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행(海南行) 47
“명경.......네 생각은 어떠냐?........”
“..............”
조용히 말을 아끼는 명경이었다. 명각과 명경은 지금 회의장을 벗어나 있
었다. 아무 소득 없는 회의였다. 그냥 그렇게 그들은 조용히 경계하는 것
밖에는 없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줄 수 없습니까? 사형”
“..............”
명각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허나 그의 눈을 굳게 변하고 있다. 이
미 결심을 굳힌 듯 했다. 명경은 안타까운 눈으로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나한진권(羅漢嗔拳)은 장문인의 허락이 없이는 쓸 수 없는 무공입니다. 잘못하면 사형은 파문당할 수도 있습니다. 잘 아시면서 왜 그러십니까?”
"..............."
안타까운 마음에 다시 설득을 하는 명경이었다. 허나 명각은 고개를 저었다.
“사제......그동안 무시주와 같이 다니면서 무얼 보았는가?”
“..............”
“그렇게 세상이 좋던가?”
“.............”
“더럽고 비뚤어진 세상이 아니던가?”
“..........사형.......”
명경은 고개를 숙였다. 그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그였다.
“중생계도? 난 믿지 못하겠다. 염불이나 외면서 동료들의 죽.....다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무시주가 세상에 무슨 잘못을 했었나? 결국은 힘없는 자를 도와서 힘 있는 자와 싸웠다. 그리고는 깨끗하게 물러났다. 오히려 난 이게 중생계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형! 힘으로 계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결국 힘은 힘일뿐입니다. 더 큰힘이 생긴다면, 그 힘이 옳지 않은 자라면 또 세상은 그렇게 됩니다. 사형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언제까지나 사형이 세상을 위해 피를 뒤집어쓰실 겁니까?”
“..............”
명각은 명경을 바라보았다. 그는 깨끗한 눈이었다. 정광이 어리는 맑은 눈이었다. 그런 사제의 눈을 바라보면서 명각은 말을 했다.
“명경, 그렇다면 무시주는 어떻게 설명할 테냐? 그도 나처럼 말할 거냐? 지금 무시주가 가는 길이 네가 말한 길이 아니냐?”
“ ! .............”
명경은 눈앞에 별이 보였다. 그런 무정에게 마음속 깊이 끌려 사형과 함께 나선 그였다. 그 역시 지금 힘으로 세상을 구하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말로는 안 된다고 하면서 행동은 반대로 하고 있는 자신이었다.
“원론은 원론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원론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라면 통하도록 하는 수밖에 그게 말로 되지 않는다면 힘으로라도 할 수밖에..............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더 이상은......... 이 삐뚤어진 세상에 불자란 이름으로 회피하고 싶지 않다. 내가 가진 모든 힘을 동원해 나름대로의 선행을 배풀겠다. 파문당해도.......... 후회 않는다.!”
나직하게 말하며 돌아서는 명각이었다. 명경은 눈을 감았다. 어릴 때부터 함께 살아온 사형이었다. 누구보다 자신을 잘 알고. 이해해주는 사람이었다. 그저 답답하고 속 시원히 말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울 뿐인 것이다. 더구나 일행을 구하려 내상까지 입은 그였다. 말리고 싶다면 목숨으로라도
말리고 싶은 그의 심정이었다.
“아니다. 명각, 그건 아니다........”
홍관주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십여 장 떨어진 곳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그였다. 명각의 마음이 그에게 그대로 전해져 왔다.
나한진권.......저주 받은 이름이었다. 그야말로 살수, 온통 살수였다. 십이식으로 구성된 그 권은 일단 펴면 상대나 자신, 둘 중의 하나는 죽어야만했다. 그래야 끝나는 권법이었다. 백년 전에 초우라는 스님이 만든 저주의 권법이었다. 소림에서도 근근히 전수하고는 있지만 쉬쉬하며 전수하는 권법. 만일 명각이 쓴다면 파문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소림의 굴이 땅에 떨어질 것이기에...
“무조건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단다......... 모르겠느냐? 힘으로 세상을 바꾼다면 정아는 혼자 다닐 것이다. 아니면 힘만 센 무도한 집단이 되었겠지.......... 정아는 군이라는 단체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알고 있는 것이란다. 동료란, 내가 부족한 것을 일깨워 주는 사람이란다. 그런 그 사람이 필요하기에 같이 다니는 것이란다........”
하늘을 보며 나직히 혼잣말을 하는 홍관주였다. 그런 그의 신형도 돌아섰다.
“무정이 얼마나 너를 닮고 싶어하는지 모르는 구나....... 너의 그 광명정대함을 얼마나 닮고 싶어 하는지를..........”
조용히 사라지는 홍관주였다. 그는 절대로 그가 나한진권을 사용하는 것을 찬성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한진권은 호신을 위해 만든 무공이 아니었다. 바로 전단격류를 상대하기 위해 만든 무공이었기에...................
홍관주의 눈길이 저기 무정이 사라진 오지산을 멍하니 쳐다보고 앉아있는 상귀, 하귀에게 향했다.
그들은 열흘간 그렇게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대장은 살아있다고 소리치는 그들이었다.
“사사삿.......”
대나무숲은 빽빽하다. 그런 면에서 신법을 수련하기에는 정말 적당했다.
그것은 지금 무정이 증명하고 있다.
“사아아아앗.....”
그 빽빽한 대나무사이를 유령처럼 누비는 무정이었다. 근처로 도는 데도
흔들리는 댓잎 하나도 없다. 그의 신형이 갑자기 솟구쳤다.
“슈우우웃.....”
두개의 대나무를 돌아 오른쪽으로 돌고 있었다. 공중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움직임이었다.
“촤아아앗”
무정의 신형이 나타났다. 조금은 마른 얼굴이었다. 건포 외에는 먹지 않은 그다. 사냥할 시간도 아까웠다. 이렇게 그는 신법을 연습하고 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신법이 아니라 묵기의 이동을 능숙하게 하기 위한 연공이었다. 그의 몸에서 묵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후우.........”
최대한도로 올린 묵기였다. 육장여의 묵기가 아직 최대였다. 그는 공기를 타고 흐르는 움직임을 이것으로 대체하려 했다. 아무래도 그 움직임은 부작용이 많았다. 언젠가는 할 것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반푼이 짜리 무공인 바에야 그냥 힘들어도 다루기 쉬운 무공이 나았다. 속도는 아무래도 뒤지는 무공이었다.
대신 움직임은 발군이었다. 여기에 직선적인 움직임을 섞는다면 상당히 괜찮을 것 같았다. 무정은 도를 뽑았다.
“스릉”
어깨와 나란히 일자로 세운 초우를 앞에 놓고 달리기 시작하는 그였다. 그의 묵기가 몸 안에서 서서히 이동하고 있었다.
“스스스 파앗....”
갑자기 수배나 빨라진 신형이었다. 무정은 멈추어 섰다. 도 끝에 묵기가 머물고 있었다. 속도차이가 배가 넘었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결정타가 가능했다. 누구든지, 인간이라면 눈은 쫒아 올수 없다 .알게 될 때는 이미 늦을 것이다. 서서히 묵기의 힘보다는 그 운용의 묘를 깨닫기 시작하는 무정이었다.
“우르릉........”
하늘이 또 검게 변하고 있었다. 내일쯤이면 많은 비가 내릴 것 같았다. 무정은 신형을 추스렸다.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었다. 상처도 어느 정도 움직일 만해서 어제까지만 해도 미통이 있기는 했지만 이젠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았다.
이젠 나가야할 때다. 일행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그였다. 동료를 믿은 것이다. 절대로 쉽게 당할 그들이 아니다. 가슴이 답답하기는 했지만 꾹꾹 눌러 참은 무정이었다.
“탁...”
무정은 부싯돌을 튕겼다. 비가 온지 근 일주일이 지났다. 열대의 기후는 나뭇잎들을 바짝 말렸다. 순식간에 불이 붙기 시작하는 숲이었다. 이 대나무들이 바로 천몽죽들이었다. 죽순을 보고 눈치 챈 무정이었다.
“화르르르....”
삽시간에 불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뒤로 검은 연기가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하루가 지났다. 화재는 거의 진화되었다. 또다시 내리는 비였다. 산등성이에서 시커멓게 타 버린 천몽죽의 숲을 보며 무정은 생각에 잠겼다.
누군가 자신들을 돕고 있다. 폭팔은 실수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고의적으로 매설을 안했던지, 아니면 젖혀버린 화약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이 안 된다. 이렇게 어이없는 실수는 있을 수 없다. 화약이란 다루기 어렵다고는 하지만 일단 시작되면 다룰 필요조차 없는 것이란 것을 너무나 도 잘 아는 무정이었다.
“마교.........”
그들도 마음에 걸린다. 관부가 이중첩자였다........... 그런데 오로지 관부를 믿고 들어왔다? 관부가 배신하면 그대로 끝장인데, 안전장치 하나 안하고 이곳으로 들어온 것인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무정이었다. 왠지 좋지 않는 기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후우............”
길게 호흡을 내쉬는 무정이었다. 차가운 공기가 한껏 가득 페부로 들어오며 눈이 크게 떠졌다. 이곳이 어디인지조차 모르는 그였기에 일부러 불을 낸 그였다. 누군가는 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
그래도 저들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저 밑에서 장창을 들며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두명의 인물.......... 절대로 그들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쓰벌, 하귀야 잘 살펴봐! 그냥 불이 날수가 없잖아! 니기미!”
“근디 영감탱이는 그럴수도 있다잖아요?”
“카악...툇....... 그거야 여기가 대장이 사라진 부근이잖아! 다른 곳은 그럴지 몰라도 이곳은 아니야! 괜히 이럴 리 없어! 쫙쫙 살펴봐!”
“알것소 성님, 성님도 눈에 불 좀 지피쇼!”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그들의 소리였다. 무정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흐르는 비가 내는 소리가운데서도 똑똑히 들리는 그들의 목소리였다.
무정의 신형이 움직였다. 정확히 그들을 향해 나아가는 그였다.
방립은 눈을 좁혔다. 이놈도 무인이랍시고 이따위 말을 지껄인다. 사기?
알면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해남도에서 쳐박혀 계집질이나 하는 네놈이 무얼 알겠는가? 이대로 죽이기만 하면 사기는 진정된다. 병력이 우세한 자신들이기에.......
방립은 조용히 신형을 물렸다. 그리고는 팔짱끼고 앞을 보았다. 될 대로 되
라는 심정의 그였다.
“남해일검....나가시게........”
“옛!”
죽립은 쓴 자가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다른 삼십오 명이 줄줄이 그 뒤에 따르고 있다. 그의 손짓이 들렸다. 그들의 신형이 폭사되고 있었다.
“남해삼십육검!”
홍관주의 목소리가 울렸다. 더 이상 방관할 수는 없었다. 타구제세 유복진의 등을 치며 그는 말하려 했다. 나가자고........
“ ! ”
하지만 나갈 수 없었다. 근 오십 여의 개방도들이 움직이는 순간 저쪽에서 궁병이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쏘지는 않고 있다. 위협성이 짙은 시위성 동작이었다.
유복진은 몸을 떨었다. 무조건 급하게 연락을 받고 부리나케 달려온 그였다. 고수를 챙길 시간도 없이 그냥 인원을 모아 온 그였다. 지금 이곳에는 저들의 화살을 피할 수 있을 만한 무공을 지닌 고수가 얼마 없다. 나가고는 싶지만....... 문도들을 죽일 수는 없었다.
홍관주는 상관없었다. 그 혼자라도 나가려했다. 그때였다.
명각이 뒤를 향해 손을 피고 있다. 나오지 말라는 신호였다. 그의 걸음이 멈추었다.
“............”
고개를 젓는 홍관주였다. 소림사에 이일은 알려질 것이다. 그럼 그는 죽는다. 파문이 아니라 죽는다. 지금 죽음을 결심한 명각이었다.
“명각......... 이 어리석은 놈!...........”
홍관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릴 때부터 봐온 놈이다. 싹수가 좋아 소림에 들릴 때는 언제나 그를 보곤 했다. 서른이 넘은 놈이......저렇게 돼 버리다니.......... 그의 자존심만은 지켜주고 싶은 홍관주였다.
“명경! 고죽시주! 돌아가십시요! 전 혼자 싸우겠습니다."
“사형, 전 사형이 없으면 못 삽니다. 잘 아시면서 왜 그러십니까?”
“허허........ 알다시피 난 저놈들과 볼일이 많아.... 혼자 그러지 말고 쪼금만 남겨주게나......”
“...............”
명각은 말이 없었다. 이대로 지옥으로 가고픈 명각이다. 그 길에 다른 사람
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헌데 이들이 와버렸다. 이 지옥 길에 그들이 와있는 것이다.......
‘허허 세존이시여.........당신의 뜻입니까?’
하늘을 보고 조용히 묻는 명각이었다. 그의 눈이 다시 그들을 향했다. 바야흐로 삼십육대 삼의 격전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