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서쪽은 몽골의 서쪽 끝이다
(서프라이즈 / 만주몽골은 조선땅이었어 / 2009-2-25 17:44)
<문헌비고(文獻備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는 처음에 중국의 동북쪽 모퉁이에서 일어났는데, 한나라가 애제(哀帝)와 평제(平帝) 이래로 호령(號令)이 중간에 쇠약해졌으며, 다시 왕망(王莽) 때 경시(更始)의 난리를 겪어서 고구려가 그 강역을 보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고구려의 북쪽은 바로 부여(夫餘)인데, 부여는 유리왕(琉璃王)에게 격파되어 스스로 떨쳐 일어나지 못하였다. 부여의 서북쪽은 바로 흉노(匈奴)인데, 흉노는 다섯 선우(單于)와 남북(南北) 선우의 난리를 겪으면서 도망쳐 숨어 그 지역이 또 비었다. 이에 고구려가 그 틈을 타고서 남쪽으로 침략하고 북쪽으로 정벌하여 토지가 날로 넓어졌다
<문헌비고>는 우리나라의 고대기록을 모아서 정리한 책인데 ,이 책은 지금은 사라진 고대의 우리책들을 보고 쓴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분명히 흉노의 땅을 고구려가 차지했다고 되어 있다. 실제로 흉노가 살았던 몽골 땅에서 최근 고구려성이 발견되었다. 또한 위구르 지역에서 고구려 귀족의 무덤이 나오고, 돈황의 성벽은 고구려 성벽을 닮았다고 한다. 수나라때 동서 6천리라고 된 기록은 고구려가 전성기가 아닌 말기였으니, 당연히 전성기에는 서역까지 진격했을 것이다. 이후 돌궐제국과 전쟁을 하여 대흥안령까지 밀렸다가, 다시 회복하여 6천리 즉 몽골 중앙부까지만 차지했을 것이다
건무(建武) 연간에는 고구려가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노략질하였는데, 우북평은 바로 순천부(順天府)이고, 어양은 우북평의 서쪽에 있고, 상곡은 또 어양의 서쪽에 있고, 태원은 또 상곡의 서쪽에 있다. 이들은 모두 한나라의 북쪽 변경 지역으로, 흉노의 요충지에 해당된다. 고구려가 이곳을 침략하면서 사군(四郡)의 지역을 경유하였는바, 일찍이 북쪽으로 그 땅을 개척하고 점차 서쪽으로 뻗어서 사군의 경계와 서로 가까이 닿아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를 호(胡)라고 칭하나 지역은 실로 북쪽과 가까우며, 지금의 압록강 동쪽 연안과 처음에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뒤에 비록 동쪽에서 군사를 써서 살수(薩水)를 경계로 하였으나, 그 지역은 역시 고구려의 변경 지역에 불과하였다(문헌비고중에서)
송나라때 제작된 화이도와 거란지리도에는 북평은 현재의 베이징이 아닌 태원바로 동쪽으로 나온다. 즉 고구려가 침공한 북평이 바로 태원바로 옆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북평과 어양 상곡 태원을 차례로 함락하며 서쪽으로 진격한 것이된다. 그렇다면 사군이 바로 북평의 동쪽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실제로 <삼국사기>의 기록을 토대로 그림을 그려보면, 사군은 베이징 서남부지역이다. 즉 한사군은 베이징에서 태원 근처의 공간이고, 고구려가 사군을 함락시키면서 태원까지 서진했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오나라 손권이 고구려에 사절을 보내 고구려 태왕을 흉노의 선우라고 인정한 것이 이해가 될 것이다. 고구려가 위나라의 관구검에게 패배하기 전, 이미 고구려는 태원에서 베이징 남부까지 서북으로 현재 몽골땅 전부를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고구려가 위나라에 패하고 선비족이 득세하여 고구려에서 분리된후, 고구려가 위기를 겪지만 광개토호태왕 때 모두 다시 정복하고 만다.
몽고학자 헤페를레가 발표 < 몽고지역에서 6개의 고구려 성터 발견> 성터는 동몽고에서 바이칼 호수근처의 중서부 몽고지역에 걸쳐
양심이 있다면 국사학계는 어서 고구려의 영토를 수정해야 할 것이다. 상식적으로 고구려의 최대영토는 광개토 장수 문자태왕때이다. 그런데 수나라 시기 통전의 기록에 고구려 영토가 점점 넓어져서 수나라 때에 '동서 6천리'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고구려 영토가 말기로 갈수록 더 넓어졌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국사학계는 상식을 좀 가지기 바란다. 그리고 동서 6천리가 어째서 요하 정도인가
당시의 길이를 재는 방식을 적용하면, 평야에서는 오차가 거의 나지 않고 산지에서는 오차가 20-30 % 가량 날 수 있다. 그럼 만주벌판과 몽골 벌판이 평야인데, 어쨰서 6천리를 대략 3000km로 받아들이지 않고 겨우 1000km밖에 안 되는 동해에서 요하까지로 고구려 영토를 확정지었는가. 중국은 10리에 5km인데, 국사학자들의 머리속에는 10리에 2km도 안되는가.
자기나라 역사 자신들의 선조들의 역사를 왜곡 축소시키면서 선조들의 업적을 깍아내리기 바쁘면서, 명절마다 조상에게 복을 달라고 비는것은 부끄럽지 않은가. 우리 국사학계는 자기들이 그린 발해 지도의 영역 넘어 발해 유적이 발굴되어도 인정치 않고 고구려 성터가 자기들이 그린 고구려 영토 지도 밖에서 발견되어도 인정치 않는구나. 이런 사람들이 학자라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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