상>동학의 인내천사상으로 이어지는 철학이다.
이사상은 서양의 근대이성철학과 합치되는 철학이었다.
이것이 현대 이성철학으로 이어지며 과학적사고, 공학적 사고체계로 이어지기 때문에,
주기철학을 정통 개혁성리학이라고 말한다.
1580년대 중반 성혼, 박순 등이 동인과의 협상을 통해
이이의 이기이원론적 일원론으로 결론을 짓고 협상을 마무리 하자마자,
1592년 4월13일 왜군의 고니시가 십자가를 목에 걸고 조선을 유린하기 시작한다.
정통 개혁성리학의 완성은 인간이 이성의 주권을 가지고 신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을 선언하는 순간과도 같은 의미가 있었다.
인간이 신의 의존으로부터 벗어나 이성의 주권을 가지고 이성주의, 경험주의, 현실주의를 바탕으로
국민을 계몽하고 국가, 사회를 합리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고자 하는
정통 개혁성리학이 주기철학이었다.
이성을 사용할때 리(사단/물질,육체,하느님(종교))쪽에 치우치지 않고,
기(칠정/정신,넋,혼백,영혼)쪽에 약간 더 치우쳐서 사고하는 체계를 갖춰
상호통제해야한다는 이론적확립을 통해 널리 국민들에게 가르치려 하였던 것이 기대승의 주기성리학이었다.
주기학파의 스승들인 이항, 박순, 성혼, 김인후 등은 1560년대부터 제자들을 길러내고 있었다.
정읍 태인의 이항은 남언경, 김천일등 호남에서 주기철학을 배우기 위해 집결한 다수의 제자들을
길러내고 있었고,임진왜란, 정유재란때 맹활약을 펼치는 문무관 제자들이 이항의 수제자들이었다.
1591년2월~1592년3월까지 정읍현감으로 좌천되었던 이순신도 이항의 주기학파 사상철학의 영향을 받게 된다.
[정읍 태인의 이항이 주기철학의 실질적인 대부격이었음].
p/s
노론의 송시열이 주자학을 고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첫째. 고전성리학파로서 대성인군자라 할수있는 주자에 대한 의리를 배신할 수가 없다.
둘째. 아무려면 대성인군자이신 주자의 말씀이, 감히 소론따위의 말보다
틀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과 믿음.
셋째. 인격완성을 위한 이성(이성의 정립과 확립)이 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아둔함.
넷째 이황과 같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온 양광도니까... 팔이 안으로 굽지 밖으로 굽나..
(경기동부, 충청북부, 충북, 강원 영월, 경북 서북부)
다섯째. 권력을 잡고나니 마음이 변함.
권력을 일단 잡기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송시열의 아버지 송갑조 그리고 조상 송시도, 송응개, 송응형 등은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친척인 송응개 ,송응형은 동인으로 율곡 이이를 맹렬히 공격하였다.
종조부 송인수, 조부 송구수가 서인이었기 때문에 송시열도 어쩔 수 없이 서인이 되었을 뿐이었다.
옥천, 보은, 영동지방은 옛 상주 고령가야 지방이었으며,
고려시대 양광도지방이었다.
양광도 지방은 그래서 서인과 동인이 혼재되어 있었다.
이이의 이기이원론적 일원론을 공격한다는 것은
이성이 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는 확실한 증거다.
만약 이해하고 있었다면 정여립의 대동계일파를 죽인 서인에 대한 원망에 대해,
학문적 스승이었던 율곡의 주기론을 비판하므로서 보복을 피하기 위해 돌려서 대리 공격한것이다.
감히 천하가 존경하고 받들어 모시는 주자의 이론을 벗어나는 것은 모두 이단이고 사단파라고
생각했다.
정신적 원류가 양광도지방을 대표하는 경북 봉화/영주의 정도전이 세우려 했던
이상주의적 유교국가를 실현하려 하였고
이는 이황으로 이어졌으며, 영남의 조식, 윤휴로 이어진다.
영남학파중 남도지방을 대표하는 윤휴와 사돈관계였다.
예학이 발전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이유.
(사람마다 보는 관점이 약간 다를 수가 있다.)
남명 조식학파는 기대승vs이황의 사단칠정논쟁과 이이vs이황의 이기논쟁을
공리공담(부질없고 쓸데없는짓)이라며 하잘 것 없는 일로 치부하였다.
한마디로 그럴시간에 정치, 군사, 예학, 천문, 지리, 역학, 수리, 의약, 그림, 산수, 시 등을
발전시켜 나가는 게 낫다는 철학이다.
현대 이성철학으로 보면 조식학파야말로 공리공담이 아니었던가?
조선철학은 서양철학에 밀려 이제 거의 쓸모없는 학문이 되었으나,
남은 것은 서경덕, 기대승의 사회이성철학과 이이의 종교이성철학은 현재까지도
살아남아서 서양철학과 그맥락을 같이한다.
송시열이 유교원리주의자이자 주자학 신봉자로서 고전성리학파였기 때문에,
유교 원리원칙에 충실하려 하였으므로 예학이 발달하는 것은 순리가 아닌가.
그는 감히 주자학의 틀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감히 신을 배신하고 나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생각하였다.
즉, 주자의 주리론을 버리고 조선에서 최초로 창시한 주기론을 따르는
진보된 신진사류인 소론의 양명학파에 대해 송시열의 노론은 그 반대급부적으로 나아가다 보니,
예학이 발전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그러나 제1차 예송논쟁때 송시열은 논쟁에 패해 체면을 구기게 된다.
한마디로 주자의 주리론vs 서경덕, 기대승, 이이, 이항의 주기론 싸움의 대리전쟁이었다.
서경덕>기대승>이이>이항>박순>성혼>윤증으로 이어지는 주기철학파, 양명학파들을 탄압하고
노론 송시열과 남인 윤휴가 우리는 유교원리주의를 고수한다는 차원에서 보란듯이
예송논쟁을 치열하게 벌이는 것이다.
윤휴학파는 개혁성리학파였지만 도교에 약간치우친 성리학집단이었다.(개혁적인 변종성리학).
어떤 것은 원칙주의이고,어떤 것은 개혁주의적이다.
당리당략에 따라 진보와 보수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그러므로 주리철학적 변종 개혁성리학파이다.
이로 인해 송시열로부터 사문난적이라고 매도당하며 후일 윤휴가 사사당하게 된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서경덕, 기대승, 이이, 이항의 주기철학vs주자, 이황의 주리철학과의 성리학 전쟁에서
조선선수가 연합군을 물리치고 승리한 전쟁이었다.
그러자,
서경덕, 기대승, 이이, 이항의 주기철학을 없애버리고 주자학 원리주의와 주리철학으로 관심을 돌려
과거로 회귀시키려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예송논쟁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예송논쟁으로 벌어지는 이전투는
노론의 송시열과 남인 윤휴와의 상복과 기간문제로 예학논쟁이 벌어진다.
송시열은 자의대비 상복을 1년으로 하자고 주장하고, 윤휴(남인영수)는 3년으로 하자며 싸운다.
주자학 유교원리주의자vs주리철학적 개혁성리학자간에 벌어진 한심한 싸움이다.
윤휴는 성혼, 이이의 문묘종사(문묘에 모시는일) 반대운동까지 벌인 인물이었다.
주자의 주리철학은 완성된 학문이었기 때문에 개혁하면 안되는 학문이었다.
성리학은 계속 학설을 새롭게 창조해 나가며 발전해온 학문이기 때문에,
주자학을 고수하는 것이 정통성리학이 아니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