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라어의 ‘파로이미아’와 ‘크룹토’를 비교하여 보면 ‘히다’란 원래 ‘명확한 진리, 확실한 진리’로서 격언이나 지혜로운 말, 상징적인 말, 잠언 등의 형태로 번역자가 번역해 놓았다. 글을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더는 증명이 필요 없을 만큼 명확한 표현으로 진리를 천명하였으나 글을 읽는 사람이 그 의미를 바로 알지 못하면 결국 그 진리는 비밀한 말이나 오묘한 말, 수수께끼가 되는 것이다. 즉 원 의미는 온전히 사라져버리고 문자만 남게 되어 본 뜻이 완전히 왜곡되어 휘장 너머에 있는 근원(베레쉬트)인 그리스도 예수의 진리를 자신 안에서 열 수 없게 된다.
1)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자가 되면,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르지만 원 뜻에서 벗어난 다른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
보지 못하는 자가 되고 듣지 못하는 자가 되면 입으로는 하나님을 외쳐 부르지만 다른 하나님이다. 근본인 그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어 우상인 바알 신을 하나님으로 섬기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 예를 들어 ‘파라볼레(비유)’로 천국을 말씀하신 것도 성경에 기록된 천국의 진리가 확실함에도 그것이 사람들에게는 수수께끼가 되어 좀처럼 깨닫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즉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함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예언하기를 “내 백성이여 내 교훈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내가 입을 열어 비유(마샬)로 옛 비밀한 말(히다)을 발표하리니(아삐아, 1인칭) 이는 우리가 들은 바요, 아는 바요, 우리 열조(아브, 1인칭)가 우리(1인칭)에게 전한 바라. 우리(1인칭)가 이를 그 자손(벤)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 능력과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레도르 아하론) 전하리로다(시 78:1~4) 하였다.
‘히다’ 자체는 열조(아브, 1인칭)에게서 예로부터 들어서 알고(야다, 하나 된 앎) 있으나, 그것이 오해가 되어 전해지는 동안 하나님과 하나 된 그 의미를 상실하였기 때문에 그 ‘히다’는 비밀한 말이 되어 감추어져 버렸고, 완전히 오해하게 된 것이다. 이 열조(아부)는 내면에 있으므로 각자 안에서 하나 되어 전해 들어야 한다.
2)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 자신의 내면으로 구름들과 함께 오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하나 되었다.
‘야다(바네다임, 1인칭, 복수)’는 외부에서 이론으로 가르침을 받아 전해진 것이 아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 자신의 내면으로 구름들과 함께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와 하나 되었다. 이것이 ‘히다’와 ‘마샬’과의 관계다.
사람의 입으로, 글로, 전해진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야다는 ‘알다’를 의미하는 동사로서 몸과 마음의 체험으로 안다는 뜻이다. ‘야다’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성경 기록은 그리스도 에수와 하나 되기 전에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비밀(뮈스테리온)한 이야기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내면에서의 깨어남(에게이로)이 없다면 언어로 문자로 이야기해 봐야 점점 더 귀머거리요, 장님이 될 뿐이다. 이처럼 천국의 비밀(뮈스테리온)은 저희(서기관 바리새인)에게는 지금도 여전히 ‘히다’로 감추어져 있는 비밀인 것이다.
그 생명의 그 빛(근본)!
첫댓글 아멘~
아멘